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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소설 효풍과 해방공간 [염상섭3]

by 자한형 2024.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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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효풍과 해방공간/고영직

8·15 해방 후 경성에서 서울로 이름이 바뀐 서울의 거리 풍경은 획기적으로 변모합니다. 일본어 간판이 일제히 퇴조하고, 미군정 실시와 더불어 영어 간판이 속속 등장합니다. 크리스마스, 럭키, 댄스홀 같은 영어 간판이 거리에 자주 눈에 띕니다. 바뀐 것이 어디 간판뿐이었을까요? 조선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도 양풍(洋風)이 거세게 불었습니다. 명동 피엑스에서 나온 구제품, 양과자, 페니실린이 각광을 받았습니다. 조선 사람들도 비프스테이크를 먹고, 코코아맛을 알기 시작한 셈이지요. 영어가 출세의 도구가 되고, 원자의 나라 미국이 원시의 나라 조선에서 천당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였습니다.

해방과 함께 조선의 빠리로 통하던 본정과 명치정의 풍경 또한 변모했습니다. 식민지 시절 보행자 수가 가장 많은 거리였던 본정 1정목은 이제 명동의 번화가가 되었습니다. 명동은 강남이 개발되기 전까지 전국 최고 공시지가, 전국 최고 상권이라는 지위에서 잠시도 내려온 적이 없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진고개는 조선 사람들이 새로운 욕망을 꿈꾸는 장소였습니다. 좌우 이념으로 나뉘어서 자신들의 국가를 욕망하고, 미군정 하에서 입신출세를 욕망했으며, 아메리카에서 온 박래품 소비를 욕망하곤 했습니다. 그래도 진고개는 미국()적인 것을 욕망하려는 조선 사람들의 거리였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가수 현인이 부른 노래 럭키 서울’(1949)에서 이 무렵 거리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을 듯합니다. “다같이 부르자 서울의 노래/ SEOUL SEOUL 럭키 서울.”

8·15 해방은 제국주의 권력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는 분기점이었다. 사진은 미 군정 당국이 영어가 가능한 간부 군인을 양성하기 위해 1945125일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에 세운 군사영어학교의 입학 시험장 모습이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염상섭의 <효풍(曉風)>은 해방 직후 욕망이 들끓는 진고개를 무대로 한 작품입니다. 당시 횡보는 경향신문사 초대 편집국장을 역임한 뒤 신민일보 편집국장으로 일하면서 자유신문에 <효풍>200회 연재했습니다. 작품의 주요 공간으로 등장하는 경요각(골동품점), 일송정(요릿집), ××(경찰서), 스왈로(댄스홀), 국제극장, 병원, 명동 피엑스, 고려각 같은 곳은 진고개와 그 일대에 위치한 장소들입니다. 여기에 종로와 흑석동이 등장하고, 인천 만국공원이 잠깐 등장합니다.

작중의 어느 인물이 요 골목을 빠져나가면 바루 모퉁이가 지금의 충무백화점예전에 M백화점 아닌가?”라는 말에서 시대 변화상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시쳇말로 진고개는 횡보의 확실한 구역이었던 셈이지요.

횡보가 묘사하는 진고개는 소비를 유혹하는 공간만은 아닙니다. 좌우로 나뉘어진 조선 사람들이 쌈으로 저물고 쌈으로 새는 해방정국의 거리정치 공간으로 묘사됩니다. 테러와 검속이 수시로 행해지는 살풍경한 공간이었지요. 군정을 지지하는 신문사 기자로 일하는 병직이 테러를 당하고, 경요각 지배인격으로 일하는 혜란이 검속을 당하는 곳이 진고개였지요. 좌우 이념의 격렬한 대립 속에서 특정 이념(좌익)을 지지하는 것은 음식점 영업 같은 일상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년의 인텔리 마담인 조정원 여사가 한 귀에는 모스크바 단파의 리시버를 달고 한편 귀는 워싱턴과 즉결되구라고 말하는 농이 마냥 농담으로 들리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횡보의 <효풍>은 세계문학적 지평(김재용 원광대 교수)을 갖는 작품입니다. 이것은 미국, 미국인, 미군정에 대한 냉철한 균형감각에서 비롯합니다. 작중의 화순이 홍삼은 일제 시대에는 미쓰이(三井)에게 내맡겼던 것이죠? 이번에는 어떤 미국 미쓰이가 옵니까?”라고 묻는 대목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횡보는 일본에서 미국으로 신구 제국주의 권력이 전환되는 세계사적 변환 과정을 박종렬 영감과 경요각 주인 이진석에 대한 묘사를 통해 탁월히 재현하고 있습니다. 이진석이 미국인 베커 청년의 환심을 사서 종이, 소금, 설탕 따위 수입품을 통해 이권을 챙기려고 하는 장면이 퍽 인상적입니다.

노여운 것도 울어야 할 것도 이 시대인가

<효풍>의 묘미는 스왈로 회담편입니다. 진고개 댄스홀 스왈로에서 조선 청년 병직과 화순이 미국 청년 베커와 날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연출됩니다. 미국인 베커 청년의 시선을 통해 제국주의적 무의식을 언급하는 대목이 탁월합니다. 베커 청년이 양복 입은 꼬맹이조선인들을 보며 니그로!”를 떠올리는 장면이 그것입니다. “미국은 해방자 아니요? 일본과 다른 점을 믿으시오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거장의 면모를 갖춘 횡보의 세계사 이해를 엿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선의 권력이 어제 일만은 아니겠지요. 지금도 이곳 명동을 찾는 동남아와 중국인 관광객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선에서 그런 불편한 시선의 권력 행사를 느끼곤 합니다.

베커 청년은 스왈로 회담에서 조선 청년들에게 구락부를 만들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병직이는 신판 녹기연맹이나 만들까!”라며 맞섭니다. 회담에 참여한 조선 청년들의 운명은 엇갈립니다. A신문 기자인 화순은 이동민을 따라 이북행을 선택하고, 병직도 이북행을 감행하지만 개성역 인근에서 체포됩니다. 베커 청년으로부터 유학 권유를 받은 혜란은 결국 미국행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병직과 혜란은 삼팔선 위 암자를 짓는 마음으로 조선학을 공부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병직이 애국주의자일 따름입니다. 모스크바에도 워싱턴에도 아니 가고 조선에서 살자는 주의입니다라고 한 말은 생생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병직과 혜란이 꿈꾸는 조선학이 지금껏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었고, 마음의 삼팔선이 휴전선으로 대체되지 않았습니까. 작중 조선 청년들이 홀탯속 같은 진고갯길을 곧장 올라가며 을지로4가 정류장까지 간 길을 따라 발길을 옮겨보다 다시 명동으로 돌쳐서 봅니다. 퍼시픽호텔 앞에 서서 바라보는 명동의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파랗습니다. 저 하늘에 삼팔선이니 휴전선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하겠지요. 언제 우리는 분단된 반쪽의 하늘이 아니라 온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있는 것일까요.

노여운 것은 이 시대요, 울어야 할 것도 이 시대라는 조선 청년 병직의 호곡 소리가 내 귀에 들려오는 것만 같은 날입니다. 명동 퍼시픽호텔 앞에서 잠시 회고주의자가 되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