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119 108. 추 사 글 씨 추사 글씨 김용준 어느 날 밤에 대산(袋山)이 "깨끗한 그림이나 한 폭 걸었으면" 하기에 내 말이 "여보게 그림보다 좋은 추사 글씨를 한 폭 구해 걸게" 했더니 대산은 눈에 불을 번쩍 켜더니 "추사 글씨는 싫여. 어느 사랑에 안 걸린 데 있나" 한다. 과연 위대한 건 추사의 글씨다. 쌀이며 나무 옷감 같은 생활 필수품 값이 올라가면 소위 서화니 골동이니 하는 사치품 값은 여지없이 떨어지는 법인데 요새같이 책사에까지 고객이 딱 끊어졌다는 세월에도 추사 글씨의 값만은 확실히 올라간다. 추사 글씨는 확실히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필 추사의 글씨가 제가의 법을 모아 따로이 한 경지를 갖추어서 우는 듯 웃는 듯 춤추는 듯 성낸 듯 세찬 듯 부드러운 듯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조화가 숨어 있다는 걸 알아서 맛.. 2021. 12. 28. 107. 초승달이 질 때 초승달이 질 때 허세욱 소쩍새가 피를 쏟듯 구슬프게만 울던 늦은 봄 초저녁으로 기억 된다. 산과 산이 서로 으스스하게 허리를 부비고 그들끼리 긴 가랭이를 꼬고 누운 두메인지라 해만 지면 금시 어두워졌고 솔바람이 몰고 오는 연한 한기로 미닫이를 닫아야 했다. 40리 밖 읍내에 가셨다가 돌아오시지 않은 아버님을 마중하러 나는 세 살 아래 동생을 데리고 재를 넘었다. 한참 걷다 보니 속눈썹 같던 초승달이 지고 어디를 보나 까만 어둠이 밀려오는데 열대여섯 살 소년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무서움에 질려 있었다. 나는 동생의 손을 꼭 잡고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주먹만 한 차돌을 주웠다. 그리고 그것을 땀이 나도록 쥐고 동생더러 뒤를 따라오라 했다. 여느 때같이 쇠죽 냄새가 물씬한 머슴의 등짝을 앞세우고.. 2021. 12. 28. 105. 철학의 여백 철학의 여백 박이문 공허감은 무엇인가의 부재 의식이다. 무엇인가에 대한 욕망과 추구를 전제하지 않는 곳에 부재가 의식될 수 없고, 갈망과 추구는 언제나 어떤 대상을 전제하며 그래서 공허감은 필연적으로 어떤 대상의 부재가 가져오는 좌절된 의식이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좌절된 욕망이 다 같이 공허감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배고픔과 빈곤, 어떤 특정한 목적이나 사회적 실패는 다 같이 욕망 좌절의 예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좌절 의식은 공허감이 아니라 부족감을 의미한다. 부족감은 물질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음식이나 돈이 생기거나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고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면 해소된다. 그러나 인간은 물질적 혹은 사회적으로 충족된 후에도 어쩐지 부족감을 느낄 때가 있다. 에 씌어 있는 것처럼 인간은 빵만으로 살.. 2021. 12. 28. 104. 책 책 이태준 책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 '책'보다 '冊'이 더 아름답고 더 책답다. 책은 읽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 어루만지는 것인가? 하면 다 되는 것이 책이다. 책은 읽기만 하는 것이라면 그건 책에게 너무 가혹하고 원시적인 평가다. 의복이나 주택은 보온만을 위한 세기는 벌써 아니다. 육체를 위해서도 이미 그렇거든 하물며 감정의, 정신의, 사상의 의복이요 주택인 책에 있어서랴! 책은 한껏 아름다워라, 그대는 인공으로 된 모든 문화물 가운데 꽃이요 천사요 또한 제왕이기 때문이다. 물질 이상인 것이 책이다. 한 표정 고운 소녀와 같이, 한 그윽한 눈매를 보이는 젊은 미망인처럼 매력은 가지가지다. 신간란(新刊欄)에서 새로 뽑을 수 있는 잉크 냄새 새로운 것은, 소녀라고 해서 어찌 다 그다지 신.. 2021. 12. 28. 이전 1 2 3 4 5 6 7 8 ··· 3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