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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세계사 , 기타 전쟁사, 문화사, ) 사건, 전투 , 등

프랑스혁명2

by 자한형 2024.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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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3) 혁명 전야의 조짐과 여러 상황 (~1787) /누들스

이 따위 장난질이 제발 끝나길 희망하며

(À faut espérer q'eu jeu la finira bientôt)

미셸 에냉(Michel Hennin), 1769, 에칭앙시앵 레짐의 3신분제를 표현한 유명한 회화로, 농민이 성직자와 귀족을 업느라 새가 곡물을 쪼아먹고 토끼가 양배추를 먹는 것을 쫓아내지 못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당시 귀족들은 토끼장과 비둘기장을 소유할 권리를 가졌기 때문에, 곡물을 쪼아먹는 비둘기와 양배추를 먹는 토끼는 농민에 대한 수탈을 상징한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혁명 이후 풍자 그림도 그렸는데 상황이 반대로 되어 있고 문구도 'Vive le roi, Vive la Nation(왕 만세, 국가 만세)'로 바뀌었다. 깨알같이 죽어있는 토끼와 새는 덤.

프랑스 혁명은 178955일부터 1799119일까지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 혁명. 18307월 혁명과 18482월 혁명도 함께 일컫는 말이지만, 대개는 1789년의 혁명만을 가리킴. 이때 1789년의 혁명을 다른 두 혁명과 비교하여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함. 프랑스 혁명 기념일은 매년 714일로 국경일이자 공휴일. 프랑스 혁명의 발단이 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이 발생한 1789714일을 기리기 위해서 이듬해 1790714일에 진행된 혁명기념 축제가 그 기원.

프랑스 사회는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앙시앵 레짐(구체제) 하에서 18세기에 모든 선진국에서 나타난 일반적 특징처럼 자본가 계급이 부상하고 있었음. 또한 미국 독립혁명의 영향으로 자유의식이 고취되어 있었음. 이런 가운데 발생한 심각한 경제불황은 인구의 절대다수(98%)를 차지하던 평민들의 불만을 가중시켰으며 마침내 흉작이 발생한 1789년에 봉기하게 되었음.

시민과 농민의 개입으로 민중혁명의 단계로 변화된 이 혁명은 3년간에 걸쳐 모든 체제를 전복시켰음. 혁명 소식을 접한 피지배 민족들이 자유와 독립 쟁취 의식에 고취되자 여러 민족을 거느린 유럽의 군주들은 불안감을 느꼈음.

프랑스 혁명이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무너뜨린 후 80년간 공화정, 제정, 군주정으로 국가 체제가 바뀌며 불안한 정치 상황이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뒤이어 이어진 나폴레옹 전쟁과 함께 결국 유럽에 민족주의, 자유주의를 널리 퍼뜨리는 역할을 하였음.

또한 크게 보면 유럽과 세계사에서, 정치 권력이 왕족과 귀족에서 자본가 계급으로 옮겨지는, 역사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시기를 열어 놓을 만큼 뚜렷이 구분되는 전환점이 되는 사건임. 자본주의의 발전기에 있어서 시민 계급이 절대왕정에 저항하여 봉건적 특권 계급과 투쟁해서 승리를 쟁취했으며 새로운 정부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낸 최초의 사회 혁명이라 할 수 있음.

18세기 프랑스의 위기

프랑스는 18세기에 들어와서 혁명 전야까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 ~ 1714), 미국 독립 전쟁(1775 ~ 1783)을 비롯한 여섯 차례의 큰 전쟁에 참여했음. 참전의 결과는 프랑스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재정만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 루이 14(재위 1643~1715)의 말년에 국가 재정은 위기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 후 더욱 심각해지고 만성화. 또한 루이 14세의 낭트 칙령의 폐지(1685)와 위그노 추방은 프랑스 산업 발전에 심각한 악재로 작용했음.

