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취우’와 한국전쟁/정우영
시간의 주름에 각인된 ‘기억’을 직시하라
시간의 주름을 펴서 꺼내는 기억들
우리가 과거를 탐색하는 까닭은 그 과거의 시간 속에 현재와 미래를 내다보는 삶의 지혜가 스며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라는 주름 안에 갈무리된 삶의 지혜에는 숱한 인간들의 기억이 담겨 있습니다. 문학은 그 시간의 주름이 살아 있는 총화입니다. 특히 소설이 그렇지요.
오늘 우리가 1950년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염상섭 소설을 다시 꺼내 읽는 것은 그런 점에서 단순히 과거를 들추는 게 아닙니다. 시간의 주름 속에 갇혀 있는 그 시대의 기억들을 현재에 되살려내는 거지요.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물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묵은 기억을 되살려서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하고.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의지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오늘이 평화롭기를 바라는 거지요.
한국전쟁은 우리에게서 400만이라는 생목숨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정신적 피폐와 물질적 망실도 안겨 주었습니다. 이후 수많은 헌신과 노력으로 당시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발전을 이루었지만, 사람들의 공포는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정전 60년을 맞은 오늘에도 피와 살과 뼈에 각인된 기억은 여전히 통증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 통증을 직시하자는 겁니다. 피하지 않고 직시해야 이 땅에서 저 폐허와 공포의 피비린내를 지울 수 있을 것입니다.
서울시내에 진입한 유엔군이 서대문 방향으로 소탕전을 벌이면서 진격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사랑이라는 낭만의 외피를 걸친 공포의 내면
소설 <취우>는 1952년 7월18일부터 이듬해 2월20일까지 조선일보에 실렸습니다. 한국전쟁의 막바지 어름으로, 휴전되기 5개월 전까지 연재된 셈입니다. 난리통에 전쟁 시기를 작품화해서 그런지 소설 속에는 폐허로 변한 도시의 음울이 곳곳에 깔려 있습니다. 기본적인 얼개가 강순제와 신영식 그리고 정명신의 연애담에 맞춰진 탓에 이러한 음울이 인물 성격에까지 미치지는 않지만, 섬뜩함까지 치워지진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낭만의 외피를 걸친 공포의 내면이라고 할까요. 염상섭은 그와 같은 도시의 정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개도 짖을 줄을 잊은 공포의 도시, 죽음의 거리에 잔잔한 새벽 바람에 날아오는 그 괴물의 발자취는 폭포 소리와 같고 썰물이 밀려가는 소리와도 같다. 자갈이 깔린 땅을 육중한 찻바퀴가 으깨면서 달리는 듯한 그 잔인한 살육의 아우성에 제각기 닥쳐올 제 운명을 생각해 보기에 잠간은 얼이 빠졌다.”
“육중한 찻바퀴가 으깨면서 달리는 듯한” 움직임이 생생하지 않습니까. 횡보는 “잠간은 얼이 빠졌다”고 기록하지만, 잠깐이 아닙니다. 그때 기억된 살육의 아우성은 시간을 넘고 넘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그의 소설 속 주요 무대인 천연동과 재동은 물론 혜화동, 필운동 그리고 한미무역이 있던 회현동에도 서려 있습니다. 지금은 그 모습, 그 아우성 다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여도 시간의 켜 살짝 들추면 격동의 신음 터져 나올 겁니다.
‘딸라’에서 표출되는 미국과 자본의 힘
<취우>가 풍자소설이 아닌데도 한미무역의 김학수 사장이 나오는 장면에 이르면 풍자와 해학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그의 복합적인 캐릭터 덕분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첩실을 둔 자본가로, 속물근성의 상징처럼 그려집니다. 피란 가면서 그가 챙기는 것은 첩인 강순제와 ‘딸라’가 든 ‘보스톤 빽’입니다. 돈과 욕망의 화신인 셈이지요. 하지만 그는 아직까진 철저한 자본가가 아닙니다. 단지 돈이라는 권력의 힘을 아는 어설픈 자산가쯤 될까요. 욕망 앞에서도 그는 그리 뻔뻔하지 못합니다. 젊은 여자한테 그저 안달복달하는 거지요. 인물이 이렇듯 벙벙하기 때문에 그가 나오는 장면에선 자연스레 해학이 밑자리에 깔리게 됩니다.
