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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세계사 , 기타 전쟁사, 문화사, ) 사건, 전투 , 등

프랑스혁명 4

by 자한형 2024.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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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4 &누들스(6/10)

1공화국(1793~1799)

1799년 프랑스 제1공화국 (녹색은 직접 관리, 연두색은 자매공화국 및 점령된 영토)

국민공회, 1공화국 수립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1792920알부터 17951026일까지 존속했던 프랑스 의 단원제 입법 기관. 여러 위원회를 통해 집행 권한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행정부의 역할도 담당했음. 1792년 파리 시민이 튀일리을 습격한 810일 사건을 통해 왕정이 무너지면서 입범의회가 법령을 통해 루이16세의 왕권을 정지시켰음. 새 의회가 수립되기 전 로베스피에르의 제안으로 국민공회라는 명칭을 결정했고 1792년 선거를 실시했음. 국민공회는 회기 2일째인 921, 공화정을 선포하여 왕정을 폐지하고 프랑스 1공화국을 수립했음. 루이 16세를 국가반역죄로 기소하여 이듬해 1월 단두대에서 처형했음. 1795112일에 시작된 총재 정부가 뒤를 이었음. 국민공회의 참가자로는 자코뱅당의 로베스피에르와 마라, 당통 등이 있음.

국경 지역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9월 학살'과 상퀼로트의 다소 과격한 활동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국민공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가 진행되었음. 재산이나 소득 금액에 상관없이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는 보통 선거가 실시되었으나 기권율이 높았음. 시민들이 겁을 먹고 감히 투표를 하지 못했기 때문. 749명의 새 의원들이 뽑혔고 국민공회가 소집되었음. 국민공회는 1792921, 군주제를 폐지하고 다음날 공화정을 선포함으로 프랑스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음. 이에 따라 1791년 프랑스 헌법은 불과 1년 만에 폐지됐음.

발미전투의 승리는 시기적절하게도 공화정의 출발에 큰 힘이 되었음. 국민공회는 어려운 상황에서 과업을 수행했음. 파리를 장악하고 코뮌을 통제하고 있던 상퀼로트의 압력과도 끓임없이 타협해야 했음. 초기에 국민공회를 지배했던 세력은 160석을 차지한 지롱드파였음. 이들은 공정가격제를 거부하고 경제 자유주의를 선호했음. 도시의 부유한 부르조아 출신인 지롱드파는 비상 재판소를 폐지하였고 공화정의 출발로 더 이상 필요없는 존재로 전락한 국왕 루이 16(시민 루이)의 목숨을 구하려 노력하는 등 온건한 개혁을 선호했음.

루이 16세 처형

급진화된 혁명 세력이 장악한 국민공회는 혁명의 후퇴를 막고 혁명 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루이 16세를 혁명 재판에 회부했음. 국왕이 전쟁 때 프랑스 정부와 국민을 배신했다는 증거가 많이 제출되어 1793114일 국민공회는 찬성 387, 반대 334로 루이 16세의 사형을 의결. 그러나 찬성 중 26표는 집행유예를 검토해야 한다는 조건부였음. 26표를 반대표로 의결하면 찬성 361 대 반대 360로 찬반 동수가 되기 때문에, 18일 집행유예에 대한 투표가 진행됐음. 찬성 380 대 반대 310로 집행유예 없음으로 의결되었기 때문에, 사형이 확정됐음.

121, 2만 명의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루이 16세는 파리의 혁명 광장(현재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에 처형되었음. 왕의 시신은 즉시 마들레느 묘지에 비밀리에 안장되었음. 왕의 무덤이 알려질 경우에 왕당파의 순례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음. 1016일 마리 앙투아네트도 뒤로 손이 묶여 퇴비 수레에 태워져 시내를 돈 이후 처형되었음. 국왕에게 사형 투표한 의원들은 "국왕 살인"으로 이후 보복을 받게 됨. 그들은 이후의 왕정복고에서 권좌에 복귀한 왕당파로부터 백색 테러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

1793121일 루이 16세의 단두대 처형 장면. 게오르크 하인리히 시베킹의 동판화

대불동맹 전쟁

17931월 루이 16세의 처형은 유럽 각국에 충격을 주었고, 영국·스페인·사르데냐 등을 포함한 11개국이 프랑스 혁명정부를 적대시하며 대불동맹을 결성하였음. 유럽의 군주들은 국왕이 없어도 국가통치가 가능하다는 불온한 혁명사상이 자국민들에게 전파되는 것을 차단하고자 했음. 그러기 위해서는 프랑스 혁명정부를 무력으로 굴복시켜야 했음. 금번 제1차 대불동맹은 피트 수상이 이끄는 영국이 앞장섰음. 이는 프랑스가 지난 9211월에 벨기에를 침공 후 합병하여 벨기에의 셸데 강 하구를 점령한 것이 영국의 대륙무역에 위협 요소가 되었기 때문.

유럽 군주들에 의해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프랑스 혁명정부는 9321일에 영국과 네덜란드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1차 대불동맹 전쟁이 시작되었음. 대불동맹의 군대들도 신속히 움직여 프랑스 국경을 넘었음. 국경 각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연패하자 다급해진 혁명 정부는 “30만명 모병을 선포하였음. 그러나 이에 반발한 왕당파가 17933월 방데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은 전국으로 확대되었음. 프랑스 혁명군들 중에서도 탈영자가 늘어만 갔음. 프랑스는 벨기에에서 오스트리아와 벌인 전투도 패했음.

