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리 전쟁 이어령
가을은 전쟁을 치른 폐허다. 그리고 가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침몰한다. 하나의 모반(謀反),
하나의 폭풍. 들판의 꽃들과 잎과 열매와 모든 생명의 푸른 색채가 쫓긴다. 쫓겨서 어디론가 망명한 것이 아니라 가을은 그 자리에서 침몰한다.
고추잠자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여름이 기울어가는 것이다. 잠자리들은 결코 소리를 내며 날지 않는다. 무슨 웃음소리를 내는 일도 없다.
그런데도 마을로 잠자리 떼가 모여들어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것을 보면, 꼭 숲 속에 숨어 있던 복병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나타나는 것 같다.
아이들은 댑싸리비를 들고 이 잠자리 떼를 쫓아다닌다. 밀려가는 잠자리 떼를 따라서 아이들의 패거리는 이동해간다. 파란 하늘 위에 너울거리는 투명한 잠자리의 날개에는 가을의 비정이 묻어 있다.
그것은 단풍이 든 나뭇잎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 역시 처참한 아름다움이다. 그것이 투명해 보일 수록, 하늘이 높고 푸를 수록 아이들의 마음을 잔인하게 한다. 온종일 기진맥진할 때까지 잠자리 학살은 계속되는 것이다.
나의 비는 짧았다. 조그만 높이 떠도 잠자리를 잡을 수가 없다. 무중력 속에서 떠다니는 것처럼 잠자리 떼에겐 체중이 없다. 눈앞에 얼씬거리다가도 비를 휘두르면 금시 높은 허공으로 상승해버린다.
공간을 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물거품처럼 떠오르는 것이다. 약이 오른다. 이유 없는 복수심이 불을 지른다.
나는 긴 대나무에 비를 매어서 다시 하늘 위에 뜬 낙엽들에 도전한다. 한 마리..... 두 마리.....비 밑에 잠자리가 떨어진다. 그것을 줍는다. 아까까지
파닥이던 날개를 잡으면 이상한 쾌감이 가슴속으로 번져간다.
잠자리를 잡으면 아이들은 으레 싱긋이 웃는다.
정복의 오만성까지도 깃들인 차가운 웃음.
잔인하고, 비정적이고, 원시의 밀림에서나 웃는 그런
웃음일 것이다. 아이들은 짐승 같아진다. 흰 이빨을 드러내고 소리 없이 웃는 그 웃음은 바로
'가을의 웃음'이다.
저항하지 못하고 가을은 풀이 죽었다. 꿈틀대던,
노랗고 빨갛던 검은 꼬라지마저도 철선처럼 굳어지면, 입가에 웃음이 사라진다. 나는 알고 있다.
잠자리를 잡는 그 쾌감은 얼마나 짧은 것인가를...
저항이 끝나면 쾌감도 사라진다.
이 순간의, 바삭거리는 그 날개를 구하기 위해서,
바람 속에서 하늘거리는 날개를 정복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잠자리 학살 속에 해가 진다.
땅에 떨어진 고추잠자리는 낙엽처럼 뒹군다.
동체가 찢기고 눈알이 빠진 비참한 잠자리 떼가 애들의 발에 짓밟힌다. 잠자리의 시체가 떨어진 길가에는 들국화 같은 것이 피어 있다.
가을인 것이다. 생명이 침몰해가는 가을인 것이다.
애들은 또 서리가 내린 고추밭으로 간다. 어른들이
고추 대를 뽑고 있는 그 밭으로 몰려 간다.
''고추 대를 뽑아 드릴까요?''
합창하듯이 고함을 치면 아낙네들은 웃는다. 그러면
우리도 웃으면서 고추밭으로 뛰어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출입 금지로 되어있는 고추밭이다. 어쩌다 고추 대를 건드리기만 해도 벼락이 떨어진다.
농부들은 남의 밭이라 할지라도 꼭 자기 것처럼 모든 농작물을 위한다. 아이들이 밭에서 노는 것을 보면 아무것이나 손에 들어 내쫓는 것이다.
그러나 가을인 것이다. 고추 대를 뽑아 내던져야
하는 가을인 것이다. 아이들은 닥치는 대로 고추 대를
전멸시켜간다. 마치 여름철의 복수를 하려는 것처럼
잔인하게 그 고추 대를 뽑아버리며 신나게 떠들어댄다.
고추 대를 움켜잡는다. 그것은 저항을 한다. 뽑히지
않으려고 저항을 한다. 그러나 힘을 주면 뿌리가 뽑히는, 흙이 무너지는 야릇한 쾌감이 손아귀에 전달된다.
나는 그것이 좋다. 일부러 힘을 늦추고 잡아당기면
뽑히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고추 대의 힘과 겨룬다.