짐이 곧 국가다

l’Etat c’est moi

루이 14

(재위 1643~ 1715)

100년 전 낭트 칙령 폐지의 영향

프랑스의 앙리 4세가 1598년 국내의 프로테스탄트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칙령. 본래 프로테스탄트였던 앙리 4세는 국내의 종교적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함과 동시에 프로테스탄트에게 신앙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였음. 이 칙령으로 위그노 전쟁은 일단 정치적으로 해결되었으나, 종교적 대립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음. 특히 루이 14세는 절대주의를 강화하기 위하여 종교적 통일을 목적으로 1685년 이 칙령을 폐지함으로써 약 40만의 프로테스탄트가 프로이센, 영국, 폴란드 등으로 망명하였음.

부르주아의 발전과 노동자 계급의 투쟁

프랑스에서 부르주아의 발전은 영국에 비해서 지지부진했으나, 18세기 후반에는 중농주의자의 주장으로 대표되는 곡물 거래의 자유, 인클로저의 자유를 요구하는 세력이 대두되고 있었음. 공업 부문에 있어서도 면직물 공업이 18세기 초부터 부상하기 시작해서 재래의 모직물 · 린네르 공업과 경합하게 되었음. 18세기 후반, 길드의 규제는 여전히 강했으나, 자본주의식 공장제 수공업(manufacture)이 각지에서 증가하고 있었음.

1774년 중농주의자인 재무총감 튀르고는 부르주아의 발전을 저지하던 영주와 국가의 통제를 없애버리려 했음. 1776년에는 여섯 가지 칙령이 공포되었는데, 이것은 농민을 노예 수준의 부담에서 해방시키고, 공업에 있어서의 길드제를 폐지하며, 농업과 노동에 대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음. 이것은 부르주아적 이해와 대립하는 봉건적 귀족과 그들에 기생하던 특권 상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불가피한 과제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음.

이러한 부르주아적 발전에 대응하여 노동자의 자본에 대한 투쟁이 조직적으로 일어났음. 견직물 공업의 중심지였던 리옹에서는 직조공들의 파업이 18세기 후반에 연이어 일어나기에 이르렀음.

중대한 실책, 미국 독립전쟁 지원

이런 불황기에 프랑스 정부는 최소한 두 가지 중대한 정책적 과오를 저질렀음. 하나는 1778년 미국 독립 전쟁의 참전이고 또 하나는 1786년 영-불 통상조약의 체결. 미국 독립 전쟁을 돕기 위해 프랑스가 쓴 돈은 무려 20억 리브르였음. 이 돈은 프랑스가 만성적인 재정 적자를 일으키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음.

물론 프랑스가 7년 전쟁(1756~1763)으로 영국에게 아메리카 식민지를 빼앗겼고 이에 대해 열등감을 가진 것은 맞으나 그와 별개로 최대의 라이벌을 약화시키는 것은 충분히 국익에 부합했으며, 미국에 대한 지원 또한 의도한 범위 내에서만 진행하였음.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프랑스의 생각과 달리 미국 내의 독립 지지가 강고하지 않은 것이 밝혀지며 점점 프랑스의 지원에 의존하게 되었고, 결국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금액을 쓰고 말았음. 이는 영국의 약화로 얻을 이득을 상쇄할 수 없을 정도로 국가 재정에 막대한 부담으로 돌아왔음.

귀족 계급의 나태

한편 귀족 계급은 성직자와 함께 봉건적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18세기에는 여러 그룹으로 갈라져 있었다. 군대에 복무하는 군인 귀족과 법무에 종사하는 법조 귀족이 대표적인 귀족이었지만, 약간의 귀족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대귀족은 궁정 (宮廷)에 빌붙어 영지 경영에 관심을 갖지 않고 나태한 생활을 보냈으며,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고 있었음.

이와 같이 18세기 후반에는 절대왕권 제도와 절대왕권제의 지지자였던 귀족들 거의 대부분도 재정적 곤란에 처해 있었음. 그들은 농민을 더욱 착취하여, 농촌을 거의 황폐화시켰음.

계몽사상의 대두

프랑스에서 부르주아가 발전하려면 사회적 대변혁이 불가피했었음. 계몽 사상가는 이와 같은 결함된 사회 제도를 맹비난하면서 합리적인 사회제도의 출현을 선동했음.

당시 프랑스는 계몽사상가인 장자크 루소와 백과전서파인 볼테르 등 사회계약설이 많은 지식인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것을 국민이 공감하여, 당시의 사회 제도(구체제=앙시앙 레짐)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음. 부르봉 왕가 정부, 특히 국왕 루이 16세는 이를 완화하기 위해 점진적인 개혁을 목표로 했지만, 특권 계급과 국민과의 괴리를 채울 수 없었음.

