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문제는 ‘국민의힘’이다/김윤철
국민의힘은 ‘현대의 군주’로 불릴 수도 없고, 그렇게 불리고 싶은 의지를 갖고 있지도 않다
그게 아님을 보이고 싶다면 비대위부터 비친윤파만이 아닌, 합리적인 당 밖의 시민에게도 개방해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의힘이, 보수정치세력이 궤멸에서 벗어날 작은 기회라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뇌썩음(brain rot)’. 옥스퍼드 랭귀지가 선정한 올해의 단어다. 인스타그램 릴스나 유튜브 쇼츠 등 60초 안팎의 짧은 영상 쇼트폼 콘텐츠의 과도한 소비로 지적 능력이 퇴보하는 것을 비판하는 용어다.
윤석열 대통령(이하 윤석열)의 ‘12·3 계엄령 선포 사태’는 뇌썩음 정치의 대표 사례로 역사서에 등재되지 않을까 싶다. 극우 유튜브 방송을 보고 들으며 부정선거설을 굳게 믿고 계엄군을 국회보다 선거관리위원회에 먼저 보냈다는 정황이 드러난 것을 볼 때 그렇다. 어디 그것만이겠는가. 윤석열의 뇌썩음 증거들은 집권기 내내 쉽게 찾을 수 있다는 데에 큰 이견이 없을 거다. 그 증거들을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당할 때까지의 열흘 남짓한 사이에 생생하게 목도할 수 있었는데, 잠시 짚어보고 가자.
첫째, 야당에 경고를 내리기 위해서는 해도 된다고 혹은 성공할 거라고 여기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것. 둘째,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 등 자신을 비판하며 퇴진을 요구하는 세력을 종북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운 것. 셋째, 자신이 실패해 -또 국회와 국민이 성공해- 2시간 만에 끝난 것인데도 2시간짜리 내란이 어디 있냐고 항변한 것. 넷째, 탄핵소추로 몰려가는 상황인데도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라며 자신의 퇴진을 요구하는 이들과 맞서 싸우겠다고 억지를 부린 것. 다섯째, 하나같이 사회적 저항과 분란만 일으킨 의료·교육·노동·연금 문제를 개혁의 성과라며 그것이 수포로 돌아갈까봐 잠을 못 이루며 걱정한다는 것.
이를 보며 뇌썩음에 따른 지적 능력 퇴보의 귀결이 ‘망상증’인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는다. 현실과 동떨어진 망상을 진실이라고 믿는 정신적 질병에 걸린 게 아니라면 도저히 저럴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으니. 특수부 검사와 검찰총장을 지낸 대통령이라는 자의 지적 능력이 저 정도일 것이라고 누가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공교롭게도 윤석열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며, 지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가 지성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으나, 반지성주의의 전형 그 자체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딱히 본 바 없다.
‘이론을 사랑하는’ 어떤 학자는 그의 ‘합리성’을 찾아내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여기서 합리성(rationality)은 ‘합당함’이라는 뜻을 갖는 이성(reason)까지는 아니어도, 뭔가 남는 장사를 할 것이라는 가정에 기댄 인간 행위의 특성, ‘(최소한의) 품격’을 가리킨다.
국힘 ‘사멸정당’의 길 걸을 공산 커
<미국의 반지성주의>를 쓴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지성의 중요성을 환기시킬 때도, 뇌썩음이라는 단어 사용의 원조로 알려진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에서 반지성주의적 풍토를 한탄할 때도 모두 중시한 것은 합리성보다는 이성이었다. 이를 그 학자가 아는지 모르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윤석열이 최소한의 품격을 지녔을 거라는 가정에 기대어 그의 합리성을 밝혀보고 싶어 했음은 알고 있다. 그런 합리성마저도 갖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를 -설사 그에게 투표하지 않았다 해도- 대한민국의 헌정체제를 책임질 대통령으로 승인한 우리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처참하게 느껴졌을 테니. 하지만 그 학자는 곧 참담함마저 받아들이며 ‘순수학문적 습관에 기댄 실천학문적 열정’을 거두었다. 앞서 거론한 뇌썩음의 증거들 앞에서.
