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신동, 모짜르트 ‘피가로의 결혼’/강효욱
런던의 앨버트 조형물.(좌로부터 바하, 글룩, 헨델, 모차르트, 멘델스존, 하이든, 베버, 베토벤)
[동양일보]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벌이 한창이다. 오페라는 대중들이 다가서기 어려운 장르라는 선입견을 갖는다. 대학시절 선배가 오페라단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덕분에 오페라 ‘나비부인’ 티켓을 얻어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 앉아 무척이나 기대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나비부인’의 서정적인 아리아 외에는 거의 기억하지 못했으니 아마도 반쯤은 눈을 감았던 탓이다. 이 경험 이후에 무의식적으로 오페라 공연관람을 멀리하게 되었고 나이가 들면서 다시 활동하는 지인 성악가들의 오페라 공연을 관람할 기회가 종종 생기게 되었다. 슬픈 사연의 여주인공과 아름다운 멜로디들이 돋보이는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은 단순한 줄거리 탓에 잠시 산만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다행히 그때마다 유독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을 뽐내는 푸치니의 오페라 배경음악들을 분석하며 감상하게 되었다. 그러던 나에게 공연 내내 웃음과 재미를 주는 오페라가 있었으니 바로 모짜르트의 희극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1756-1791)는 하이든, 베토벤과 함께 고전음악을 완성한 고전주의 시대의 위대한 작곡가이다. 어린 시절부터 연주와 작곡에 모두 능했던 그는 ‘음악의 신동’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실제 6세가 되던 해부터 연주여행을 다녔으며 건반에 앉아 빠르게 즉흥연주곡을 작곡하는 것은 다반사, 심지어 그의 작곡노트에 고친 흔적이 없었을 정도로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도전하여 수많은 곡을 남긴 모차르트는 음악계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지만 정작 그 스스로는 “연습을 정말 열심히 했다”고 이야기하였다.
어린 시절 궁중 음악사였던 아버지와 하나뿐인 누이와 함께 연주여행을 다니던 모짜르트는 청년기에 접어들자 잘쯔부르크로 이사를 하게 되고 베토벤, 하이든, 슈만, 슈베르트, 브람스 등 유명 작곡가들에게 찬사를 받았지만 인기도 일도 많았지만 부인과 함께 사치를 즐기던 그는 늘 재정이 쪼들리고 덕분에 많은 작품 활동들을 하게 된다. 음악사에서는 가장 다양한 장르의 훌륭한 곡들을 가장 많이 남긴 작곡가로 기록되어 있다.
오페라에 관심이 있었던 모차르트는 당대 가장 유명한 작가였던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 1749-1838)에게 2년여 만에 대본을 받아 내고 1786년 드디어 그의 3대 오페라 중 첫 번째 오페라인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하게 된다. ‘피가로의 결혼’은 롯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의 후속편이다. 같은 희곡작가의 글을 대본으로 사용한 연유이지만 오페라는 ‘피가로의 결혼’이 먼저 작곡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결혼에 골인하게 된 백작이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백작의 시종 피가로의 약혼녀 수잔나를 탐하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이에 피가로는 백작부인에게 수잔나의 옷을 입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만나게 해 백작이 놀라고 망신스러워 할 작전을 짜는데 이 과정에서 백작과 친하게 지내던 의사와 백작이 피가로와 결혼시키려던 늙은 하녀가 피가로의 부모라는 기상천외한 설정으로 공연 내내 관객에게 웃음을 준다. 사회풍자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코믹 오페라는 세속적인 소재를 담은 탓에 그 해에는 9회 이상 공연이 어려웠지만, 지금은 가장 인기 있는 오페라 중 하나이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경쾌하게 시작되는 서주를 제외하고는 극의 내용에 비해 음악이 조용하게 흘러가는 곳이 많다. 그 중 ‘편지2중창’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한 ‘산들바람은 부드럽게’는 백작부인과 수잔나가 백작을 속이려는 목적을 갖고 편지를 쓰는 장면에 나오는 곡이다. 평화로운 가사와 온화한 멜로디가 유유히 흐르지만 극 중 노래를 하는 배우들을 살펴보면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표정이 역력히 나타난다. 이 곡은 영화 <쇼생크 탈출>의 한 장면에도 삽입되었는데 쇼생크가 우연히 틀어놓은 ‘산들바람은 부드럽게’는 온 교도소의 재소자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듯 보인다.