혁명의 이념적 기초는 장 자크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드니 디드로 를 포함한 계몽주의자들과 백과전서파로부터 시작되었음. 특히 프랑스 혁명의 뿌리를 만든 사람은 루소로서, 루소의 사회계약설과 인민주권론은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던 프랑스의 전제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음.

이 가운데 사회계약설은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처음으로 주장한 이론으로,

"왕이란 존재는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직업이 아니며, 한 사회와 국가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번영하기 위해 백성님들께서 계약하듯이 옹립해 준 자리다."라는 왕권민수설을 주장했음. 이는 왕권신수설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론이었음.

앙시앙 레짐과 불평등한 사회 체제

프랑스 혁명은 이런 구체제(앙시앵 레짐)의 모순에서 발생하였음. 구체제 하에서는 인구의 2% 정도밖에 안 되는 제1계급인 성직자와 제2계급인 귀족은 전체 토지의 40%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면세 등의 혜택을 누리는 등 주요 권력과 부와 명예를 독점하였음. 인구의 약 98%를 차지하던 제3계급(평민)은 무거운 세금을 부담해야 했음. 3계급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삼부회가 있었지만 175년간 소집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정치에서 배제되었음.

국가 재정의 파탄

루이 16(재위 177492)의 정부는 영국의 아메리카 대륙 진출을 견제하려고 미국 독립 혁명(1775~83)을 지원하였으나 과도한 군사비 집행으로 인해 재정 궁핍에 빠지게 됨. 또한 프랑스 왕실 재정 역시 선대의 향락으로 인해 국고가 바닥났음. 17872, 재정총감 칼론은 명사회를 소집하고, 특권 신분에게도 과세하는 임시지조를 제안함. 그러나 귀족·성직자들은 파리 고등법원과 결탁해 재정안에 저항하였고 그로 인해 파산 직전에 이른 재정을 메우기 위해 제3신분에게 부과되는 세금은 점점 과중해졌음.

루이 16세에 이르러 재정은 파탄나고 흉년이 거듭됐으며, 1785년 목걸이 사건이 일어나며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의회에 미움을 사게 되고 왕실에 대한 불만은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극에 달하게 됨. 목걸이 사건은 사기꾼 라 모트 부인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이름을 도용하여 돈과 목걸이를 손에 넣은 사기극으로, 재판을 통해 왕비의 결백이 증명되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고 왕비의 사치가 재정 위기를 초래했다는 오해를 퍼뜨리게 하였음. 결국 이 사건으로 왕비는 대중에게 미운털이 박혔고 프랑스 혁명기인 17931016일 참수형에 처해지는 간접적 원인이 됨.

민중의 개혁 의지

3계급 중에서도 의사, 변호사, 사업가 등 전문지식을 통해서 부를 축적한 전문직 일명 부르주아지 계층은 혈연과 교회의 권위로써 부와 권력을 향유하는 1, 2 신분을 제치고 사회의 주도층이 되길 원하고 있었음. 이들은 계몽주의 사상을 강력하게 신봉하였음. 프랑스 혁명 당시 노동자, 빈농, 인민 등의 프롤레타리아 계급들도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혁명에 참여했음. 이들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장 자크 루소의 직접민주주의 이념의 영향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여야 한다."는 열망에서 특권층에 의한 불평등한 사회 체제에 항거하려는 이념으로 혁명에 가담하였음.

귀족회의인 명사회 개최

1787년이 되자 상황이 절망적인 수준으로 악화되었음. 빵의 품귀와 물가 폭등으로 민중의 불안이 증가했고 폭동과 시위가 잇달았음. 1787222, 루이 16세는 144명의 귀족과 성직자로 구성된 명사회를 소집해 대책을 논의했음. 재무부 장관 칼론은 160년 만에 소집된 명사회에서 국가 재정을 살리기 위해 인지세와 토지세 인상 등 세제 개혁을 제안했음. 또한 많은 토지를 소유한 귀족이나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와 같은 특권 계급에 대한 과세도 논의 주제로 삼았음.