윤석열은 원래 반지성주의적 망상증 환자였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가? 한국의 대통령은 환자여야 오를 수 있는 자리인가? 원래 환자가 아니었다면, 대통령이 된 후 그리된 것인가? 그렇다면 왜 그리되었는가?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그리되지 않을 방도는 없었던 것인가?
그게 뭐였든 결국 문제는 국민의힘이다. 윤석열을 발탁해 자신들의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것도,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도, 그래서 집권여당이 된 것도 모두 국민의힘이다. 이리 말하는 것은 탓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정당이 얼마나 중요하고 강위력한 존재인지를 상기시키기 위함이기도 하다.
국민의힘은 ‘사멸 정당’의 길을 걸을 공산이 크다. 합리성을 내세워 아무리 주판알을 튕겨봐도 합당함을 잃으면 소용이 없다. 그런데 국민의힘은 합당함을 잃었다. 아니, 내다 버렸다. 비상계엄령 해제 투표를 해야 할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들은 비겁하게 숨어 있었다. 탄핵소추 투표를 해야 할 때는 도망을 쳤다. 합당치 않은 비상계엄 사태를 아무것도 아닌 일로 여긴 게 아니라면,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문제로 몰고 갈 의도가 아니라면 도저히 그리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리했다. 자신과 다른 생각과 처지를 헤아릴 줄 몰라 대통령은 물론, 정치인의 자질조차 없던 이를 대통령으로 만들 정도의 힘을 보유한 주체이자 제도인 정당이 그리했다.
국민의힘은 대통령이 탄핵을 당해 궤멸의 위기에 처했던 게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대통령 탄핵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 대통령을 만들어 낼 정도의 큰 힘을 합당치 않은 데 쓴 것의 결과였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은 죽어가는 새누리당을 국민의힘으로 살려놓은 반전의 계기였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로 인해 역풍이 불어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며 제1당 자리에 올랐던 것 같은 경험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건 합당치 못한 사유로 탄핵소추를 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합당한 사유로 인한 것이었다. 집권세력의 사익 추구를 위한 권력의 사유화만이 아니라, 세월호 참사 같은 비극을 겪게끔 사회의 구조적 위험을 방치하거나 국민을 그 위험 속으로 내몰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국민의힘을 살려놓았다고? 그렇다. 새누리당은 망하고 국민의힘이 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래도 그 과정에서 부끄러운 척이라도 하고 혁신하는 척이라도 해서 국민으로부터 존재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당하지는 않을 수 있었다. 즉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통해 반성(하는 척)의 계기를 제공받았기 때문에 국민의힘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들이 윤석열을 공정과 정의의 사자로 호출해 대통령을 만들 수 있었던 것, 즉 그리해도 어색하지 않았던 것은 그런 반성(하는 척)의 시간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들 스스로 그것을 ‘탄핵의 강 건너기’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그때만 해도 이들은 대의와 다수 여론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남을 줄 아는 간지를 보유하고 있었고 발휘하기도 했던 거다.
친윤의 국힘 깨야 보수 궤멸 막아
그러나 지금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시작부터 훗날의 밑천을 다 탕진하는 방식으로 가고 있다. 당을 여전히 친윤이 장악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자신들의 수장인 윤석열이 군대를 동원해 내란을 기도했고 그 수괴임이 명백한데도 그리하고 있다. 국회의원 총사퇴라도 하는 흉내를 내야 할 때, 오히려 탄핵 찬성파를 축출하는 데 힘을 쏟고 있는 형색이다. 국운을 다시 지피는 무슨 심박한 정책이라도 추진하느라 그런 것이라면 봐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책의 ㅈ자도 나오고 있지 않다. 여전히 탄핵 반대의 입장과 관점에 서서 더불어민주당을 탓하고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 공략에 힘을 쏟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의 보장으로 공당의 지위를 부여받은 정당임에도 불구하고, 국헌을 문란케 한 내란에 동조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비상계엄 사태 이전에 이미 레임덕도 아닌, 데드덕에 빠져들었다고 거론되던 윤석열이 무서워 그런 거라고 보기도 어렵다. 또 결정적 순간에 숨어버리는 비겁함과 남 탓으로 일관하는 조잡스러움을 보면 의리파라 그런 것도 아니다. 의리파라면 묵묵히 자신이 먼저 나서서 총을 맞아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자신을 제외한 모두에게 총을 쏴대기만 한다. 당 안에선 친한파와 탄핵 찬성파에게, 당 밖으로는 야당에, 심지어 탄핵과 정치의 합당함을 요구하는 국민에게.
