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속의 인연/ 박명순
하루가 시작되면 먼저 시간과의 만남이 열린다. 오늘이라는 새로운 시간이 다가와 함께 움직여 준다. 어제와 다름없는 같은 공간에서 시작되는 오늘이지만 지금은 분명 새 아침이 온 것이다. 창문을 열면 맑은 공기가 빠르게 곁으로 와서 상쾌함을 더해 준다.
하루가 시작되는 뉴스를 들으며 신문 기사를 읽는다. 밝은 햇살을 받으며,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 것에 감사한다. 거리로 나오면 바람이 몰고 오는 산뜻한 냄새와 반짝이는 잎들의 속삭임을 듣는다. 때로는 대기의 오염 속에 물든 뿌연 하늘이 나를 바라보지만, 그것은 이미 친숙해진 어제의 친구이며 내일의 손님이 되어 다시 찾아올 것이다.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진다. 서늘한 빗줄기가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려준다. 창밖으로 보이는 빗속에서 우산의 행렬이 얼굴을 가린 채 길게 이어진다. 각양각색의 얼굴처럼 우산의 색상도 다양했다. 시간은 우리를 미지의 인연 속으로 몰아가고 있으며 삶이 계속되는 한 여러 가지의 형태로 자꾸 변화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연이 어느 날에는 한순간의 찰나로 끝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때로는 몇십 년, 짧게는 몇 분으로 이어지는 일도 많았다. 오늘 맺어지는 인연은 얼마만큼 긴 시간으로 남게 될까. 흩뿌려지는 가을비처럼 기억되지 않고 스러지는 그런 것은 아닐까. 스쳐 지나가는 인연은 그저 스친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일까. 아니면 다시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지는 것일까.
우리는 어떠한 의식 아래 묶여진다고 본다. 어떠한 형태로든 매듭을 짓게 되고 그 둥우리 안에서 같은 맥락을 이루며 호흡하고 있다. 실타래를 엮듯 엮어지며 풀어도 보고 다시 엮어도 보며 영글어 가고 있다. 한 개의 가느다란 올들이 모여 아주 튼튼한 타래를 만들어 결속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작게 보면 나 한 사람이지만 우리는 우리라는 둥우리 틀 속에서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숨 쉬고 있다. 작은 목소리, 큰 목소리, 쉰 목소리, 맑은 목소리, 소리 없는 아우성들, 모두 개성 있는 갖가지의 색깔로 보이고 또 흩어지기도 한다.
언제까지나 반복되는 일이겠지만 싫다고, 지겹다고 머리를 흔들지만 결국 집결되는 곳은 한 곳이다. 인간은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의 연극은 오늘도 내일도 반복되기 마련이다. 매일 새로운 세계가 서서히 열리며 조금은 망설여지고 조금은 두려움 속에서 엿보이듯 그렇게 열리고 닫히고 한다. 때로는 수줍음과 떨림 또는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 조금씩 가까이 밀려오기도 한다. 내가 잡으려 하는 손을 상대방이 떨쳐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 조심스럽게 내밀어 보는 손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돌아서는 것은 아닐까. 가슴 속 깊이 주저하는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는 없을까.
이십 대의 나와 지금의 내 차이는 작은 일에도 주저하는 마음의 변화일 것이다. 어깨를 치켜세우며 으스대보지만 때로는 나약함을 본다. 발을 맞추어 가며 씩씩한 척하지만 곧 움츠러드는 나약한 자신을 보고 놀라워한다.
시공을 넘나드는 관점의 차이가 크지는 않았으며 인생을 덧없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렇게 살지 않았노라고 믿고 싶다.
내가 나를 제일 잘 알고 있듯이 남들도 그들 자신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자신을 조바심으로 바라보듯 그들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믿어본다. 그들의 마음속에 미흡한 점이 있겠지만 웃음 지으며 내미는 손을 무정하게 떨쳐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어눌한 말로 실수를 해도 싹둑 잘라서 말을 막지는 않을 것이다. 내면의 갈등과 때로는 혐오감을 느끼면서 우리는 함께 영글어 가며 성숙해진다고 본다. 이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며 일상에서의 좋은 만남을 기대한다.
가을비에 흠뻑 젖은 창가의 풀들도, 그 많은 씨앗들 중에서 공중곡예를 하며 무한대의 우주공간을 넘나들다 내 집 작은 뜰로 찾아온 하나의 인연이다. 긴 여름 뙤약볕 아래 시들기도 했지만 무성하게 자란 들풀. 그 넓은 공간으로부터 이 작은 곳을 택하여 나를 찾아와 주었으니 예사로운 인연이 아니다. 보잘 것 없는 잡초이지만 그들과 나는 공존을 하는 것이다. 햇볕과 어우러져 늦가을에 작은 열매를 기다리는 야생풀들의 흔들림은 어느 날 문득 나를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게 만든다. 감동을 주는 그들을 생각하며 하늘과 맞닿은 높은 빌딩 숲을 바라본다.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곧게 지탱하는 힘은 자신의 꿋꿋한 의지일 것이다.
인연이란 사람과의 만남뿐만 아니라 우주 속의 모든 것과도 필연적인 연결 고리가 되어 있다. 생명체와 무생물, 식물, 동물 때로는 장소, 주위에 산재해 있는 모든 것이 나와 짝지어져 어떠한 형태로든 맺어진다고 본다. 비바람이 부는 날, 유리 창가에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빗물과 어울려 오랜 시간 머물러주는 그들은 마지막 생명을 나와 더불어 마감하는 그런 인연일 것이다.
어느 외딴 시골길, 처음 가보는 아름다운 숲길, 또는 시간과 공간에서 느끼는 섬광처럼 지나가는 인연을 단순하게 떨쳐버릴 수가 없다. 언젠가 만났던 것과 같은 느낌, 그래서 당혹감이 찾아올 때도 있다. 아무리 과거의 어느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아도 기억해낼 수 없는 순간들이 있는 것이다.
이제 어둠이 내리면 또 다른 시간이 창가에 다가와 기다려 줄 것이다. 오늘을 들여다보고 내일을 맞을 준비를 할 것이다. 우리는 기다림 속에서 소중한 만남을 위해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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