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 은 부 르 짖 음 속 의 숨 -최창학
막걸리로 보충하는 피팔이의 피에 관하여
떠올리기조차 끔찍하지만, 우리는 첫애를 두 돌도 채 넘기지 못하고 병명조차 정확치 않은 악성병으로 잃었다. 병원마다 진단이 다르게 나오는 그 이상한 병으로 결국 대학병원에 입원한 지 열 여드레만에 죽은 것이다, 입원해 있는 동안 마누라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나로서도 한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고역을 겪어야만 되었다. 암이라든가 백혈병이라든가 매독 같은 것 말고도 그렇게 무서운 병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었다. 한쪽 코에 산소통과 이어진 호스를 끼고, 이마에 링겔병과 이어진 바늘을 꽃은 채 얼굴이 온통 반창고 투성이가 되어 새파랗게 굳어진 몸을 어린것은 바르르 바르르 바르르 계속 떨었다,
그 옆에서 우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걸 지켜보면서, 숨이 멎으면 의사나 간호원에게 알려 입의 오물을 빼내 주거나 심장 마사지를 시켜 회생시키곤 했다.
바로 그 무렵의 일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직장을 쉴 수는 없어 나는 점심 시간과 밤 동안만 거기에 가 있었는데, 한여름이었기 때문에 일 년 중 정초 때 말고 꼭 한차례 있는 며칠간의 휴가가 마침 그 때 주어져 그 휴가 기간 동안에는 줄곧 있게 되었다. 병원에서 밥을 한 그릇씩만 주었으므로 마누라가 그걸 먹고(원래는 환자 분이지만) 나는 사먹어야 되었다. 병원 밖으로 나와 종로 쪽으로 있는 길을 하나 건너 어떤 싸구려 집을 단골로 삼았다. 밥집이 아니라 왕대포집으로 다른 밥 종류는 없고 백반만 아주 싼 값에 팔고 있었다. 그 집을 드나들면서 나는 밥보다는 술을 더 많이 마셨다. 몇 끼니 연이어 안 먹기 전에는 밥 생각이 안 날 때였으므로 대개의 경우 술 한두 잔으로 때웠는데 막걸리도 먹고 소주도 먹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는 오후에 가서 소주를 찾으니까 주인 노파가 불쑥 말했다.
"오늘은 피팔이들이 안 와 막걸리가 잔뜩 있는데, 막걸리 들지 그래요?"
"피팔이라뇨?"
"왜 몰라요, 피를 팔러 다니는 사람들? 피를 팔아먹고 사는,,,,,,"
"아, 매혈자들 말씀이신 것 같은데 매혈자들 중에 그렇게 전문으로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까?"
"있다마다요. "
"그 사람들이 막걸리를 먹습니까?"
"먹어도 보통 먹는 게 아치죠. 사발로 몇 사발씩 쉬지 않고 들이켜지요. 그래야 빼낸 피만큼 보충이 된대요."
몸에 힘이 없을 때 술을 한두 잔 들이켜면 혈액순환이 빨라져 일시적으로 힘이 생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지는 건 나도 경험한 바라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듣고서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 후 그 사람들과 그 집에서 우연히 맞닥뜨렸는데 (물론 자리야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스무 살이 갓 넘어 보이는 사람들로부터 마흔이 넘어 보이는 사람까지 있었다. 주인 노파가 내게 눈짓을 해 알아차렸지만 그들끼리의 대화를 들으니 그들은 자신이 하나의 완전한 직업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장사꾼들이 밑천을 들여 촌을 벌 듯 막걸리 값의 밑천을 들여 돈을 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니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떳떳한 장사라고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제미랄, 이놈의 짓도 이제 그만 해먹어야지."
"왜? 이놈의 짓이 어때서? 우린 지금 헌혈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거야."
"헌혈 좋아하시네. "
"장사로 쳐도 그렇지. 씁 팔아먹고 사는 기집년들 말고는 이만큼 밑천 안 들이는 장사가 어딨어?"
"붕어 점심 먹는 소리하지 마. 몸이 망쳐지는 건 생각 않나?"
"몸이야 늙어 가면 다 망쳐지는 거야. 나는 요즈음 내가 왜 진작에 이런 걸 생각해 내지 못했나 하는 생각을 하는 때가 많아. 자넨 잘 모르겠지만 나도 안 해본 것 없는 놈이야. 강도, 도둑질, 도둑질 중에서도 시체 도둑이라는 거 아나? 군대에서 전방 복무를 했다면 알겠지만 시체 도둑이라는 게 있어. 시체를 도둑질 해다 병원에 수술 실험용으로 팔아먹는 건데 값이 왜 짭짤하지. 어떻게 훔치는지 아나? 울타리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전방 부대에서야 시체실이라는 게 한 데나 마찬가지 아닌가? 보초야 동초 한 명에 따로 둘이 동원되지만 그자들이야 대개 안에서 소주나 까고 있게 마련이지. 거기에 유령이 되어 나타나는 거지. 허연 광목을 뒤집어쓰고 히히히 웃음소리를 내는데 기절하지 않을 놈이 어디 있어? 기절하면 점잖게 떠매고 나오는 거고 달려들려고 하면 가지고 간 막대기로 한방 냅다 치는 거지. 그런 놈의 짓도 해먹었는데,,,,,,뿐만 아니야. 차 밑으로 뛰어들어 위자료 타먹는 짓, 시골에서 올라온 순진한 기집애들 팔아 넘기는 짓, 춤바람난 유부녀들 등쳐먹는 짓, 그런 오만 짓을 다 해먹은 난데, 요즈음의 이거야말로 얼마나 당당하고 신선한가?"
"젖 까고 나발부네. 너만 그런 짓 한 줄 아냐? 나는 씁 팔아먹는 년들한테 아편도 팔아먹은 놈이야. 어떻게 팔아먹는 줄 아나? 처음엔 착실한 단골이 되지. 알려진 값보다 몇 푼만 더 줘도 몇 차례 찾아가면 빨아 주고 돌려주고 별별 짓 다하는 그년들 아냐? 그년들한테 좋은 보혈제라고 하고 한 방 꽉 놓아주는 거야. 한 방 가지고는 안 되지. 직업이 의사라고 하고 한 서너 차례만 놓아주면 그 뒤부터는 살려 주십시오지. 그러면 그때부터 긁어내는 거야. 씁 팔아 번 돈 몽조리 다 긁어내는 거지.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제 그런 짓은 해먹을래도 해먹을 수 없게 되었지만 차마 어디 그게 해먹을 짓이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놈의 짓을 해먹고 있는데 뭐? 헌혈 운동? 내 머리가 이렇게 어지러운데 헌혈 운동? 개씹--- 아휴 어지러워."
나이 많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젊은 사람 중의 하나가 끼어들었다.
"정말 혀 먹을 게 없어라우. 노동을 혀 먹을래도 붙여 줘야 말이지라우. 아직 젊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피를 빼고 나면 오히려 시원해지며 정신이 더 맑아지는 것 같아라우. 그래서 직업치고는 이것이 괜찮다고 생각허는디,,,, "
남은 젊은 사람 하나가 여기에 맞장구를 쳤다.
"나도 그럽디데이. 피를 뺄 땐 시원한 게 꼭 용두질할 때 기분하고 같습디데이. 기분 좋고돈 버는데 나쁠 게 뭐 있습니껴? 우리가 뺀 피로 죽어 가는 사람 살리니 그 점에서도 우리는 긍지를 가질 필요가 있는 기라요."
분명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나와 같은 피부 빛깔을 떤 사람들의 이런 이야기들을 들은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그날도 역시 밥 대신 술로 때우고 병원으로 가자, 이마에 꽂았던 링겔 바늘을 손목에 꽃기 위해 핏줄을 찾느라 애의 손목 여기저기를 만지작거리며 땀을 흘리고 있는 의사 옆에서 마누라가 나한테 말했다.
"애가 너무 지쳐 있어 링겔만으로는 안 되겠대요, 다른 주사로도 안 되고 수혈을 해야 되는데 제 피나 당신 피는 안 된다니 어떡하죠?"
'피'라는 말에 나는 무엇보다 먼저 어제 그 피 팔이들을 떠올렸고 동시에 으스스 몸을 떨었다.
"왜? 왜 안 된단 말이야?"
내 소리가 너무 크다고 생각됐는지 의사가 고개를 들고 낮을 찌푸리며 메마른 어조로 말했다.
"혈액형이 맞지를 않습니다. 두 분은 모두 A형인데 애는 O형이니까요."
"부모와 자식간에 어떻게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까?"
사는 더 말하기 귀찮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고 대신 마누라가 말했다.
"부모가 양쪽 다 A일 언 아들은 A아니면 O가 된다는데 공교롭게도 이 애는 O라는군요."
어제 그 피팔이들의 피가 애의 핏줄에 흐르는 상상과 함께, 애가 커서 그들이나 비슷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숨이 막혀 왔다. 안 돼, 안 돼, 그런 삶을 살게 할 바엔 차라리 죽이는 게 나아, 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그러나 나는 무조건 살려놓고 보자는 얕은 생각에서가 아기라 흥분을 가라앉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한 나머지 이렇게 부르짖었다.
"괜찮아, 우리들의 피가 아닌 막걸리로 보충되는 피팔이들의 피도 괜찮다구. 흔히 피라는 건 속일 수 없고, 피에 따라 그의 삶이 결정 된다고들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는 않아. 그렇다면, 만일 그렇다면 천한 놈 자식은 항상 천하게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 아냐? 넣자구, 아무 피라도 괜찮으니까 넣어 살려서 우리 나름대로 한번 키워 보자구."
하나의 작품과 바꾼 전위화가의 목숨에 관하여
세상의 마누라들이 거의 다 그렇듯이 내 마누라도 가난하고 고된 생활에 찌들어 지금은 완전히 못사는 집의 여편네 티가 박혀 버렸지만 결혼 전엔 적어도 내 눈엔 왜 잘생기고 멋있는 여자로 보였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시내 중심가에 화실을 차려 놓고 애들을 가르치며 작품 제작을 했었는데 어울리지 않게 구상보다는 추상, 정통보다는 실험이라는 낱말에 더 매력을 느껴 전람회도 그런 계열의 작품으로 가졌었다. 국전에는 한번도 출품하지 않으면서 앙데팡당전 같은 생소한 작품전에는 출품하여 파리 비엔날레니 상파울로 비엔날레니 하는 국제전에 대한 꿈은 키울 줄 알았었다. 따라서 그 당시 사귀었던 화가들도 국내에 많이 알려진 돈을 잘 버는 화가들보다는 국외에 더 많이 알려지거나 무명인, 돈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통나무에 식탁보 같은 보자기를 씌워 놓는다든가 커다란 바윗덩어리에 밧줄을 묶어 놓는다든가 석고로 거대한 수십 개의 구(球)를 만들어 그 그림자들로써 무얼 보여준다든가 녹슨 철판의 일부분을 곱게 갈아 여자의 음부 비슷한 형상을 만든다든가 주머니에 얼음을 담아다 놓고 전시 기간 중 증발해 버리도록 만든다든가 닳아빠지고 때묻은 걸레조각, 단추가 떨어지고 찢겨진 군복, 흙덩이, 담배꽁초, 밀가루 등속으로 어떤 형체를 이룬다든가 심지어는 어떤 허술한 대포집의 형상을 그대로 전시장에 옮겨다 놓고 술을 마시게 하면서 그것 자체를 작품이라고 한다든가 전시장의 건물을 지붕 위까지 올라가 온통 광목으로 휘감아 묶어 놓고 그것 자체를 작품이라고 하는 등 어떻게 보면 정신병자들의 소행 같이도 보여지는 작품들에 골몰하고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그중엔 가짜가 있는 반면에 분명히 진짜도 있을 법한데 가짜인지 진짜인지 나로선 잘 분별할 수 없지만 그런 계통의 작품을 하는 황 호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무명인데도 동료들 간에 서 이상하게 귀재로 통하는(약간은 비아냥거리는 뜻도 있을지 모르나) 사람이었는데 마누라가 가지고 있던 화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화실을 가지고 있어 비교적 자주 만났다. 금방 무너 앉을 듯한 목조 건물의 이층으로 대여섯 평 될까, 애들을 가르치지는 않고 작업실로만 썼기 때문이겠지만 줄리앙이니 아그립파니 하는 흔한 석고상 하나 없는 건 물론 흔히 '그림'이라고 불려지는 액틀에 넣어진 유화 하나 걸려 있지 않고 화실 안이 온통 쓰레기장 같았다.