프랑스군이 승리한 발미 전투 1792920Horace Vernet - The National Gallery

공포 정치

이러한 위기 외에도 지롱드파가 하층민의 식량 위기에 대해 아무런 정책을 취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면서 하층민의 분노가 폭발. 1793531, 자코뱅파가 지롱드파를 쓸어버리게 됨. 62, 하층민이 지지하는 자코뱅파가 국민공회에서 지롱드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 713일 자코뱅의 지도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장 폴 마라가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암살을 당하는 등 테러리즘도 연발하여 프랑스 정세는 여전히 불안했음.

이런 상황에서 자코뱅파는 독재 정치를 시작. 공안위원회, 보안위원회, 혁명재판소 등의 기관을 통해 공포 정치를 실시하여 반대파를 차례로 단두대로 보냈음. 권력을 잡은 로베스피에르는 당통, 에베르, 라부아지에, 카미유 데뮬랭, 뤼실 두플레시 등 에베르 파와 당통 파를 숙청했고, 17937, 농민에 대한 토지의 무상 분배 등 자기의 이상으로 하는 독립 소생산자에 의한 공화제의 수립을 목표로 했음. 법에 의한 보호와 신체의 자유, 소유의 권리를 담은 인권 선언은 휴지 조각에 불과했음. 자코뱅 파는 823일에 국가총동원을 선포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군비를 정돈하고 왕당파의 반란과 대불동맹군에 대해 반격에 나섬.

아시냐의 지불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음. 농민과 상인들은 수확과 상품에 대해 신고서를 제출해야 했음. 가택수색과 징발이 빈발했고 밀고자들에게는 포상금을 지급했으며 혐의만으로 체포가 가능했음. 17946월에 제정된 일명 프레리알 22일 법으로 인해 법률조력과 증인심문이 폐지되고 선고는 무죄와 사형, 이 두가지 판결로 축소되었음.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오를레앙 공작, 뒤바리 부인, 지롱드파 지도자들이 처형되었고 수많은 반대파와 반혁명 혐의자들이 약식 재판만으로 기요틴에서 참수되었음. 공포정치로 인해 1년여 동안 파리에서만 30만명이 체포되고 약 15,000명이 처형당했음.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

노예제 폐지

이처럼 프랑스 본토에서는 공포 정치가 진행되었지만, 한편 산토 도밍고(현재 아이티)에서는 1793829일 프랑스 본토에서 파견된 국민공회 의원 레제 프리시테 손토나가 노예 제도의 폐지를 독단으로 선언했음.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 파는 179424일 국민공회에서 푸뤼비오즈 16일 법을 통과, 서구 세계 최초의 식민지를 포함한 전반적인 노예제 폐지를 결의했음.

이렇게 루이지애나, 기아나, 산토 도밍고(현재 아이티), 마르티니크, 과들루프 등 대륙의 광대한 지역에서 흑인법아래 농장 농업에 묶여 있던 흑인 노예는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음. 이것은 영국에 저항하고 있었던 산토 도밍고의 흑인 실력자 투생 루베르튀르의 프랑스 복귀를 이끌어내는 등 자코뱅 파를 통해 자유와 평등이 실천되었다고 할 수 있음.

1791-1804 일어난 아이티 혁명으로 노예제가 폐지되고 아프리카 출신 사람들이 지배하는 최초의 공화국인 아이티가 세워졌음

테르미도르 반동

결과적으로 로베스피에르는 국내외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의견을 완고하게 관철시켜려 하여 많은 사람들을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하였음. 로베스피에르는 혁신 정책은 노동자의 지지를 얻었으나 부르주아들과 토지를 얻은 농민들은 혁명이 더 이상 진행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음. 그러나 공포정치가 계속되자 반대파는 1794727(혁명력 2) 측근인 생 쥐스트와 함께 참석한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에서 의장 조제프 푸셰, 데르브와와 랑베르 탈리앵, 비요 바렌 등에게 탄핵을 당함.

장내에서 탈리앵 등이 폭군을 타도하자!”라는 연설을 하였으며, 로베스피에르 파의 체포를 요구하여, 오후 3시 로베스피에르, 쿠통, 생 쥐스트 등의 체포 결의가 통과했음. 다음 날인 1794728일 로베스피에르 등 22명은 자신들이 애용한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함. 이와 함께 자코뱅파는 몰락.

공포정치의 끝.

테르미도르(Thermidor)란 혁명 때 제정된 프랑스 혁명력(후에 나폴레옹에 의해 폐지) 11번째 달을 의미. 이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 혁명은 실질적으로 끝나게 되고, 시민 혁명은 종말을 고했음.

습격당하는 로베스피에르파 Jean-Joseph-François Tassaert (1765 - ca.1835) - Jean-Joseph-François Tassaert

1794727, ()로베스피에르파가 프랑스혁명기 독재자 로베스피에르와 그 일당을 체포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장면을 그린 그림이에요. 국민공회군에 의해 체포된 로베스피에르는 다음 날 오후, 그가 공포한 법에 따라 재판도 없이 단두대에 올려져 처형됐음 /위키피디아

총재 정부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된 후인 1795년에 국민공회는 공화력 3년 헌법을 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총재 정부를 수립하였음. 이는 5명의 총재가 행정권을, 원로원과 500인회에서 입법권을 갖는 체제로 운영되었음. 하지만 총재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반대파들이 일으킨 반란을 직면하게 되었음.

