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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콘 실레

by 자한형 2024.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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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쉴레)(Egon Schiele, 1890-1918)/꼬로로

"이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훌륭한 사람과 앞으로 훌륭하게 될 사람들이 있겠진요. 그렇지만 나는 나의 훌륭함이 마음에 듭니다." - 에곤 실레

"예술가를 제한하는 것은 범죄다.

그것은 태어나는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 - 에곤 실레-

출생 : 오스트리아 남부 툴른

클림트의 제자/ 스승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클림트가 장식적 패턴이 많은 반면 실레는 그림은 고독하고 척박해 보이는 그림이 많음

에곤 실레가 살던 19세기말 빈은 유럽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곳

시골마을 역장의 아들로 태어남/ 1905년 에곤 실레의 아버지는 매독으로 사망/ 어머니는 이런 병명으로 죽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냉담/ 아버지에 대한 연민을 거둘 수 없었던 실레는 이로인해 어미니와 갈등을 빚음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여동생 게르티에게 과하게 집착하는 내성적 소년이었다고 함

1906년 그림에 뛰어나 16세에 빈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지만 보수적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옴/ 같은 해 히틀러도 입학신청을 했으나 거부당함...이때 입학했다면 히틀러의 인생도 세계사도 바뀌었겠지..ㅎㅎ

1912년 노이렌바흐라는 시골에서 머물며 작업할 때 어린 소녀들을 유인해서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음/ 그 이후로 너무 어린 소녀들을 그리지 않았다고 함/ 이때 에곤 실레를 옹호하며 곁을 지켜준 여인이 발리 노이질

자신의 그림과 서로 교환하자는 실레의 말에 클림트는 "자네 그림이 더 나은데 왜 교환하자는 거냐?"라는 농담을 던질만큼 클림트는 실레의 그림을 높이 평가

화가로서의 명성을 막 얻기 시작했을 시기 임신 6개월의 아내가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하였고, 그 역시 전염되어 28살의 나이로 사망​​

아르투어 뢰슬러의 초상/ 1910/ 빈역사박물관

수집가이자 미술 비평가였던 아르투어 뢰슬러는 1911년 발표한 조형 예술가, 예술가와와 예술 애호가들을 위한 잡지에서 "실레의 작품은 우리의 감각을 아슬아슬하게 건드린다...그가 발표하는 작품들은 언제나 충동과 내적 욕망을 드러낸다."라고 했다고 함

자화상/ 종이에 연필,구아슈 등/ 55.8*36.7/ 1910/ 알베르티나미술관,

100여점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한결같이 그의 어두움과 병적인 내면 세계를 그리고 있음

자화상(죽음과 남자) 2/ 1911/ 레오폴트미술관,

자신과 죽음을 동일시하여 그린 그림

꽈리가 있는 자화상/ 32.2*39.8/ 나무에 유채/ 1912/ 레오폴드미술관, , 오스트리

은둔자들/ 181*181/ 1912/ 레오폴드미술관, , 오스트리아

에곤 실레와 클림트의 모습을 그린 것/ 앞에 있는 사람이 에곤 실레, 뒤에 있는 사람이 클림트/ 에곤 실레와 클림트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예술세계를 존중하는 우정을 나누었다

정사각형으로 그린 건 클림트에 대한 존경의 의미인가??

죽음과 소녀/ 180*150.5/ 1915/ 벨베데레미술관,

그림 속 죽음은 에곤, 소녀는 발리 노이질

그녀는 원래 클림트의 모델이었다가 실레를 만나 모델을 해 주었고 연인으로 발전/ 에곤 실레와 동거하면서 실레가 외설스러운 그림을 그릴 때도,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을 때도 실레를 옹호하며 곁을 지켰음

에곤 실레는 자신의 후원자에게 "저는 곧 결혼할 겁니다. 다행히도 발리는 아닙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함/ 에곤 실레는 그녀를 버리고 철도청 고급관료의 딸 에디트와 결혼함/ 실레에게 에디트를 소개시켜주고 두 사람의 결혼을 권유한 것도 발리라고 함/ 이건 또 무슨 막장인지..

그는 결혼 후에도 발리에게 모델로, 연인으로 함께 있어달라고 했으나 그녀는 거절/ 종군간호사를 지원해 전쟁터에서 숨을 거두었음​​

강변의 집 담벼락/ 109.5×140/ 1915/ 레오폴드박물관, , 오스트리아

에곤 실레는 여인과 에로스의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가 일생동안 그린 그림 중 절반 이상은 풍경화였다

포옹/ 1917/ 벨베데레미술관,

다리를 위로 끌어 올리고 앉아 있는 여자/ 연필 드로잉과 구아슈/ 46*30.5/ 1917/ 프라하국립미술관, 체코 출처: 위키피디아

작품 속 여성은 실레의 처제였던 아델레 하름스로 추정

네 그루의 나무/ 1917/ 벨베데레국립미술관, , 오스트리아

전쟁에 동원된 실레는 부대가 주둔하던 오스트리아 빈 남부 지역에서 일기를 쓰며 스케치를 남기곤 했는데, 이 그림은 그 스케치를 참고하여 유화로 작업한 것이라고 함

네 그루의 나무 중 한 그루는 나뭇잎이 다 떨어져있다... 왜 이 나무만 유독 잎이 다 떨어진걸까?? 뒤편으로 보이는 석양이 쓸쓸함을 더하는 것만 같다.

