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119 91. 오월 오월,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 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 2021. 12. 27. 90. 옛 절터를 찾아 옛 절터를 찾아 유병근 가시덩굴이 길을 가로막는 골짝에 작은 삼층석탑이 숨은 듯 서 있다. 탑 속에는 부장품처럼 햇빛과 달빛이 고여 있을 성싶다. 바람과 구름, 풀벌레며 산새의 울음도 탑을 둥지 삼아 깃들어 있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그동안 숱한 비바람과 진눈깨비, 때로는 무더위에 시달린 탑이다. 그런 탓인지 손으로 살짝 밀기만 해도 부스러질 듯 조마조마한 낌새다. 어느 날은 뼈와 살이 깎이고 뭉그러지는 아픔도 겪었을 것이다. 그런데 용케도 버티고 있다. 그게 무슨 힘일까. 나는 슬그머니 탑 곁에 다가선다. 절은 남향으로 서 있었던 듯하다. 당우(큰 집과 작은 집)의 양 추녀 끝을 받치느라고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활주처럼 탑을 세웠을 것만 같다. 해가 뜨고 지는 궤도에 따라 세월의 흐름을 두 탑에서 읽고.. 2021. 12. 27. 87. 아리랑과 정선 아리랑과 정선 (김병종) 정선은 초록이다. 초록 산, 초록 나무, 초록 바람이다. 그 속을 초록 강물이 흐른다. 아픈 사랑과 이별의 전설을 안고. 열 겹의 산을 열 가지 색으로 내비친다는 강. 行旅(행려)의 그대여. 그 아우라지강에서는 흐르는 강물에 눈길을 보태지 말라.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아라리 가락처럼 멀어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결국엔 저렇게 흘러가는 것이로구나, 애달픈 사랑도 정 깊은 인연도 그리고 우리네 인생마저도. 공연히 서러워지려니…. 정선아리랑의 탯줄 아우라지 가는 길. 기차는 간이역 ‘餘糧(여량)’에 선다. 도회지로 가는 딸을 배웅 나온 듯한 어머니가 서 있다. 어여 그만 들어가시라고, 딸은 몇 번씩이나 손짓을 보내건만 어머니는 개찰구에서 움직일 줄 모른다. 그러다가 기어이 옷고름.. 2021. 12. 27. 84. 짝 잃은 거위를 곡하노라 짝 잃은 거위를 곡하노라 오상순 내 일찍이 고독의 몸으로서 적막과 무료의 소견법(消遣法)으로 거위 한 쌍을 구하여 자식삼아 정원에 놓아기르기 십 개성상(十個星霜)이러니 금하에 천만 뜻밖에도 우연히 맹견의 습격을 받아 한 마리가 비명에 가고, 한 마리가 잔존하여 극도의 고독과 회의와 비통의 나머지, 음식과 수면을 거의 전폐하고 비 내리는 날, 달 밝은 밤에 여윈 몸 넋 빠진 모양으로 넓은 정원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동무 찾아 목메어 슬피 우는 단장곡(斷腸曲)은 차마 듣지 못할러라. 죽은 동무 부르는 제 소리의 메아리인 줄은 알지 못하고 찾는 동무의 소린 줄만 알고 홀연 긴장한 모양으로 조심스럽게 소리 울려오는 쪽으로 천방지축 기뚱거리며 달려가다가는 적적 (寂寂)무문(無聞), 동무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때.. 2021. 12. 25. 이전 1 ··· 5 6 7 8 9 10 11 ··· 3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