1795105일 반대파가 일으킨 방데미에르 13일 반란(왕당파 반란)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에 의해 진압되었음. 반대파의 반란을 진압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후 이탈리아 원정과 이집트 원정을 통해 국민 영웅으로 부상하였음. 반면, 총재 정부는 당시의 경제, 사회적 불안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며 민심을 잃었음.

혁명력 8년 브뤼메르 18일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통령 정부

마침내 나폴레옹은 1799년 브뤼메르 18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 정부를 전복시키고 통령 정부를 수립하여 제1 통령의 자리에 올랐음. 프랑스 혁명으로 태어난 프랑스 제1공화국은 나폴레옹에 의해 시작된 프랑스 최초의 제정으로 인해 10여 년만에 단명하며 막을 내렸음. 또한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혁명으로 붕괴된 부르봉 왕조가 부활했음.

프랑스혁명7

나폴레옹(1792~1799) 이탈리아, 이집트 원정

육군 소위, 혁명 발발과 내전

178516세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포병 소위로 임관. 불과 4년 뒤인 1789, 프랑스 혁명이 터짐. 나폴레옹은 휴직한 후 코르시카로 귀향하여 의용병 대대의 장이 되었음. 코르시카 의용병대의 대대장이 되면서 이 당시 나폴레옹의 계급은 중령.

17922월 혁명 이후 정부로부터 교회에 대한 재산 몰수가 진행되며 코르시카 섬과 나폴레옹의 의용병대에게도 수도원 해산 지시가 내려졌음. 지역 신망이 두터웠으므로 아작시오 수도원에서 병사들과 이에 반대하는 지역 일꾼 및 백 사람들 간에 실랑이가 오갔는데, 그러던 중 오발 사고로 인하여 부하 소위 한 명이 죽게 되었음. 이에 분노한 나폴레옹이 강경 진압을 하고자 코르시카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 정규군에게 지원과 탄약 증원을 요청하였으나 지휘관인 마이야르 중령이 이 요청을 거절하고 되려 의용병대 해산을 명령함.

나폴레옹측은 이 명령을 무시하고 다음날 아침 의용병들과 교회에 쳐들어가 정문에서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고, 민간인들이 무차별적으로 죽게 됨. 여기까지도 문제가 많으나, 의용병대는 곧 나폴레옹의 통제에 벗어나 상점과 축가를 털며 약탈과 파괴를 하였음. 나폴레옹의 첫 출전이나 다름없던 이 사건은 처음으로 나폴레옹의 지휘 실책을 드러냈을 뿐 더러, 이 사건으로 당시 코르시카를 주름잡던 파올리에게도 반감을 사게 되었음.

대위 승진, 대불전쟁 참여 1792

한편, 같은 달인 17922월 프로이센 왕국과 합스부르크 제국(152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와 국가들을 통칭)이 프랑스를 침공해왔고, 시국이 이렇자 1792528일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의용병들과 함께 파리로 복귀하고자 함. 나폴레옹은 휴직 기간을 한참 넘긴데다, 코르시카 의용병대로 머물던 중 앞서 말한 사고도 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복귀하면서 신변 보호와 변호 등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전쟁과 혁명으로 장교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든 프랑스 정부는 복귀한 나폴레옹을 바로 대위로 임명하고 그해 7104포병 대대에 배속시킴.

한편, 17931월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유럽의 여러 군주제 국가들은 이를 두려워해서 대() 프랑스 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프랑스는 홀로 영국, 합스부르크 제국, 프로이센 등의 군사 강국과 맞서게 되었음. 이 와중에 나폴레옹이 몸담고 있던 프랑스 제1공화국 또한 내부의 분열이 심화되고 있었음. 온건파인 지롱드파(Girondins)와 과격파인 자코뱅파의 대립이 그것이었음. 1793531, 자코뱅파가 지롱드파를 쓸어버리게 됨.

그러자, 이에 반발하여 지롱드파가 많았던 리옹, 아비뇽, , 마르세유에서 반란이 터짐. 이러한 혼란속에서 이번에는 툴롱에서 왕당파가 혁명파들을 쫒아내고는 영국군과 스페인군을 받아들인 사건이 발생. 이 사건이 바로 툴롱 포위전으로 이어지게 됨. 마침 그 직전인 17936, 나폴레옹과 그의 가족들은 코르시카의 실력자 파스콸레 파올리와의 의견 대립으로 코르시카를 탈출한 상태였음.

감옥에 갇힌 지롱드(1845년 판화)

툴롱의 왕당파 반란 진압(1793), 장군 승진

17935월부터 지롱드파 의원이 체포된 이후로 각지에서 왕당파의 반란이 일어났음. 당시 프랑스 해군의 주요 기지이자 항구도시인 툴롱에서도 이 상황에 휩쓸려 영국 해군을 등에 업은 왕당파가 반란을 일으켰음. 코르시카를 탈출한 나폴레옹은 여기서 포병을 집중적으로 운용하는 전법으로 상륙한 영국군을 몰아내고 반란군을 진압했음. 나폴레옹이 지휘관이 된 데는 기존의 장군, 제독들이 왕당파로 몰려 망명하거나 처형당해 많은 고급 장교 보직이 공석이 된 것도 한몫 했지만 결정적 계기는 따로 있었음. 그것은, 나폴레옹이 대표적 정치군인이었다는 것. 나폴레옹은 자그마치 당시 자코뱅당의 총수였던 로베스피에르와 연이 닿아 있었음. 강철 낙하산 앙시앵 레짐과 거리를 두는 이 스탠스는 엄청난 변화를 가지고 옮.

