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힘/김별아
맡은 자리를 진심으로 받들고
성실히 일상을 지키는 사람들
그들이 침묵 속에 지켜보다
등을 돌릴 때 세상은 바뀐다
다시, 환절기다. 꽃 진 자리에 초록이 무성하고, 서늘하지도 뜨겁지도 않은 바람이 분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 그 익숙한 풍경 속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출퇴근길 대중교통과 일터와 거리에서 마주치는 평범하고 조용한 존재. 바로 그들이, 유월의 어느 하루 투표를 통해 세상을 움직였다. 승리의 환성 혹은 패배의 한숨과 함께 금세 잊히기 일쑤이지만, 진짜 전환은 항상 그 손끝에서 일어난다.
몇 해 전 도서관과 커뮤니티 시설에서 글쓰기 교실을 진행했다. 첫 수업이 열리는 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연락과 이런저런 실무를 도울 ‘반장’을 정하는 것이다. 서로 초면인 수강생들은 누구도 쉽게 나서지 못하고 조심스러운 눈빛만 주고받는다. 그때 나는 휴대폰을 꺼내어 ‘제비뽑기’ 앱을 켠다. 처음에는 다들 웃으며 가벼운 놀이처럼 받아들이지만, 나는 진지하게 버튼을 누르고 당첨자를 발표한다. 모두에게 반장을 맡을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결코 헛된 소리가 아니다. 놀랍게도, 그렇게 무작위로 뽑힌 반장은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성별과 나이, 학벌이나 직업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연히’ 맡은 자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의미를 부여하며 성실히 제 몫을 다했다. 나는 그것을 ‘평범한 사람의 특별한 힘’이라 부르련다. 자신의 책임을 기꺼이 감당하며, 주어진 의무를 묵묵히 수행하는 일상인의 힘.
그 대단하다는 정치란 누가 더 크고 선명하게 외치는가 하는 싸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다른 데 있다. 정당에 가입하거나 광장에서 부르짖지 않아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익명의 고요 속에서 한 표를 던진다. 결국 그들에 의해 정권이 바뀌었다. 환호와 절망, 기대와 체념이 교차했다. 누군가는 나이, 성별, 지역에 따라 색깔을 구분하며, 싸잡아 비난하거나 제 편인 양 우쭐한다. 그들은 고작 한 표씩을 가졌을 뿐이다. 하지만 선동도 충동도 아닌, 저마다 고민 끝에 신중하게 한 표를 행사했다. 이토록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힘을 모르거나 간과하는 데서 정치의 파행이 비롯된다.
말 없는 다수는 모른 게 아니다. 수차례 반복된 탄핵 시도와 방탄 입법, 정의를 가장한 위선과 폭주를 똑똑히 지켜보았다. 다만 분노를 터뜨리는 대신 시간의 법칙에 기대었고, 직접 목소리를 내는 대신 법과 제도의 힘을 믿었다. 그런데 그 신뢰를 먼저 저버린 쪽은, 뜻밖에도 정권을 쥔 자들이었다. 침묵을 오해했고, 조급증으로 기다림의 시간을 침범했다. 결국 시간과 법에 의지한 다수가 아니라, 그들을 의심해 신뢰를 배반한 권력이 스스로를 무너뜨렸다.
믿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건 무지하거나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어금니를 사리물고 고단한 노동과 남루한 삶을 견디는 것은, 무슨 영생불멸 천지개벽을 바라서가 아니다. 가족과 일, 지리멸렬한 일상이나마 무사히 지키면서, 범죄자는 감옥에 가고 피해자는 구제받는 ‘순리’의 실현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잠깐’ 동안 그걸 깨뜨린 것이 그다지도 큰 죄냐고 묻는다면 갈 길이 멀다. 무시를 넘어 모욕당한 분노를 모른다는 건 그만큼 민심과 동떨어져 있다는 증거와 다름없다.