거지들이 들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깡통으로부터 시작해서 돌덩이, 쇳조각, 쇠막대, 철판, 나무토막, 나무뿌리, 송판, 새끼줄, 전깃줄, 밧줄, 쇠줄, 철사, 우산살, 자전거바퀴, 타이어, 탈바가지, 지게, 갈대, 짚, 깨어진 삽, 밀짚모자, 고무로 만든 손, 인형, 마포조각, 시멘트도구, 용 접기, ,,,,,, 등 온갖 잡동사니만이 가득 차 있는 것이었다. 조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회화를 한다는 사람의 방이 그러니, 아무리 웬만한 액틀 속의 그림에는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나라고 할지라도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물론 요즈음에 와선 동양화와 서양화의 구별은 물론 조각과 회화의 구별도 희미해져 가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마누라는 전적으로 관심을 갖는 눈치였고 나를 데리고 가 일부러 어울릴 기회를 갖게 해주곤 했다. 그러나 어울리는 동안 나는 그가 마누라의 말처럼 '몇십 년 후에는 틀림없이 이름을 크게 떨칠' 사람이라는 느낌은 갖지 못했다. 술을 잘 마셔 내 주량을 넘어섰고, 술을 마시면 평소보다 눈이 더 빛났으며, 순수함이라 말할 수 있는 광기가 있었고, 어쩌다가 이따금 그림을 하는 사람치고는 꽤 깊이 있는 말을 던져 오는 일이 있었지만 천성적인 듯한 그의 게으름이며 퇴폐성 같은 것은 결코 좋게 보여지지가 않았다.
그와 어울리면서 그가 던져 왔던 말 중에 비교적 잊혀지지 않는 말 하나만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명성이랄까 인기랄까, 작품을 하는 사람과 이 사회에서의 인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사회의 모순을 파헤치는 작가가 그 모순된 사회에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그것 자체가 얼마나 큰 모순이며 넌센스겠소?"
문학 작품이라면 몰라도 회화로써 사회의 모순을 파헤친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렸지만, 잘은 몰라도 그의 입체작품이라는 것들 중엔 그런 게 더러 있었다. 어느 땐가는 화실의 천장에 교수대의 형구처럼 목을 매달기 좋은 올가미를 밧줄로 만들어 놓은 적이 있었는데, 저것도 작품이냐고 우리가 묻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죽고 싶은 사람들은 한번 이용해 보라고 만들어 왔소. 주위에 하도 죽고 싶다는 사람이 많아서,,,,,, 최형도 이용해 보려면 한번 이용 해 보쇼."
"좋소. 삯이 얼마요?"
"글쎄, 뭐 소주 한 병이면 되겠죠. 핫하."
문제의 작품 -의자-라는 것도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일흔이 넘은, 망령기가 좀 있는 그의 할머니까지 동원해 가며 만든 그 엉성한 의자가 설마 작품이 되리라고 까지야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쇠막대와 전깃줄이 재료의 대부분을 이룬 그 의자를 만들 때 그는 유난히 열성이었다. 산소 용접을 하고, 그의 할머니한테 열심히 무얼 물어 보고, 심지어는 거기에 변압기까지 부착을 시켰는데 우리가 무엇이냐고 묻자 가볍게 대답했다.
"보다시피 의자요."
"의자에도 변압기가 다 필요하오?"
“전기 의자로 이용해 보고 싶은 사람한테는 필요하지 않겠소?"
"전기 의자라니 ? 사람 죽이는 데 써먹는 것 말이오?"
"죽일 때도 써먹고 그냥 고문산 할 때도 써먹을 수 있죠. 고문 한 번 당해 보겠소?"
"좋소. 그렇지 않아도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인데,,,,,,
"핫하, 조금만 더 기다리시오. 아직 미완성이니까."
그러고는 그는 망령든 그의 할머니한테 다시 무언가를 묻기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옛날 왜정시대 때 할머니가 전기 의자에 앉아 본 경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앉았었은데 할아버지는 그로 해서 죽고 할머니는 머리가 좀 이상해졌다고 했다, 그 경험담과 함께 그 의자의 생김새에 대해서 그가 묻는 대로 다 대답해 주고 할머니는 어린애처럼 천진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너도 그 높은 양반들처럼 조선 사람들 데려다가 그런 장난을 하고 싶으냐?"
"네, 할머니."
"재미있을 게다, 참 재미있을 게여. 그렇지만 조심해라. 잘못하다가는 다치니까 조심해."
"핫하 알았어요, 할머니, "
이 순간 나는 숙연함에 빠졌는데 그것은 그의 할머니와 말을 주고받던 그가 갈수록 눈에 빛을 더해가더니 끝내는 그 안 깊숙이 물기 같은 걸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가 그런 걸 보이지 않았다고 해도 나는 틀림없이 이상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미친놈과 미친 할머니의 하릴없는 놀음이라고 지나치기에는 무언가 걸려 오는 게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죽음의 빛깔 같은 유쾌하지 못한 빛 속에서 허위적거렸는데 아니나다를까 일은 크게 벌어졌다.
귀재로 통하던 황 호릉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가 그 며칠 후 그의 화실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누라와 나는 '정말 뜻밖'이마는 느낌을 별로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그런 놀이를 하던 그 의자에 앉은 채(변압기의 볼륨을 터무니없이 높이 올려놓은 채) 죽은 걸 어떤 사람은 순간적인 실수였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품에 지나치게 집념한 나머지의 순간적인 광기로 단정했고, 그는 끝내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잘했는데 마누라도 마찬가지였다.
"그것 보세요, 제가 귀재라고 하지 않았어요? 귀재는 역시 하나의 작품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줄도 알아야 되는 모양이에요."
마누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그가 죽은 건 작품 때문이 아니라 현실 때문이야. 그런 걸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지 않을 수 없는 현실---"
죽이기 전에 빼내는 염소의 흔에 관하여
아직 나이 마흔도 되지 않은, 전혀 내세울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 내가 건강 타령을 늘어놓는다면 어떤 사람은 메스꺼움을 느낄지 모르나요 몇 달 사이 내 건강이 그전처럼 다시 못쓰게 되어진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원래 거울 앞에 서기를 고문 받는 일만큼이나 싫어하는 나이긴 하지만 요즈음도 어쩌다가 거울이 아니라 전동차 속의 창에라도 비친 내 얼굴과 마주치게 되면 나는 무슨 보아서는 안 될 끔찍한 물건이라도 보았을 때처럼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돌려버리고 만다. '며칠 동안 죽 한 그릇도 못 얻어먹은 놈의 몰골'이라는 후한 표현이 있지만 그보다는 못 먹을 것을 먹어 부황이 난 놈의 몰골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오직 눈만이 약간의 광채를 띠고 있을 뿐 핏기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검누르퉁퉁한 얼굴이 상한 풀빵처럼 부석부석하다. 직접 느끼는 자각증상으로도 아무 곳에나 앉아서 눈을 감기만 하면 시들시들 졸음이 온다든가 잠 속에선 으례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꿈(예를 들자면 변소에서 막 나서려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어전 체구가 건장한 놈이 가로막으며 목덜미를 움켜잡아 변소통 속에 몰아 처넣는 꿈)을 꾼다든가 밥알이 모래알 같다든가 갑자기 알 수 없는 구역질이 난다든가 머리가 어질어질하면서 귀가 멍멍해 온다든가 오후가 되면 길을 걷다가도 길바닥에 주저앉고 싶어질 정도로 온몸에 맥이 없어지곤 한다. 따지자면 이런 증상이야 만성화된 지 이미 몇 년 되니까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견딜 수는 있었는데 몇 달 전부터는 견디기가 아주 힘이 드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작년에 꼭 한 차례 난생 처음으로 보약이라는 걸 먹은 후 괜찮은 것 같더니 다시 마찬가지가 된 것이다.
보약이라는 것도 먹으려 해서 먹은 것이 아니고 작년에 그런 일이 있었다. 낱낱이 공개할 이야기는 못 되나 어느 날 밤 마누라와의 잠자리에서 꽤 오랜만의 교접이었는데도 물건이 제대로 움직여 주지를 않아 끝내 절정에까지 이르지를 못하고 중도에서 쓰러져 버린 일이 있었다. 술에라도 취해 있었던 때라면 혹 그럴 수 있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아주 말짱해 있었는데도 그랬으니 보통 일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물론 강렬하게 욕구가 치솟아서 그 일을 벌였던 것은 아니고 마누라에 대한 의무랄까 보살피는 자로서의 따뜻함 같은 것 때문에 약간은 고의적으로 벌였던 것이지만 그래도 결과가 그렇게 되어진 건 처음 일이었다. 어느 면으로나 나 자신보다는 싱싱함이 남아 있는 마누라의 빛나는 눈의 움직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 그 일을 하면 더 낫지 않을까 해서 일부러 불까지 켜가며 해보았는데도 소용 없었다. 마누라는 마누라대로 자기의 어디가 잘못되어 그런 게 아닌가 하고 좀처럼 그러지 않던 음탕한 몸놀림까지 해가며 나를 위해 애를 썼지만 역시 헛수고였다. 겨우 마누라만을 절정에 이르게 했는지 어쨌는지 불분명한 상태에서 내가 쓰러지자 물걸레처럼 젖은 내 전신의
엄청난 땀을 닦아주며 마누라는 왜 그러느냐는 말을 몇 차례 반복했다. 그러더니 아마 그날 밤 그런 생각을 했는지 며칠 후 마누라가 친정엘 가더니 약 꾸러미를 들고 온 것이다. 말로는 친정어머니가 지어준 것이라고 했지만 직접 지어 온 게 분명할 것이었다.
"뭐, 보약?"
