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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인물

음악의 어머니 헨델

by 자한형 2024.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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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어머니헨델은 독일사람? 영국사람?/최홍섭

독일 할레 시장광장의 헨델 동상 옆에서 열리는 헨델축제의 한 장면. photo 할레헨델축제

요즘 음악계에서 별로 반기는 표현은 아니지만 과거 일본 잡지에서 바흐(1685~1750)음악의 아버지’, 헨델(1685~1759)음악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얼마 전 독일을 여행하면서 바흐가 태어난 아이제나흐와 27년간 살았던 라이프치히를 상세하게 둘러보았다. 아버지를 보는데 어머니를 외면할 수 있겠는가. 라이프치히에서 기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할레(Halle)를 찾아갔다. 인구 24만명인 할레는 잘레(Saale)강 가에 있다고 하여 독일에서는 할레-잘레로도 표기한다. 헨델(독일어로는 Georg Friedrich Händel, 영어로는 George Frideric Handel)이 태어나고 18세까지 살았던 곳이다.

장인 vs 거장, 대조적인 바흐와 헨델

바흐와 헨델은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두 사람은 한 달의 시간차를 두고 직선거리 100밖에 안 되는 곳에서 각각 태어났다. 바흐는 2명의 아내에게서 20명의 자식을 보았지만 헨델은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바흐가 대위법을 비롯한 음악의 뼈대를 세우고 특히 교회음악에서 두각을 나타낸 반면, 헨델은 46곡의 오페라와 32곡의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고 탁월한 비즈니스 능력까지 보였다. 보통 헨델의 음악은 HWV(Händel-Werke-Verzeichnis), 즉 헨델작품번호로 표기한다. 1번부터 42번까지 죄다 오페라일 정도로 헨델은 오페라에 힘을 쏟았다.

서울대 음대 민은기 교수는 바흐가 음악을 만드는 장인이자 독실한 종교인이었다면, 헨델은 쉽게 금방금방 곡을 만들었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공연 기획까지 맡은 종합예술의 거장이었다고 평가했다. 생전에 바흐는 독일을 벗어난 적 없이 약간 유명한 성가대 지휘자 겸 작곡자 정도로 평가받았지만, 헨델은 이탈리아와 영국으로 진출해 명성을 쌓고 나중에는 아예 영국으로 귀화했던 유럽의 스타였다.

실제 유럽 음악계에서는 헨델을 놓고 유대인은 어디를 가도 유대인이듯, 헨델도 독일인 뿌리가 어디 가겠느냐란 주장과 영국에서 훨씬 오래 살았고 귀화까지 했으니 당연히 영국인이라는 주장이 신경전을 벌인다고 들었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헨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독일 할레 헨델축제(왼쪽)와 영국 런던 헨델축제의 올해 포스터.

그는 진정한 유럽인이다

헨델의 생가(生家)를 찾아 할레 중앙역에 내렸다. 나지막한 언덕을 넘어 20분쯤 걸어가니 인파로 북적거리는 시장광장(Marktplatz)이 나타났다. 그 시장광장을 시장교회(Marktkirche)의 쌍둥이 첨탑이 내려다보며 압도했다. 시장광장에는 헨델의 동상이 높다랗게 서 있다. 1859년 헨델 서거 100주년을 맞아 독일과 영국에서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세웠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예술은 국적을 넘어 양국 모두에서 사랑을 받는구나 싶었다. 시장교회에서 뒤쪽 골목으로 300m 정도 들어가니 헨델이 태어난 헨델하우스가 나왔다. 나이가 지긋한 직원에게 헨델은 독일사람인가, 영국사람인가라고 슬쩍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헨델이야말로 진정한 유럽인(European)이야.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해.”