계절은 머무르지 않는다. 초록이 붉어지고 시들어 떨어지는 것처럼, 변화는 늘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다가온다. 지금은 공수가 바뀌었을지언정 여야에 달리 해당하는 이치가 아니다. 묵묵히 침묵 속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등을 돌리는 순간, 세상은 바뀐다. 대의와 이념, 전략과 선전보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 힘을 지닌 평범한 이들이 이 모두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이다.
소통의 불협화음, 읽고 이해하는 힘이 필요하다/이재은
‘감잡았지?’는 과일을 잡았냐고 묻는 게 아니다. ‘조짐이 보인다’는 누굴 조진다는 게 아니다. ‘사생대회’는 죽고 사는 대회가 아니고, ‘유선상으로 연락 바람’은 유선상 씨에게 연락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본래 의미는 다들 아시리라 믿는다. 문해력 논란은 2024년 한국 사회의 최대 이슈 가운데 하나다. 문해는 문자로 된 기록을 읽고 거기에 담긴 정보를 이해하는 능력이다. 문해한 정도를 문해력(文解力)이라고 한다.
문해력 파장의 대표 사례는 많이 들어보셨을 터. 모 웹툰 작가가 사인회 관련 안내문을 올렸다. “심심한 사과를 전합니다.” 잇달아 댓글이 달렸다. 지루한 사과 왜 함? 재미없는 사과 따위 하지 말라고! ‘심심한’은 지루하고 따분하다는 정의 외에 매우 깊고 간절하다는 의미도 있다.
어느 개그 유튜브가 사이트에 공고를 올렸다. “모집 인원 0명.” 줄줄이 댓글이 붙었다. 0명 뽑는데 공지 왜 올림? 장난하냐? ‘0명’은 한 자릿수 인원을 모집한다는 뜻이다. 월요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했다. “토일월, 사흘간 연휴를 즐길 수 있습니다.” 항의 댓글이 올라왔다. 4일이 아니라 3일 아님? 3일을 왜 사흘이라고 씀? 사흘을 4일로 오해하거나 숫자로 표기하면 될 걸 굳이 그런 단어를 써야 하느냐는 불만이었다. ‘사흘’은 3일의 순우리말 표현이다.
‘금일(今日:오늘)’을 금요일로, ‘중식(中食:점심)’을 중국 음식으로, ‘십분(十分:충분히)’을 10분으로, ‘고지식(융통성이 없다는 순우리말)’을 높은(高:높을 고) 지식으로, ‘가제(假題:임시 제목)’를 갑각류로 착각한다는 사례가 곳곳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병원이나 약국에서 처방된 투약설명서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보험 규정을 해석하지 못하는 등 생활에서 불편을 겪는 사람들도 점점 늘고 있다고 한다.
학생들의 문해력 실태를 다룬 방송이 있었지만 비단 학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많은 성인이 글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은 통계로도 확인할 수 있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발표한 ‘제3차 성인문해능력조사’(2021)에 따르면, 일상에 필요한 문해력을 갖추지 못한 ‘수준1’(초등1,2학년)은 4.5%, 기본적인 읽기와 쓰기, 계산 등은 가능하지만 활용이 미흡한 ‘수준2’(초등3~6학년)은 4.2%다. 전체 성인의 8.7%가 한국어의 뜻과 맥락을 제대로 짚지 못한다는 것이다. 소통의 불협화음이다.