녹용에 인삼에 부자 등속이 큰 값비싼 보약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마누라가 고맙다는 생각보다는 순간적으로나마 불쾌한 생각이 앞섰다. 세상의 어느 누가 자기 몸을 위해 보약을 지어 왔는데 불쾌하겠는가만 며칠 전 밤의 일이 연상되자 마누라가 추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아니더라도, 나를 자랑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사실 내 체일 자체가 아무런 고민 없이 보약 같은 사치스러움을 즐길 수 있게 되어 있지를 못했다, 보약은커녕 그 무렵 몸이 그 지경이 되어 가지고도 병원을 찾는 일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져 꺼려온
것은 물론 쉽게 예를 들자면 공동목욕탕에서 자기 몸뚱이의 때를 때밀이한테 시켜 벗겨내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에도 심한 구역질을 느끼는 다인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먹고 살기 위해 직장을 나가는데 그 직장이라는 곳이 차를 두 번씩 갈아 타가며 무려 한 시간 이십 분씩을 시달려야만 겨우 출근이 되는 곳이다. 까딱하면 야근이고 공휴일이란 일요일뿐인데도 까딱하면 일요일마저 근무를 해야 되며 어쩌다가 집에서 쉬게 되는 날에도 까딱하면 동네 길 도치는 일(집이 경기도 산 부근이라 비가 조금만 와도 땅이 질퍽거려 차가 안 들어오는 통에 새마을운동을 해야 된다)에 동원되어야 한다든가 직장의 야근이 없는 밤에도 까딱하면 집에서도 밤을 꼬박 새우며 일을 해야만 하는 처지이면서도, 나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을 하면서 보상보다는 고통을 훨씬 더 심하게 받는 사람들이 무위에는 얼마나 많은가 하는 생각과 함께 지금 이런 세월에 내가 겪는 이 정도의 어려움이 무슨 어려움이 되며 이 정도의 애씀이 무슨 애씀이 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잊지 않는,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꽉 막혔거나 소년 취향적인 나인 것이다. 그러니 보약이라는 것이 나 같은 사람이 먹어도 전혀 상관이 없는 물건으로 쉽게 느껴지지 않을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보약? 아니 그래 당신은 내가 숨어가지고 보약이나 먹고 있어야만 좋겠어?"
좀 웃어가면서 반 농담 식으로 던진 말이지만 나로서는 거의 꾸밈이 없는 소견이었다.
"숨어서 먹긴 왜 숨어서 먹어요?"
"그럼 이렇게 멀쩡해져 가지고 보약을 떳떳하게 먹으란 말이야?"
"멀쩡해요? 당신이 멀쩡하단 말이에요?"
"그럼 멀쩡하지 않고,,,,,,"
"보약 먹는 것도 뭐 죄가 되는 줄 아시나봐."
"어쨌든 난 먹고 싶지 않으니까 장모님이나 잡수시라고 돌려드려."
"사람 체질에 맞춰 지어 온 걸 아무나 먹어도 되는 줄 알아요?"
"어쨌든,,,,,,"
"그만두세요. 꺼떡하면 세상, 세상 하시는데 세상이 뭐 어때요? 그렇게 세상 걱정하는 분이 술은 왜 드세요? 술 드시는 건 죄스럽지 않으세요?"
"그거야 다르지. "
"뭐가 달라요 ? "
"어쨌든,,,,,,"
"난 모르겠어요. 하여튼 달이긴 달일 테니까 드시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일이 그렇게 되어 결국 분에 겨운 보약을 먹기에까지 이르렀는데, 보름에 걸쳐 그것 스무 첩을 먹고 나자 몸이 확실히 달라지긴 달라졌다. 사흘이 멀다 하고 마셔대던 술을 약을 먹는 동안 끊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밥맛도 나아지고 거리를 걸어가다가 주저앉고 싶은 증세도
없어졌으며 마누라와의 교접에서 실패하는 일도 없게 되었다. 그러더니 다시 몸을 함부로 굴리게 되자 그 증세들이 하나둘 되살아나기 시작했고, 급기야 몇 달 전부터는 완전히 심해졌으며, 또 최근에는 작년 그 언젠가의 밤처럼 낭패스런 밤을 연거푸 두 차례나 겪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누라가 어느 날 느닷없이 염소를 한 마리 통째로 염소 집에서 약으로 만들어 가지고 왔다. 살코기는 고기대로 발라오고 뼈다귀 등속은 한약을 넣어 고아서 즙을 만들어 가지고 온 것이다. 나는 아찔했다.
"아니 이걸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어떻게 먹긴 어떻게 먹어요? 그냥 먹으면 되는 거죠. 잡기 전에 혼을 뺐으니까 노린내는 안 날 거예요."
"뭐, 혼?"
"옛날 영화 같은 걸 보면 왜 망나니들이 사람을 죽이기 전에 칼춤을 추어 혼을 빼잖아요? 그런 식으로 이것도 잡기 전에 혼을 빼면 냄새가 안 난대요."
“……"
"죽이기 전에 끌고 산 같은 델 정신없이 막 뛰어 다닌다든가 눈앞에서 손가락으로 뺑뺑이질을 하면 빠진대요."
"허, 참,,,,,,"
"먼저 무엇부터 드실래요? 고기부터 드실래요, 즙부터 드실래요?"
거의 강제적으로 나오려는 태도여서 나는 일부러라도 진저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안 먹겠어. 생각해 보라구. 그렇지 않아도 혼을 지키기 힘든 세상인데 죽이기도 전에 혼빼낸 걸 먹었다가 어떡하겠어? 이걸 먹었다가 이제까지 아득바득 지켜온 내 혼마저 빠져나가면 어떡하냐구?"
갓난애를 쌀과 바꿔먹은 이웃에 관하여
결혼을 해가지고도 줄곧 세 방만을 살다가 기를 쓰고 장만한 것이 현재 살고 있는 집이다. 값으로 따지면야 서울 변두리의 껄렁한 두 간 전셋값밖에 안 되지만, 경기도 지구에서도 교통이 아주 불편한 그린벨트 지역 부근이라 터만은 그 나름대로 시원하게 트인 감이 있다,
건물 자체도 내부 자재가 싸구려라 그렇지 기와 지붕에 붉은 벽돌을 쓴 새 집이기 때문에 겉모양은 그럴 듯하다. 다른 주택촌이나 마찬가지로 똑같은 규격의 집들이 팔십여 채가 들어서 있는데 땅 임자와 집을 지은 사람간에 싸움이 벌어져 소송에 걸려 있는 관계로 아직도
비어 있는 집이 몇 채 있다. 우리 이웃집이 바로 그런 집의 하나이다. 사람이 들어 살고 있기는 하나 진짜 주인이 아니고 아직은 아무에게도 팔 수 없는 집을, 이 동네 집들을 지을 때 고용되었던 듯한 한 인부 가족이 임시로 빌어 살고 있는 것이다.
처마의 물받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창에는 유리 대신 비닐이 씌워져 있으며 울안에는 아직 펌프 수도마저 놓여 있지 않다. 물론 이 집과 우리 집 사이에는 블록으로 된 담이 있지만 높이가 내 목 부근밖에 차지 않기 때문에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문짝 없는 변소에서 치마를 올린 채 쭈그리고 앉아 있는 기미 투성이의 아낙네 모습이라든가 악을 쓰며 울어대는 자기 애들에게 '저런 모가지를 비틀어 죽일 놈 봤나'라는 식의 욕설을 아무렇지 않게 해대는 사내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이웃사촌'이라는 낡은 말이 아니더라도 이웃간에 사이좋게 지내서 나쁠 일이 무엇이 있으랴. 열 번이면 열 번 다 우리가 손해를 보더라도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는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인데 마누라는 그렇지가 않다. 인정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따질 것을 지나치게 따지려
는 생활 태도 때문으로 알고 있는데 아마 일의 발단은 연탄 문제로부터였을 것이다. 한때 연탄 파동이 일어 카드제니 배급제니 하고 떠들 때 내가 집에 없자 마누라가 배급을 받은 연탄을 동네 입구에서 몇 장씩 머리에 이어 날랐던 모양이다. 그걸 보고 이웃집 사내가 기사 정신을 발휘했던 것까지는 좋았다. 어디서인지 리어카를 가져와 백여 장 되는 걸 한꺼번에 실어다 우리 집 연탄광에 쌓아 주었다. 거기에 감동한 마누라가 연탄 값에 오백 원을 더 얹어서 주었다. 사내는 처음에는 사양하는 체하다가 받아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반장 집에 지불이 되었어야 할 연탄 값이 지불되어 있지가 않았다. 어떻게 된 거냐고 추궁을 하자 사내는 이렇게 대답을 하더라는 것이다.
"양식 살 돈이 없어 내가 임시로 융통했으니 곧 갚아 드리죠."
두 번째는 하수도 문제 때문이었다. 한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비가 좀 오게 되자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 부엌에 물이 괴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것인가 알아보니 이웃집과 연결되어 있는 하수도가 이웃집 안에서 문제가 생겨 그랬다. 마누라 말로는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 같다고 했으나 설마 그랬을 리야 없을 것이고, 어쨌든 우리가 어찌 된 거냐고 성화를 부리자 사내는 작업을 시작했고,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안 되어 제대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끝내고 나서는 일당을 요구했다. 자기네 집 하수도를 고쳐 놓고 우리한테 일당을 요구하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고 마누라는 펄쩍 뛰었고, 사내는 사내대로 우리가 고치라고 해서 고쳤으니 주어야 단다고 떼를 썼다. 마누라가 말을 안 들어 줄 것 같자 나중엔 나한테 매달렸는데 사정이 딱해서 그러니 도와주는 셈 잡고 조금만 생각해 달라고 말했다. 결국 마누라 모르게 내 주머니 돈을 조금 내주어 무마가 되었다.
또 한번은 전기 문제 때문이었다. 전기세 밀린 걸 안 내자 전기 회사에서 나와 이웃집 전기를 잘라 버렸는데 우리 집 전기줄에 잇지 않고는 끌어쓰지 못하도록 모조리 잘라 버렸다. 그러고는 우리더러 이웃집에서 전기를 끌어쓰려 해도 절대로 못 쓰게 하라고, 만일 쓰게 하면 우리도 함께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전기회사 사람은 반 공갈조의 소리를 하고 갔다. 그런데 이웃집 사내는 아니나다를까 우리 집으로 찾아와 사정을 했다. 요즈음 일거리가 없어 몇 푼 안 되는 것조차 못 내어 이 꼴이 되었지만 곧 풀리게 되면 갖다 내고 복구시킬 예정이니 그때까지만 좀 보아달라, 우리가 아무리 끌어써도 선생님네 계량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되어 있으니 그런 염려는 조금도 마시고 편리를 좀 보아달라, 이웃 좋다는 게 뭐냐, 어려운 때 피차간에 서로 도와가며 사는 게 이웃의 도리가 아니냐, 우리 집엔 라디오조차 없으니 부엌에 하나 방에 하나 해서 이십 촉짜리 꼭 두 등만 켜면 된다, 초를 사다 켤래도 촛값도 비싸 못 사다 켜겠다, 정말이지 요즘 같아선 약을 사먹고 죽을래도 약 사먹을 여유조차 없다, 죄송하다------
하지만 마누라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도둑 행위이며, 우리더러 거기에 동조하라는 건 도둑질에 공범으로 가담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웃끼리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건 그런 일에 도우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배운 사람이다, 그것이 나쁜 행위인 줄 알면서 어떻게 그 행위에 협조를 한단 말이냐, 우리는 양심상 도저히 그럴 수 없으니 다른 대책을 강구해 봐라---
나로서는 어떻게 해야 바른 태도가 될지 몰아 난처한 표정만을 짓다가 결국 이렇게 말했다.