그러니까 결국 국민의힘, 특히 자칭타칭 친윤이라는 이들이 주도하는 ‘패거리-도당(徒黨·clique)’이 문제였음을 깨닫는다. 윤석열이 원래 환자였든 아니었든, 또 대통령이 되고 나서 환자가 되었든 아니었든 ‘비정상적 통치 행태’를 보인 것은 결국 ‘집단적인 비겁함과 조잡함의 힘’ 때문이었던 거다. 그러니까 보수의 궤멸은 윤석열 탄핵 때문이 아니라, 친윤의 국민의힘 때문이다. 그래서 보수의 궤멸을 피하려면 탄핵을 막을 게 아니라, 친윤의 국민의힘을 깨야 하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좌파 정치인이자 <옥중수고>의 저자로 점진적 개혁노선 지향의 유러코뮤니즘 형성에 영감을 준 안토니오 그람시는 현대 정치체제에서 정당을 ‘현대의 군주’라고 불렀다. 모든 정당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사자의 용맹함과 여우의 간지를 가진 정당, 즉 부당함에 도전해 합당함을 추구하고 구현하는 ‘집단 지성의 조직’을 그리 불렀다.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절반의 인민주권>의 저자인 샤츠슈나이더는 정당을 ‘민주주의의 창조자’라고 불렀다. 소수 엘리트 혹은 극단적 집단이 아니라, 다수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과 상식을 대표하는 주체이자 제도라는 의미에서였다. 국민의힘은 그리 불릴 수도 없고, 그렇게 불리고 싶은 의지를 갖고 있지도 않다. 행여라도 그게 아님을 보이고 싶다면 당장 비상대책위부터 비친윤파만이 아닌, 합당함을 추구하는 당 밖의 시민에게도 개방하고 맡겨야 한다. 또 집권여당이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국회와 야당과 함께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하고 정부를 함께 꾸려가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의힘이, 보수정치세력이 궤멸에서 벗어날 작은 기회라도 잡을 수 있을 거다.
윤석열 정권의 ‘역사전쟁’이 놓치고 있는 것
윤석열 정권의 역사전쟁 재개에 분명한 게 있다면 홍범도 장군 논란 때처럼
항일독립투사를 포함해 이국 땅을 헤매다 살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이야기를 지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 존재의 무게를 느낄 역사를 삭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념적 목적과 의도에 따른 것인지 여부를 떠나 윤 정권 주도 역사전쟁이 놓치고 있는 지점이다
1) 4663명! 한국의 베트남 전쟁 파병 군인 중 전사자 숫자다. 한국의 베트남 전쟁 파병과 참전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이루어졌다. 총파병 인원은 32만여명에 달한다. 그러니까 전체 파병 군인의 1.4%가 ‘살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다(전사자 숫자는 자료에 따라 수십명에서 백수십명까지 차이가 있다).
얼마 안 된다고 여겨지는가? 전사자를 숫자로 표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숫자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들 모두 각각의 사람이었다. 자신만의 이름과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유일한’ 형이었고 아들이었다. 전사자의 형제와 부모에게 전사자 한 사람 한 사람을 1.4% 중 한 명일 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터이다. 숫자로는 존재의 무게를 드러낼 수 없다. 그래서 전사자 명단을 하나하나 인명사전식으로 편찬하라는 요구도 있다. 삶의 관계를 담은 기억의 서사 속에서만 존재를 드러낼 수 있기에.