할레의 헨델하우스는 입장료 6유로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전시의 규모와 수준이 대단했다. 그러면서 런던에 있는 헨델하우스가 떠올랐다. 런던에도 브룩스트리트 25번지에 헨델하우스가 있다. 헨델이 1723년부터 사망하던 1759년까지 36년간 머물던 집으로, 2001년부터 박물관이 되었다. 그런데 최근 변화가 있었다. 197028세로 사망한 미국의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 때문이다. 그는 헨델하우스와 붙어 있는 23번지 건물의 꼭대기 층에서 1968년부터 1년간 머물렀다. 그래서 지금은 25번지와 23번지를 연결하고 헨델 당시의 시설을 가능한 복원해 이름을 헨델-헨드릭스 하우스라고 다시 지었다. 지미 헨드릭스는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일렉트릭 기타리스트로 주법(奏法)과 사운드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폭시 레이디(Foxy Lady)’를 비롯한 수많은 명곡을 히트시켰다. 하지만 헨델과 묶어 클래식과 팝의 위대한 뮤지션이 만났다라는 식으로 홍보하는 것은 약간 작위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공감대를 이룰 만한 요소가 있거나 둘이 직접 만나 합의했다면 모르겠지만, 왠지 어색하고 집중력이 떨어졌다.

그에 비해 할레의 헨델하우스는 헨델의 생가답게 온전히 헨델의 음악세계에 몰입할 수 있었다. 생가의 프리미엄이라고나 할까. 사실 바흐만 해도 라이프치히 토마스교회 맞은편에 있는 바흐박물관보다는 생가가 있는 아이제나흐의 바흐박물관이 훨씬 풍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헨델하우스의 경우 겉모습은 헨델이 살 때의 노란색을 유지했지만, 내부는 전면 개조했다. 관람은 2층을 먼저 보고 1층으로 내려간다. 헨델 얼굴이 나이에 따라 변하는 영상도 재미있다. 진귀한 악기도 많았고, 청음(聽音) 시설도 첨단이었다.

헨델의 아버지는 외과의사이자 이발사였다. 60세에 아내가 죽자 서른 살 연하의 도로테아 타우스트와 재혼했고 63세에 헨델을 낳았다. 헨델은 아버지를 따라 궁정에 갔는데 오르간 연주에 재능을 보이면서, 당시 시장교회의 성가대 지휘자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차호프의 가르침을 받았다. 헨델의 인생에서 음악을 배웠다는 기록은 차호프가 유일하다. 그러나 아버지는 헨델이 법률가로 성공하기를 원했고, 헨델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17세인 1702년 할레대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자신의 적성이 음악에 있음을 알고 결단을 내렸다. 어머니와 스승 차호프도 동의했다.

세계의 수도런던에 마음을 뺏기다

헨델은 1703년 독일 오페라의 중심지가 된 함부르크로 갔다. 1705년에는 알미라라는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스무 살 때였다. 1706년에는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로 훌쩍 건너가 4년간 공부하면서 본격적으로 창작을 했다. 17106월 독일로 돌아온 헨델은 하노버의 게오르크 루드비히 선제후(選帝侯·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할 권한을 가진 제후)로부터 카펠마이스터(궁정 음악감독)로 임명받아 세속 칸타타 아폴로와 다프네(HWV 122)’ 등을 선보이기도 했다. 헨델은 틈을 내어 고향인 할레를 비롯, 뒤셀도르프, 런던 등을 다녀왔다. 그러면서 런던에 마음이 빼앗겼다.

18세기 당시에 런던은 세계의 수도였다. 청교도 혁명의 영향으로 음악의 불모지였던 런던에도 오페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수많은 오페라 극장이 문을 열고, 대중도 돈만 있으면 오페라를 즐길 수 있게 됐다. 헨델은 런던이 블루오션이라고 보았다. 헨델은 웅장하고 진지한 이탈리아식 오페라가 영국에 자리 잡도록 했는데, 단기 방문했던 1711년에는 오페라 리날도(HWV 7a)’를 만들어 빅히트를 쳤다. 이 오페라는 울게 하소서란 소프라노 아리아로 더욱 유명하다. 2막 중에 적군에 사로잡힌 십자군 총사령관의 딸 알미레나가 자유를 염원하며 부르는 아리아인데, 헨델은 이 멜로디를 오페라 알미라에 이어 다시 사용하면서 대박을 맞았다.

