갑진년 장모님 생신
지난 주말이었다. 장모님 생신을 위해 처갓집에 가는 날이다. 봄이 길목이었다. 간단하게 가방을 챙겨서 서울역으로 향했다. 광역버스를 타려고 시간에 맞춰 정류소로 갔는데 하필 만원이어서 다음차로 밀렸다. 하는 수 없이 강변역 방향 광역버스에 올라 광나루역에서 내려 5호선 전철로 환승했다. 동대문운동장역에 내려 4호선으로 갈아타고 서울역에 내렸다. 한시 50분발 오송역으로 가는 KTX였다. 대합실에서 초밥을 하나 구입했다. 아내는 출장지에서 아침을 먹었다고 해서 식사할 생각이 없었다. 먼저 15분 전에 탑승해서 식사까지 마쳤다. 50분 정도 소요될 것으로 보였다. 오송역에서 권서방이 마중을 나왔다. 처제는 목발 신세여서 차에서 기다렸다. 권서방네 차에 탑승해서 광주로 향했다. 본래 계획은 장성의 펜션에서 행사를 하려고 예약까지 했는데 예약을 취소하는 바람에 위약금까지 물었다. 장모님의 건강상태가 그렇게 무리하게 출타를 할 정도까지 회복이 안되어 하는 수 없이 집에서 행사를 하는 것으로 변경이 된 것이었다. 오후 5시 50분쯤에 광주 광명동 처갓집에 도착했다. 먼저 세배부터 드렸다. 그리고 덕담을 듣고 세뱃돈을 받았다. 출타중에 있는 조카 등에게는 세뱃돈을 카카오페이로 보냈다. MZ세대라 바로 문자로 답신이 왔다. 역시 빠른 것이 신세대 다웠다. 처제는 배트민트를 치다 발목을 다쳐 목발신세가 되었다. 치료에 열중해야 하는데 학교를 나가고 졸업반 학생들을 졸업시키고 하는 통에 상처가 더욱 악화되었던 모양이었다. 조카들도 셋을 제외하고 다 참석을 했다. 모두에게서 세배를 받았다 그리고 육남매간에 서로 간 세배가 있었다. 모두들 바깥으로 나와 차를 타고 인근의 원지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저녁을 먹고 왔다. 메뉴는 보쌈과 코다리찜이었다. 김치맛이 좋았다. 게장도 별미였다. 오랜만에 가족행사인 셈이었다. 예전에는 1년에 4회정도 회합을 가졌는데 이제는 2회 정도로 줄어든 셈이었다. 저녁을 먹으며 반주로 소맥을 몇 잔 마셨다. 다음의 자리는 남자들끼리 다섯 명이 당구장을 찾았다. 차는 고서방 차로 이동했다. 4구 경기를 했다. 내기는 호프내기였다. 다섯이서 기량을 뽐냈다. 1시간여 경기를 하며 우의를 돈독히 했다. 예전에는 골프를 즐기기도 했었는데 이전 옛 추억이 되었다. 고서방과, 권서방 처남은 거의 싱글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 코로나19 시기의 3년을 거치고 골프열기가 시들어 이제는 경기를 갖기도 힘들어졌다. 당구경기를 마치고 호프집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다시 또 소맥을 마셨다. 제육볶음, 소시지볶음을 안주로 여러 얘기를 나눴다. 처남과 처제가 병간호에 고생을 많아했었다. 의료계 사태, 처형의 병환 그리고 조카네 이야기 등 많은 일들이 있었던 듯했다. 호프를 마신 후 처갓집에 들렀다가 최종적으로는 고서방네로 옮겨 술자리를 가졌다. 장송이란 중국술을 마셨다. 거의 오량액 수준이었다. 백주로 아주깔끔한 맛이었다. 술은 권서방이 가져왔다. 막판에는 연태고량주를 마시기도 했다. 전축은 오래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노래는 70-80 시절의 노래였다. 예전 음악감상실 같은 분위기에 취했다. 아이들은 따로 별도로 삼삼오오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조카 둘은 광주와 청주의 공군부대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었다. 이제 거의 1년이 되어가는 장조카와 한창 군에 적응해 가는 조카가 있었다. 휴가를 나왔을 때 군복을 입고 세배를 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남겼기에 영상으로 세배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세배를 받자마자 세뱃돈을 보낸 셈이었다. 자매들간의 자리는 밤을 새워 얘기꽃을 피운 듯했다. 나는 새벽 두 시쯤에 자리에서 일어나 잠자리에 들었다. 아내는 남자들이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장모님을 케어했던 듯했다. 장모님은 지난해 10월 경에 발병이 되어 여태까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얼마 전에 집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병에 관해서는 완치판정을 받았는데 아직 항생제 등의 후유증으로 습생에도 애로를 겪었는데 이제는 겨우 먹을 수 있게 된 듯했다. 먹는 것은 약제의 부작용으로 모두 토해내기도 해서 더욱 어려움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제 겨우 몸을 추스르고 회복되어가는 과정에 있었다. 초장기에는 간병인의 도움을 받기도 했었다.
다음날이 되었다. 처남이 차를 끌고 식구들을 데리러 왔다. 모두들 채비를 해서 차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동명동 처갓집으로 왔다. 잠시 앉았다가 커피를 한 잔 마셨고 인근의 음식점 오륙도로 향했다. 메뉴는 이미 주문을 다 해놓은 상태였다. 아구찜과 해물탕이었다. 매운 아구찜을 먹는 것이 쉽지 않아 해물탕 국물에 씻어서 매운맛을 빼고 맛보는데도 물을 들이켰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와서 생신 행사를 했다. 케잌에 촛불을 켜고 생일 축하곡을 합창했다. 어른들만 참석을 한 셈이었다. 자식들이 금일봉씩을 보모님께 드렸다. 아내와 막내처제가 E-마트에 다녀왔다. 장모님의 옷과 플라스틱 옷장을 사 왔다.. 그것에 옷정리를 했다. 두 시간여 동안 옷정리를 깔끔하게 마무리지었다. 다음은 베란다에 보관 중이었던 배추의 정리 작업을 했다. 썩은 배추등은 버렸고 잎줄기가 상한 부분 등은 도려내고 배추의 싱싱한 부분만으로 정리작업을 마무리 짓고 작업이 완료되었다. 저녁은 간잔히 보쌈과 홍어로 식사를 했다. 그리고 귀경길에 나섰다. 하필 비가 내리고 있어 어려운 귀경길이 될 것으로 보였다. 오후쯤에 세종팀이 먼저 귀로에 올랐다. 막내처제와 우리 내외만 남아 집정리 등을 하고 귀경길에 오른 셈이었다. 봄을 재촉하는 비로 여겨졌다. 간신히 가까스로 광주송정역에 도착해서 헐레벌떡 플랫폼에 뛰어가 KTX열차에 탑승했다. 제시간에 탑승한 것이 신기할 지경으로 아슬아슬한 곡예였었다. 서울역에 당도하니 거의 밤 11시였다. 이제 전철로 갈 수 있는 곳도 거의 막차 수준이었다. 결국 종합운동장에서 택시로 간신히 귀가했다. 집에 오니 자정이 넘었다. 이렇게 1박 2일간의 갑진년 장모님 생신행사가 마무리 되었다. 이제 병환에서 겨우 회복이 되셨는데 이제 얼마나 더 이렇게 행사를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이 해외여행을 할 정도였었는데 이제는 운신자체가 힘들 정도이니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항상 장인, 장모님 모두 건강하고 평안한 노후 보내시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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