'툴롱 포위전' 이전의 나폴레옹은 장군은 커녕 부대 참모도 아니었고 보케르라는 작은 도시에서 보급대를 이끄는 하급 지휘관이었을 뿐이었음. 이때, 나폴레옹은 '보케르에서의 저녁식사'라는 짧은 정치 팜플렛을 작성했음. '왕당파와 공화파가 서로 사상논쟁을 하다가 결국 공화파가 이긴다'라는 내용의 이 팜플렛을 나폴레옹이 만든 이유가 혁명에 대한 지지 때문인지, 출세 목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음. 툴롱 포위전이 벌어지는 1793년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한 시기였기 때문.

하지만 이 팜플렛을 보고 감탄한 인물이 등장했으니 오귀스탱 드 로베스피에르(1763~1794), 즉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의 동생이었음. 이 오귀스탱 드 로베스피에르가 나폴레옹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어줌. 한편 이때 마르세유와 툴롱 지역의 파견 의원은 코르시카 출신으로 나폴레옹과도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던 앙투안 크리스토프 살리세티였음. 당시 로베스피에르 파벌, 즉 산악당 소속이었던 살리세티는 포병대 지휘관이 부상당하자 그 자리에 나폴레옹을 천거해서 낙하산으로 꽂아줌.

툴롱 포위전에서의 나폴레옹은 비록 총사령관이 아닌 포병지휘관으로 아직 영관급에 불과했지만, 엄청난 열의를 가지고 보급과 훈련 등 포위군의 총체적인 개선에 나섰음. 전술적 재능 역시 본격적인 첫 전투인 이때 이미 발휘되어, 해안가에 분산된 반혁명 연합군 방어선의 약점을 간파하고, 포병대를 해안에 전진 배치해 연합군 함대를 봉쇄하는 데 성공했음.

그러나 포위전을 총지휘한 혁명군 사령관들은 군사적 자질이 아니라 정치적 충성도에 의해 임명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나폴레옹의 활약을 궁극적인 승리로 이끌어 낼 능력이 없었음. 첫 번째 사령관인 카르토는 화가였으며 연합군 요새에 대해 무모한 보병 돌격을 감행하다 실패했고, 결국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라는 든든한 연줄을 가진 나폴레옹이 그를 비난하는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하자 소환되었음.

교체된 사령관은 도페 장군이었음. 그는 젊은 시절 잠깐이나마 군대 경험은 있었지만 그건 10대 시절의 일이었고, 그의 직업은 내과 의사였음. 그는 최음제나 일종의 기 치료법 같은 걸 주로 시술했고, 심지어는 피 공포증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던 걸 보면, 돌팔이 의사였던 것으로 보임. 역시나 '정치적으로 안전'한 인물이기 때문에 임명되었으나, 역시나 군사적 재능은 전무했고, 임명된 지 며칠도 지나지 않아 '질병을 이유로' 사임했음.

마지막으로 임명된 뒤고미에 장군은 직업군인이었으며, 나폴레옹의 능력과 그가 제시한 작전을 인정하고, 파리의 혁명정부에 추천서를 보내주었으므로, 나폴레옹은 툴롱 포위전을 사실상 지휘하게 됨. 사실 이전 지휘관들이 무능했던 것은 나폴레옹에게는 천운이었는데, 이로 인해 그의 능력이 상대적으로 돋보였고, 그의 계급보다 더 많은 실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의 공적을 인정받아 불과 몇 달의 기간 중에도 지속적으로 승진할 수 있었기 때문.

이후 나폴레옹의 전략이 맞아들어가서 그가 배치한 포대의 포격을 버티지 못한 연합군은 결국 혁명군의 포대를 파괴하려 무모한 공격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오히려 역공을 가한 혁명군에게 툴롱을 점령당하게 됨. 영국 해군은 대부분 도망가는 데 성공했으나, 영국 육군과 스페인, 이탈리아군은 대부분 항복하여 포로로 잡히게 됨. 이후 혁명군이 미처 도망가지 못한 왕당파를 학살하였는데, 나폴레옹은 이에 참여하지 않았음. 한편 포위전 승리의 공로로 나폴레옹은 장군으로 진급할 수 있었음. 이후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는 파리 수비 사령관을 제안했으나, 나폴레옹은 이를 거절하고 '이탈리아 방면 포병 사령관'을 맡았음.

테르미도르 반동(1794), 국민공회 몰락

그런데 여기서 정치적 대격변이 벌어지는데,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나서 '국민공회'가 몰락한 것. 오귀스탱 드 로베스피에르는 형인 막시밀리앙, 동료인 생쥐스트 같은 이들과 단두대로 갔고, 나폴레옹은 자기가 자코뱅이 아니라고 변명해야 하는 처지로 몰렸음. 이때 한발 더 빠르게 움직였던 '살리세티'는 나폴레옹을 '자코뱅 주의' 혐의로 감옥에 집어넣었음. 나폴레옹의 부하들은 나폴레옹에게 탈옥을 권유했으나, 나폴레옹은 좀 더 기다리는 쪽을 선택했음.