면세 혜택을 받는 특권층이었던 명사회의 대다수는 이를 반대했음. 세제 개편안 때문에 칼론은 정적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는데 공금 유용 등 비리가 폭로되자 178748일에 루이 16세는 그를 해임하였음. 칼론의 후임으로는 툴루즈 대주교인 브리엔을 임명하였음. 새로운 채권 발행, 곡물 거래 자유화 등만 승인하고 명사회는 5월에 해산되었음.

1506년 루앙에서 열린 명사회 모습

직전 30년 연대기 : 1756 ~ 1787

1756~1763: 7년 전쟁

1770: 재정 적자 1,000만 리브르에 달함

1771: 모포의 고등법원 개혁 운동

1774: 루이 16세 즉위, 모포 해임

1776: 재무대신 튀르고 해임

1778 ~ 1783: 미국 독립전쟁 지원

1781: 재무대신 네케르 해임

1785: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다이아몬드 목걸리 사기 사건

1786: 영국-프랑스 무역협정

820: 재무대신 칼롱, 왕실 재정 파산 선언

1229: 귀족 과세 위해 귀족회의(명사회) 소집

1787: 특권 계급의 반란

222: 명사회. 칼롱의 제안 거부

48: 칼롱 해임, 브리엔 선임

5: 브리엔, 명사회 해산시킴

7: 고등법원, 삼부회 소집 요구

87: 고등법원, 귀족 과세 거부

프랑스 혁명 (4) 전야 1788& 혁명 첫해 1789년 사건들

가뭄과 흉년

프랑스 혁명 직전에 닥친 것이 가뭄과 흉년. 1785년에는 극심한 가뭄이, 2년 뒤인 1787년에는 큰 홍수가 닥쳤고 다시 1788년에는 가뭄과 우박, 벼락이, 그리고 1788~1789년 사이 겨울에는 기록적인 추위가 프랑스를 강타했음. 1730년경 이후 지속되던 호경기가 1775년부터 갑자기 불황으로 빠져들었는데, 1773년부터 농작물의 흉작이 빈번해졌고, 1775년부터는 식량 부족이 만성화하였음.

더구나 1785년의 대가뭄과 1788~1789년 겨울의 한해는 식량 위기를 더 악화시켰음. 그리고 곡가 앙등은 불황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음. 1776~1789년 사이의 평균 물가 상승률은 65%였음. 밀과 호밀의 가격이 각각 66%71% 올랐고, 대혁명이 일어나는 1789년 여름 6월과 7월에는 각각 150%165% 상승했음.

과세 불균형 심화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이런 구체제의 모순으로 프랑스는 각 계층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음. 이전 시대에만 해도 귀족이 될 수 있었던 시민 계급은 정치 권력에서 소외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으며, 농민은 점점 늘어가기만 하는 세금으로 고통받고 있었음. 18세기 프랑스의 세금은 200% 이상 늘었지만, 노동자 임금은 100% 정도 밖에 늘어나지 않았음.

이에 루이 16세의 재정총감 드칼론은 17872, 명사회를 열어 귀족과 성직자를 포함한 특권 계층에게 임시로 과세하는 것을 재정 위기의 타개책으로 제시했음. 그러나 특권 계층은 이것에 크게 반발하며 과세를 강력히 거부했고 고등법원의 권한을 이용해 어떻게든 특권 계층의 임시 과세안을 막으려 했음. 이때 귀족은 삼부회에 비견될 회의를 별도로 열려고 국왕에게 압력을 넣기에 이르렀고, 이에 대한 반발로 열린 것이 뒤에 언급되는 삼부회였음.

삼부회의 구성과 명사회의 소집 등도 특권 세력과 왕실의 대립 과정에서 결정되었음. 이 때문에 프랑스 혁명의 트리거는 구 특권 세력이 제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프랑스 혁명의 1단계 혹은 0단계는 구 귀족들의 왕에 대한 반발이라고 보기도 함.

혁명의 시발, 삼부회 개최

명사회는 제1, 2 분인 귀족과 성직자로만 구성되었기에 면세 특권층인 이들에게 징세를 위한 세제 개혁안을 승인 받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음. 도처에서 삼부회 개최에 대한 요구가 빈번했고 178888, 재무부 장관 브리엔은 국왕으로부터 삼부회 소집을 허락받았음.