35세에 요절한 모차르트는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음악가이자 대중에게 사랑받는 작곡가였으나 정작 그의 장례에는 모차르트의 천적이었던 살리에리와 그의 친척들만 참여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일생을 고단하게 살아온 ‘음악의 성인’ 베토벤의 장례는 빈의 많은 시민들이 참여했다. 그래서 그런 말들이 나왔을까.
“모짜르트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재고, 베토벤은 하늘로 올라간 천재이다.”
이번 주는 천재들의 음악을 듣는 영광을 갖게 되길 바란다.
“모차르트, 권위보다 진실된 내면의 신앙 더 중요시”/이대웅
한국인 저자가 펴낸 모차르트 평전
음악 신동? 평생 부지런히 노력
해가 갈수록, 음악 깊이 더해져
사랑과 자유, 유토피아 꿈 노래
프리메이슨 가입, 죽음 미궁 속
모차르트 평전
이채훈 | 혜다 | 808쪽 | 32,000원
“모차르트의 음악이 달콤하기 때문에 그를 ‘온실 속의 화초’로 여기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그의 길지 않은 35년 인생은 눈부신 성공과 쓰라린 좌절, 영광과 고통으로 가득했다.”
‘신이 내린 천재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의 출생부터 사망까지 전 생애를 총망라에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저자는 MBC 스페셜 2부작 <모차르트: 천 번의 입맞춤, 마술피리>를 제작한 방송사 다큐멘터리 PD 출신으로, 이 책은 한국인 저자가 쓴 첫 모차르트 전기인 셈.
모차르트는 잘 알려졌듯 종교음악도 다수 작곡했다. 가장 잘 알려진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성곡인 레퀴엠(Requiem)을 비롯해 23세에 작곡한 ‘대관식 미사(Krönungsmesse)’ 등 15곡의 미사곡(예배곡)과 소프라노를 위한 모테트 ‘환호하라, 기뻐하라(Exsultate, Jubilate’ 등을 남겼다. 대부분 잘츠부르크 시절 탄생한 작품들이다.
책 맨 처음 유럽 각 나라의 ‘모차르트 당시의 화폐’ 단위부터 알려주며 범상치 않게 책을 시작하는 저자는 언론인 출신이라 그런지, 머리말에서 자신의 ‘게이트 키핑(Gage Keeping)’ 기준을 제시한다. 기존 평전들이 충분히 강조하지 않은 모차르트의 몇 가지 특징에 주목했다는 것.
첫째는 ‘음악 신동’으로부터 시작해 평생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그의 뒤에 가려진 ‘부지런히 노력한 음악가’로서의 면모다. 그는 “내가 쉽게 곡을 쓴다고 생각하면 오해”라며 “고금의 중요한 작곡가 중 내가 철저히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밝혔다고 한다.
둘째는 모차르트의 음악이 짧은 35년의 생애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무르익어갔다’는 점이다.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경이로운 재능을 보였는데, 해가 갈수록 음악의 깊이가 더해갔다.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나이가 들수록 원숙한 곡을 쓰지만, 모차르트는 천부적 재능 때문에 그 사실이 잊혀진다는 것이다.
셋째와 넷째는 모차르트가 ‘사랑’ 그리고 ‘자유’ 없이 살 수 없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음악에는 동요부터 아리아까지 사랑이 넘쳤고, 모든 사람이 존중받는 유토피아의 꿈을 노래하면서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의 시대정신을 오페라에 담아냈다.
위에서 소개한 슈바이처의 <바흐 평전>과 다르게 작품 분석보다는 모차르트라는 인간의 생애에 방점을 뒀다. 저자는 음악 비전공자라는 전공을 살려, 악보라는 ‘텍스트’보다 역사적 맥락인 ‘콘텍스트’를 파고들었다. 이에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의 역할, 아내 콘스탄체와의 사랑, 빈 시절의 경제 상황, 때이른 죽음의 원인 등 더 탐구해야 할 영역들을 기존 연구 성과에 더해 나름의 해석을 붙였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 초상화.
