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와 30년대 명동/이민호
식민지 조선 청년의 욕망과 타락의 1번지 ‘진고개’
남산에 오를라치면 깎아지른 듯한 계단을 보고 숨이 막힙니다. 조선신궁이 있었던 자리라 그런가 무언지 모르게 섬뜩합니다. 일제가 왜 이곳에 조선신궁을 세웠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염상섭이 <사랑과 죄>에서 담아냈듯이 식민주의 문화정치의 꼼수가 엿보입니다. 조선신궁은 일제의 문화적 우월함을 강요하고, 식민주의의 학습을 꾀하는 상징적 공간이었습니다. 성역입니다. 다가가기에 쉽지 않고 다다르면 두려움 속에 가두는 귀신의 자리입니다. 192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근대적 감옥을 빠져나오는 길은 얼마나 모질고 두려웠을까. 남산을 내려와 남대문 불탄 기억 앞에 서서 잠시 회한에 잠깁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박인환의 시를 노래에 실어 흥얼거리는 기분은 애잔하지만 상쾌합니다. 남대문시장을 오른편에 끼고 걸으며 길 건너 한국은행이 드리우는 자본의 냄새를 흡입하고 신세계백화점에서 또 한 번 진하게 자본의 물웅덩이에서 텀벙대다 어느새 중앙우체국 앞에 서 있습니다. 부치지 못한 사연들을 떠올리며 통속적으로 그렇게 조금만 더 가면 청춘이 물결쳐 밀려가고 밀려오는 명동입니다.
비로소 1930년대 화려한 서울의 공간으로 들어갑니다. 명동과 충무로 일대는 식민지 조선의 가장 번화한 거리였습니다. 진고개라 부르기도 하고 본정(本町)이라 칭했으며, 일본말로는 혼마치라 했습니다. 진고개의 원래 지명인 이현(泥峴)은 남산의 산줄기가 뻗어 내려오면서 형성된 고개가 그리 높지 않았지만 흙이 끊어질 정도로 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신궁의 상징성만큼이나 기호적이지 않습니까. 저 높은 성역보다 진창이 좋습니다. 1930년대 조선 사람들도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식민지 청춘은 또 얼마나 피가 끓어 이 진창 속에서 뒹굴었을까요. 이곳이 과거에 이현이었건 진고개였건 아니면 혼마치가 되었건 그 이름은 삭제되고 오늘 명동과 충무로에 청춘의 입술처럼 뜨겁게 살아있습니다. 염상섭의 <삼대>는 이 진흙탕 속에서 연꽃으로 피어났습니다.
1930년대 명동 거리.
진고개, 식민지 최고의 환상 공간
<삼대>는 1931년 1월1일부터 같은 해 9월17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입니다. 서울의 만석꾼 집안 조의관, 조상훈, 조덕기 삼대가 일제강점기 때 몰락해가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평자들은 당시 청년들의 고민을 사실적인 수법으로 묘사했다고 높이 평가합니다. 구시대적 인물과 식민지 지식으로 태어난 새 인물, 그 사이에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배회하는 인물들을 통해 식민지인의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생생하게 그렸기 때문입니다. <삼대>는 또한 식민지 서울의 공간을 실제처럼 담아 핍진함을 더했습니다.
등장하는 공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홍파동(이필순 집), 북미창정(홍경애 집), 수하동(조의관·조덕기 집), 본정통(카페 빠커스), 화개동(조상훈 본집), 안국동(예배당), 남대문안(대한정미소), 당주동(홍경애가 조상훈의 첩으로 살던 집), 안동(매당집), 삼청동(조상훈 처가), 간동(김의경 집), 현저동(홍경애 외가), 태평동(수원집 본가), 효자동(산해진 가게), 삼청동 110번지(장훈의 아지트), 소격동(의전병원), 진고개(K호텔), 종로, 황토현 네거리, 석다리, 광화문, 남대문, 서대문, 독립문, 영추문, 추성문, 영성문, 새문밖, 총독부, 감영, 조선은행, 종로서, 창덕궁, 경성우편국, 경무국, 의전병원, 방재병원, 서대문 감옥, 남대문 장, 삼각산, 경성운동장, 장충단 솔밭, 진명학교, 매동학교 등입니다. 이런 역사적·지리적 공간을 통해 우리는 식민지인의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공간적으로 볼 때 <삼대>에서는 두 개의 이념이 충돌합니다. 수하동과 효자동이 그것을 담고 있습니다. 수하동은 오늘날 중구에 있는 동으로 북쪽으로 삼각동(三角洞), 남쪽으로 을지로2가, 동쪽으로 장교동(長橋洞), 서쪽으로 삼각동·남대문로1가와 접해 있습니다. 이곳에 조의관과 조덕기의 집이 있습니다. 효자동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광화문 부근을 말하는데 김병화와 홍경애가 반찬가게 ‘산해진’을 차렸던 곳입니다. 조씨 집안의 수하동 집이 봉건주의와 식민주의 이념의 결합체로 구시대의 권력과 자본을 대신한다면, 산해진은 급진적 사회주의 이념의 결집체로서 현실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세력을 표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공간의 대립과 갈등은 당시 북촌과 남촌의 구도와 유사합니다. 즉 종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민족자본과 일본인들이 중심이 되어 구축했던 식민자본의 충돌로 읽힙니다.