816, 국고가 바닥나서 국가 지불 정지가 선언되었음. 825, 약탈과 폭동이 빈발하는 가운데 루이 16세는 브리엔을 해임하고 네케르를 다시 불러들였음. 결국 드 칼론과 그 후임자인 브리엔이 특권 계층과의 파워 게임에서 밀리며 실각하고 후임 재정총감으로 복귀한 자크 네케르는 1614년 이래로 열리지 않았던 삼부회의를 개최를 제안했음.

네케르는 공채발행을 통해 급한 위기를 수습하였고 1788년에 명사회를 다시 소집했으나 별 소득이 없자 1212일 해산하였음. 1789년 초가 되자 삼부회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가 진행됨. 선거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정치적 인쇄물이 늘어나고 정치토론이 활성화되었으며 여러 정치담론이 형성되었음. 삼부회에 참석할 대표 선출은 신분별로 일정한 자격과 기준으로 선정된 대의원(선거위원)들이 신분별 회의를 통해 지명,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음.

또한 신분별 참석 인원수는 1614년의 선례에 따라 각 신분별 동일한 인원수로 구성할 예정이었음. 그러나 제3신분(평민)은 지방 의회에서처럼 평민대표의 인원은 2배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고, 결국 루이 16세는 이 요구를 허락하였음. 루이 16세는 귀족들과 성직자들을 견제할 생각으로 원래는 한 신분당 같은 의석수였던 삼부회에서 제3신분인 부르주아 의원의 수를 두 배로 늘린 것임.

178955, 루이 16세는 175년 만에 삼부회를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열었음. 성직자 290, 귀족 270, 평민 585명의 대표가 참석. 그러나 삼부회는 초반부터 머릿수 표결과 신분별 표결을 놓고 의견이 충돌하며 난항이 거듭되었음. 신분별 표결 방식은 각 신분별 의결후 1표만 행사할 수 있었는데, 특권층인 귀족과 성직자가 기득권 수호를 위해 협력하므로 대부분 21이 되어 제3신분인 평민이 불리했음. 귀족, 성직자 대표는 신분별 표결 방식을, 평민 대표는 머릿수 표결 방식을 지지함으로써 자신들이 속한 계급에 유리한 표결 방식의 채택을 주장했음.

또한 다수를 차지하는 평민 계급은 면세 등 각종 특권 폐지와 부동산에 대한 중세적 권리 폐지 등의 개혁을 위해 합동 회의를 통한 토론을 요구했음. 기득권 유지를 원했던 귀족과 성직자들은 역시 신분별 회의 진행을 주장함. 결국 삼부회는 해결점을 못 찾고 첨예한 대립만 오고 가며 파행이 이어졌음.

오귀스트 카우더 (1839) '178955일 삼부회(Opening session of the General Assembly, 5 May 1789)

테니스 코트 서약

평민 대표들은 머리수 표결 방식이 채택되지 않자, 자신들이 국민의 98%를 대표한다는 주장과 함께 617일에 별도로 '국민의회'를 결성함. 아울러 어떠한 세금도 자신들의 동의 없이 징수할 수 없다고 선언함. 평민대표들의 도발에 분노한 루이 16세는 측근들과 귀족 대표들의 의견에 따라 '국민의회'의 해산을 명한 후 회의장을 폐쇄해 버림.

회의장이 폐쇄되자 1789620일 국민의회측(평민대표들)은 테니스 코트로 이동하여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는 국민의회를 해산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이에 대해 서약문을 작성함. 국민의회에는 진보적 사고를 갖고 있던 로마 가톨릭 사제와 자유주의 귀족 47명도 합류함. 79일에는 제헌 국민의회라 칭하여, 인민의 최고 입법 기관으로서 프랑스 헌법 제정에 착수하였음.