헨델은 런던에서 리날도15회나 지휘하느라 하노버에 늦게 돌아왔다. 게오르크 선제후는 헨델이 괘씸했지만 그의 재능을 보아 용서해 주었다. 하지만 헨델은 27세가 되던 1712년 완전한 런던행을 결심했고, “잠깐 다녀온다는 말과 달리 이번엔 아예 돌아오지 않았다. 드디어 하노버의 게오르크 선제후는 17136월 헨델을 카펠마이스터 자리에서 해고했다. 헨델이 런던에서 돌아오지 않는데다, 당시 유럽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으로 진영이 갈라졌고 영국과 하노버는 서로 다른 진영이었는데 헨델이 영국을 지지하는 앤섬(교회 등의 합창곡)을 작곡했기 때문이다. 게오르크 선제후로서는 대단한 배신감을 느낄 만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몇 년 뒤 묘하게 재회했다. 그것도 하노버가 아니라 런던에서였다. 1714년 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앤 여왕이 죽자 후사(後嗣)가 없었고, 궁여지책으로 독일에 사는 6촌 동생인 게오르크 선제후가 조지 1세라는 타이틀로 영국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영어를 전혀 못하는 영국 왕이었다.

헨델의 초상화. photo 헨델하우스

왕의 노여움을 풀어준 수상음악

여기서부터 다양한 버전의 스토리가 존재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을 보자. 헨델은 자신이 독일에서 저지른 배신행위 때문에 불안했다. 그래서 수완 좋은 비즈니스맨답게 왕의 노여움을 풀어줄 기회를 찾았다. 1717717일 조지 1세의 유람선 행렬이 템스강을 거슬러 화이트홀에서 첼시까지 올라갈 때, 헨델은 자신이 만든 수상음악(HWV 348~350)’을 연주했다. 당시 왕과 귀족들은 큰 바지선을 탔고, 50명의 악사는 바로 옆의 작은 바지선을 타고 연주했다. ‘수상음악은 바로크시대 관현악 형식의 3개 모음곡인데 웅장한 분위기와 강렬한 리듬, 다양한 선율로 지금까지도 인기가 높다. 조지 1세는 음악이 무척 맘에 들어 3번이나 다시 연주하도록 지시했다. 8시부터 연주된 수상음악은 밤 11시에 마쳤다. 조지 1세 입장에서는 자신을 즐겁게 해준 헨델에 대해 다시 생각했으리라. 과거의 배신을 복수하기보다는 같은 독일 출신으로서 지금의 자신을 도와줄 적격자라고 판단했을지 모른다. 이후 헨델은 왕립오페라극단을 1719년에 세우고 운영하는 등 영국에서 입지가 갈수록 탄탄해져 갔다.

1727년 조지 1세가 서거하고 조지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헨델에게 대관식 음악을 요청했고, 이때 만든 작품이 대제사장 사독(HWV 258)’이란 걸작이다. 사독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운 대제사장이다. 이 음악은 지금도 영국 왕실 행사에 꼭 등장한다. 그리고 왕궁의 불꽃놀이(HWV 351)’를 만들게 한 것도 바로 조지 2세였다.

필자는 헨델의 작품 중에서 오라토리오 메시아(HWV 56)’와 함께 템스강을 배경으로 연주된 수상음악과 그린파크에서 초연됐던 왕궁의 불꽃놀이를 즐겨 듣는다. 영국에서 살 때 밤이 되면 템스강으로 달려가 타워브리지의 야경을 바라보고, 버킹엄궁에서 가까운 그린파크도 자주 거닐었다. 그때의 기분을 되살리는 데 그만이다. ‘대제사장 사독왕궁의 불꽃놀이를 만들면서 헨델은 완전한 영국인으로 자리매김했고, 드디어 172742세의 나이에 영국으로 귀화했다.

헨델이 영국으로 귀화한 이유

헨델이 왜 귀화까지 했는지에 대해서는 도널드 버로우즈가 쓴 헨델과 영국왕실교회(Handel and the English Chapel Royal)’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헨델은 1723년 조지 1세로부터 왕실교회의 전임 작곡가로 임명받았다. 문제는 왕실 여자들에 대한 음악선생 역할도 위촉받았는데, 당시에는 외국인이 왕실에서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귀화를 신청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당시 영국 오페라계의 분위기로 보아 헨델이 관객에게 좀 더 다가서려면 외국인 이미지를 벗어버릴 필요도 있었다. 당시 귀화 절차는 까다로웠다. 영국성공회(Church of England)에 들어가 국가와 군주에 대한 충성서약을 한 뒤 의회의 심사를 거쳐 국왕이 최종 재가를 하는 식이었다. 헨델의 귀화는 1727220일 조지 1세의 서명으로 효력이 발생했다. 독일인 헨델이 영국인 헨델이 된 날이었다.