2) 최근 강원도 화천에 있는 ‘월남파병용사 만남의 장’(월남참전기념관)에 다녀왔다. 파병하기 전 병사들을 훈련시켰던 곳이다. 전두환 신군부 정권의 인권탄압 현장으로 악명 높은 삼청교육대로 쓰이기도 했던 곳이다. 30도를 훨씬 웃도는 더운 날씨에 땡볕 아래를 걷는데도 그곳에 발을 들여야 했던 당시 청년들을 떠올리니 가슴이 서늘했다. 사방팔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이곳에 들어오면 그야말로 꼼짝할 수가 없겠구나”라는 느낌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다.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전쟁터로 갈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청년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무고한데도 삼청교육대에 끌려온 이들의 심경은 또 어땠을까?
관계자분의 이야기를 들으니, ‘빠져나갈 수가 없는 곳’이라 훈련소와 삼청교육대로 썼다고 한다. 오고가는 도로조차 없어 교통을 통제하기가 용이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고가는 도로가 생긴 지금도 교통이 불편한 건 마찬가지다. “방문객이 좀 있냐”고 물었더니, “어디 (오고가는 길이) 사람들 오게 생겼냐”는 핀잔 같은 답을 들을 정도였다.
그래도 기념관은 얼추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콘텐츠들도 베트남 전쟁 당시의 국내외 정세 기술 등에 있어 나름 구색을 맞추고 있는 것 같았다. 반공주의에 기초해 파병과 참전의 정당성만을 일방적으로 선전하는 유치함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전사자들 명단을 적어놓은 공간도 마련되어 있어 살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담으려는 곳이라는 느낌도 받았다.
정치의 가장 극적 형태인 전쟁과 관련한 일과 장소인지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인들이 오기도 하냐”고. “전혀 안 온다”고 한다. (파병을 보낸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자, 정치적 계승자일 수밖에 없는) “박근혜 대통령마저도 온 적이 없다”고 한다. 아예 베트남 전쟁 파병과 참전 역사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 같다는 평을 곁들이기도 한다.
베트남서 죽은 이들의 서사 외면
정치인들이 이곳에 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툭하면 ‘역사전쟁’을 벌이면서도 말이다. 베트남 전쟁 파병과 참전의 역사는 정쟁으로 삼을 거리가 못 되어 혹은 삼지 않아도 괜찮기 때문인가? 너무 외진 곳이어서 못 간다 하면, 그건 정치 안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거나, 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중히 여기는 목적과 의도를 갖고 있다면 정치인은 달나라든 화성이든 어디든 간에 없는 일이라도 만들어서 가야 한다. 전사자들이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고, 그곳에는 가지 않느냐고 할지도 모른다. 작년 현충일 윤석열 대통령이 현충원의 베트남 전쟁 전사자 묘역을 방문하기도 했으니.
하지만 화천의 기념관도, 또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현충원 방문도 살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정부가 공인하는 곳에 전사자 명단을 적어놓거나 유해를 안장했다고 해도 파병과 참전의 필요성과 효과를 주로 조명하고 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도 목숨을 걸고 호국보훈에 기여해야 한다는 주문을 걸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사하기 전부터, 또 파병되기 전부터 한 사람으로서 지녀왔던 존재의 무게를 각각의 삶과 꿈과 희망,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뒤로한 채 베트남의 전쟁터로 향해야 했던 ‘사연’ 등의 기록을 통해 드러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3) 현재의 5060세대들은 자신의 가족, 친지 중에서 베트남 전쟁 파병 군인 출신자를 찾거나 만나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 나의 경우 내 아버지와 이모부, 그리고 내 아내의 아버지(장인)가 계신다. 이분들은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자라면서 이분들께 베트남 전쟁과 파병 그리고 참전 경험 등에 관한 이야기를 별로 듣지 못했다. 가족, 친지 중에 파병 군인이었던 분들이 있는 지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나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던 것일까? 살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아픈 기억, 그리고 그것을 포함한 자신들의 드러내고 싶지도 않고, 들려주고 싶지도 않은 상처와 고통 때문이었을까? 기억과 이야기마저 반국가적인 것으로 여겨져 드러낼 수도 없고, 들려줄 수도 없는 시절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였을 ‘국민학교 고학년’ 때쯤인가에 아버지로부터 들은 일화가 두 개 있기는 하다. 모두 ‘비극적’인 것으로, 하나는 살아 돌아오지 못한 당신의 동기에 관한 것이었다. 다른 하나 역시 살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에 관한 것으로 폭격에 따른 화재로 목숨을 잃은 병사들 이야기였다.