테니스코트의 서약(Le Serment du Jeu de paume) : 자코뱅 당원으로 프랑스 혁명에 관여하였던 자크 루이 다비의 작품. 중앙 탁자 위에서 오른손을 들고 서약하고 있는 이는 본래 천문학자로 국민 의회 의장으로 선출된 바이이(J. S. Bailly)이고, 양손을 가슴에 대고 감격의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이가 로베스피에르. 프랑스 파리 카르나발레 박물관 (musée Carnavalet) 에 전시되어 있음.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Maximilien de Robespierre)

178931세의 나이로 시민층의 지지를 받아 아르투아주 제3신분 대표로 삼부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면서 로베스피에르는 정치에 입문. 혁명 초기의 로베스피에르는 주목받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이 시기부터 가장 단호한 제3신분 대의원의 한 사람이었음.

테니스 코트의 서약에 45번째로 맹세했고 79일 국왕에게 파리 주변의 외국 군대 철수를 요구할 24인의 대표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으며, 717일 루이 16세의 파리 방문을 수행했음. 하지만 혁명이 진행되면서 의회에서 파벌의 분화가 이뤄지기 시작하자,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의 거두로 성장하기 시작했음.

1794728일 로베스피에르 처형 장면. 자코뱅 지도자였던 로베스피에르는 루이 16세 처형을 주도하며 권력의 실세가 되지만 공포정을 실시하는 사람도 공포를 느끼는 상황에서 공포정의 출구를 찾으려다 단두대에 서고 만다. 여문책 제공

바스티유 감옥 습격

왕당파가 제헌국민의회의 무력 탄압을 기도하여, 지방으로부터 군대를 결집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789712일부터 군대와의 사이에 충돌을 반복하였음. 714일 아침, 파리 민중들은 혁명에 필요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음. 민중들은 도개교(跳開橋)를 내리고 감옥으로 쇄도하여, 감옥을 점령하였음.

이 습격의 성공은 바야흐로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음. 이들이 프랑스 대혁명에 가담한 이유는 기득권층에 대한 감정적인 불만이나 부르주아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자"면서 평등사회를 추구한 장 자크 루소의 영향으로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사회 개혁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

파리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트가 세워지고 자치위원회가 주도하여 바이이를 새로운 시장으로 선출하였으며 민병대(국민군) 사령관으로 라파예트를 임명하였음. 루이 16세는 군대를 철수시킨 후 718일에는 파리를 방문하는 등 사태를 진정시키려 노력하였음. 한편 혁명의 여파는 지방으로 확산되어 격렬한 동요가 있었음.

지방 중소도시에서는 자치위원회와 국민방위대를 조직하고 정치범 수용소, 요새, 성들을 장악하였음. 국왕이 임명한 지사나 군사령관들은 국민방위대에 저항하지 않았고 그들의 활동에 대해 방임으로 일관했음. 이로써 국왕의 권위는 지방에서도 이미 존재하지 않았음. 또한 도시들은 상호 연맹을 맺고 협력하였음.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Prise de la Bastille) 장피에르 위엘(Jean-Pierre Houel) , 프랑스 국립도서관, 1789

농민 반란과 무산 계급

농민들도 혁명에 휩쓸려 봉기하였는데 이들은 총뿐만 아니라 낫, 쇠스랑 등 농기구를 들고 매우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방법들을 행동으로 옮겼음. 성들을 약탈하고 자신들을 얽매었던 문서를 불살랐으며 영주와 지주들을 공격하였음. 이런 폭력적인 현상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며 대공포라는 표현이 사용될 정도로 심각성을 띄었음.

삼부회나 국민의회(제헌의회)의 활동 중에 농민과 도시 노동자(프롤레타리아)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발언권은 없었음. 지방도시의 봉기에서 자치위원회나 국민방위대 조직시에도 무산계급(소작농과 노동자)은 배제되었음. 혁명과 제3신분의 대표 선출은 대부분이 부르주아 출신이 주도하며 무산계급의 발언권은 묵살되었음. 권리요구의 완충지대가 없이 억눌렸던 욕구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것.

봉건제 폐지와 인권선언

제헌의회(국민의회)는 예기치 못한 사태에 당황하며 민중과 농민의 급진적인 행동으로 인한 무질서를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84일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였음. 봉건지대 유상 폐지라는 시대적 한계는 있었으나 영주제와 농노제 폐지, 개인적 예속의 폐지, 소득에 비례한 세금 납부 등이 기본 내용이었음.

