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고문님 댁에 다녀오면서
Y고문님께 정확한 주소를 확인했다. 샘마을 대우 한양아파트였다. 예전에 몇 차례 왔던 곳임에도 하도 오래된 일이어서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는 Y고문님의 연세가 91세라고 하셨다. 무척이나 연로해지신 듯했다. 건강에 문제가 없으시냐고 했더니 귀도 괜찮으시고 눈도 밝으시다고 했다. 자동차를 끌고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를 타고 안양으로 갔다. 집에서 거리가 38km였고 소요시간도 거의 45분쯤이었다. 안양의 도로변도 벚꽃으로 화려하게 수놓은 듯했다. 한창 벚꽃이 피어나고 그 화려한 자태를 빛내는 때였고 절기였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두고 종이가방 두 개와 난 화분을 들고 아파트 4층으로 올라갔다. 어떻게 오는 시간을 아셨는지 아파트 현관문 밖에 마중을 나와 계셨다. 일단 집으로 들어가 큰절을 올렸다. 사모님도 무척 반갑게 맞아주셨다. 집안은 깨끗하게 정비되었다. 동양란, 서양난, 수석 등이 즐비했다. 경기농협지역본부장이 보낸 동양란도 비치되어 있었다. 직접 수집하신 듯한 수석들도 꽤 많았다. 당신께서 직접 써 두신 글이 써진 액자를 손에 들고 사진 촬영을 했다. 제자는 오래전에 준비해 두신 것으로 보였다. 성천선생의 글씨 두 작품에 관해서도 설명을 해 주셨다. 장식장에는 훈장, 일가상, 5.16 민족상 등이 진열되었다. 고희, 미수, 구순 등에 맞게 감사패, 축하패 등이 놓여 있었다. 베란다에는 할미꽃과 군자란이 만개해 있었다. 서재도 한 번 구경했다. 가을쯤에 미국에 있는 동생네 가족들이 귀국을 해서 당신의 구순잔치를 해줄 것이라고 했다. 이제 해외여행도 멀리 가는 부분은 자제를 하고 있었다. 눈, 귀, 허리 등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평생을 농업에 몸 바쳐오신 원로이셨다. 새농민회 50년사를 책으로 역으신 고생담도 얘기하시고 '새농민 50년사’ 책도 주셨다. 내 후년의 60년사에 관해서는 전혀 관여하실 뜻이 없으신 듯했다. 종축개량협회와 새 농민회, 농수산대학 등에 일생에 걸쳐 헌신해 온 세 개의 단체를 손에 꼽으셨다. 아파트의 베란다도 돌아보았는데 할미꽃이 예쁘게 피어져 있어 인상적이었다. Y고문님과의 인연은 20여 년 전인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농협 안성교육원 총무팀장으로 재직중이었던 시절이었다. 새로 부임하게 된 H원장을 모시고 고문님을 뵈러 갔다. 오전 11시 원장님의 취임식을 앞둔 시간이었는데 면담시간이 길어져 결국은 취임식이 지연되기도 했다. 원장님은 안성교육원 원장으로 취임하기 전에 농업계의 원로이신 고문님을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전국적으로 명망이 높으셨 분이셨고 예전 새농민회 회장을 역임하셨고 이제는 고문님으로 추대된 상황이었다. 그 당시에도 이미 농업경영에서는 은퇴하신 상태였었고 난을 재배하시고 산책하시고 전국을 주유하시면서 은퇴 후의 삶을 영위하시고 있던 때였다. 이후 고문님에 관해 파악한 바로는 다음과 같았다. 50년대쯤에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시대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나가던 시절에 홀로 최초의 귀농 1호였었다. 주변의 권유는 미국유학도 권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오롯이 자신의 의지를 쫓아 귀농을 하신 삶을 선택하셨다. 보성고를 나오셨고 S대 농대를 나오셔서 그렇게 귀농을 하셔서 처음에는 과수원 등도 경영을 하셨다가 최종적으로 정착한 곳은 지금 살고 계신 안양 근처의 목장지였다. 낙농업을 최종적으로 경영하게 된 것이었다. 초창기 열악한 축산환경 속에서 낙농업에 심혈을 기울였고 우유를 생산하셨고 종축개량협회, 농협의 새농민회, 지역농협의 이사회 등에 역할을 수행하셨다. 새 농민상, 5,16 민족상, 새 농민회 회장, 종축개량협회 이사 등으로 활약을 하시기도 했다. 일본의 홋가이도와 교류하셨고 일본의 선진 낙농기술의 도입에도 앞장서기도 했다. 일평생을 농업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농업의 진흥과 농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시기도 했다. 성천 유달영 선생과의 관계도 돈독하셨고 안성교육원은 개원의 첫 강사로 초빙되어 강의를 하시기도 했다. 또한 의왕의 서울구치소 재소자를 위한 강의를 하셔서 사회 공헌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사모님께서 2012년경부터 안성교육원에서 건강강좌 강의를 하시기도 하셨다. 항상 부부동반해서 전국을 다니셨다. 교육원에 오시면 수지침을 교육원 교수들에게 놔주시곤 했다. 여러 가지 일화를 말씀해 주시기도 했다. 역대 회장님들도 사모님의 수지침을 맞으시곤 했다고도 했었다. 손가락에 체질에 맞게 은반지 금반지를 맞춰주시기도 했다. 그렇게 실반지로 맞춰주시면 어떤 분들은 실제로 금, 은반지로 맞춰 끼시기도 했다. 강의를 위해 교육원에 오시면 사모님이 강의를 하시는 동안 부원장시절에는 고문님의 말벗 노릇을 강의시간 동안 부원장으로서 접견실에서 하기도 했었고 식사를 같이 하기도 했다. ‘상선약수’ 란 글귀를 써주시기도 했다. 매년 북해도를 부부동반해서 다녀오시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해외 가시는 것도 쉽지 않으신 듯했다. 전국의 새 농민회 회원들에 대해서도 항상 의견을 청취하시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셨다. 안성교육원에서 연례행사로 전국 새 농민회를 개최하면 항상 참석하시고 교육원을 지지해 주시고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안성교육원 30주년 때에도 기념 글씨를 보내주시기도 했다. 농협중앙회의 월례행사에도 항상 참석하시곤 했는데 이제는 거의 간헐적으로 참석을 하시는 상황인 듯했다. 사모님도 건강하시고 활기차 보였다. 차를 한잔 마시면서 환담을 했었고 고문님과 함께한 기념촬영도 빠지지 않았다. 면담을 마치고 곧바로 귀로에 올랐다. 고문님 내외분이 모쪼록 건강하시고 활력 넘치는 노년을 보내시고 만수무강하시길 기원해 본다..
'자작글(수필, 여행기, 편지글, 일기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종에서 (0) | 2024.08.02 |
---|---|
길에서 (0) | 2024.07.22 |
동창회 (1) | 2024.07.17 |
양산을 다녀오며 (0) | 2024.07.17 |
Y고문님 댁에 다녀오면서 (1) | 2024.0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