무라타 사야카의 소설 <컬처쇼크>에는 ‘균일’의 세계에 사는 부녀가 나온다. 아버지는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은 날이면 더더욱 예민해져서 “똑같은 빌딩, 똑같은 광경, 똑같은 음식. ‘균일’은 이제 질렸어!”라고 소리 지른다. 반면 ‘나’는 나란한 치아처럼 동일한 광경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를 따라 옛 도시인 ‘컬처쇼크’에 온 아이는 한밤중 몰래 호텔에서 나왔다가 화려한 옷을 입은 노파를 만난다. 놀란 아이는 ‘균일어’로 말하는데 표현되는 건 “아-----! 아-----” 뿐이다. 노파가 인상을 쓰자 아이는 애니메이션에서 본 멸망한 옛 도시의 언어를 가까스로 생각해 낸다. 균일에서 왔다고 말하자 노파는 가엾은 표정으로 아이를 본다. 그러곤 자기가 먹던 음식을 내미는데 아이는 맛이 뭔지 모른다고, 맛이란 건 어쩐지 기분 나쁘다고 대답한다. ‘균일’에서 먹는 음식은 맛도 냄새도 없기 때문이다. 노인은 한숨을 쉬며 말한다. “문화를 모르는구나. 불쌍한 녀석이로군.”
문화는 사회에서 습득되는 행동이나 생활에서 얻어지는 물질적, 정신적 소득이다. 여기에는 언어, 풍습, 종교, 학문, 예술 등이 포함된다. 특정 지역에서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비슷한 문화를 향유하고 소통하기 마련이다. 그 첫 단추가 ‘언어’가 아닐까. 균일의 세계에서 온 아이가 “아-----! 아-----”를 언어로 인식하는 건 오감을 표현할 기회도, 감정을 드러낼 기회도 없어서였다. 그 세계에서는 똑같은 얼굴, 똑같은 말씨, 똑같은 교육을 당연하게 여겼다. 다름을 읽어낼 수 없는 사회에서는 소통이 무의미하다.
격변하는 현대사회에서는 다양성의 인정이 필요불가결하다. 사회가 다방면으로 변화하고 확장됨에 따라 문해력의 범위도 확대되고 있다. 텍스트를 넘어 영상, 춤, 음악, 키오스크까지 다수의 콘텐츠를 접하고 표현하는 능력까지 문해력의 범주에 속한다. 사회, 문화뿐 아니라 심리 영역에서도 읽고 이해하는 힘은 중요하다. 지금은 ‘금일과 중식, 십분’이지만 앞으로 어떤 단어가 ‘불협화음의 불씨’로 떠오를지 모른다.
문해력 저하 원인에 관한 일각의 분석은 이렇다. 독서 부족, 스마트폰 과다 사용, 유튜브 및 숏폼 중독, 한자 공부 경시의 폐해 등등.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짧고 자극적인 단어에 도취 돼 있고, 점점 자기표현 기회를 잃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어떻게 이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가장 쉬운 방법은 책 읽기다. 책은 처음, 중간, 끝이 있고 발단부터 결말까지의 모든 과정이 들어있다. 흐름을 파악하며 한 세계를 만나기에 더없이 적당한 매체다. 세상에 대한 넓은 시야와 비판적 사고를 기르고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기에 독서만큼 효율적인 건 없다. 타인의 삶을 간접 경험하며 자신의 관점을 돌아보고 자기 성찰의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닐 것이다. 실천이 어렵다면 작은 독서 모임에 참여해보는 건 어떨까. 많이 읽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양보다는 질. 여기서 멈춤이 아닌 한 걸음 더. 깊이 있는 독서와 함께 하는 독서가 불통을 소통으로, 불협화음을 고운 화음으로 만드는 정도(正道)일 것이다.
80년대 국민들의 문화인식/이보형
우리 전통문화의 전승발전이라는 측면으로 봤을 때 지난 60년대 및 70년대에 비교하여 보면 80년대에 들어서 현저하게 차이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 문화의 저변에 흐르는 전통문화에 대한 온 국민의 새로운 인식의 환산이다 할 수 있다. 전통문화의 전승발전을 위한 제창이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60년대 70년대에도 이런 제창은 고조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지도층이나 국민들이 전통문화 전승발전 위한 행위에 대한 당위성의 긍정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고 실제 말과 행위에 피리가 있었다.