그러나 김학수 사장의 등장이 결코 만만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이후 우리 경제의 주요 축으로 자리잡은 자본가의 원형처럼 보입니다. 그가 운영하는 회사가 제조회사가 아니라 무역회사라는 점, 노사 간에 갈등이 드러난다는 점, 탐욕과 이기심이 노정된다는 점 등이 그래서 무척 흥미롭습니다.
더불어, 놓치지 않아야 할 대목이 ‘딸라’의 존재감입니다. ‘딸라’에는 단순히 돈의 가치만 들어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장차 도래할 미국과 미국 자본의 힘이 예견되어 있습니다. 김학수가 ‘딸라’가 든 ‘보스톤 빽’을 목숨과도 같이 챙길 때, 거기에는 보다 더 큰 권력에 기대는 심리가 짙게 배어 있는 것이지요. 아마 횡보는 1950년대에 이미 ‘딸라’로 대변되는 미국의 힘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진취적인 현대 여성의 원형적 면모
<취우>에서 제일 매력적인 캐릭터는 강순제라는 여성입니다. 좌익 남편이 있는데도 한미무역의 김학수 사장 비서이자 애첩 노릇을 합니다. 당시의 윤리관으로 보면 용납되지 않을 유형입니다. 하지만 강순제는 떳떳이 말하지요. 그건 굴종이 아니라, “대등한 인격으로 자기 책임을 자기가 지고 융합한 것”이라고. 이런 사고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는 연애에 있어서도 단호합니다. 사랑도 쌈이니 “하면 목숨을 걸구 하”겠다고 말합니다. 강순제의 말을 직접 들어볼까요?
“죽을 각오로 나서는 거야! 그 대신에 엄연하거던! 용서가 없어! 그런 점으루 보면 사랑은 독재예요. 민주주의가 아냐. 의론이나 합의가 아니라 명령야, 군령야! 호호호.”
거침없지 않습니까. 이뿐만 아니지요. 그는 인민공화국 치하에서도 시계나 보석붙이 등을 팔면서 세 집 살림을 도맡아 이끌어갑니다. 소설 속에 나오는 그 어떤 남성보다도 당차고 맵습니다. 그는 전쟁 중임에도 거리낌없이 천연동 영식이네 집에서 재동 자기 집까지 서울 거릴 활보합니다. 난리통이라는 상황을 두려워하기는커녕 그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있습니다. 왜곡된 생활을 영위하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불굴의 여성상 쪽입니다. 진취적인 현대 여성의 원형적 면모를 이미 드러내고 있는 거지요.
격동의 시간을 견딘 도시의 신음
<취우>에 그려진 사람들의 혼란을 뒤로 하고 혜화동 로터리에 서 봅니다. 평화롭습니다. 저기 어디쯤에서 강순제와 신영식 그리고 정명신이 불쑥 나타날 것만 같습니다. 소설에서 그들의 연애는 어느 쪽으로도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신영식은 누구와 맺어졌을까요? 대학로의 활기 속에 그들을 놓아봅니다. 염상섭은 “큰 환란을 만난 뒤에 우리의 생각과 생활과 감정에” 아로새겨진 “얼룩을 그려보려는 것”이라고 <취우>의 창작 의도를 밝히고 있습니다만, 그 얼룩 같은 건 다 사라지고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연애하는 이들로 대학로는 아연 밝아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평화로움, 정말 믿어도 될까요? 정전의 포성이 저 환한 평화의 뒷덜미를 혹 낚아채지나 않을까요? 격동의 시간을 견딘 도시의 신음, 여전히 저릿하게 우리 삶을 에두르고 있거든요.
< 시리즈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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