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의 노래/ 서숙
천년을 기다려 꽃으로 피어났을 것입니다. 또다시 천년의 세월을 더하여 그 빛깔과 그 모습에 어울리는 향기를 지니게 되었을 것입니다. 한 방울의 물과 한 웅큼의 햇빛으로 빚어낸 기적, 날마다 기적입니다. 연하고 연한 순하고 순한 그대 꽃봉오리의 기적을 본받아 나도 나의 기적을 짓습니다. 나도 한 방울의 물과 한 줌의 햇빛으로 연하고 연한 순하고 순한 새 움을 터 신록으로 세상을 맞습니다.
오랜 세월의 원(願)을 새겨 얻은 귀한 모습이어서 일까요. 당신은 너무나 보드랍고 가냘파서 미풍에도 견디지 못할 것 같군요. 그대가 행여 다칠까봐 조심조심 감싸고 싶은데 가까이 가지 못하겠습니다. 그대 섬세한 살갗은 가볍게 스치기만 하여도 멍이 들고 살짝 닿기만 하여도 상처를 입을 테니까요. 그대를 지척에 두고도 마냥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어 나는 애가 탑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바라보고 지켜볼 수 있어서 말할 수 없이 행복하기도 합니다.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사랑에 눈멀어 그대가 아름답게 보이는 게 아니라 당신이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다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나는 당신이 아름다워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당신이니까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당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그냥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사랑에 눈멀어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입니다.
당신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것은 당신이 지닌 간결함 때문입니다. 욕심이 군더더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신은 그 무엇에도 헤프지 않습니다. 슬픔에도 일그러지지 않고 기쁨에도 들뜨지 않습니다. 당신의 절제가 눈부시어 나의 눈매가 가늘어집니다. 한때는 사랑의 밀어를 간절히 원할 때도 있었으나, 당신의 간결함과 당신의 절제를 배워 이제는 그저 말없이 충만한 합일을 헤아립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나는 당신이 제일 어여쁩니다’라고 기쁘게 알아듣고, 내가 당신을 아름답다고 말하면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즐겁게 알아듣습니다.
내 안의 소년은 아무 것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열렬히 그대를 사랑하는 일에만 열중할 뿐입니다. 그대 안의 소녀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아름답기 때문, 그리고 세상의 많은 것에 대해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 그러나 무엇보다도 당신이 내게 무한히 너그럽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대의 사랑을 잃지 않으려고 그대의 말을 가슴 깊이 명심합니다. 내 안의 순정, 순수, 내 속에 들어있는 가장 좋은 것, 가장 아름다운 것이 그대를 만날 때면 표정도 선명하게 파릇파릇한 싹을 틔울 수 있도록.
수줍은 미소를 머금을 때의 모습은 청순하여도 당신은 마냥 다소곳하지만은 않아요. 깜찍한 눈웃음으로 애교도 부릴 줄 알고, 가벼운 투정으로 응석도 곧잘 부립니다. 달빛이 은은할 때엔 요염한 자태를 뽐내기도 하지요. 때로 당신은 꽃잎 팔랑이며 바람과 희롱하고 도란도란 별 나비와 소곤거리느라고 내가 다가다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나는 시무룩하여 괜시리 아직 깨어나지 않고 나무 등걸에 붙어있는 애벌레의 고치를 집적거려 봅니다. 예쁘고 귀엽고 앙큼하고 매정한 그대, 그대는 어쩌면 그렇게 내 마음을 잘 알아 나를 꼼짝 못하게 옭아맵니까?
며칠 동안 봄볕이 좋더니 어젯밤에는 제법 큰 비가 내렸습니다. 비바람에 그대 지쳐 쓰러질까 봐 나는 가슴을 졸였습니다. 그래도 의연히 말갛게 씻긴 얼굴로 그 역경에도 당신은 억세어지지도 거칠어지지도 않고 순한 모습 그대로 아침햇살 아래 연한 꽃잎으로 곱습니다. 산들바람에도 바르르 미세한 떨림이 애처로웠건만 폭풍우를 견뎌내는 모습에 나는 오로지 당신이 대견할 뿐입니다. 내가 기뻐하니 나의 몸에도 저절로 윤기가 흐릅니다. 그대를 사랑하다가 나는 드디어 온 세상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저절로 깨우치게 되었나 봅니다. 내 몸은 어느새 이렇듯 천지에 위안을 주는 녹색으로 세상을 덮게 되었으니까요. 사랑이 지극하면 아름다움으로 현현한다고 하던가요.
어느덧 당신의 얼굴에 어쩔 수 없이 드리우는 허무의 그림자를 나는 가슴 아프게 지켜봅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나는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 가실 때는 뒤도 안 돌아보고 훌쩍 가버릴 것이라는 것도 나는 알아요. 그대 가세요. 미지의 세계를 돌아 오랜 기도로 한 하늘이 열리면 당신은 빛의 날개를 달고 구름 속의 햇살처럼 다시 돌아올 것도 나는 알고 있으니까요. 그대가 먼 길 마다않고 찾아오면 나도 그때까지 휘돌아온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내가 삶의 의지로 하늘 향해 치솟는 것이나 날로 짙은 음영을 드리우는 것은 오직 당신 향한 그리움 때문입니다.
그리워서, 그리워서 그리움이 목까지 차오르면 터져 나오는 꽃망울.
이제 나는 기다림을 준비해야 하나봅니다. 애달픈 내 마음은 그대에게 기억으로 시름을 잊고 다만 그리움으로 푸르러, 푸르러.
'현대수필4' 카테고리의 다른 글
33. 아름다운 강북 (0) | 2022.02.09 |
---|---|
32. 신이 되던 날 (0) | 2022.02.06 |
30. 시간 속 인연 (0) | 2022.02.06 |
29. 쉰 (0) | 2022.02.06 |
28. 세월은 강물처럼 (0) | 2022.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