제헌의회(국민의회)의 개혁은 지속되었으며 826일에는 인권선언을 발표하였음. 주권 재민, 사상의 자유, 법 앞의 평등, 재산, 투표, 과세의 평등, 소유권의 신성 등 새로운 사회질서의 원칙을 제시하여 혁명의 정의와 이념을 세웠음. 인권선언은 자연권 사상과 계몽 사상을 표현한 것으로 미국의 독립 혁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

인간과 시민에 관한 권리 선언 원본(1789, 1791) / Original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of the Citizen

장 폴 마라(Jean-Paul Marat), 인민의 벗 창간

마라는 프랑스 혁명 시기 조르주 당통,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자코뱅의 중심에서 활약한 혁명가 3인 중 1. 개인적으로 부르봉 왕조에 격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매우 저돌적인 성격이었음. 당대에는 왕당파에게는 잔인하지만 국민들에게는 따뜻하고 관대한 모습으로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오늘날에서도 잔혹한 사형집행자와 혁명의 투사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음.

1789912인민의 벗(L'Ami du Peuple)’이라는 신문을 발행하며 정치 일선에 뛰어들었음. 이 신문은 온통 선동적인 문구로 도배가 되어있으며, 혁명회의에서 "인민의 적에게 줄 것은 죽음밖에 없다"는 말을 하면서 귀족과 왕당파를 몽땅 없애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음. 그 덕분에 프랑스 전 국토에는 한바탕 피바람이 불어오게 됨.

이 무자비한 숙청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 중 한 명인 샤를로트 코르데에 의해 마라는 17937월 지병인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목욕을 하던 중 목욕탕에서 암살당하고 말았음.

 

장 자크 다비드 작품 '마라의 죽음'과 폴 자크 에메 보드리(Paul Jacuus Aime Baudry) 작품 '마라를 죽인 후의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 after the Assassination of Marat)', 1861 낭트 미술관

조르주 당통

1780년에 파리로 나와 법을 배워 변호사가 되었고, 결혼 후엔 1787년 왕실 고문회의의 변호사가 됨. 1789,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이에 공감하고 참여하여, 자코뱅 클럽에 가입. 독특한 존재감을 발휘하여 9월 코르들리에 지구 의장에 뽑혔음.

17904월 코르들리에 클럽을 창설 후 샹 드 마르스의 소동에 휘말려 잠시 영국으로 망명. 1791년 말 귀국 후 파리 코뮌의 제2 조역에 선정됨. 1792, 민중을 선동하여 왕궁을 습격한 후(810일 사건), 급진파 중 유일하게 지롱드 파 내각 사법 장관으로 기용됨.

베르사유 여인들 행진

루이 16세는 봉건제 폐지와 인권선언의 재가를 거부하며 군대를 베르사유로 이동시킴. 파리에는 '인민의 벗'을 비롯한 많은 새로운 신문이 창간되었고, 국민의회(제헌의회)는 헌법제정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음. 바스티유 습격 사건과 봉건제 폐지 등으로 놀란 귀족들은 망명길에 오르기 시작했고, 귀족들로 인해 번성했던 직업에 종사했던 이들이 일거리가 사라지며 실업자가 증가하였음.

전년도의 기상이상으로 인한 대흉작은 밀 수확량을 급감하게 만들었고 파리의 빵값이 치솟으며 서민들의 궁핍한 생활이 이어지자 불만과 원망이 폭발 일보직전에 놓이게 됨. 이런 파리 시민들의 사정과는 달리 베르사유에서는 플랑드르 군대를 위한 호화로운 연회가 101일 벌어졌는데 이때 군인들에 의해 혁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삼색기가 훼손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음.

이 소식을 접한 파리 시민들은 다시 흥분. 특히 이번에는 빵값 폭등으로 화가 난 여인들이 전면에 나섬. 7천여 명의 여인들이 파리 시청으로 모여들어 "빵을 달라"고 외치며 105일 베르사유 궁전을 향해 행진을 하였음. 20km가 넘는 이 행진에 국민방위대도 동참하였음. 갑작스럽게 베르사유 궁전 앞에 몰려든 군중을 보고 당황한 루이 16세는 인권선언을 재가하며 이들을 달램.

