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목 - 박성룡 -
과목에 과물(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뿌리는 박질(薄質) 붉은 황토에
가지들은 한낱 비바람들 속에 뻗어 출렁거렸으나
모든 것이 멸렬(滅裂)하는 가을을 가려 그는 홀로
황홀한 빛깔과 무게의 은총을 지니게 되는
과목에 과물(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 흔히 시를 잃고 저무는 한 해, 그 가을에도
나는 이 과목의 기적 앞에서 시력(視力)을 회복한다.
- <신풍토>(1959)-
해 설
[개관정리]
◆ 성격 : 서정적, 사색적, 인식적, 관조적
◆ 표현 : 경이로움과 감탄적인 어조
투박한 한자어와 '사태, 경악'과 같은 돌발적 시어를 사용하여 신선한 느낌을 표현함.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제재 : 과목
◆ 주제 : 자연에서 느끼는 경이로움과 감탄, 자연의 생명력
[시상의흐름(짜임)]
◆1연 : 과목이 과일이 열리는 경이로움
◆2연 : 모든 시련을 이기고 자라는 뿌리와 가지의 모습
◆3연 : 소멸의 계절에 성숙하는 과일을 통해 느끼는 신의 은총
◆4연 : 과일이 열리는 경이로움
◆5연 : 사물과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발견
[이해와감상의 길잡이]
<과목>의 5연으로 된 시이지만, 1연이 4연에서 다시 한번 반복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발단이자 동인(動因)이 되고 있는 것은, 바로 1, 4연이며 이것이 바로 시의 핵심이다. 하나의 발견 - 그 시적인 경탄과 경이로움이야말로 이 시가 갖고 있는 정서적 충격이라 하겠다. 가을에 과일들이 탐스럽게 열린 것을 '사태'와 '경악'으로 표현하고 있다. 과장적 표현처럼 보이는 이 시의 묘수(妙手)는 바로 이 충격 요법이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사물에 대한 새로운 발견의 기쁨이 이 시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 시에서도 박성룡의 독특한 시작법이 나오는데, '사태'와 '경악'이라는 단어는 신선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매우 당돌한 표현이나 시어로 적합지 않게 느껴지는 이런 용어가 적중했을 때, 신선한 느낌은 배가(倍加)된다. 이 시는 자연의 신비 앞에 눈 뜬 자의 무한한 희열로 빛나고 있으며, 외경의 생각까지 느끼게 한다. 마지막 5연의 '나는 이 과목의 기적 앞에 시력을 회복한다.'에서 보듯이 자연의 질서와 섭리를 인식한 '시력의 회복'에서 또 한 번 삶의 영원한 길을 되찾는다. 그것은 우주와의 일체감에서 오는 진리의 길이기도 한 것이다.
■ 더 읽을거리
이 시는 박성룡 시인이 1959년에 발표한 '과목'이라는 작품이다. 의도적으로 한자어를 많이 쓴 것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한자어의 적절한 사용은 이 시 전체를 '과물(果物)'의 무게만큼이나 중량감 있는 것으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첫 행의 '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에서의 그 '사태'라는 상황이 이처럼 실감날 수 있을까? '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사태'인 것이며, 두 번째 행의 '경악'이라는 시어도 이처럼 경악스러울 수가 없다.
'경악'이라는 낱말이 이 시에서처럼 하나의 충격으로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그 어떤 탁월한 감각적 표현 이상으로 이 표현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충격의 칼이다.
'박질(薄質)'이라든가 '멸렬, 황홀, 은총, 기적, 시력, 회복' 등의 다른 한자어들도 적재적소에 들어 박혀서 눈부시게 살아 움직인다. 요즈음에도 적절하지 못한 한자어의 남발로 한 편의 시를 살리기는커녕 오히려 망쳐 버리거나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이 되어 그 시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피곤하게 만드는 것을 생각하면 이 시에서의 한자어 사용은 놀랄 만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시가 지니고 있는 특성과 난해성의 극복 문제는 시의 소외화와 더불어 아직도 다각적으로 운위되어야 할 성질의 것인데, 이처럼 쉽고 감동적이면서도 한 편의 시로서 훌륭히 형상화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람직한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멸렬하는 가을'에 '홀로 황홀한 빛깔과 무게의 은총을 지니'는 과목의 '경악'스러운 '사태' 앞에서 '흔히 시를 잃고 저무는 한 해, 그 가을에도' '이 과목의 기적 앞에' 잃었던 '시력'을 다시 '회복'하고 나는 다시 경건한 자세로 펜을 잡는다. -출처:어느 시인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