그리고 투옥된지 2주 만에 살리세티에 의해서 풀려남. 하지만 목숨만 건진 상황이었고, 이탈리아 방면군으로 돌아갔지만 단지 부대 참모로 왕따를 당하는 처지였음. 자코뱅 문제는 이후에도 꾸준히 남아서 코르시카 원정군 참여 요청을 해봤으나 거절당했고, 방데 전쟁 진압에 참여하라는 정부의 요청은 나폴레옹이 거절하면서 나폴레옹은 직위 해제당함. 참고로, '방데 지방'은 가장 대표적인 '왕당파 세력'으로 이 지역의 반란은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이후는 물론이고, 나폴레옹이 100일 천하로 재집권한 시기까지 이어졌음.

바라스와의 인연

이 상황에서도 나폴레옹은 인맥을 만드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툴롱 포위전 이후 왕당파를 학살했던 대표적인 장군 중 하나이자 테르미도르 반동을 주도하여 실권을 잡은 권력자 바라스였음. 알려진 대로 바라스는 훗날 나폴레옹의 아내가 되는 조제핀의 내연남이었음. 이 시기에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의 처제인 데지레 클라리와 약혼한 상황이었음. 하지만 그는 바라스와의 관계를 위해, 혹은 진정으로 조제핀을 사랑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조제핀과 결혼하게 되면서 클라리와 파혼하게 됨. 클라리는 이후,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와 결혼해서 스웨덴 왕비가 됨.

이탈리아 화가 안드레아 아피아니가 그린 조세핀’. [사진 위키피디아]

방데미에르 13일의 왕당파 반란(1795) 진압

이런 나폴레옹을 복권시킨 것이 바로 방데미에르 13일 사건임. 17959월 아르투아 백작이 영국 육군과 해병대, 망명 귀족의 병력을 포함하여 약 3,000여 명을 이끌고 프랑스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친가톨릭-반혁명 왕당파들이 파리로 몰려들었고, 왕당파 시위대는 3만까지 그 숫자가 불어나게 됨. 이에 당시 중앙정부는 방데 전쟁 진압에 효과적으로 대처했다고 평가를 한 장 프랑수아 드 므누를 진압사령관으로 임명했으나, 당시 파리의 병력은 5천이었고 므뉴는 이 상황이 어렵다고 본 것인지 원래 왕당파 성향이었는지, 타협안을 제시하고 미적거리는 모습을 보였음.

이에 정부는 다시 므누를 파면 및 구속하고, 새로운 사령관을 임명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바라스였음. 나폴레옹은 바라스에 의해서 현장지휘관이 되었고, 므누에게 얻은 정보에 착안, 한 기병 장교를 시켜서 파리 외곽에 배치되어 있던 대포를 파리로 끌고 오게 됨. 이 기병 장교가 바로 '조아킴 뮈라'. 그리고 이렇게 끌고 온 40문의 대포를 튈르리 궁 인근 교차로에 배치해서 파리 시내에서 '포월(포도의 달, 방데미에르)''포도탄'을 쏴대는 강경 진압을 시작했음. 이후 왕당파 시위대는 300여 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해산했고, 나폴레옹은 육군 중장 진급과 동시에 포도탄 장군이라는 멸칭을 얻게 됨.

왕당파의 시위는 단순한 폭력시위 정도가 아니었음. 차라리 쿠데타에 가까웠음. 왕당파 반군의 병력과 기세가 워낙 드세서 대포라도 쏘지 않는 이상 진압은커녕 혁명정부가 전복될 상황이었음. 나폴레옹은 혁명 초기의 카오스 속에서 있었던 굵직한 사건의 흐름을 통해 민중 봉기의 과격성과 이에 대한 강경 진압의 효과성을 알고 있었고 이를 십분 활용했음. 물론 성공해서 그는 다시 출세길을 걷게 되었음. 나폴레옹이 아니었다면 정통성과 안정성이 극히 취약했던 파리의 혁명정부(당시엔 총재정부)가 이때 전복되었을거라는 평가가 중평임.

북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발탁

이 전공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이 되어 1796년 이탈리아 원정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쳐부수고, 그 결과 체결된 캄포 포르미오(Campo Formio) 조약으로 프랑스는 벨기에와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까지 차지하게 되었음. 프랑스 혁명 전쟁의 이탈리아 원정은 프랑스 혁명군과 오스트리아, 러시아, 사르데냐 왕국 그리고 많은 이탈리아 국가들이 북이탈리아에서 벌인 일련의 전쟁. 1796~1797년에 걸쳐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서 벌어진 프랑스 제1공화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간의 전쟁. 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프랑스 혁명 전쟁)의 일부로 나폴레옹 전쟁의 최초 국면임.

프랑스 혁명 4년차인 1793년 툴롱 공략의 승리로 명성을 얻은 나폴레옹은 다음해 24세의 나이로 준장으로 고속 승진해 이탈리아 방면 전선으로 배치. 당시 프랑스 혁명 정부는 중부~동부 유럽 뿐만 아니라 북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제국과 전쟁 중이었기에 이탈리아 반도 북부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자 했지만 3년이 넘도록 성과가 없었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혁명 정부 내부 정치적 혼란 속에서 잠시 해임되기도 했으나 방데미에르 13일 사건 때 파리로 몰려든 왕당파를 강경 진압한 공을 세운 덕에 17963월 이탈리아 방면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될 수 있었음. 나폴레옹에게 주어진 병력은 4만 정도였지만, 이탈리아 방면군에 대한 보급이 무척이나 빈약해 사기가 많이 꺾여 있었음. 병사들 봉급이 많이 밀려있었고, 군복과 군화의 보급이 시원치 않아 장교들마저 누더기가 된 옷을 입고 있었고, 식료품마저 부족한 상황. 당시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의 주전장은 라인강 연안의 중부유럽이었기에 이미 재정난에 허덕이던 프랑스 혁명 정부는 이탈리아 방면의 군대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음.