"밀린 전기세가 얼마나 되는지 그걸 우리가 빌려드릴 테니까 갖다 회사에 내시고 복구해 달라고 하십시오."
그러고는 몇 푼 안 되는 그 돈을 나는 마누라의 과히 좋지 않은 눈길을 받으며 꺼내 주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돈을 갖다 내지 않았고 전기는 우리 집에서보다는 훨씬 더 먼 줄을 이어야 되는 앞 집에서 끌어다 쓰고 있었다,
또 한번은 말린 동태 때문이었다. 동태가 알을 많이 밴 데다가 파리가 없어 말리기가 좋은 봄철이 되면 마누라는 으례 그걸 상자로 들여다가 말린다. 내가 술을 많이 마시는 관계로 자주 북어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알은 알대로 창자는 창자대로 심지어는 아가미까지 버리지 않고 젓을 담글 수 있어 여러 면에서 이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번에도 한 상자를 들여다가 말렸는데 말릴 장소가 마땅치 않아 (마당에 널어 말리면 개가 그냥 두지 않는 관계로) 이웃집과 우리 집 사이의 블록담 위를 이용했다. 널빤지를 놓고 늘어놓자 볕이 좋아 사흘도 안 되어 거의 다 말랐는데 그걸 거둬들이면서 마누라는 첫날부터 한 마리가 빈다고 하더니 다음날엔 세 마리, 그 다음날엔 다섯 마리가 빈다고 이상하다, 이상하다,,,,,, 소리를 연발했다. 한 상자면 스물 대여섯 마리쯤 되니까 다섯 마리가 빈다면 세어 보지 않아도 눈에 띄긴 띄겠지만 세어 봤는지 어쨌는지 그러더니 그 다음날에는 아주 노골적으로 화를 냈다. 또 두 마리가 빈다는 것이다. 듣기가 거북해서 내가 말했다.
"쥐가 물어갔겠지."
"동태를 쥐가 물어가요?"
"아니면 개가 건드렸든지."
"개가 거길 어떻게 올라가요?"
"그럼,,,,,, ? "
"뻔하죠, 뭐. 그곳에다 말린 내가 잘못이지."
"이웃을 의심한단 말이야? "
"그만두세요. 이런 거야 뭐 서로 나눠먹을 수도 있는 거니까. 생각하면 소행이 괘씸하긴 하지만---"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알지도 못하긴, 그럼 붜 그게 다시 살아나서 바다라도 찾아갔단 말이에요?"
이런 일 외에도 그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이와 비슷한 일들이 가끔 일어났는데 어느 날인가 이 이웃집에서 이제까지는 들리지 않던 갓난애(올망졸망 두세 살이 더 되는 애들이야 있었지만 갓난애는 없었다.)울음소리가 들렸다. 만삭이었던 이웃집 아낙네가 해산을 했다는 것이었다.
"미역국도 제대로 못 끓여먹었을 거 아냐? "
“……"
"미역 한 가닥 정도야 사다 줄 수 있지 않아?"
"누군 뭐 그럴 줄 몰라서 그래요?"
갓난애 울음소리가 유난히 영악했다. 밤이면 계속 들려, 병적으로 쉽게 곯아떨어지는 그 무렵의 내 잠까지도 설치게 만들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날 때까지도 그 울음소리는 멎지 않았다. 첫애를 갓난애 때 병으로 잃은 경험이 있는 우리는 그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섬뜩섬뜩 놀라기까지 했다.
그런데 보름 가까이 된 어느 날 밤부터 갑자기 들리지 않았다. 어쩌다가 그러는 밤도 있나 하고 지나치다가 그 다음날도 여전히 들리지 않아 신기하게 생각한 내가 웬일이냐고 묻자 마누라는 웃으며 말했다.
"쌀하고 바꿔 먹었대요."
"뭐?"
"애 못 낳는 어떤 집에 주고 쌀 한 가마 받아왔대요."
"무슨 얘기야?"
"믿어지지가 않으시나 보죠 ? 애를 쌀하고 바꿔 먹었다니까......"
마누라는 계속 웃었다. 물론 나는 처음엔 믿지 않았다. 하지만 곧 이어서 그것이 사실임을 알았다. 그만큼 마누라의 웃음은 자연스런 것이 아니었고 어색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무엇엔가 크게 얻어 맞은 듯 멍한 상태로 있다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보기 싫어. 그런 이야기를 그렇게 웃으면서 스스럼없이 말하는 당신이 보기 싫다구. "
화신이 되어 나타난 어둠의 역사에 관하여
하나의 무슨 상징처럼 그 여인은 우리 집에 나타났다. 해방된 지 삼십 년이 되는 해라고 해서 '광복 삼십 년' 운운하는 말이 여기저기에 한참 오르내리던 무렵의 어느 비 내리는 밤이었다. 몸이 망가지는 것과는 상관없이 무모하게 마셔대던 이십대 시절의 술버릇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서 어쩌다 한번씩은 폭음을 하지 않고는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날 밤도 그렇게 몸이 흐물흐물하도록 마셔대다가 통금 시간이 다 되어서야 집 앞에 당도했다. 그런데 비틀걸음으로 세상의 어지러움에 대해 혼자 독백까지 해대며 집 앞까지 다가간 나는 초인종을 누르다가 눈을 흡뜬 채 오락가락하는 정신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둠의 덩어리 같기도 하고 쓰레기통 같기도 한, 아침가지만 해도 보지 못했던 한 물체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시멘트로 된 대문의 문턱에 놓여 있었는데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보니 그것은 물체가 아니라 남루를 걸친, 숨을 쉬고 있는 사람이었다. 거리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거지라고 곧 판단되었으나 그러면서도 나는 가볍게 지나쳐 버리지를 못했다. 그대로 그냥 두면 그 자리에서 죽을지도 모를 만큼 쇠약하고 늙은 여자인 데다가 잔뜩 비조차 맞은 채 움츠려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대문간들을 다 제쳐놓고 하필 우리 집 대문간에 앉아 있다는 사실과 함께 생각을 비약시키자 별별 생각이 다 들었기 때문이다. 가령 평생을 고생만 하다가 억울하게 죽은 어떤 한 많은 여인의 넋일지도 모른다는, 또는 어느 때보다도 어렵고 메마르고 거친 오늘의 이 세월을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시험하러 온 하늘의 사자일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가지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몹시 지쳐 있었는데도, 초인종소리를 듣고 나온 마누라와 함께 그 여인에게 관심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뭘 하시는 분인데 여기서 이러고 계세요?"
“……"
"가실 곳이 없으신 모양인데, 안으로 들어가시죠."
“……"
"이곳은 시골이라 야경원도 없고 파출소도 멀어 이렇게 계시다간 꼼짝없이 여기서 날을 새우셔야만 됩니다."
그래도 여인은 들은 체도 않다가 한참 후에야 비로소 우리를 올려다보더니 천식 기침 같은 개 울음소리와 비슷한 소리의 기침을 두어 차례 했다.
"정말 안 되겠어요, 들어가셔야지."
한 가정의 생활 가계부를 정리하는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이 냉정할 땐 냉정하고 따질 전 야박할 만큼 따져도 그래도 어느 면으로나 나보다는 훨씬 감상적이고 선량한 편인 마누라는 처음엔 무심코 지켜만 보았으나 여인이 기침을 하자 그때부터는 나보다 훨씬 더한 관심을 표명했다. 직접 여인의 손을 잡아 일으켰고, 집안으로 들인 후엔 젖은 옷을 자기의 헌 옷과 갈아입게 했으며 내 밥으로 남겨둔 밥을, 당신은 드셨죠? 라고 말한 후 차려 주었다.
마누라가 밥상을 건넌방으로 들여가는 걸 본 후 나는 그 여인에 대한 관심을 일단 마무리짓고 발도 씻지 않은 채 곯아떨어졌다. 여인을 보는 순간 싹 몰려가는 듯했던 취기가 방안에 있게 되자 다시 견딜 수 없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어느 때나 마찬가지로 악몽에 시달리다가 구갈을 느끼며 눈을 뜨자 방안의 줄에 낯이 익지 않은 빨래가 몇 가지 걸려 있는 게 보였는데 여인의 옷을 마누라가 빨아 넌 것임을 곧 알 수 있었다.
물그릇을 가까이 놓아주며 마누라가 말했다.
"얻어먹으러만 다니는 사람 같지 않고 좀 이상해요.
"왜 ?"
"몹시 지쳐 있는 것 같아 자세히 묻지는 않았지만 누구를 찾으러 다닌다나 봐요."
"누굴 ? "
"모르겠어요. "
우리가 아침을 먹을 때까지도 여인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깨워야 할지 어쩔지 망설이던 끝에, 푹 쉬도록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그냥 두기로 하고 나는 출근을 해 버렸다.
그런데 퇴근을 하고 돌아오자 마누라는 이미 우리 집을 떠나간 그 여인에 대해서 내가 귀찮아할 만큼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출근을 한 사이 심심풀이 삼아 모든 자초지종을 듣게 된 모양이었다.
어떤 사람의 생애를 이야기할 때 '기구하다'거나 '파란만장하다'라는 말을 곧잘 쓰는데 그 여인의 생애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런 생애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이야기가 너무 도식적이면서도 상징적인 것 같아 많은 생각에 부딪히게 되었다.
특히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는 우리 역사와 많은 관련을 갖고 있어 얼핏 그 여인이 우리 광복 삼십 년 역사의 어둠의 화신 같은 생각조차 들었던 것이다.
그 여인의 생애는 여순반란 사건 때부터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제 식민지하의 그런 끔찍한 세월 속에서도 양심에 크게 부끄러울 일 없이 결혼을 하고 3남1녀의 자녀까지 두어 복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을 누리며 살아왔는데 해방이 되고 미군정이 베풀어지고 그러다가 느닷없이 사건이 터져 남편을 잃은 것이다.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여수 주둔 국방 경비대가 일으킨 반란사건은 불과 일주일 만에 진압되긴 한 셈이지만 그때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은 적지 않았다. 남편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 후부터 여인의 생애는 그야말로 '필설을 가지고는 도저히 늘어놓을 수 없는' 생애가 되고 말알다.
첫아들은 사변 때 전사당했다. 아직 군대에 갈 나이도 아니었는데 붙들려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유골 상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 밑이었던 외동딸은 역시 사변 때 미군들로부터 집단 강간을 당하고 미쳐 돌아다니다가 기차에 치여 죽었다. 중학을 다니다가 그렇게 됐으니까 아직 사춘기도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둘째아들은 사월 학생의거에 앞장을 섰다가 부상을 당하고 병원에 입원한지 석 달만에 죽었다. 뇌를 다쳐 혼수 속을 헤매다가 끝내 죽은 것이다.
셋째 아들은 오윌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나서 십 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오 년 전에 행방불명이 된 후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여인이 몇 푼 모았던 재산을 깡그리 없애고 지금 꼴이 된 것도 이 셋째 아들을 찾기 위해서였는데 그러나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도 모르고 있다.
"우리나라 장편소설 같은 데서나 상투적으로 볼 수 있는 집안이군."