하지만 이 딱딱한 구도로 <삼대>를 읽는 것으로는 배춧잎에 퍼져 있는 주름 같은 명동(진고개) 샛길 맛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진고개는 일본 본토의 혼마치를 동경하며 꾸며낸 공간입니다. 오늘날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미쓰코시백화점이 있었고, 옛 미도파백화점 자리에 백화점 정자옥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몇 개의 대형 백화점들이 자리하였습니다. 당시 유명한 대중잡지 ‘별건곤’에 따르면 “진고개는 불야성을 이룬 별천지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그 환상의 공간으로 몰려갔습니다. 그러므로 진고개는 수하동 집 사람들이나 효자동 산해진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진흙탕과 같은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는 조씨 삼대를 몰락으로 이끈 식민자본의 첨단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사회주의 그룹에는 해체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명동은 오늘날에도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진고개였던 그때도 사람들은 그곳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상(李箱)이 미쓰코시백화점 옥상에서 다시 날아보겠다는 꿈을 가졌듯이 <삼대> 속 청년들은 암울한 현실을 떠나 진고개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의 파국처럼 결국 <삼대>의 청년들은 타락하거나 훼절하거나 자살을 감행합니다. 그렇다면 염상섭은 삼대의 몰락을 통해 마침내 1930년대 조선 사람들의 진흙탕 속 삶을 보여주려 했을까요.
횡보와 6월의 하늘을 보았다
명동(진고개) 거리를 걸으며 여기저기서 많은 기억과 만나게 됩니다. 언제나 기억은 지워 없애거나 저절로 사라지는 것으로 여겼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발터 벤야민이 19세기 유럽의 거리를 걸으며 느꼈던 것을 아케이드로 펼쳐진 명동 거리에서 체험하게 됩니다. 자본의 물결 속에 허우적대는 인간 욕망의 실체가 둥둥 떠다니며 쉴 새 없이 부딪쳐오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상품으로 넘쳐나는 쇼윈도를 바라보며 물결에 휩쓸리듯 지나가는 사람들 틈에서 물속 깊이 자맥질하는 남루한 차림의 빈곤과 만나게 됩니다.
염상섭은 <삼대>를 연재하기에 앞서 “한 집안에서 살건만 삼대의 호흡하는 공기는 다르다”고 말하였습니다. 언뜻 조씨 삼대가 겪은 삶의 갈등과 몰락을 암시하는 말로 비칩니다. 그러나 그 말뜻을 달리 읽고 싶습니다. 어쩌면 동일한 공간에 있다 하더라도 모두 절망을 호흡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래서 염상섭은 <삼대>를 마무리하며 ‘연민’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도덕적 타락과 이념적 갈등의 희생양인 필순을 덕기로 하여금 거두게 했습니다.
염상섭은 서울 거리가 분칠한 냄새로 가득하다고 질겁하곤 했습니다. 식민자본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여성들의 분냄새를 역겨워했습니다. 진고개의 공간은 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은밀히 소수자에게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보게 되는 순간 산책자 벤야민의 사유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벤야민은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경계를 넘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염상섭도 경계를 넘지 못한 점에서는 비슷해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경계인이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은 한쪽에 치우쳐 있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진실을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명동 거리를 거닐면 1987년 6월의 함성이 하늘 높이 가득합니다. 그 기억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경찰이 쏜 최루탄을 피해, 그들이 휘두르는 폭력에 쫓겨 명동 실핏줄 같은 샛길로 스며들었던 청춘을 잊을 수 없습니다. 염상섭이 그린 <삼대>의 젊은이들이 시간을 달리하여 그때 함께했다면, 혹은 우리가 1930년대로 돌아간다면 그들과 우리 모두 동일한 공간에서 같은 하늘을 우러르고 있을 것입니다. 명동이 진고개였든 혼마치였든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삶았던 사람들이 호흡하는 공기는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명동 입구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명동성당은 1930년대 진고개 초입에서도 바라다보였습니다. 남산 기슭에 일제가 세웠던 조선신궁이 귀신의 은둔지였다면 언제나 돌아오는 6월의 명동성당은 늘 사람들의 성역입니다. <삼대>의 인물들은 남산 밑에 갔다 다시 진고개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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