나폴레옹은 원정에 앞서 "정부는 제군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제군을 가장 비옥한 평원으로 데리고 간다. 제군은 거기서 부와 명예를 얻을 것이다"라는 연설해 사기를 단번에 끌어올렸음. "우리는 이제부터 유럽에서 가장 이쁜 여자들이 모여 있는 로마로 들어간다" 라고 군인들을 설득했다는 설도 있음.

1차 대불전쟁 초기 정리(1792~)

프랑스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1792420)을 시작으로, 프랑스와 주변국들 간에는 프랑스 혁명 전쟁이 개시됨.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헤센의 3국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진격을 계속했고, 823일에는 롱위가, 92일에는 베르됭이 함락되었으나, 프랑스는 발미 전투(920)의 승리로 공세로 전환. 그리하여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벨기에)로 진출하여 저마프 전투(116)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하여, 남쪽 네덜란드 전역을 점령.

1793년에 들어서자, 프랑스에서는 전년에 군대에 참전한 의용군들이 만기를 이유로 귀향했고, 상비군에게 급여도 제대로 줄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프랑스의 병력은 점차 감소. 또한 1793121일 혁명 정부의 루이 16세의 처형은 유럽 전체를 뒤흔들었고 유럽의 각 왕국에 위기감을 안겨 줌. 프랑스 혁명 정권이 왕정을 부정하게 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

혁명 사상이 자국에 파급될까 두려워한 여러 왕국 즉, 스페인 · 네덜란드 · 나폴리 왕국 · 사르데냐 왕국과 그때까지 시민 혁명에 동정적이었던 잉글랜드조차 반혁명의 입장에 서게 되었음. 또한 잉글랜드로서는 네덜란드가 프랑스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자국의 안보도 심각한 문제였음. 이러한 이유로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한 주요국 사이에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음. 이 동맹은 프랑스 혁명 정부를 타도하는 것을 목표로 했음.

대프랑스 동맹군은 지중해에서 프랑스에 대한 공격을 시작.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공화국은 라인강에서 공격을 했고, 영국은 해상 봉쇄를 시작(531)하여 프랑스 해군의 거점인 툴롱 항을 포위했음. 프랑스는 1793318일 오스트리아와의 네르빈덴 전투의 패배 후 이어진 뒤무리에의 투항으로 대외적으로 열세에 놓이게 되었음. 또한 국내에서도 서부 방데 지역과 남동부 리옹 등에서 왕당파의 선동에 의한 반란이 일어났고, 툴롱에서도 도시 내의 왕당파가 영국과 스페인 함대를 입항시키는 등 내우외환을 안고 있었음. 같은 해 46, 혁명 정권은 공안위원회를 조직하여 내부의 긴축을 도모함과 동시에 823, 징병제를 시행하여 상실한 병력의 복구를 시도했음.

1793년 말부터 프랑스는 반격에 나서 국내에 침공했던 동맹군을 모두 국외로 쫓아냄. 같은 해 1219, 나폴레옹은 툴롱 탈환에 중요한 역할을 하여 명성을 높였음. 이후에도 프랑스의 공세를 계속하여, 179546일에 프로이센과 조약을 체결하고 라인란트를 얻었음. 같은 해 5월 남부 네덜란드에 위성국인 바타비아 공화국을 건국했음. 스페인도 2차 바젤 조약으로 프랑스와 휴전.

프랑스 국민공회가 해산되고 프랑스 총재정부가 성립(17951026)되자 프랑스군은 잉글랜드와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쟁 수행에 박차를 가하였음. 다만, 영국을 직접 공격할 수는 없었기에 오스트리아의 영향권 밑에 있는 북부 이탈리아의 정복에 착수함.

1792920ko:발미 전투Horace Vernet - The National Gallery

오스트리아 원정 계획

1796년 프랑스 총재정부는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기 위해 세 방향에서 공격을 계획. 라인 방면에서는 2개의 군을 주르당과 모로가 이끌었고,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는 바라스의 조치에 의해 보나파르트가 발탁되었음. 3개의 군이 티롤에서 합류하여 비엔나를 점령하겠다는 작전. 전략은 4월에 시작. 당초 주르당과 모로는 순조롭게 진격. 모로는 바이에른을 통과하여, 9월경 티롤의 국경까지 도달. 그러나 주르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테셴 공작 카를에 패배하여 라인강 서쪽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음.

프랑스 국내에서는, 왕당파의 참여와 영국의 지원을 받아 오래 끌던 방데 반란이 라자르 오슈에 의해 1796년 상반기에 진압. 12, 오슈는 아일랜드에 원정을 시도했고, 영국 함대의 방해로 인해 상륙 작전은 실패로 끝났음. 또한 10월에는 스페인이 프랑스 편에 서서 영국에 선전 포고하였고, 스페인 함대는 1797214일 쌍 빈센트 곶 해전에서 존 저비스와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에 패했음.