‘프리메이슨’이라는 제목으로 한 장을 할애한 것도 흥미롭다. 그는 ‘자유·평등·형제애’라는 이념에 공감해 1784년 12월 5일 프리메이슨 ‘선행’ 지부에 가입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의혹 투성이로 보이는 프리메이슨은 모차르트가 살던 도시 빈에도 여러 지부가 있었다. 음모론과 자주 엮이는 일루미나티 영향이 짙었던 ‘참된 화합’, 신비주의적 경향이 강했던 ‘아시아 형제’ 등이다.
당시 프리메이슨 지부는 정치적 성격이 강했고, 모차르트는 일반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정치의식이 높았다. 그의 성악곡에서는 프리메이슨 영향을 보여주는 대목들이 적지 않고, 프리메이슨 집회를 위해 많은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의 오페라 <후궁 탈출>,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여자는 다 그래>, <마술피리> 등에는 예외 없이 프리메이슨의 이상이 담겨 있다. 심지어 서양음악사(史) 최대 의문사(死)로 남은 그의 사인(死因) 중 독살설에도 살리에리와 함께 프리메이슨이 등장한다.
저자는 “모차르트가 프리메이슨에 가입한다고 해서 종교를 바꿀 필요는 없었다. 가톨릭 성직자 중에도 회원이 많았다”며 “교황청은 1738년과 1751년 프리메이슨을 이단으로 규정했지만, 교황의 명령은 빈에서 이렇다 할 효력이 없었다. 그는 정치 이슈를 주의깊게 관찰하고,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오페라와 가곡에 담았다”고 설명했다.
‘프리메이슨’ 바로 앞장 ‘대미사 C단조’에서는 모차르트의 종교가 소개된다. “모차르트의 종교는 물론 가톨릭이었다. 하지만 그는 교회의 권위를 추종하고 의례를 중시하기보다는 진실된 내면의 신앙을 더 중요시했다. 그는 가톨릭의 기득권을 제한하고 허례허식을 폐지한 요제프 2세의 개혁을 지지했다.”
모차르트가 ‘바흐’를 언급한 부분도 눈에 띈다. 그런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가 아닌, 그의 둘째 아들 ‘요한 엠마누엘 바흐(Carl Philipp Emanuel Bach, 1714-1788)’를 지칭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모차르트는 동시대 음악가였던 하이든에게 “엠마누엘 바흐는 아버지이고 우리는 모두 그의 자식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엠마누엘 바흐는 ‘북독일의 바흐’로 불리며 당대에 아버지 바흐를 능가하는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로 부르는데, 모차르트는 그의 아들 엠마누엘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로 지칭하고 있다.
저자는 알려진 자료들과 함께 모차르트가 가족이나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들을 통해 그의 짧고도 긴 35년간의 삶을 유려하게 풀어낸 후 말한다. “인간은 따뜻한 체온이 있기에 차가운 기계와 구별된다. 200여 년 전 세상에 나온 모차르트 음악은 우리가 결코 잃어서는 안 될 인간의 온기를 되살려준다.”
의사 슈바이처가 엄청난 바흐 평전을 썼듯, 위대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모차르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모차르트 음악은 너무나 순수해서 우주에 언제나 존재했던 것처럼 보인다. … 내게 죽음이란 모차르트의 음악을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모차르트 / 고 클래식
요즘도 모짜르트를 살리에리가 죽였다고 믿는 분이 계셔서 이렇게 퍼왔습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년 1월 27일 - 1791년 12월 5일)는 서양 고전 음악에서 가장 중요하고 지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작곡가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삶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지금은 오스트리아이지만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대주교 관할 구역이었던 잘츠부르크에서 궁정 음악가인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 페르틀 모차르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 루퍼트 성당에서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Johannes Chrysostomus Wolfgangus Theophilus Mozart)'라는 세레명을 받았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모차르트는 어렸을 때부터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 교육자 중 한 사람으로, 볼프강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모차르트의 음악적 능력은 빠르게 발달하여, 다섯살 때 이미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여행
레오폴트는 어린 볼프강을 데리고 연주를 다녔다. 볼프강은 눈을 가리거나 손을 뒤로 해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었으며, 그가 본 적이 없었던 어려운 악절을 갖고 즉흥 연주를 할 수 있었다. 한 번은 볼프강에게 병이 난 적이 있었는데, 레오폴트는 아들의 몸보다는 수입이 줄어들 것을 더 걱정했다.