하지만 헨델에게 어려움도 많았다. 2025년 가을엔 헨델 영화가 개봉된다. 오페라 극장이 많던 런던 명소 이름을 따 코벤트 가든의 왕이란 제목으로 앤서니 홉킨스가 주연을 맡는다. 이 영화는 헨델이 1741년에 불후의 걸작인 메시아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다룬다.(헨델의 메시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주간조선 제278820231218일 자 참조) 당시 헨델은 갈수록 경쟁자가 늘어나면서 운영하던 오페라 회사의 재정이 불안해졌다. 때마침 사회를 풍자하는 거지의 오페라라는 영어 오페라가 인기를 끌면서 이탈리아 오페라는 시들해졌다. 헨델은 잇단 흥행 실패로 타격을 입고 1737년 무렵에는 파산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헨델은 1741822일부터 914일까지 단 24일 만에 총 354쪽에 달하는 메시아를 완성했다. 세상의 영광과 수완에 집착하던 헨델이 신앙적으로 승화된 삶을 살게 된 계기로 보는 시각도 있다. 헨델은 완벽한 영국의 영웅이 되었다.

런던에서는 매년 헨델 페스티벌이 열린다. 헨델의 작품에 대한 재조명은 물론, 생전에 젊은 음악가를 양성하고 대중을 위한 음악을 썼던 그의 삶을 기리는 축제다. 헨델이 223일 태어나 414일 세상을 떠나서인지 보통 2~4월에 열린다. 하이라이트인 성악경연대회를 포함한 상당수 공연은 그가 자주 다녔던 세인트조지교회에서 진행된다. 이 교회는 노숙자들이 함께 쉴 수 있도록 다양한 자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고향 할레의 헨델 축제

헨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할레에서도 헨델 축제가 열린다. 헨델이 영국으로 귀화했다고 독일을 버린 것이 아니며, 좀 더 자유롭고 큰 시장에서 음악을 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할레 사람들은 보는 분위기였다. 1922년 처음 개최된 할레헨델축제(Händel-Festspiele Halle)는 보통 5월 말에서 6월 초까지 열린다. 올해는 524일부터 67일까지 진행된다. 몇몇 프로그램은 꼭 가보고 싶다. 525일 할레 성당에서 열리는 오라토리오 에스더(HWV 50)’가 먼저 눈을 당긴다. 531일 시장교회에서는 메시아가 공연되는데, 요즘 스타일이 아니라 1742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초연(初演)했을 때와 똑같은 형태와 악기로 진행된다고 한다. 흔치 않은 기회다. 531일과 69일 오페라홀에서는 세르세(HWV 40)’가 공연된다. ‘세르세는 감미로운 첫 곡인 라르고 옴브라 마이 푸(Ombra mai fu)’ 덕분에 한국인에게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다. 64일 저녁 7시 영국이 아니라 독일에서 듣는 수상음악공연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헨델은 영국에 정착한 뒤에도 간헐적으로 고향인 할레를 종종 다녀왔다. 1730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물론이며, 마지막으로 다녀온 것은 1750년이었다. 당시 네덜란드의 할렘과 헤이그를 거쳐 고향인 할레에서 잠시 지내다가 런던으로 돌아갔다. 헨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언제나 독일과 할레가 있었던 모양이다.

헨델은 말년에 백내장(추정)으로 고생했는데, 바흐처럼 영국의 돌팔이 의사 존 테일러로부터 수술을 받고 나서 실명(失明)했다. 그는 1759414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420일 금요일에 열린 헨델의 장례식에는 3000여명이나 참석했다고 한다. 헨델은 런던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안장되는 영광을 누렸다. 영국인들이 독일인 헨델을 여느 영국인 이상으로 존경하고 사랑했다는 뜻이다. 헨델은 진정한 유럽인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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