1차 이탈리아 원정

한편, 이탈리아 원정 임무를 부여받은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서 작전을 성공시키고 있었음. 그는 공격을 개시(17963)하여 각 방면에서 대프랑스 동맹군을 격파. 최전선에서 프랑스군과 대치 해왔던 사르데냐 왕국을 약 1개월 만에 항복하게 하고, 오스트리아군의 거점 만토바를 포위. 뷔름저와 아르비트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만토바 탈환을 목표로 반격에 나섰지만, 나폴레옹에게 카스틸리오네 전투(85), 아르콜 다리 전투(Battle of the Bridge of Arcole 1115~17)에서 패배함.

1797114, 이탈리아 방면에서는 오스트리아가 리볼리 전투에서도 패배하였고, 22일 만토바가 성문을 열였음. 나폴레옹은 티롤에서 비엔나를 향해 진격하였고, 카를 대공도 나폴레옹의 기세를 멈추지 못했음. 오스트리아는 휴전을 제의하였고, 레오벤 조약이 체결(418). 그 후 반년간의 협상을 거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1017). 프랑스는 남부 네덜란드를 합병하고, 북부에 치자르피나 공화국 등 위성국을 성립. 맞 교환으로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합병. 오스트리아의 탈락으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되었고, 영국만이 전쟁을 계속하게 되었음.

아르콜 다리 전투 La Bataille du Pont d'Arcole Horace Vernet -

이집트-시리아 원정

1798년부터 1801년까지 프랑스 군대가 이집트, 시리아로 원정. 나폴레옹이 이끄는 5만 명의 프랑스군은 몰타를 통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근처에 도착. 도중 나폴레옹의 귀환 후, 3년간에 걸쳐 맘루크 군대와 지방의 여러 세력, 영국군, 그리고 이후 전쟁을 선포한 이집트, 시리아를 간접 지배하는 오스만 제국의 정규군과도 싸웠음.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원정하게 된 것은 대륙 제패를 하려는 프랑스에게 바다 건너 편에 있어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이른바 눈의 가시였던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음. 인도에 중요한 식민지를 가진 영국은 식민지와 본국의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이집트를 경유했음. 따라서 이집트를 빼앗는 것은 영국 본국과 인도 식민지, 또한 인도와 지중해의 관계를 끊을 수 있으며, 이렇게 된 이상 인도의 식민지 탈취와 연결된 전략적 군사행동이었음.

한편 이집트는 300년간 오스만 제국의 통치 하에 있었지만, 오랜 지배 기간 지속되어 온 이스탄불 제국 정부의 지배력은 쇠퇴하고 있었으며, 이집트는 주지사로서 24개로 나뉜 주를 지배하는 맘루크의 유력자 파샤가 사실상 좌지우지하고 있었음. 카프카스의 체루케스인 등의 비아랍계의 백인 노예로 구성된 맘루크는 노예 전사로 이집트로 데려 온 용병이었지만, 토착하여 콥트인 등 이집트 원주민을 지배하는 세력을 갖게 되었음. 프랑스는 이 맘루크 지배에서 이집트의 민중을 해방시키고, 우방인 오스만 제국의 정통적인 지배를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이집트를 침공하게 된 것임.

179873, 아부 킬 항구에서 이집트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다음날에는 지중해안의 가장 중요한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점령. 그들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최단 거리로 가기 위해 사막 한가운데를 행군하여 카이로에 육박하여, 721일 마침내 도착한 카이로 근교 나일강변 마을 에무바베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집트 맘루크 군대를 격파.

장 레옹 제롬, ‘스핑크스 앞의 보나파르트’, 캔버스에 유채, 1867~1868, 카이로 외교관 클럽 소장

3대 피라미드 있는 기자에서 불과 15 km 떨어진 이 지역에서 피라미드를 바라보면서 전투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피라미드 전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음. 이 전투에서 화려한 의상으로 몸을 감싸고, 목도리를 껴입고 엄청난 속도로 말을 몰고 다가오는 중세를 방불케 하는 맘루크 기사에게 총검을 장착한 보병을 중심으로 방진 대형을 이룬 현대적인 프랑스군이 압승을 거두었음. 맘루크의 돌격은 프랑스군의 일제 사격 앞에 총검으로 다져진 방진 전열을 뚫지못하여 완패했고 프랑스군은 참호를 순식간에 돌파하여 이집트군을 섬멸했음. 전투가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적의 옷이 아군의 총 발화 장치에 걸려서 적의 옷에 불이 붙었다. 우리가 짠 방진 주위에는 적의 시체가 겹겹이 불탔다라고 종군 병사가 말했음. 1500기의 맘루크를 괴멸시켰던 격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불과 수십 명에 불과했음.

피라미드 전투에서 승리한 프랑스군이 남진하자 다음 날 카이로 시내는 프랑스 군대에 항복. 725, 나폴레옹은 카이로에 입성했고, 도착에서 불과 3주만에 이집트 정복을 거의 끝냈음. 그러나 이집트를 빼앗긴 모양새가 된 오스만 제국은 당연히 프랑스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고, 2차 대프랑스 동맹에 가입하여, 카이로를 정복한 지 불과 1주일 후인 81일에 호레이쇼 넬슨이 이끄는 지중해 함대가 아부 용골을 지키고 있던 프랑스 함대를 섬멸(나일 해전)하여, 프랑스군의 보급과 퇴로를 끊었음. 또한 상부 이집트(이집트 남부)에서는 카이로에서 도망친 맘루크가 다시 세력을 모아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음. 프랑스군과 카이로 시민들 등 이집트인들과의 관계도 해방자와 피해방자의 관계가 될 수 없었으며 카이로에 입성한 지 불과 3개월 뒤인 1021일에는 카이로에서 폭동이 일어나 프랑스 병사 300명이 군중에 의해 살해되었고, 이집트 사람도 2,500명 이상이 죽었음.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즈하 모스크 등 종교 시설을 공격한 것도 이집트인의 반감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음.