모차르트는 1762년 뮌헨을 시작으로 3년 반 동안 아버지를 따라 비엔나, 다시 뮌헨, 만하임, 파리, 런던, 헤이그, 다시 파리, 취리히, 잘츠부르크, Donaueschingen, 뮌헨으로 연주 여행을 다녔다. 모차르트 일행은 1767년 말에 비엔나로 가서 1768년 12월까지 거기에서 지냈다. 잘츠부르크에서 1년 동안 지낸 다음 이탈리아로, 1769년 12월에서 1771년 3월까지, 1771년 8월에서 12월까지, 1772년 10월에서 1773년 3월까지, 세 차례 갔다. 모차르트는 이탈리아에서 그리고리오 알레그리의 《미세레》를 한 번 듣고 기억만으로 전부 써내려갔다.
1777년에는 어머니와 함께 뮌헨, 만하임, 파리로 갔는데, 파리에서 어머니를 여의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모차르트는 많은 음악가들과 만났는데, 그 중에서 1764-5년에 런던에서 만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비엔나
1781년 모차르트는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 주교의 작곡가로 들어가면서 비엔나로 옮겼는데, 얼마 못 가 쫓겨났다.
1782년 8월 4일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바람을 어기고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했다. 둘은 여섯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네 명이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두 명의 아이 카를 토마스(Karl Thomas, 1784-1858)와 프란츠 크사버 볼프강(Franz Xaver Wolfgang, 1791-1844) 모두 결혼하지 않아 자식이 없다.
1782년은 모차르트에게 행운의 해인데, 그의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이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 이후로 그는 자신이 쓴 피아노 협주곡을 스스로 지휘·협연하기 시작했다.
1782년부터 1783년까지 모차르트는 바로크 작품의 필사본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고트프리트 판 슈비텐 남작의 영향으로 바흐나 헨델과 같은 작곡가의 작품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모차르트는 뒷날 마술 피리나 교향곡 제41번에 등장하는 푸가 처럼 바로크의 형식을 띈 작품을 쓰게 된다.
비엔나에 살던 중에 모차르트는 요제프 하이든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하이든이 비엔나에 올 때면 같이 현악 사중주를 즉흥 연주하곤 했던 것이다. 1782년부터 1785년까지 작곡된 모차르트의 현악 사중주곡 중 여섯 개가 하이든에게 헌정된 것이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를 경외롭게 보았는데, 처음 모차르트의 작품을 듣고 레오폴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신 앞에 맹세하건대 당신의 아들은 내가 들어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곡가입니다. 그에게는 감각이 있고, 게다가 그는 가장 뛰어난 음악적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프리메이슨 단원이 되었다. 그의 마지막 오페라 마술 피리의 주제는 프리메이슨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모차르트는 내내 가난과 병에 시달렸다. 종종 돈을 못 받기도 했으며, 돈을 낭비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받은 돈도 모아지지 않았다.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와 《돈 조반니》를 썼던 비엔나의 집은 현재 보전되어 있다.
죽음
모차르트의 죽음과 그 원인에 대해서는 수많은 전설을 비롯하여 학설이 많다. 낭만적인 주장으로는 모차르트의 건강이 점점 약해지면서 그의 모습과 작품 역시 다가오는 죽음과 함께 쇄퇴하였다는 것이 있다.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모차르트의 마지막 해가 그에게 성공적이었으며, 그의 죽음이 가족들에게 충격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의 죽음이 급작스러웠다고 주장한다.