그날 밤 이슬을 맞으며 노숙한 여인들은 다음날 궁전에 난입하여 국왕의 파리 귀환을 요구했고 국왕 일가는 군중들과 함께 파리로 이동하였음. 이후 국왕 일가는 파리 시민들의 감시 속에 튀틀리 궁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국민의회도 파리로 이동하였음.

이 시기의 혁명은 온건한 미라보, 라파예트 등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온건파 혁명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음. 시민군은 자유주의 귀족 라파예트를 총사령관에 임명하였고, 1790년에는 그의 제안에 따라 삼색기(현재 프랑스 국기)가 혁명의 깃발이 되었음.

여성들의 베르사유 행진을 묘사한 그림. 역사가 미슐레는 남자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탈취했다면 여성들은 왕을 사로잡았다고 기록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망언?

빵을 달라고 여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요!"라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무심하게 했다는 말. 그러나 악의적으로 퍼트려진 거짓말임. 왕비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음. 세상물정 모르는 왕비의 무지와 함께 왕실의 부패와 비리를 과장스럽게 부풀려서 혁명의 당위성을 주장하고자 한 당대의 혁명 세력들 혹은 후대 사가들에 의해 조장된 근거 없는 낭설.

이 말의 출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 우선 루소가 쓴 고백록에 젊은 공주가 이런 말을 했다고 적혀 있는데 이것이 와전되었다는 것. 학계에서는 고백록이 완성된 시기를 1770년경 혹은 그 이전 시기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것을 근거로 할 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20년 전에 쓴 것으로 시기적으로 일치하지 않음.

서울대 주경철 교수는 그의 저서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에서, 이 에피소드는 역사상 가장 널리 회자되는 거짓말 중 하나이며, 이 말은 루이 14세의 왕비가 된 스페인 공주 마리 테레즈를 필두로 외국 출신 왕비를 비난하는 데 자주 이용되었던 고전적인 레퍼토리 중 하나라고 주장함. 비난을 퍼부을 희생양으로 외국인 출신의 순진한 왕비보다 더 좋은 인물은 없었다는 것.

1788~1789년 연대기

1788: 대흉작과식량 폭동

58: 고등법원, 사법 개혁안 거부

5-6: 파리, 디종, 툴루즈 등의 폭동

67: 그로노블민중이 국왕군에 투석

75: 브리엔, 삼부회 소집 결정

721: 도피네지방 삼부회, 3신분 부상

88: 8951일 삼부회 소집 공표

824: 브리엔사임, 네케르재선임됨

11: 명사회, 3신분 2배 증원안거부

125: 고등법원, 3신분 증원안승인

1227: 루이 16, 3신분 증원안승인

1789: 식량위기, 대공포 (그랑풀) 확산

1: 시에예스, ‘3신분이란 무엇인가발간. 베스트 셀러

426: 로베스피에르, 아르투아3신분 대표 선출됨

55: 베르사유에삼부회 집결. 표결 방식 놓고 대립

617: 3신분 대표들, 국민의회 자칭

620: 3신분 회의장 폐쇄, 테니스코트의 서약

623: 국민의회, 신분별회의 거부

624: 151명의 사제들이 국민의회 가담

625: 47명의 귀족들이 국민의회 가담

627: 루이 16, 남은 삼부회에 국민의회 합류 권고

77: 헌법기초위원회 구성

79: 국민의회, 제헌의회 자칭

711: 루이 16, 네케르해임.

712: 파리 시민, 성문 톨게이트에 방화

713: 파리 선거단, 시청사집회. 시민군결성 결의

714: 파리 시민, 앵발리드 무기 탈취, 바스티유 습격

715: 파리 선거단, 시장에 바이이와국민방위대 사령관에 라파예트선임

716: 루이 16, 네케르재선임

84: 제헌의회, 봉건제 폐지 선언

811: 봉건제 유상 폐지령공표됨

826: 제헌의회,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채택

912: 장 폴 마라, 인민의 벗 창간

10: 자코뱅클럽 창립. 루이 16, 인권선언 거부

105: 부녀자들과 국민 방위대의 베르사유 행진

106: 왕실, 파리의 튈르리궁전 귀환

1012: 제헌의회, 파리 이동

112: 교회 재산 몰수, 국유화 선포

1114: 아시냐 증권 발행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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