가족/ 1918/150*160.8/ 벨베데레궁전,,오스트리아

실레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그렸는데, 정면을 향한 실레와 달리 아내와 아이의 시선은 다른 곳을 두고 있다.

실제로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내를 잃었고, 실레 역시 같은 병으로 사흘 뒤에 세상을 떠났다

에디트 실레의 임종Portrait of the dying Edith Schiele/ 1918

왼쪽 하단에 1918.10.28.이라고 적혀 있는 이 그림의 주인공은 에디트 실레로 실레의 아내다

실레는 아내 에디트가 죽어가는 순간을 묘사했는데...모네도 첫번째 부인이 죽었을 때 그림을 그렸는데..화가는 그러고 싶은가 보다..

1918년 전쟁이 끝나고 봄에 열린 전시가 성공하면서 실레는 클림프를 이을 스타 작가로 부상했고, 아내 에디트가 결혼 3년만에(둘은 1915년 결혼) 임신에 성공하면서 인생 최고의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해 가을 스페인 독감이 대유행하면서 임신6개월이던 에디트도 희생되었다. 아내를 잃고 3일만에 실레 역시 스페인독감에 감염되어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0월의 마지막..

에콘실레/네이버백과

오스트리아의 화가. 클림트의 표현주의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공포와 불안에 떠는 인간의 육체를 묘사하고, 성적인 욕망을 주제로 다루어 20세기 초 빈에서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다. <죽음과 소녀>는 실레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출생-사망

1890612~ 19181031

출생지-사망지

오스트리아 툴른 - 오스트리아 빈

예술양식

표현주의 화가, 초상화, 자화상, 풍경화, 고통에 사로잡힌 인물들,

십대 소녀들의 노골적인 데생, 밀실공포증적인 도시 풍경화

작품

미술작품 감상하기

구스타프 클림트의 친구이자 피후견인이었던 에곤 실레는 클림트의 표현주의적인 선들을 더욱 발전시켜 공포와 불안에 떠는 인간의 육체를 묘사하고,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주제로 다룸으로써, 20세기 초 빈에서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다. 빈 공간을 배경으로 툭툭 튀어나온 뼈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앙상하게 마르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한 실레의 자화상은 고뇌하는 미술가 신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것은 그의 작품의 어느 일면일 뿐이다. 실레의 도시 풍경화들은 역동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파로 넘쳐나는 도시 모습의 이면에는 어떤 긴장감이 감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실레가 그린 장인의 초상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그린 초상화들은 감정이입의 표현이 훌륭하며, 가장 뛰어난 초상화 작품들에 속한다.

실레는 열여섯 살에 빈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지만, 그곳의 교육이 케케묵고 인습적이라고 생각되어 곧 그만두었다. 그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신미술가협회'를 창립했다. 그 후 그는 여인들과 소녀들의 누드화를 적나라할 정도로 솔직하고 생생하게 묘사한 드로잉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드로잉들은 실레가 크루마우로 이주한 후인 1911년에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모델이자 동거녀었던 발레리 '발리' 노이칠과의 자유분방한 생활과 미성년자들을 모델로 그린 그림들 때문에 크루마우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다. 노이렝바흐에서는 더욱 이해받지 못했다. 1912년 실레는 그곳에서 어린 모델들을 데려다가 부도덕적인 그림을 그렸다는 죄목으로 잠시 동안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다.

<죽음과 소녀>는 실레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군복무를 마치고 빈으로 돌아온 실레가 1917년에 그린 <포옹>

1915년 실레는 발리와의 동거 생활을 청산하고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했다. 1918년이 되자 실레는 지난 몇 년간에 비해 훨씬 더 안정된 삶을 살게 되었다. 아내인 에디트는 임신한 상태였다. 실레는 빈 분리파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해에 사망한 클림트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아버지가 된다는 기대감으로 <가족>(1918)을 완성했다. 새롭게 발견한 희망을 보여주는 듯한 이 작품에서 실레와 아내, 아이는 모두 나체로 묘사되어 있으며 특히 인물들의 행복한 표정이 눈에 띈다. 하지만 같은 해 10, 실레의 아내는 당시 유럽을 휩쓸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했고, 아내와 뱃속의 아기를 잃고 슬퍼하던 실레도 스페인 독감으로 3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

실레에 관한 사소한 것들

· 실레의 왜곡된 인물 습작은 접사다리 위에서 작업한 것에 기인한다.

· 실레의 작품들은 빈의 레오폴트 미술관에 많이 있다.

· 실레가 감옥에서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일기는 사실 그의 친구이자 평론가인 아르투르 뢰슬러가 쓴 것이다.

· <발리의 초상>(1912)<죽은 도시 >(1911)21개월이나 뉴욕에 억류되었다. 전시를 위해 대여 중이었던 두 작품은 나치가 오스트리아에서 약탈한 것으로, 원 소장자가 이를 돌려받기 위해 재판에 회부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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