전기가 오는 것처럼 바르르 떠는 잠자리와 날개를 잡을 때와 같은 잔인한 쾌감이 가슴으로 번진다.
차례차례 고추대는 쓰러진다. 그러면 담 밑 양지바른
곳으로 간다. 우리는 동그랗게 앉아 고추 대의 가지를
이용해서 지게를 만든다. 시든 이파리는 다 떼어 내버리고 앙상한 줄기만 남긴다.
그 고추 대의 형상은 바닷속에 있다는 산호 같기도 하다. 채 익지 못한 작은 풋고추가, 시들어버린 쭉정이의 그 풋고추가 매달려 있으면 그것을 따라 지게 위에 올리곤 한다. 그런 날에는 대개 머리 위에서 솔개가 돈다.
''쥐 잡아줄게 돌아라. 닭 잡아줄게 돌아라.''
애들이 고함을 치면 정말 솔개는 빙빙 돈다.
그것도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게다. 폭격을 맞은 것 같은 어수선한 고추밭 위로 솔개가 돌고 있는 가을인 것이다.
마을에선 대추를 턴다. 큰 방석을 펴들고 대추를 턴다. 나무 위에 올라가 가지를 흔들기도 하고 긴 장대로 털기도 한다. 여름내 자라온 열매들은 이렇게 해서 낙하하는 것이다.
폭력 속에서 그것들은 우박처럼 떨어져 구른다.
어른들이 다 털고 난 대추나무는 아이들 것이 된다.
대추를 털 때 우리는 멀찍이 뒷짐을 지고 구경만 해야 된다. 어른들이 얼씬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지루하게 기다린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망을 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른들의 대추 털이가 다 끝나면 애들은 일제히 달려들어 이삭 털이를 하는 것이다.
아직 덜 떨어진 대추들이 남아 있다. 아주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것엔 돌팔매질을 해야 한다. 나뭇잎 사이에 숨어 있는 놈들은 돌팔매질을 해야 한다.
남보다 빨리 빈 대추나무를 털지 않으면 허탕을 친다.
이 찌꺼기를 소탕하는 일은 언제나 요란스럽다.
하나도 님김없이 샅샅이 뒤져내는 이삭 털이는 거의 열병에 걸린 것같이 치열하다 그 수확이란 별것이 아니다. 남김없이 대추를 털어없앤다는 것이 더 신나는 일이었다.
고추 대를 뽑는 것처럼 금지된 열매를 마음놓고 딸 수 있다는 것이 더 신나는 일이었다. 숨어 있던 대추들이, 대추만이 아니라 얼마 남지 않은 나무 잎사귀들까지도, 끝에 바둥대며 매달려 있던 그 나무 잎사귀까지도, 잔인하게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어른들이 다 털어버리고 난 대추나무만을 골라 다니며 종일 미친 듯이 나뭇가지를 두드린다.
그래도 지렁 대추란 놈은 없다. 새빨갛다 못해 까맣게 타버린 잘 익은 대추는 없다. 이런 것은 좀처럼 구경하기가 힘들다.
다 털고 난 빈 대추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은 벌레 먹은 쭉정이들뿐이다. 앓고 병든 대추만을 호주머니에 넣고 집에 돌아오는 날은 피로하다.
그 피로 때문에 마음은 지긋한 행복감에 젖는다.
잠자리에 누워도 손과 발바닥이 둥실 떠 있는 것 같다.
잠자리 학살과 고추 대 뽑는 일과 대추 털어내는 것은 가을이 시키는 비정의 작업이다. 폐허의 작업이다. 왜 애들은 그렇게 잔인해지는 것일까?
나는 가을이 침몰해가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째서 아이들이 잠자리를 두들겨 잡는가를, 그리고 고추 대를 뽑아 던지는가를 나는 알고 있다.
서리같이 찬 가을의 웃음 속에 쾌감이, 쾌감이 깃들어 있다.
무참한 가을은 그렇게 침몰해간다. 서리가 내린 들판의 잡초가, 그리고 그 산하가 어떤 모습으로 바뀌고 있는지를 나는 알고 있다. 그 아름다운 채색 속에는 무참한 웃음의 쾌감이 있는 것이다.
가을은 그렇게 웃는다. 자연과 친한 애들도 그런 웃음을 웃는다.
가을은 전쟁을 치른 폐허다. 그리고 가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침몰해간다. 침몰해가는 모든 것들은 폭동과 모반 속에서 죽어가는 귀족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가을은 오만하다. 가을은 무참하다. 가을은......
가을은 냉혹하다. 우리는 서리가 내린 대지 위에서
학살된 잠자리의 숫자를, 그리고 푸성귀의 고추와 병든 대추들을 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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