"글쎄 말이에요. 잘 곧이들어지지가 않아요. 아무리 기구하다고 해도 원 그렇게까지 꾸민 것처럼 기구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사실이긴 사실인 것 같았어요.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걸 느꼈어요.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딱하기에 가실 때 노자에 보태 쓰라고 돈 천 원을 드렸거든요. 그런데 받지를 않아요. 처음엔 사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앞가슴에 강제로 넣어 주다시피 했는데 끝까지 받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면서 정색을 하고 하는 말이, 자기는 거지가 아니라는 것이었어요. 우리가 강력하게 끌어 비록 하룻밤 신세는 졌다고 할지라도 구걸하면서까지 세상을 살고 싶지는 않다는 거예요. "
"최후의 긍지군."
"아들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제 생각으로는 죽었을 것만 같은데."
물론 마누라로서야 무심히 뱉은 말이겠지만 그 여인을 우리의 역사와 관련시켜 자꾸 상징적으로만 생각하던 나는 이렇게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 말버릇! 이왕이면 왜 그런 생각을 하지? 그런 긍지를 갖고 있는 한 틀림없이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찾아서 여생은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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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었다. 죽어 저 세상에 가면서도 가능하면 한겨울의 강추위는 피해 가자는 것일까. 날씨가 풀리면서 죽는 식구들이 더 많았다. 아직 추위가 완전히 가신 건 아니나 우선 햇살과 바람이 한겨울의 그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그래서 그런지 사흘이 멀다 하고 죽는 식구가 나왔다. 어떤 날은 하루에 두 식구씩 죽기도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올해가 다 가기도 전에 이곳 백 오십여 명의 식구들이 모두 다 죽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오늘 새벽에도 한 식구가 죽었는데 여느 때와는 달리 앰블런스가 오지 않았다.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식구가 죽을 때는 대개 오게 되는 앰블런스가 오늘 새벽엔 왜 오지 않았는지 신혜는 알고 있었다.
오늘 새벽에 죽은 심 순자 아주머니는 신장(腎臟)이나 안구(眼球) 중 어느 것도 기증하기로 되어 있지 않은 식구이기 때문이었다.
새 식구가 들어올 때마다 목사님은 말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고 서러워 마십시오. 이 세상에 나와 어떤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되신다면 그 은혜를 갚을 길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에서 주신 가장 큰 재산의 하나인 신장이나 안구라도 남겨 꺼져 가는 생명을 구하고 앞을 못 보는 불행한 사람에게 광명을 주십시오.”
물론 지나친 노약자에게야 권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많고 다른 병을 앓고 있더라도 신장이나 눈만은 괜찮아 보이는 식구에게는 서슴지 않고 권했다. 그러면 처음에는 주저하던 식구도 나중에 가선 감화되어 대개는 기증 서약서를 써 내밀었다. 그러나 식구가 막 되었을 때는 물론 기회 있을 때마다 그런 설교를 해도 끝까지 기증 서약서를 써내지 않는 식구도 없지 않았다. 오늘 새벽에 죽은 심 순자 아주머니도 그런 식구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이야 이제 오십대였지만 심근경색증을 앓으면서 정신도 좀 정상이 아닌 것 같았던 그 아주머니는 목사님 아닌 그 누구에게서라도 신장이나 안구 기증에 대한 소리만 사오면 노발대발했었다.
"말도 꺼내지 마. 나는 못 줘. 날더러 계속 그렇게 서약서를 쓰라고 하면 나는 여기서 나갈 테여. 정말 더럽구만. 세상엔 공짜가 없다더니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녀. 그것 조금 먹여주고 재워주었다고 신장과 눈알을 내놓으라니,,,,,, 어이구, 생각만 해도 끔찍해라. 한번 죽는 것도 서러운데 왜 두 번씩 세 번씩 죽으라는 거여? 죽은 후에도 저 세상이 있다면서, 그런 걸 떼어주고 저 세상에 가서 나는 어떻게 살란 말이여?"
원 참, 무슨 그런 걱정을 다 하시느냐고, 천국에 가셔서 다시 태어나실 땐 깨끗한 육체를 새로 받으실 텐데 무슨 그런 걸 문제삼으시냐고, 어쩌다 봉사자들이 건네기라도 하면, 더 펄쩍 뛰었다. 너희들이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 옛날부터 제일 큰 형벌이 무엇이었는 줄 아느냐, 죽은 시체를 다시 토막내 죽인다는 말 듣지도 못했느냐, 죽어서도 육신이 온전해야 제대로 저 세상에 가지, 그렇지 않아 가지곤 악귀가 되어 떠돌아다닌다는 걸 모르느냐라고 소리질렀다. 대개의 식구들은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높임말을 쓰는 봉사자들한테 그 아주머니는 한번도 높임말을 쓰지 않았다. 딸이나 아들 대하듯 함부로 대했다. 그것을 다른 봉사자들은 불쾌해하기도 했지만 신혜는 그렇지는 않았다. 허물이 없어 오히려 한 식구 같은 느낌을 더 주어 대하기가 편하기도 했다. 그 아주머니에게서 문득문득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었던 것도 그 때문인지 몰랐다. 원래부터 그렇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도 집을 나가시기 직전, 실성기가 심해지셔서는 그 아주머니 못지 않게 성깔이 고약했었다. 걸핏하면 신혜에게도 이년, 저년 욕을 해대며, 만만한 가재도구를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다, 오빠가 대학에 다니다가 군대에 가 어처구니없게 죽게 된 걸 엉뚱하게 신혜 때문이라고 물아 붙이기도 했다.
죽은 식구는 앰블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가 안구나 신장을 기증하고 화장이 되거나, 아니면 이곳 임시 묘지에 묻혔다. 식구들이 기거하는 '안식의 집' 건물 남쪽 산 한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묘지에 봉분 없이 얄팍하게 묻혀 나뭇가지로 만들어진 십자가 하나를 품에 안았다. 심 순자 아주머니도 그런 과정을 밟았다. 신장이나 안구를 기증하지 않고 죽은 식구들에게도 목사님은 똑같이 정성껏 기도했다. 천국이라는 낱말이 세 번, 영생이라는 낱말이 두 번 반복되는 기도였다. 봉사자들과 불편한 대로나마 기동이 가능한 식구들을 동반한 그 의식은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 걸로 시간을 많이 끌래야 끌 수도 없었다. 식구들이야 상관없겠지만 봉사자들로선 그럴 여유가 없었다.
자기 몸뚱이조차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백 오십 명이 넘는 식구들을 불과 일곱 명밖에 되지 않는 봉사자가 치다꺼리해야 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 일곱 명도 남자는 두 명밖에 안 되고 모두 여자여서 더 힘이 들었다. 심지어는 남자 식구들의 목욕까지 여자 봉사자들이 시켜줘야 되었다, 식사준비나 설겆이, 빨래는 물론 똥 오줌을 받아내는 일까지도 괜찮은데 남자 식구들의 목욕까지 시켜주려면 웬만큼 이를 악물지 않고는 안 되었다. 그만큼 신앙심이 두터워서 그런지 다른 봉사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아니 어느 때는 오히려 더 재미있어하면서 그 일을 했지만, 신혜는 이곳에 온지 석 달이 넘은 아직까지도 그 일만은 자연스럽게 되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날씨가 풀리면서 목욕을 하고 싶어하는 식구가 더 많아진 데다, 하고 싶어하지 않아도 으례 시켜주지 않아서는 안 될 식구들 때문에, 신혜라고 해서 그 일만은 못하겠다고 버틸 수가 없었다.
이날도 그랬다. 잠시도 일손을 뗄 수가 없다가 오후가 되자 약간 틈이 생겼는데 그 틈을 같은 봉사자인 조 금선 선생님이 붙들고 나섰다, 목욕을 시켜주러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짜증이 나, 또 남자 식구라면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생각뿐 차마 그런 말이 나와지지는 않았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온 것도 아니고 스스로 택해 봉사자로 와서 좋은 일 궂은 일 가리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그래도 처음에 와서보다는 이제 천사가 다 된 셈이었다. 팔이 사랑이고 봉사지 처음에는 사실 죽지 못해 사는 여자로서의 자학하는
심정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니다 말기야 했지만 대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콧대깨나 높은 걸로 알려졌던, 남이라고는 도무지 위할 줄 모르며 살아온 여자가 전혀 그런 심정 없이 어떻게 스스로 이런 반송장들이 득시글거리는 집으로 뛰어들었겠는가. 겉으로야 '안식의 집'이라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이름이 붙어 있긴 했다. 이름만이 아니라 실제로 하늘 아래 그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는 이곳 식구들에게는 이 이상 안식을 느낄 수 있는 집이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봉사자의 입장에서는 이 집은 성자나 천사가 되지 않고는 버텨내기 힘든,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로 가득찬 죽음의 집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세상의 냄새 중에 썩어 가는 사람 냄새만큼 역겨운 게 또 있을까. 이곳에 온 첫날, 신혜는 몇 차례나 구역질을 했었다, 복도, 방, 식당, 주방, 변소, 목욕탕 할 것 없이 집안에 온통 배어 있는 형언할 길 없이 고약한 냄새 때문이었다. 어느 집에나 그 집 특유의 냄새는 있게 마련이지만 이 집안의 냄새는 그렇게 유별날 수가 없었다.
음식찌꺼기 냄새나 분뇨 냄새, 또는 시궁창 냄새와도 완연히 달랐다. 뿌려진 소독약 냄새까지 뒤엎고 일어나 코를 찔러오는 그 냄새가 무슨 냄새인지 신혜는 처음엔 몰랐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 그 냄새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그것이 다른 냄새 아닌 바로 사람 썩어 가는 냄새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이 집 식구들 중 몸의 어느 한 곳이라도 썩어가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저 노쇠해 있을 뿐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알고 보면 어디든 한두 군데씩은 심히 앓고 있었다. 하기야 아무리 노쇠해 있다고 해도 특별히 앓는 데가 없이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으면 이 집 식구가 될 자격이 없으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집도 가족도 없는 데다 얻어먹으러 돌아다닐 수마저도 없는 불구자나 병약자, 그 중에서도 어른소리를 들을 만한 사람만이 자격이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혼자 몸이지만 한번 결혼한 경험이 있다는 조 금선 선생님은 나이가 신혜보다 일곱 살이나 더 많고 성격이 남자처럼 시원시원했다. 다른 봉사자들도다도 특히 신혜를 좋아해 무슨 일이든 둘이 함께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꼭 신혜를 동반했다. 신혜는 그것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싫었다. 다른 봉사자들이 쉬고 있을 때도 자기는 쉴 수 없게 만드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조 금선 선생님은 천성적으로 일을 좋아했다. 일을 하지 않고는 잡생각이 들고 좀이 쑤셔 못 견디겠다는 말을 입버릇으로 달고 다닐 정도였다.
"누구부터 시키죠? 남자 식구부터 시킬까요, 여자 식구부터 시킬까요?"
"오늘은 몇 명이나 시켜줘야 되는데요? "
"많이 시켜줄수록 좋죠, 뭐. 적어도 네댓 명은.”
"그럼 여자 식구들이나 시켜주고 말아요."
"안돼요. 남자 식구들이 더 급해요. 남자 식구들은 모두 남자 봉사자들한테 미루고 안 시켜서 꼴들이 말이 아녜요. 강 신혜 선생도 뻔히 보면서 뭘,”
"그래도 남자 식구들 목욕시키는 건 싫어요."
"왜요? 부끄러워서요? 아직도 식구들한테 그런 기분이 남아 있어요?"
"그럼 조 금선 선생님은 남자 식구들 목욕을 시키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에요?"