그의 죽음의 원인 또한 추측이 무성하다. 기록에는 그가 "무수히 난 좁쌀만한 발열"("hitziges Frieselfieber")으로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현대 의학으로 진단할 수 있는 것에 비해서는 충분한 사실을 말해주지 않고 있다. 사인에 대한 학설 중에는 선모충병, 수은 중독, 류머티스열, 덜 익힌 돼지고기에 의한 식중독 등이 있다. 환자의 피를 뽑았던 당시의 의술도 모차르트의 죽음을 앞당기는 데에 기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오전 0시 55분경에 죽었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완성하지 못한 작품 레퀴엠의 완성을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에게 맡겼다.
모차르트가 가난과 무관심 속에서 죽었다는 이야기와 달리, 그는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수입이 있었고 프라하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꾸준한 작곡 위촉을 받았다. 그가 말년에 전성기 때만큼의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으며 돈을 꿔 달라고 쓴 편지가 있지만, 그가 가난했던 것이 아니라 번 돈보다 더 많이 써버린 것이었다는 증거 또한 있다. 그는 알려진 것처럼 공동 묘지에 묻히지 않고, 1783년 법령에 따라 공립 묘지에 묻혔다. 다만 성 마르크스 묘지에 있는 그의 무덤의 위치는 알 수 없다.
1809년 콘스탄체는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과 재혼했다. 그는 모차르트의 추종자로서 그의 편지를 정리하고 전기를 썼다.
음악
모차르트는 다작을 한 작곡가로, 유명한 작품으로는 오페라, 피아노 협주곡, 교향곡, 현악 사중주 등이 있다. 그의 많은 작품이 그 당시에 있던 형식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피아노 협주곡만큼은 모차르트 혼자서 발전시켜서 대중화했다. 모차르트는 미사곡을 포함한 종교 음악과 실내악곡, 그리고 디베르티멘토와 춤곡과 같은 가벼운 곡도 썼다.
영향
모차르트 이후로 많은 작곡가가 모차르트를 경배했다. 조아치노 로시니는 모차르트가 "천재성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지식만큼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음악가"라고 말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그의 제자 페르디난드 리스에게 자신이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24번의 1악장의 주제만큼 대단한 선율을 생각해낼 수 없다고 말했다. 베토벤이 모차르트에게 보내는 경의로 쓴 작품이 있는데, 마술 피리의 주제에 의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두 개의 곡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위해 쓴 카덴자 등이 그것이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을 만나고 나서 그를 칭찬한 적이 있었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는 모차르트를 위해 《모차르티아나》를 썼으며, 구스타프 말러는 모차르트의 이름을 부르다 죽었다. 막스 레거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인 《모차르트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제11번에 의한 것이다.
쾨헬번호
모차르트의 작품을 정리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1862년 루트비히 폰 쾨헬에 의해서였다.
전설
모차르트는 전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작곡가이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가 남긴 레퀴엠이 스스로를 위한 것이라는 것인데, 많은 작가들이 이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글을 썼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한 학자들의 연구에는 방해가 되는 것이다.
유명한 것은 모차르트가 안토니오 살리에리와 경쟁 관계에 있었으며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게 독을 먹여 죽였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알렉산데르 푸슈킨의 연극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세르게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피터 섀퍼의 연극 《아마데우스》의 주제로 다뤄졌다. 《아마데우스》는 영화로 만들어져 여덟 개의 아카데미 상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섀퍼의 연극에서 모차르트가 천박하고 촌스럽게 그려졌다 하여 이를 거짓 과장이라 비난하였다.
다른 전설은 모차르트의 음악적 천재성에 대한 것이다. 모차르트가 다섯 살때부터 작곡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학자들은 그가 20세 이전에 쓴 작품은 너무 단순하여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아마데우스》에서 그려진 것처럼 모차르트가 영감을 받아 머릿속에서 음악을 완성한 다음 한 번도 고치지 않고 써내려가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그는 신중하고 노력하는 작곡가였으며, 그의 음악적 지식과 기법은 오랜 시간동안 이전 시대의 음악을 연구함으로서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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