루이 프랑수아 르죈 남작 의 피라미드 전투 1798721

프랑스군은 상부 이집트를 평정하기 위해 별동대를 파견하는 한편, 오스만 군을 격퇴하기 위해 시리아 지역으로 북진하여, 다음 해 1799년에 팔레스타인에 들어가 욥바를 점령(욥바 공방전) 했지만, 아카(아코)의 공략에 실패하여 철수(아코 공방전). 이 때 욥바의 프랑스군 내에서 전염병이 돌자 나폴레옹은 많은 전염병 환자를 방치하여 죽였다는 비난을 현대 역사가들에게 받게됨. 일설에는 아편을 주어 안락사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음. 나폴레옹 자신도 나중에 그 책임을 물을 것을 생각을 하고, 당시는 만질 수조차 꺼려하는 전염병 환자에게 직접 병문안 그림을 그리게 함. 그것이 유명한 자파의 페스트 환자를 병문안한 나폴레옹.

그 무렵 프랑스 본국에서도 영국,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대한 공격을 재개. 나폴레옹은 계속적인 오리엔트 공략을 포기하고 프랑스로 돌아갈 것을 결의. 아부키르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격퇴한 뒤 822, 나폴레옹은 몇 명의 측근과 함께 몰래 이집트를 탈출했고, 이후 많은 병사들이 보급이 끊겨 현지인의 저항과 전염병 속에 방치되었음. 나폴레옹이 탈출한 후 드제가 이끄는 이집트 별동대는 맘루크 수장 무라드 베이에게 항복을 받는데는 성공했지만, 지휘관이 없는 프랑스군은 이미 영국과 오스만 제국의 공세에 힘겹게 저항을 계속하는 것이 고작이었음. 18012년간에 걸친 전투 끝에 생존한 15,000명의 프랑스군은 영국과 오스만 제국에게 항복을 한 뒤 프랑스로 귀국했음.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에서 167명의 과학자와 건축 기술자로 구성된 학술조사단을 동행시켰음. 그들은 이집트의 지형과 산물을 조사하는 외에도, 고대 유적의 조사를 담당했음. 조사단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로제타 스톤의 발견. 또한 드제와 동행하여 상부 이집트로 향한 무리는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과 왕들의 계곡을 세계 최초로 학술적으로 기록했음.

대영박물관 내 로제타 스톤

이집트 원정 정리

나폴레옹은 인도에 식민지를 가진 영국을 견제하고자 이집트 원정을 원했고, 혁명정부도 나폴레옹의 인기가 높아지자 견제하려는 속셈으로 이를 수락. 사실 나폴레옹은 17978월부터 영국을 항복시키려면 이집트를 점령해야 한다고 정부에 건의했으나, 17983월 중순부터 본격적인 이집트 원정을 준비했고, 414일 정부의 승인을 받았음. 이집트 원정은 1798519일에 시작다. 350척의 함선과 54,000명의 장병을 싣고 투롱 항을 떠난 것이 519, 나폴레옹은 이 원정의 목적이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아일랜드를 점령하는 데 있다는 허위 정보를 퍼뜨려, 영국의 넬슨 제독 함대로 하여금 지브롤터 해협을 지키게 했음.

그 사이에 나폴레옹은 몰타 섬을 점령한 후 이집트로 향했고, 631일에는 알렉산드리아 항에 상륙하기 시작하여 카이로로 출발. 72일에는 당시 이집트를 장악하고 있던 맘루크 군대와 큰 접전을 벌였는데, 이 접전에서 나폴레옹은 휘하 장병들에게 이 피라미드 위에서 4,000년의 역사가 귀관들을 내려보고 있다고 격려. 다소 엉뚱해 보이는 나폴레옹의 연설 같지만, 프랑스 원정군의 사기를 높이기에는 충분했고, 쉽사리 맘루크의 군대를 격파하며 이튿날 카이로까지 승승장구하며 입성.

그러나 와중에, 프랑스 해군이 호레이쇼 넬슨의 영국 해군에게 박살나 퇴로가 끊기고 맘. 설상가상으로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 재탈환을 위해 선전포고를 하게 되어, 요격을 겸해 내친김에 시리아 원정까지 감행했으나 아크레 공방전에서 제자르 파샤의 수비에 막혀 결실없이 물러났고, 프랑스 본국이 다시 오스트리아의 위협을 받게 되자 이집트를 탈출해 귀국하였음.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오스만 제국은 물론이고 흑해에서 지중해로 남하하려는 러시아 제국에도 크게 자극을 주었으며, 이는 영국, 러시아, 오스만 투르크 세 나라의 반불 동맹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됐음. 러시아는 남부 이탈리아와 나폴리 왕국과 동맹을 맺고,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음. 이리하여 1799년 봄부터 프랑스는 이집트 원정의 역효과로 제2차 반불 동맹국가들과 전면적인 교전 상태에 들어가게 된 셈.

리들리 스콧 감독 영화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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