"뭐가 어때요? 난 더 재미있던데
"뭐요? 재미?"
물론 농담으로 일부러 그런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농담 속에 진담이 있다고 조 금선 선생님은 어쩌면 정말로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켜주지 않고 넘어가도 상관없을 남자 식구들 목욕을 왜 그렇게 애써 시켜주려고 한단 말인가
"놀랄 게 뭐가 있어요? 재미있잖아요? 여자들에게는 달려 있지 않은 고추도 구경하고,,,,,,"
"어머, 참, 자꾸 그러실 거예요? 그러시면 난 안 갈 거예요."
봉사자들 방에서 나와 조 금선 선생님이 앞장서는 대로 식구들이 있는 방들 쪽으로 따라가다가 신혜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울상을 지었다.
"알았어요. 그런 말 안 할께요. 하지만 강 신혜 선생은 역시 봉사자가 되려면 아직도 멀었어요. 병들어 죽게 생긴 식구들 간병하면서 푸슨 그런 걸 다 따져요? 남자라고 해야 거의가 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뻘이 잖아요."
신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인지 조 금선 선생님은 처음부터 남자 식구들 방으로 가지는 않았다. 여자 식구들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거나 곧 죽게 생긴 식구들이 있는 방으로 갔다. 열 세 명의 식구 중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지 않은 식구는 하나도 없었다. 두 사람이 들어가도 눈을 뜨고 쳐다보지도 않고 모두 가느다란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날씨가 좀 풀렸다고는 해도 모두들 추위를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난방이 약한 상태라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기름 보일러로 된 방을 계속 따뜻하도록 땔 수는 없기 때문에 이렇게 견디도록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연탄 보일러로 바꾸는 편이 나을 거라는 생각을 신혜는 겨울 내내 해 왔었다. 조 금선 선생님이 첫 번 째로 일으켜 세운 식구는, 평소에 신혜로서도 유난히 냄새가 많이 난다고 느껴 왔었던 팔순으로 짐작되는 대동아 할머니였다. 노망기가 심한 편도 아니고 말도 어눌하나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은 하는 편인데, 척추가 심하게 굽고 똥 오줌을 받아내야 할 정도로 몸을 거의 쓰지 못했다. 자기 고향이 어디인지도 기억을 못하면서 이따금 대동아 전쟁 이야기와 일본에 떨어졌다는 원자폭탄 이야기를 해 그냥 그렇게 불렀다. 형식적으로나마 일주일에 한번 정도씩 다녀가는 의사의 말로도, 심하지는 않으나 원폭 피해를 입은 할머니 같다고 했다. 이 할머니에게서는 별 증상이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자식을 낳았다면 그 자식들에게선 아마 심한 증상이 나타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목욕을 하시자면서 두 사람이 부축해 목욕탕으로 데리고 가자,
"목, 욕 ---? 곧, 죽을, 틴디---목, 욕은-, 무슨,,, 죽, 더, 라도... 깨, 끗이---허고, 죽으라고? 고, 맙, 구, 먼.., 그, 려, 야, 지 ---천, 당에, 가, 더라도---깨, 끗, 허게,,, 허고,..-.가야, 하, 나님이---좋= 아, 따시, 겄지,,= 라고 느릿느릿 더듬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곧 죽을 사람을 무엇 때문에 목욕을 시켜드리겠느냐고, 할머니는 오래오래 사실 것 같아 특별히 시켜드리는 것이니 더욱더 오래오래 사시라고 큰소리로 말하면서, 조 금선 선생님은 할머니의 옷을 벗겼다. 때를 벗기는 것도 비누질을 하는 것도 조 금선 선생님이 다 하므로 신혜는 할머니의 몸을 붙잡아 드리기만 하면 되었다. 자기 몸을 가눌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구태여 두 사람씩 동원될 필요가 없겠지만, 그렇지를 못하니 어쩔 수가 없는 것이었다. 뼈에 가죽만을 입힌 듯 쭈글쭈글한 그 몸에서도 때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벗겨졌다. 기력이 떨어져서 그런지 시원해서 그런지 할머니는 눈을 감은 채 쌔근쌔근 숨만을 내쉴 뿐 아무 말도 없이 두 사람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한참 때를 벗겨가던 조 금선 선생님이 갑자기 에그머니나 ! 라고 소리를 질렀다. 신혜가 놀라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는 얼굴로 바라보자, 조 금선 선생님은 여간해선 짓지 않는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할머니의 샅 쪽을 내려다보았다. 순간적으로 눈을 감아야 할 만큼 신혜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비명조차 터져 나왔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틀림없었다, 자잘한 허연 구더기 떼였다. 항문에서인지 음부에서인지 구물구물 기어 나와 욕실 바닥으로 흩어져 갔다. 겉으로 어떤 상처가 있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돼서 저런 것들이 !I.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들 목욕을 시켜 왔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종기가 나 짓물러 터진 식구들에게서도 볼 수 없던 일이었다. 두 사람이 그토록 비명을 지르며 안절부절 못해도 할머니는 별로 반응이 없었다. 가려움을 느낄 신경조차 마비되어 있는지 아무렇지 않게
"왜, 그려?"
라고 중얼거리며 눈만 한번 가느다랗게 떴다 감았다. 역시 조 듬선 선생님은 천사가 다 되어 있었다. 구역질이 날 텐데도 측은하다는 듯 쯧쯧 혀만 두어 번 찰뿐 할머니가 눈치채지 않도록 깨끗이 닦아냈다. 밖으로 나와 있는 것들만이 아니라 속 깊숙이 있는 것들까지도 일일이 끄집어내고 샤워 물줄기로 몇 차례씩이나 씻어내었다.
그렇지 않아도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인데 어쩔 수 없이 하다가 그런 것까지 보게 되니 신혜는 정말 목욕시키는 일에는 더 이상 가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조 금선 선생님은 막무가내였다. 산 사람 몸에서 그런 것이 발견되도록까지 식구들을 방치해 둔 데 대해 봉사자들은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더 열을 내어 한 사람이라도 더 시켜주려고 애썼다. 의용군에 끌려간 자식이 언젠가는 꼭 돌아올 것이라고 아직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의용군 할머니,
원래부터 벙어리인지 아니면 실어증에 걸린 것인지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다가도 낮이든 밤이든 가리지 않고 느닷없이 괴성을 지르며 몸을 떠는 실어증 할머니까지 시켜주고 나서도 남자 식구를 세 명이나 더 시켰다.
시대를 잘못 만나 아직 이 꼴로 있지만 자기는 원래 큰 인물이 될 팔자를 타고났으니 언젠가는 꼭 큰 인물이 될 거라는, 자유당 때는 무슨 회사 사장으로 정치가들 정치자금까지 대됐다는, 마누라와 딸은 지금도 미국에서 잘살고 있다는, 하반신을 못 쓰는 큰 인물 할아버지, 이남으로 와서도 결혼을 두 번이나 했지만 이북에 두고 온 아내와 아들 생각 때문에 결국은 다 헤어졌다며, 아내야 몸이 약했으니 죽었을지 모르나 아들은 살아 있을 테니 통일이 되어 아들을 만나보기 전에는 결코 죽을 수 없다는, 반신불수에 천식이 심한 통일 할아버지, 자신이 말년에 이런 꼴이 되어 있는 건 젊은 날에 노름을 좋아한데다 술집 여자한테 미쳐 마누라와 자식들을 다 버렸기 때문이라며 걸핏하면 회한의 눈물을 줄줄 흘리는, 역시 반신을 잘 못 쓰는 바람둥이 할아버지--- 목욕을 시켜주는 동안에도 남자 식구들은 언제나 마찬가지로 짓궂었다. 마비되어 몸을 쓰지 못하면서도 여자 앞에서의 남자 행세를 하지 못해 안간힘을 썼다. 남자의 기능까지 완전히 마비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은 통일 할아버지나 바람둥이 할아버지는 물론 완전히 마비된 것 같은 큰 인물 할아버지까지도, 조 금선 선생님으로 하여금 그 부분을 오래오래 깨끗이 씻어주기를 바라며 그 순간을 즐기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신혜는 얼굴이 달아올랐으나 조 금선 선생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기분 좋은데 좀더 오래 깨끗이 씻겨 달라는 큰 인물 할아버지의 요구에도,
"쓰지도 못하는 물건 깨끗이 씻기만 하면 뭘해요? 냄새나 안 나면 되지"
라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며 그 부분에 물만 두어 차례 더 끼얹어 주었다. 그것을 보면서 신혜는 언젠가 있었던 부끄러운 기억을 되살렸다. 방에서 똥 오줌을 받아낼 정도가 아니고 부축을 해주면 변소로 가 용변을 볼 만한 식구는 부축을 해주는데, 그날 저녁엔 사이판도 할아버지라는 분을 부축해 췄더니 변소 안에서 신혜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2차 대전 때 징용으로 끌려가 사이판도에서 사람고기까지 먹고 살아났다는 분으로 위와 간이 나빠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나라의 난민처럼 기형적으로 깡마른 데다 부축을 해줘야 겨우 걸을 수 있는 칠순이나 된 할아버지라, 순간적으로 망령기가 발동한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넘겨버리기에는 자세가 너무 이상했다. 놀라 왜 이러시느냐는 표정으로 몸을 피해도 불량배처럼 노려보며 끌어안을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신혜가 결국 그 할아버지를 뿌리치고 변소에서 나와 조 금선 선생님으로 하여금 모시고 나오게 한 것은 그 자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용변을 보고 나서 집어넣지 않고 그대로 둔 듯 성기가 바지 앞자락 지퍼 밖으로 나온 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지야 않았지만 더우기나 그것은 결코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노인의 것으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그때도 조 금선 선생닝은 그 할아버지 지퍼를 잠가주고 부축해 나오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망령드셨수? 물건이라고 시들시들 구실도 못하게 생겼고만 무슨 주책이우?"
2
봉사자라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관(棺)짜는 일로 보내는 정 태문 선생님은 흰소리를 잘했다. 웬만한 우스개에도 곧잘 얼굴이 붉어지는 게 재미있어서인지 특히 신혜한테는 더 심하게 굴었다.
"내가 관상 잘 보는 것 모르죠? 강 신혜 선생은 겉으로는 얌전한 척해도, 언제나 눈에 눈물 같은 윤기라 감도는 걸 보면 남자를 상당히 좋아하게 생겼어요. 내가 강 신혜 선생 과거 한번 알아맞혀 볼까요? 어떻게 돼서 이런 험한 곳까지 오게 됐는지......?"
그런 식으로 말을 붙여와 뭐라고든 한마디 대꾸를 해주면 그 앞에서 쉽게 떠나지를 못하게 만들었다. 손으로 붙잡는 게 아니라 말로 붙잡았다. 관을 만들 나무에 톱질이나 대패질, 또는 망치질은 계속하면서 입만으로 묘하게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날도 그랬다.
신혜가 아침 내내 한 빨래를 양지바른 곳에 널고 주방 쪽으로 가는데, 그 사이에 있는, 정 태문 선생님이 대개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관 만드는 장소에서 소리가 들렸다.
"강 신혜 선생, 그러면 못써요."