80년대에 들어서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은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국력의 신장에 따라 우리는 중진국으로 발판을 굳히고 선진국의 대열을 향하여 매진하고 있지만 자주문화의 선진화가 없이는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없는 것이고 또 자주문화는 전통문화에 바탕을 두고 세계문화 속에 오늘의 한국문화를 창조하는 것일진대 이를 위해서는 관념적인 이념의 제창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전통문화와 세계문화의 균형 있는 체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편협한 복고주의로 말미암은 외래문화의 배격이라든가 외래문화의 맹목적 추종에 따른 전통문화의 멸시와 같은 문화의 불균형에서 벗어나 전통문화와 세계문화의 균형 있는 조화된 문화의 체득 속에 오늘의 자주문화 창조행위가 바람직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국민들의 자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86 아시안 게임에서 성화봉송, 개폐회식, 문화축전 등 많은 문화행사에서 수많은 전통민속놀인 전통공연예술이 공연되었고 또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음악 무용 연극분야의 많은 창작물이 공연된 것도 이러한 자주문화 창조의식에 대한 국민적 자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화의 체득은 이념이나 구호로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장기간의 실제적인 문화학습으로 이루어진다. 이번 86 아시안 게임의 성공은 우리 국민들에게 여러가지 많은 성취감을 불러 일으켰고 이것이 국민적 자긍심을 심어주고 있지만 자주 문화창조의 측면에서 볼 때 균형있는 문화 축적이 절실한 것이었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균형있는 문화학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우리 국민들의 문화적 불균형은 외래문화의 미흡에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전통문화의 미흡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80년대에 국민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 것은 이와 같은 전통문화의 가치인식뿐만 학습을 통한 체득으로 문화적 불균형을 극복해야 한다는 자각이다. 86 아시안 게임 문화행사 가운데 국민들이 가장 많이 참가한 것이 성화봉송 축제, 서울놀이마당 전통예술공연, 국립국악원 국악의 향연과 같은 공연이었었던 것이라든지, 여러 곳에서 개최하는 문화강좌에서 박물관대학, 서예, 묵화, 국악실기, 탈춤실기, 전통무용실기와 같이 전통문화 분야의 강좌에 맡은 국민들이 참가하는 것이라든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각도 지방 민속예술경연대회, 향토축제에서 국민들의 호응이 컸던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런 국민들의 균형있고 조화된 문학의 인식과 체득을 위해서 제2세 국민교육에 현명한 배려가 있었던 점, 예술의 전당을 비롯하여 지역마다 문화예술 센터와 또 문화발전연구소와 같은 문화예술자료 센터를 설립하고 있는 점, KBS국악관현악단,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과 같은 전통예술 공연을 위한 단체를 창단한 점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다.
우리는 이런 그릇을 훌륭하게 활용하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제2세 국민을 교육하는 교육대학에서는 피아노와 데생 실기의 의무화에 그치지 말고 가야금과 수묵화실기의 의무화까지 확대한다든가, 지역마다 세워지는 문화센터에는 향토전통문화 학습기구를 부설한다든지, 전통 예술공연이 특수 단체에 한정하지 앓고 국민들이 스스로 학습하여 공연하도록 하고 이들 향토예술 공연을 위한 마당놀이 공연장이 지역마다 있어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주도하도록 한다든지, 각 지역의 문화센터에 전통문화자료실, 박물관을 구비하도록 하는 것이다.
전통문화와 세계문화의 균형 있는 국민들의 문화체득은 80년대 자주문화창조의 밑거름이라 할 것이다.
예술의 효용성에 관한 생각/김연정
창작활동을 시작하고 예술이 무엇인지 알아보려 할수록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느낀다. 이 기록이 쌓여 내가 예술가로서 성장하는 여정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내가 할 일은 나의 생각과 작업이 편협한 것 혹은 실패한 것이 될 거라는 두려움은 내려놓고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작업을 하면서 이어지는 여러 활동들을 통해 도움이 될 피드백과 영감, 자극을 받고 싶다.
