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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2021신춘 문예 단편소설 , 수필, 시 등 당선작/현대수필3

80. 풍경 뒤에 오는 것

by 자한형 2022.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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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뒤에 오는 것 이어령

 

 

그것은 지도에도 없는 시골길이었다. 국도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한국의 어느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길이었다. 황토와 자갈과 그리고 이따금 하얀 질경이 꽃들이 피어 있었다.

 

붉은 산모롱이를 끼고 굽어 돌아가는 그 길목은 인적도 없이 이렇게 슬픈 곡선을 그리며 뻗어 있었다.

 

(시골 사람들은 보통 그러한 길을 '마차길'이라고 부른다.)

 

그때 나는 그 길을 '지프'로 달리고 있었다. 두 뼘 남짓한 운전대의 유리창 너머로 내다본 나의 조국은

 

그리고 그 고향은 한결같이 평범하고 좁고 쓸쓸하고 가난한 것이었다.

 

많은 해를 망각의 여백 속에서 그냥 묻어두었던 풍경들이다.

 

이지러진 초가의 지붕, 돌담과 깨어진 비석, 미루나무가 서있는 냇가, 서낭당, 버려진 무덤들, 그리고 잔디, '아카시아', 말풀, 보리밭..... 정숙하고

 

단조한 풍경이다.

 

거기에는 백로의 날갯짓과도 같고 웅덩이의 잔물결과도 같고 시든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 같고 그늘진 골짜기와도 같은 그런 고요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폐허의 고요에 가까운 것이다.

 

향수만으로는 깊이 이해할 수도 또 설명될 수도 없는

 

정숙함이다. 아름답기보다는 어떤 고통이, 나태한 슬픔이 졸리운 정체(停滯)가 크낙한 상처처럼 공동처럼 열려져 있다. 그 상처와 공동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거기 그렇게 펼쳐져 있는 여린 색채의 풍경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위황장에 걸린 시골 아이들의 불룩한 그 배를 보지

 

않고서는, 광대뼈가 나온 시골 여편네들의 땀내를

 

맡아보지 않고서는 그리고 그들이 부르는 노래와 무심히 지껄이는 말솜씨를 듣지 않고서는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지프'가 사태진 언덕길을 꺾어 내리받이 길로 접어 들었을 때 나는 그러한 모든 것을 보았던 것이다.

 

사건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사소한 일 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가장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늙은 부부였었다. '클랙슨' 소리에 놀란 그들은 곧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너무나도 놀랐었던 것 같다. 그들은 갑자기 서로 손을 부둥켜쥐고 뒤뚱거리며 곧장 앞으로만 뛰어 달아나는 것이다. 고무신이 벗겨지자 그것을 다시 잡으려고 뒷걸을질 친다.

 

이것이 그때 일어났던 이야기의 전부다.

 

불과 수십 초 동안의 광경이었고 차는 다시 일도 없이 그들을 뒤에두고 달리고 있었다. 운전수는 그들의 거동에 처음엔 웃었고 다음에는 화를 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었다.

 

이제는 아무 표정도 없이 차를 몰고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잔영이 좀처럼 눈 앞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누렇게 들뜬 검버섯의 그 얼굴, 공포와 당혹의 표정,

 

마치 가죽처럼 무딘 몸짓으로 뒤뚱거리며 쫓겨 가던

 

그 뒷모습, 그리고.... 그리고 그 위급 속에서도 서로 놓지 않으려고 꼭 부여잡은 메마른 두 손.....

 

북어대가리가 꿰져 나온 남루한 봇짐을 틀어잡은 또

 

하나의 손.... 벗겨진 고무신짝을 잡으려던 그 또 하나의 손.... 떨리던 손.....

 

 

 

나는 한국인을 보았다. 천년을 그렇게 살아온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뒷모습과 만난 것이다.

 

쫓기던 자의 뒷모습을.

 

그것은 여유 있게 차를 비키는 '아스발트' 위의 이방인처럼 세련되어 있지도 않다. 운전수가 뜻없이 웃었던 것처럼 그들의 도망치는 모습은 꼭 길가에서 놀던 닭이나 오리 떼가 차가 왔을 때 날개를 퍼덕거리며 앞으로 달려가는 그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악운과 가난과 횡포와 그 많은 불의의 재난들이 소리

 

없이 엄습해왔을 때에 그들은 언제나 가축의 몸짓으로 쫓겨가야만 했던 것일까? 그러한 표정으로 그러한 손길로 몸을 피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가?

 

우리의 피부 빛과 똑 같은 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우리의 비밀, 우리의 마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