햇볕을 받기 위해서인지, 허름한 창고 같은 그 건물의 문을 열어놓은 채 일을 하고 있던 정 태문 선생님이 이쪽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또 무슨 흰소리를 하려고 그러는가 하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하도 느닷없는 말이라 신혜는 자연히 눈을 깜박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원 그렇게 속일 수 있어요?"
"속여요? 제가 윌요?"
"애인은커녕 가족도 없다고 했잖아요?"
정 태문 선생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고, 조 금선 선생님이 물어 그와 비슷하게 어물어물 넘긴 적은 있었다.
"제가요? 언제요?"
"조 금선 선생한테 그랬다면서요?"
"모르겠는데요. 기억 안 나는데요. 그랬다 하구요. 그게 뭐 잘못 됐어요?"
"잘못 됐죠. 속인 거잖아요? 찾아왔던데.”
"찾아와요? 누가요?"
정 태문 선생님이 흰소리를 잘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잊을 만큼 신혜는 흠칫 놀랐다.
"부모님이랑 애인이랑, 부모님이 그렇게 의젓하신 분인 줄은 몰랐어요. 애인도 아주 미남이시고,,,,,, 키가 후리후리한데다 탄력이 넘치던데--- 그 누구죠, 영화배우? 아메리칸 플레이보이라는 영화의 주인공, 그 친구하고 비슷하던데,,,”
신혜가 더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눈을 흘기며 떠나오자 정 태문 선생님은 등뒤에다 대고 계속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어젯밤 꿈에 찾아왔었다구요. 알죠? 내 꿈은 보통사람 꿈과 다르다는 것?"
관 만드는 사람은 영통(靈通)을 한다는 것이 평소의 그의 주장이었다. 자기가 관상을 남달리 잘 본다든가 자기의 꿈이 보통사람 꿈과 다르다는 것도 바로 거기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생각해 보라, 그렇게 많은 죽은 사람들의 방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어떻게 영계를 드나들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우연이었거나 또는 어떤 방법으로든 미리 소식을 들어 그랬는지 몰라도 어떤 때는 실제로 희한한 생각이 들만큼 신통하게 알아맞힌 때도 없지 않았다. 관을 짜면서, 이 관은 어떤 식구의 것이 될 것이라든가, 며칟날엔 관이 몇 개 필요할 테니 미리 짜두는 게 좋을 것이라면서 짜면 그대로 맞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아무 날엔 이 집에 귀한 손님들이 들이닥칠 것이라고 하면 기자들이나 요인들, 선교사들, 또는 어떤 자선단체의 사람들이 선물 보따리를 차에 싣고 몰려오기도 했다.
어떤 식구나 봉사자들의 과거를 어림짐작 알아맞히는 솜씨도 보통 수준은 넘었다. 새 식구가 들어와 묻는 대로 잘 대답을 하지 않아 답답하면 정 태문 선생님이 유도 심문하는 식으로 물어 알아내는 일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 집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지혜로운 면이 있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했다. 원래 목수 노릇을 한 일도 없다는, 이제 삼십대밖에 안 된 젊은 사람이 관을 손택없이 짜내는 것만 해도 그랬다. 그전에는 사다 썼었는데 하도 많이 필요하게 되니까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스스로 나서서 짜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혜만이 아니라 이 집의 그 누구도 정 태문 선생님의 과거에 대해서 소상히는 알지 못했다. 무슨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노총각이라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여자 봉사자들 중에는 그에게 특별히 이성으로서의 관심을 갖는 사람도 있었는데 신혜는 언제 한번이라도 그런 적은 없었다. 다만 이따금 그가 던져오는 흰소리 때문에 신경을 써왔고, 이날도 그 엉뚱한 말들로 해서 내내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그
가 내세우는 그의 영통을 조금이라도 믿어, 그의 꿈이 현실화될까봐 그런 것은 물론 아니었다. 애인이라고 말할 만한 남자는 지금은 물론 과거 어느 때에도 없었다. 다만 자기의 순결을 앗아간 남자야 있었으나 그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는 아직도 알고 있지 못했고 구태여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빼앗겼다기보다 내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신혜는 죽음 이외의 그 무엇이고 자기를 구원해 줄 수 없을 것 같은 극한에까지 내몰려 있었다.
국회의원을 지낸 적까지 있지만 계속 야당만을 고수해 온데다 지병이 있어 집 한 채 남겨놓지 못하고 아버지가 죽은 후 집안은 말이 아니었다. 대학에 갓 입학한 신혜는 물론 삼 학년에 재학 중이던 오빠마저 당장 학교를 그만둬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무리 가진 게 없더라도 학교마저 다니지 않아서야 어떻게 되겠느냐고, 어머니는 있는 수단 없는 수단 다 동원해 온 채 전셋집을 방 두 간 짜리 전셋집으로 줄이면서까지 가르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런 꼴이 보기 싫어서였을까. 그런 상황에서 태연스럽게 배우려고 하는 자신이 못 견디게 혐오스러워져서였을까. 어느 날부턴가 오빠는 공부보다 다른 일에 더 열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대학에서나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던 시위에 앞장서는 것으로 학교생활을 일관했다. 어머니나 신혜가 눈물을 흘리며 말렸으나 소용없었다. 끝내 자기 고집을 꺾지 않더니 결국엔 영장이 나와 군대를 가게 되었다. 졸업하고 가기로 되어 있으니 영장이 나을 리가 없는데 나왔다고 오빠는 투덜거렸지만 어머니나 신혜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군대에 가 얽매이게 되면 자연히 여러 면에서 달라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군대에 간지 일 연도 못 되어 유골 상자가 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몰랐다. 사고사라고 했지만 어떤 사고로 어떻게 죽은 것인지 구체적으로는 누구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오발사고라느니 자살이라느니 동료들과 싸우다가 죽었다느니 간첩작전에 나가 크게 부상을 입어 고생하다가 죽었다느니 말들이 많았으나 어떤 말이 정말인지는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었다. 사람이 실성한다는 건 간단했다. 그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언제 한 번 흐트러짐 없이 아버지 뒷바라지에 병구완, 그리고 자식들 교육에 그토록 정성을 쏟아오던 어머니가 오빠가 그렇게 된 후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신혜의 힘으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도록 실성기가 심해져 결국엔 집을 나가버리고 말았다. 곧 돌아오려니 했으나 며칠, 몇 달이 지나도 종무소식이었다. 신혜가 다니던 학교까지 그만두고 친척집, 친구집, 병원, 절, 기도원 등 웬만큼 다녀볼 만한 데는 다 다녀보았으나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실종신고에 심인광고까지 냈어도 허사였다. 그런 와중에서 신혜가 아무리 마음을 다져먹는다고 해도 언제까지나 멀쩡하게 버틸 수 있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더 이상했을 것이다,
지치고 지척 절망의 끝에 이르러 죽음만이 구원해 줄 수 있으리라는 결론을 얻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접근해 오는 거리의 남자한테 순결을 내동댕이쳤던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망가짐으로 해서 좀더 쉽게 죽음에 닿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역시 죽는다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엔 이런 엉뚱한 집에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물론 도피하듯이 붙잡은 신앙이 동기가 되었지만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는 자학의 심정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런 마당에 애인이 어디 있고 부모님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설령 그 동안 어디엔가 살아 있었던 어머니가 회복이 되어 찾아오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물론 어머니가 찾아오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이 집의 식구가 되겠다고 찾아온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역시 날씨가 풀려서인 것 같았다. 교통이 불편한 곳이라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로서는 찬 겨울 강추위가 몰아칠 때는 찾아
오고 싶어도 찾아오기가 힘들 것이었다. 물론 단독으로 오는 일이야 없지만 누구의 안내를 받아 와도 그랬다. 그냥 두면 거리에서 얼어죽을 것 같아 어쩌다가 경찰서나 군청 같은 데서 어쩔 수 없이 데려오는 일은 있었으나 그것도 극히 드물었다. 데려오는 사람들로서도 강
추위가 몰아칠 전 더 부담스럽기 때문일 게 뻔했다. 또 데려온다고 해서 무조건 다 받아주지는 못하기 때문에 이 집으로서도 한겨울에 찾아온다고 해서 좋을 건 없었다. 받아줄 경우에는 괜찮아도 그렇지 못하고 돌려보내야 할 경우에는 그만큼 더 난처하기 때문이었다.
이날 처음에 온 사람은 어떤 젊은이가 오토바이에 싣고 왔다. 무슨 장사꾼인지 오토바이 뒤에 합판으로 짠 때가 끼고 퇴색한 커다란 상자를 싣고 있었는데 그 속네 넣어 가지고 왔다. 그가 집 앞에 바짝 다가왔을 때가지도 신혜는 그 속에 설마 사람이 들어 있으리라고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라면이나 헌옷가지 같은 무슨 구호품, 살아 있는 무엇이라면 돼지나 염소 같은 것쯤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사람이 나왔다. 젊은이가 두 손으로 들어 꺼내놓았는데 얼핏 봐선 한쪽 다치를 제대로 못 쓰는 것 외에는 그다지 큰 이상은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이도 별로 많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라는 호칭보다는 아저씨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날마다 하지는 않았을지 모르나 세수도 자주 한 얼굴이고, 깨끗하게 보이지는 않으나 옷도 두툼히 입은 편이었다.
다른 잡일도 하면서 총무 일도 함께 보는 남자 봉사자 박 해준 선생님이 사무실에서 나와 맞이하자 젊은이가 말했다.
"이분이 이 집에서 살고 싶다고 데려다 달라고 졸라대 데려왔는데 어떤 수속을 밟아야 되죠?"
으례 그렇듯이 박 해준 선생님이 싫을 것도 반가울 것도 없다는 덤덤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물었다.
"두 분은 어떤 사이신데요7"
이쪽에서 무는 의심이라도 할까봐 그러는지 젊은이는 지나칠이만큼 강한 어조로 나왔다.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 그냥 시장 길에서 오다가다 몇 차례 마주쳤었는데, 어찌나 졸라대는지,,,,,, 아, 글쎄 날더러 자기한테 껌 장사 밑천으로 쓰던 돈 오천 원이 있으니 그걸 줄 테니까 데려다 달라잖아요? 내가 그런 돈을 받겠어요?"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껌장사를 하며 살아왔단 말이군요?"
"말이 껌 장사지 비럭질을 한 거죠, 뭐. 더러 보셨을 거 아니에요? 다방이나 술집 같은 데서,,,,,, 가게에선 백 원씩 받는 껌을 이백 원씩 받는 거지들,,,,,,"
"그런데 이제는 왜 그렇게 살지를 못하겠다는 거예요?"
"몸이 아프대요. 몸이 너무 아파 돌아다니지를 못 하겠대요. 오래 전부터 아팠었지만 참아왔는데 이제는 더 이상 못 참겠대요."
"그럼 병원엘 가 보셔야지,,,,,,"
"병원에 육 개월이나 있다가 퇴원을 한 거라는데요, 뭐. 살림 조금 있는 것 병원에서 다 가먹고, 하나 있던 딸마저 어디로 달아나 버려 어쩔 수 없이 껌 장사를 하기 시작한 거래요."
알았다고, 목사님한테 함께 가 보시자며 박 해준 선생님이 앞장을 서자, 젊은이는 머뭇머뭇 뒤로 물러섰다.
"나는 그냥 돌아가면 안 됩니까? 필이 좀 바쁜데
"안 되죠. 결정 여부를 알고 가셔야 되니까."
"결정을 누가 하는데요?"