처음 문화매거진에 글을 쓰기로 했을 때, 작업자로서 어떤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내 글의 효용성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내용을 어떤 말하기의 방법으로 전달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은 곧 내가 예술가로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지식이 얼마나 해박한가에 대한 자문으로 이어졌다. 비약하자면, 내가 원했던 일이었으나 마치 입시생이 대학 생활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스스로 받았다.
지나친 겸손과 자기(작업에 대한) 비하는 피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이성이 지시하는 행동 지침일 뿐이었다.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솔직한 심정으로는 내가 아직 예술가인지 아닌지조차 잘 모르겠다는 것. 아니 그보다는 내가 하고 있는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인지, 그럴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더 필요했다.
작업에 대한 부족한 확신은 서두에서 말했던 글쓰기의 효용성에 대해 고민했던 것과도 맥락이 이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글도 그림도, 어떤 효용성을 가져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은 습관적이었다. 예술작품과의 만남의 가장 숭고한 목적은 관람자 혹은 독자의 생각을 확장해 주고 어떤 깨달음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라는 믿음은 미장센 혹은 아름다운 문장만으로도 마음속에서 큰 울림으로 존재하고 있던 영화나 소설의 위대함을 뭉툭하게 깎아내린다. 누군가 예술의 가치에 대해 의문 품은 질문을 던질 때 속으로 삼켰던 ‘프린세스메이커 2’의 딸의 대사인 “예술은 마음을 풍족하게 해줘요”와 같은 말들도 결국은 예술의 효용적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에 동의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수전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으로 만난다는 것은 특정한 경험을 얻는 것이며 해답을 듣는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술은 무언가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무언가이며, 세상에 관해 말해주는 텍스트나 논평이 아니라 세상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또한 예술이 줄 수 있는 도덕적 쾌감이자 역할은 우리의 의식에 지적인 희열을 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예술이 지나친 도덕적 불쾌감을 주는 경우에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태도는 여전히 어떤 쪽으로도 확신이 들지 않는다. 끔찍하게 아름다운 장면이나 문장을 들이밀면서 감당 가능하기에 버거운 불쾌한 이야기를 펼쳐 놓을 때, 그들이 헤집어놓은 마음을 차곡차곡 정리하며 오래도록 곱씹어 본다. 예를 하나 들면 영화 ‘은밀한 가족(감독: 알렉산드로스 아브라나스)’가 그렇다. 이것은 좋은 이야기일까, 불필요한 이야기일까. 이런 이야기는 영화로써 다루어졌을 때 더 가치가 있을까 아니면 고발 목적을 가진 다큐멘터리 형식이어야 했을까.
반면,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낼 수 있는 이야기들도 존재한다. 내게 있어서 그런 이야기들로는 ‘판의 미로’, ‘렛미인’, ‘경계선’ 정도가 있다. 공통점을 생각해 보면 아름다운 장면들과 공포의 속성이 혼재되어 있다는 것이겠다. 그리고 끔찍하게 불쾌한 속성, 감당하기 힘든 속성은 비현실적 존재와 세계 속으로 그 짐을 떠맡긴다. 그러기에 도덕적 불쾌감은 신비로운 속성을 얻어 다른 것으로 변화한다. 받아들일 수 있는 아름다움으로 존재할 수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는 작업자로서 어떤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한 결론을 이렇게 정리했다. 구체적인 독자는 상상하지 말 것. 나의 이야기를 진심을 담아서, 기왕이면 아름다운 문장으로 재밌게 쓰도록 노력할 것. 무엇보다 글은 반드시 나를 위한 것일 것.
창작활동을 시작하고 예술이 무엇인지 알아보려 할수록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느낀다. 이 기록이 쌓여 내가 예술가로서 성장하는 여정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내가 할 일은 나의 생각과 작업이 편협한 것 혹은 실패한 것이 될 거라는 두려움은 내려놓고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작업을 하면서 이어지는 여러 활동들을 통해 도움이 될 피드백과 영감, 자극을 받고 싶다. 그렇게 성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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