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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4

32. 신이 되던 날

by 자한형 2022.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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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던 날 - 김시헌

지구의 껍질을 걷는다. 이리저리 나 있는 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 나는 더위를 무릅쓰고 기어이 걷는다. 앞에서 신호등이 가로막는다. 수많은 차량이 두 눈을 부릅뜨고 속도껏 달린다. 벼룩처럼 몸이 가벼운 놈, 공작처럼 뒷몸이 길쭉한 놈, 곰처럼 둔하게 생긴 놈, 차는 동물의 모양을 닮았다. 전등은 두 눈을 닮았고, 지붕은 등을 닮았고, 내 바퀴는 다리와 발을 닮았다. 땅 위를 달리자면 땅 위를 기고 걷는 동물을 닮아야 잘 움직여질 수 있다.

파란 신호등이 내려지자 나는 걷기 시작한다. 차들이 좌우에 멈추어 서서 나를 지켜본다. 어서 건너가라고 독촉을 하는 표정이다. 어떤 사람은 너무 서둘러서 걷는다. 신호등이 깜박깜박 움직이고 있으니 마음이 바빠지는 모양이다. 그러나 서울시청의 교통을 담당한 사람들은 충분히 걷는 시간을 고려했을 것 아닌가. 사람을 달리게 하는 어리석은 계획을 짰을 리 만무하다. 나는 유유히 바쁜 마음을 누르면서 천천히 걷는다.

다음 길에는 큼직한 건물이 질서정연하게 나타난다. 그 사이를 걸으면서 날씨가 덥다고 느낀다. 한 굽이를 돌자 작은 건물이 나타나고 음식 냄새가 코에 전달돼 온다. 그 거리는 음식점 거리이다. 닭 볶는 냄새가 길을 뒤덮고 있다. 식욕을 동하게 하는 의도적인 냄새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싫다. 기름이 섞인 인공적인 냄새가 비위를 건드려 온다. 사람의 코는 각양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좋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싫다. 시원하게 문을 열어 놓고 선풍기를 신나게 돌리고 있는 식당이 보인다. 분위기가 어서 오십시오하는 유혹하는 것 같다.

등에 끈적끈적한 땀을 느낀다. 그늘을 찾아 밟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될 수 있다면 육체에 가혹한 고통을 주고 싶다. 이렇게 지구의 껍질을 직접 발로 밟으면서 걷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권태 때문이다. 이 며칠 동안 권태라는 마물이 나를 습격하고 있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에 변화를 주고 싶다. 걷고 있는 동안에 육체 안에 변화가 일어나고 귄태의 의식에도 변화가 올 것이다. 권태는 습관명이다. 주기를 두고 내게 돌아오는 홍역 같은 정신 현상이다.

음식점 거리를 다 지나가니까 십자로가 나온다. 나는 다시 멈추어 선다. 건너편에 석촌호수가 보인다. 그곳으로 가리라. 넓은 호수가 더위에 시달리는 나의 마음을 움직여 온다. 신호등이 보이지 않는다. 신호등이 없는 곳인데도 나는 기계처럼 멈추어 서고 있었다. 차가 달리는 공간을 이용하려고 기회를 노린다. 그런데 갑자기 텅 빈 한길이 된다. 저쪽 편 신호등이 막혀서 차들이 모두 정지당했다. 왰다면서 한길 가운데로 몸을 옮긴다. 바빠 할 이유가 없다. 차들은 저쪽 먼 곳에 눈을 켜들고 기다리고 섰다. 마치 내가 십자로를 다 건너갈 때까지 서 있겠다는 자세들이다.

석촌호수는 말없이 조용히 하늘을 보고 있다. 그 둘레에 여기저기 사람들이 앉아 있다. 호수를 찾아온 연인도 있다. 손을 잡고 걷기도 하고 의자에 앉아서 몸을 서로 끌어안기도 한다.

나도 의자에 앉아서 호수의 수면을 바라본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날이다. 거울 같다고 할까. 대패로 민 것 같다고 할까. 높낮이가 없는 호수의 수면은 파란 빛으로 물들어 있다. 나는 문득 호수를 지구에 뚫어진 구멍이라고 느낀다. 호수는 깊은 곳으로 뚫어져 내려가서 어디까지 가 있을까? 2미터, 3미터 정도의 깊이밖에 안 되는 호수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것을 한없는 깊이로 상상해 본다. 깊이를 따라 나의 의식은 물속으로 내려가 보기로 한다. 백 미터, 천 미터. 계속 내려가 지구 중심을 지나고 지구의 저쪽 편으로 빠져나간다. 껍질에 구멍이 뚫어지면서 저쪽 편 허공으로 나간다. 그때 나는 석촌호수를 버리고 혼자 우주의 끝을 보기 위해 계속 달린다. 어디까지 가면 우주의 끝에 이를까. 우주는 무한대라는데 끝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가도 가도 끝이 없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달리다가 더 갈 수 없는 좁은 곳에서 정지한다. 우주의 기점이라고 할까. 팽이의 끝 같은 뾰족한 지점이다. 우주 전체를 받치고 있는 고임대이다. 고임대는 멈춰진 나의 의식은 뒤돌아서 호수 쪽을 본다. 너무도 멀고 깊은 곳에 나는 가 있다. 거기서 이쪽을 바라보니까 나팔 모양으로 퍼지면서 아득한 곳에 지구의 껍질이 보인다. 나는 고임대를 잡고 팽이를 돌리듯이 우주를 돌린다. 빙글빙글 우주가 돌아간다. 태양도 달도 별도 지구도 하늘도 바다도 다 돈다. 돌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우주의 조종사가 된 것이다.

그때 문득 나는 신()이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우주를 관리하는 존재는 신이다. 신이 있다면 이런 곳에서 우주를 움직이고 있을 것이 아닌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존재도 이런 것일까.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도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우주를 움직이는 주인의 존재가 될 때 하나님과 같은 역할이 되고 내가 우주와 한 덩어리가 되어 같이 움직이고 있을 때 부처님과 같은 역할이 된다. 지구의 껍질을 걷고 있을 때는 껍질에 가리어지고 권태 같은 감정이 가리어져서 우주의 속 깊은 참모습을 볼 수 없었는데 지금은 우주의 핵심에서 나 자신의 정체를 관찰하고 있다. 우주가 곧 나 자신이라는 말에 실감을 느끼기도 하고 우주를 내가 관리하고 있다는 주인의식을 가지기도 한다.

나는 상당한 동안 우주 속에서 여러 생각을 하다가 길을 따라 석촌호수를 향해 올라온다. 허공을 지나고 암벽 속을 지나 수면 위에 의식을 내놓는다. 그리고 처음의 의자에 돌아가 앉는다. 우주여행을 하고 돌아온 셈이다. 신이 되었다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왔다고 할까.

해가 서선에 기울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야지? 몸을 의자에서 들고 일어서는 나의 무게가 의외로 가볍게 느껴진다. 더위도 권태도 지금은 내게 없다. 거대한 무엇에 취한 감정이 나를 움직이고 있다. 버스를 타겠다는 생각도 없다. 이대로 그냥 가는 곳까지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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