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여행 – 프롤로그 김훈
나는 자전거가 좋다
어디를 여행하면 속도에 반비례로 사물과 교감한다.
비행기보다는 버스가,투어 버스보다는 로컬버스가, 버스보다는 자전거가, 자전거 보다는 걷기가 더 많은 사연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걷는 것은 한계가 있고 가장 적합한 수단은 자전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게다가 자전거는 공해도 없이 자가발전 내 힘만으로 가는 것이니 다른 사람을 위협하지도 않으면서 조용히 페달을 밟는 대로 나아간다.
내 자전거 타는 실력은 일천하지만 자전거타기는 내게 활력을 준다.
씽씽 타고 가노라면 내가 자전거의 일부인지 자전거가 나의 일부인지 혼란스럽다.
김훈 말하기를 "빛과 바람에 몸을 절여가며 영일만 바닷가를 달릴 적에, 몸 속에서 햇덩이 같은 기쁨이 솟구쳐 올라."아아아" 소리치며 달렸다. 삶을 쇄신하는 일은 결국 가능할 것이었다. 길이 아까워서 천천히 가야 하는데,
길이 너무 좋아서 빨리 가게 된다. 뒤로 흘러가는 바다와 앞으로 흘러오는 바다의 길을 "아아아"소리치며 달렸는데, 새로운 시간의 바다는 끝도 펼쳐져 있었다."
지난 가을
안양천변 자전거길을 달려가며 멋진 가을 단풍에 취해 정말 길이 아까워서 천천히 가야 하는데. 길이 너무 좋아 빨리 가게 되었다. 너무나 생생한 자전거 타기의 즐거움이다.
김훈의 글은 그리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음미할 수록 깊은 울림이 있는듯 하다.
깊은 사유 긑에 나오는 글인듯 때로는 언덕을 올라가는 자전거처럼 힘겹다. 때로는 직관적인 글로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가듯 유연하다.
"겨울 섬진강은 적막하다. 돌길에 자전거가 덜커덕거리자 졸던 물새들 놀라서 날아오른다. 겨울 강은 흐름이 아니라 이음이었다. 강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인간의 표정으로 깊이 가라앉아 있었고, 물은 속으로만 깊게 흘렀다. 가파른 산 굽이를 여울져 흐르는 젊은 여름 강의 휘모리 장단이나, 이윽고 하구에 이르러 아득한 산야를 느리게 휘돌아나가는 늙은 강의 진양조 장단도 들리지 않았다. "
나도 자전거타고 의왕부터 안양천을 돌아 한강합류하는 목동까지 다시 한 번 가볼까나!
내겐 비록 풍륜처럼 멋진 자전거는 없지만 삼천리 자전거만으로도 충분하다.
빠름만을 강조하는 이 시대에 자전거의 속도가 내 마음에 꼭 든다.
『삼국유사』에는 원효가 “이 세상에 얽매이지 않았고 거침이 없었다.”라고 쓰여 있지만, 여자 앞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원효는 사랑의 깃발을 당당히 내세우면서 여자한테 가지 못하고, 여자 집 앞에서 일부러 개울에 빠져서 옷을 적시고, 옷 좀 말려달라는 구실로 여자한테 접근했다. 이것은 속세 대중이 하는 수작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옷을 말리자면 옷을 벗어야 하는데, 설총은 그날 밤에 잉태되었다. 원효 스님 애인 집은 지금 경주 박물관에서 남천(南川) 개울가를 따라 내려가다가 35번 국도와 만나기 직전, 반월성 건너편에 있었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은 에세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교범과 같다. 수려한 문체로 사물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빚어내는 그의 글은 치유 행위에 오히려 가깝다. 밥벌이와 낭만과 이상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그의 글은 비체계성 위에서 인간적인데, 그의 글이 헤매는 종이 위 방황은 복되다.
살아가면서 여행 한 번 떠나기 힘들다. 삶이 무거워서인지 익숙해서인지 알 수 없지만 바로 여기 삶과 길 위의 삶의 무게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행을 가지 못한다면 삶의 무게에 짓눌렸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삶이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여행 길 위에서 만나는 숲과 문화재와 방언과 사람 속에 리얼리즘이 있다. 나의 몸이 바로 여기에 매여 있으면서도 여행을 그리워하는 건 DNA속에 오백만년 전 구석기 유목민의 유전자가 있기 때문인데, 이 유전자와 바로 여기 삶을 조화이루는 게 리얼리즘이다. 바로 여기 삶과 길 위의 삶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 둘을 모두 끌어안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이곳저곳을 간신히 왕복할 수 있다.
부석사와 화개마을, 삼국유사 속 원효와 서울의 산과 일산신도시의 러브호텔을 바라보는 김훈의 시선은 똑같이 삶의 높이에 위치한다. 자연을 사랑하지만 매몰되지 않고 인위를 비켜가려 하지만 긍정하는 그의 글은 36.5도 사람 체온만큼 정직하고 길 위의 모든 사건을 해석하는 필터는 휴머니즘과 리얼리즘으로 따뜻한데 배고픈 이에게 하늘을 말하는 대신 밥을 주는 것이 휴머니즘이고 리얼리즘이다. 산과 러브호텔은 인간에게 똑같이 필요하고 다르게 작용하지만 틀리지는 않다.
공자, 장자, 에피쿠로스, 푸코 등 동서고금의 철학도 의풍마을의 밭가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삶은 늘 길 위에 있고 바로 여기에 있으며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사는 일은 어렵지도 쉽지도 않지만 어렵고도 쉽기도 하다. 종횡하는 사상의 씨줄과 낱줄로도 엮지 못하는 삶은 결국 몸이 빚어내는 작품인데 이것은 바로 여기와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 자연에서 인간으로 다시 인간에서 자연으로. 자연과 인간이 본디 구분되는 것이던가 아득한데, 이 역시 오로지 몸만이 답을 지닌듯하다. 몸이여, 밥 벌어먹으며 때로는 꿈을 꾸는 나의 삶이여. 이토록이나 어지러운 세계에서 삶으로 말하는 김훈의 자전거 여행은 조선시대 막사발처럼 귀해서, 그의 글을 읽는 일은 복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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