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목의 가을 맹난자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면서 마음에 따라와 번지는 가을, 깊숙이 그 속에 들어앉고 싶다.
거리를 거닐면서도 은행나무 잎을 살피게 되는 버릇, 야위어 가는 푸른빛의 퇴색을 심장深長하게 바라보게 된다.
미망迷妄에 갇힌 어느 젊음이 완성으로 이르는 길목 같아서다.
해질 무렵, 시월 넷째 주 올림픽공원을 찾았다.
눈에 가득 들어차는 가을, 단품이 곱다. 원두를 잘 끓여낸 커피색의 갈참나무, 왕벚나무의 선홍빛 단풍도 곱지만 내가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 것은 은행나무의 노란 단풍이다. 칙칙하던 녹음 속에서 깨어나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 내명內明한 어느 현자賢者를 만난 듯싶어 괜히 가슴이 설렌다.
이맘때가 되면 나는 연례행사처럼 은행나무 아래를 서성이곤 한다. 무엇인가 가슴에 차오르는 생의 충만감을 누르며 노랗게 물든 그 나무 밑을 즐겨 왕복하는 것이다. 작년에도 그랬고 내년에도 그럴 것이다. 아름답게 제 빛깔을 완성한 그 은행나무 잎들이 떨어지고 나면 그야말로 내 한 해는 다 가고 마는 느낌, 생존을 확인하는 교차 지점이기도 하다.
올림픽공원 남문 밖이다.
길가에 줄지어 선 은행나무들의 저 늠름한 자태, 리듬을 타고 나뭇잎들이 물결치자 거기에 카라얀의 뒷모습이 겹쳐진다. 그의 지휘봉을 따라 황금비가 노랑머리의 음표로 솨르르 쏟아져 내린다.
석양 속으로 가벼이 가벼이 날리는 영혼.
눈앞에 펼쳐지는 이 장관을 어떻게 전하랴?
그때 전광석화처럼 운문雲門선사의 한 마디가 머리를 스쳤다.
'체로금풍體露金風.'
'나무가 시들고 잎이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하고 제자가 물었을 때 운문은 '가을바람에 본체本體가 드러나지' 하고 이 넉자를 썼던 것이다.
가을바람에 몸만 말고 마음의 비늘도 떨어내야 하리라.
신의 탈락脫落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어지 본체[진리]를 보랴.
요즘은환幻인 줄 알면 곧 여윈다는 『원각경』의'지환지이知幻卽離'를 가슴에 새기면서 곱씹고 있는 중이다. 자의식이 그려놓은 허깨비[관념]에 속지 말라는 말씀을.
우수수 또 한 차례 황금비가 쏟아진다. 하늘의 무슨 기별奇別같다. 그것들은 노랑나비 떼처럼 공중을 선회하다가 사뿐히 내 어깨 위로 내려앉는다. 그것을 감각感覺하는 나라는 존재는 분명 여기 있는데 가합假合된 이 존재는 정말 있는 것일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것은 생명의 낙하落下가 바로 눈앞에서 펼쳐진 때문이다. '현상적現象的인 나'라는 존재가 없다는 것은 아닐 터.
'나'라고 하는 관념이 실체實體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관념의 허상虛像과 주객主客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오롯이 드러나는 본체自性, 운문은 그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등 뒤로 내리쬐는 햇볕이 따스하다.
이런 날은 햇볕에 나와 옷을 말리다가 이를 옷 속에 다시 넣어 입었다는 양관良寬선사가 문득 그리워지기도 한다.
설사 하며 임종에 이르러 그가 내놓은 말.
겉도 보이고
속도 보이며
떨어지는 단풍이여!
나는 이 시구를 좋아한다. 고매한 정신과 무상한 육체의 탈락. '떨어지는 단풍이여'로 언하言下에 드러나는 진면목眞面目.
'체로금풍'이다. 이렇게 주객을 떼지 않고도 분별을 떨쳐 버린 자리. 이런 자유인들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소쇄한 가을바람에 본체를 드러내는 저 나무들.
저녁노을에 물든 은행나무가 금색 옷을 입으신 대일여래大日如來로 다가온다. 거룩한 광명의 현현顯現, 나는 그 앞에 잠시 망부석이 되었다.
눈 시린 이 만목滿目의 가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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