중학생 때인가, 살아 돌아오지 못한 병사들에 관해 들은 일화에 바탕을 두고 ‘풍선’이라는 제목의 소설 흉내를 낸 글을 쓰기도 했었다. 엉망이라 생각되어 결국 쓰레기통에 버려서 지금은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 내용은 생생히 기억한다. 지독한 가난 때문에 파병 대열에 지원해 베트남에 가게 된 청년 병사의 이야기다. 그는 작전이 없는 날이면 몰래 미군의 물탱크 청소 ‘알바’까지 뛰면서 돈을 벌어 한국의 가족에게 보내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기치 못한 폭격으로 불이 난 물탱크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생을 마친다. 이런 식의 죽음을 나는 그 병사가 참전을 통해 이루길 바랐던 ‘잘살아보세’의 꿈이 허망하게 날아가버린 것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풍선’이라는 제목을 단 이유였다.
독립기념관도 외딴곳 될까 우려
어설픈 작가 흉내에도 불구, 베트남 전쟁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이들이 쓰고 만든 책과 영화 등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살아 돌아왔으나,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역시도.
대학에 다니던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쯤 베트남 전쟁을 다룬 문학 작품과 영화와 TV드라마 등이 꽤 많이 등장했던 것 같다. 반공주의라는 지배이데올로기가 봉쇄·차단했던 베트남 전쟁에 관한 다른 혹은 가려졌던 사실에 기초한 시각과 사유의 길이 1980년대 말 이후의 민주화 과정에서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장 기억나는 것은 1988년 단행본으로 출판된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이다. 안정효의 <하얀전쟁>도 있다. 소설로는 1985년에 나왔는데, 1992년인가에 영화로 상영되었다. 작고한 유명 배우 강수연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도 기억에 남아 있다. 이 영화는 파병 군인들의 전쟁 후유증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한국의 베트남 전쟁 파병과 참전을 자유와 민주주의와 정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주의 세력에 맞선 것으로만, 또 전쟁 특수를 가져와 경제발전의 기틀을 놓았다는 것으로만 채색했던 것에서 벗어나 다른 측면이 있음을 알려주려 한 작품들이었다. 당시 통치세력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기는 했다. 하지만 통치세력을 부정하기보다, 전쟁 때문에 희생당하고 고통받은 사람들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가 듣고 기억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념이 아니라 사람에 관하여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4) 정치권이 한·일관계를 둘러싸고 다시금 역사전쟁 중이다. 윤석열 정권이 친일 논란 인사들을 독립기념관장직 등에 임명해 사회적으로 비판 여론이 일면서 촉발되었다. 저조한 지지율을 견디기 위한 보수 결집 외에 역사전쟁을 재개한 윤 정권의 정치적 목적과 의도는 분명치 않다. 분명한 게 있다면, 홍범도 장군 논란 때처럼 항일독립투사를 포함해, 조국을 떠나 이국 땅을 헤매다 살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이야기를 드러내고 들려주기는커녕, 지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 존재의 무게를 느낄 역사를 아예 삭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념적 목적과 의도에 따른 것인지의 여부를 떠나 윤석열 정권 주도의 역사전쟁이 놓치고 있는 지점이다. 자칫하면 독립기념관도 화천의 월남참전기념관처럼 외딴곳이 되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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