"목사님께서요. 물어볼 걸 물어보셔서 이 집에 있어야만 할 사람이면 있게 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돌려보내시니까."
다른 면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그 면에선 목사님은 아주 철저했다. 비단 식구만이 아니라 봉사자 한 명을 있게 하는 데도 그랬다. 와서 있으라고 사정을 한다고 해서 있을 사람도 드물겠지만, 스스로 와서 있겠다고 사정을 해도 다 받아주지는 않았다. 심지어는 신혜조차도 스물 세 살이라는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망설였었다. 여행하는 기분으로, 또는 대학생이 방학 때 며칠 동안 시골로 봉사활동 나가는 기분으로 있으려면 아예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었다
세 사람이 목사님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신혜는 자기가 해야 할 일로 돌아왔다. 결국 오토바이에 실려온 그 사람은 있는 걸로 결정이 되었다. 그러나 오후 좀 늦게 두 번째로 찾아온 사람은 있지 못하고 돌아갔다. 일에 쫓겨 신혜가 자세히 보지는 못하고 스치듯이 보았지만 두 번째 온 사람은 열 살이 갓 넘어 보이는 소녀의 손에 부축되어 왔다. 오토바이에 실려온 사람보다 나이도 훨씬 더 들어 보이고 몰골도 눈뜨고 자세히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화상을 입었는지 얼굴이 온통 흉터였고 눈도 한쪽은 흰창만이 있었다. 거기에다 무슨 병이 있는지 몸도 전체적으로 부석부석했다. 어서 빨리 따뜻한 방에 눕혀드리고 싶도록, 어쩐지 곧 죽을 병에 걸려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신혜의 판단으로는, 아간 오토바이에 실려 왔던 사람은 받아주지 않더라도 이 사람은 받아줘야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결국 있지 못하고 돌아간 것이다. 목사님 방에서 나와 돌아갈 때의 광경 역시 스치듯이 볼 수 있었는데 어린 소녀가 뺨이 젖도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물론 모든 건 목사님이 알아서 하니 자기가 신경쓸 일은 아니지만, 그 소녀의 눈물이 잠자리에 들 때가지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신혜가 잠자리에 누워 조 금선 선생님에게 그 이야기를 비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왜 나이도 별로 많지 않고 병도 그다지 깊어 보이지 않는 사람은 받아주면서 그보다 훨씬 더 비참해 보이는 사람은 안 받아주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조 금선 선생님은 한참 묵묵히 있다가 신중하게 말했다.
"나도 얼핏 보았었는데, 겉으로만 봐서야 알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겉이 괜찮아 보여도 속으로는 곧 죽을병을 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겉은 곧 죽게 생겼는데 속은 괜찮은 사람도 있으니까. 그리고 말 들으니까 나중에 온 사람은 그 소녀가 친손녀라던데 아무리 어려도 가족은 가족이니까,,,,,, 자기 할아버지는 여기에 두고 그 소녀는 고아원으로 갈 셈이었던 모양인데 그것도 바람직한 일일지는 생각해 봐야 될 문제고,,,,,"
그러나 다음날 낮에 어쩌다가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정 태문 선생님은 전혀 다르게 말했다.
"강 신혜 선생은 관상으로 봐서는 예술이라도 하게 생겼는데 말하는 걸 보면 영 둔쎈느란 말이야. 척하면 삼천 리라고, 그걸 판단 못 하겠어요? 소녀가 모시고 나중에 온 사람은 한쪽 눈이 불구잖아요? 그리고 몸이 퉁퉁 부었으니 신장도 나쁠 테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우리 식구들을 불쌍하게 생각해서 아무데서나 무조건 자선금을 주는 줄 아세요? 주는 사람들도 있죠. 하지만 그것 가지곤 이 식구들, 어림없어요. 세상엔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는 법이에요. 병원이든 환자든 신장이나 안구 같은 거라도 기증 받아야 한 푼이라도 좀 많이 내놓지 그런 것도 없는데 덮어놓고 내놓을 줄 알아요? 그리고 여기 식구들도 그래요. 대개 다 기증서약서를 쓰지만 여기서 공짜로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지를 않아 보세요. 그래도 그런 걸 그렇게 많은 사암들이 쓸 것 같아요? 목사님으로서도 처음에야 이런 것 저런 것 따지지 않으셨겠지만 세상이 워낙 갈수록 각박해져 이 집도 문을 닫아야 할 지경이 되니 어쩌실 수 없겠죠."
3
한 대의 앰블런스가 다녀갔다. 며칠이 지났다. 또 한 대의 앰블런스가 다녀갔다. 또 며칠이 지났다. 다른 또 한 대의 앰블런스가 다녀갔다. 또 다시 며칠이 지났다. 몇 대인지 모를 앵블런스가 다녀갔다.
완전히 봄이 왔다. 웬만큼 심히 앓고 있는 식구들도 밖으로 나와 햇볕을 쬘 수 있을 만큼 한낮은 따뜻했다. 식사 시간과 예배 시간, 성경 공부 시간을 제외한 자유 시간에는 많은 식구들이 집 앞과 옆에 놓여 있는 벤치에는 물론 우물가, 장독대 옆, 언덕배기, 비탈 등에 나와 웅크리고 앉아 있는 일이 많았다. 하늘을 보는 사람, 산의 나무를 보는 사람, 한없이 펼쳐진 벌판을 보는 사람, 저 멀리 이 집과 이어져 뻗어 있는 길을 보는 사람, 고개를 끄덕이며 옆 사람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 옆에 아무도 없는데 혼자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고 투덜거리다가 소리 없이 웃는 사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아무 곳도 보지 않는 사람.
그런 식구들을 향해서, 햇볕을 받아 번쩍번쩍 빛을 되쏘아내는 검은 빛깔의 승용차 두 대가 들이닥친 것은, 이 집으로서는 가장 한가로운 시간인 오후 세 시쯤이었다. 자연히 식구들의 눈은 일제히 그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승용차들이 이 집 앞으로 들이닥치는 일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지난 연말에만 해도 몇 대씩이나 들이닥쳤었다. 그러나 봄볕을 받아서인지 이날의 승용차들은 검은 빛깔인데도 이제까지의 승용차들과는 달리 유난히 호화스럽게 빛나 보였다. 몇몇은 일어섰고 몇몇은 웅성거렸다. 어떤 식구는 환성을 지르기 도 했다.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식구들까지도 그 웅성거림과 환성에 무슨 일인가 해서 눈을 비켜 뜨며 자리에서 움직였다,
전화 연락이 있었는지, 아니면 득이닥치는 걸 보고서 박 해준 선생님이 연락을 드린 것인지, 목사님이 안에서 알맞게 나왔다. 교회 일로 자주 드나드는 전도사님과 집사님도 마침 목사님 방에 와 있었던 듯 함께 나왔다. 미리 알고 와서 기다린 것인지도 몰랐다.
승용차에서는 정확히 여덟 사람이 내렸다. 운전기사 두 사람을 제외한 여섯 사람이 무얼 하는 사람인지는 신혜로서도 알 수 없었다.
미국인으로 보이는 의젓하게 생긴 늙수그레한 외국인 남녀와 역시 의젓하게 생긴 늙수그레한 한국인 남녀, 그리고 젊은 한국 남자 두 사람이었다. 젊은 한국 남자 두 사람 중 한 명은 어깨에 카메라를 메고 있는 걸로 보아 비서 아니면 기자 같았고, 다른 한 명은 외국인 남녀 옆에 바짝 들러붙어 떠나지를 않는 걸로 보아 통역 같았다. 하지만 나이 많은 외국인 남녀와 한국인 남녀는 성직자인지 재벌인지 고관인지 분별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겉모습만으로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볼 위치에 있는 사람들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승용차들이 들이닥칠 때는 대개의 경우 그랬듯이 이날도 절차는 비슷했다. 인사들이 교환되고 몇 개의 선물꾸러미들이 전달되고 사진이 찍혀지고 떠들썩한 말소리가 오고가고 웃음소리, 이날의 말소리와 웃음소리는 외국인이 섞여 있어서 그런지 좀 색달랐다. 외국인이라도
젊은 선교사들이 섞여 있었던 그전에는 이렇지 않았었다. 그때에는 자유로움과 훈훈함이 감돌았었는데, 지금은 질서정연함과 정중함이 감돌았다. 사진은 계속 찍혔다. 선물꾸러미가 전달되는 광경만이 아니라 각양각색의 식구들 모습도 찍혔다. 외국인 부부, 한국인 부부가 걸어가다가 잠시만 머뭇거리면 그곳은 다 찍혔다. 그곳에는 대개의 경우 사람의 물골과는 가능한 한 거리가 멀어 보이는 식구들이 있었다.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방안에서 쓰레기더미처럼 누워 있거나 쓰레기통처럼 앉아 있는 식구들도 찍혔다.
살펴될 만큼 살펴보고 둘러볼 만큼 둘러본 그들은 목사님 방으로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조 금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신혜가 가지고 가 따랐다. 목사님은 물론 교회 관계 사람들이 올 땐 혼자 도맡다시피 하여 따라왔던 차를 오늘만 유달리 자기에게 따르라고 시 키는 조 금선 선생님이 못마땅했으나 그런 걸 가지고 투정을 부릴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혜가 커피를 따르는 동안 그 안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는 뜻밖에도 고려장(高麗葬)에 관한 것이었다. 아마 생명의 존엄에 관한 이야기 끝에 한국인 부부 입에서 그 이야기가 나온 것 같았다. 통역을 맡은 사람이 외국인 부부에게 통역을 해주자, 외국인 부부는 고개를 내저으며 거기에 대한 자기들의 견해를 이야기했다.
외국인들이 하는 영어를 구체적으로 다 알아들을 만한 실력은 못 되기 때문에 신혜도 통역하는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 외국인들은 고려장에 관한 자기들의 견해에 이어 안락사(安樂死) 이야기까지 꺼냈다. 결론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는, 고려장이야 천만부당한 일인 건 말할 것도 없고, 요즈음도 세계적으로 논의가 되고 있는 안락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문제라고 했다. 설령 식물 인간으로 십 년씩 살더라도, 하나님에서 주신 생명을 어떻게 인간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목사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한
국인 남자가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스치듯 반문했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육체에 칼을 대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칼을 대다노?"
"신장이나 안구 같은 걸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는 행위 말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그에게 준 육체를 왜 다른 사람에게,,,,,,"
"아니죠. 그거야 별개의 문제죠. 그는 이미 죽었고, 죽은 그가 남긴 육체로 해서 새로 한 생명이 태어나게 되는 거니까."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도 이식 받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하지만 그 경우에도,,,,,,"
"모르겠습니다, 뭐가 뭔지,,,,,, 나도 물론 목사님께서 하시는 이 일이 보통 위대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죠. 내 생각으로는 안락사라는 제도도 찬성을 해야 될 것 같아요. 식물인간으로 십 년씩 살다니,,,,,, 그래가지고, 그 주위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 당사자에게도 좋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거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 운운하는 말을 끌어다 대는 건 설득력이 별로 없다는 이야기죠. 식물인간만이 아니라 소생 가망이 없는 불치병 환자들은 적당한 시기에 안락사 시켜 본인도 고통에서 헤어나게 해주고 또 그들로부터 신장이나 안구를 이식 받을 사람들에게도 알맞은 시기에 혜택을 준다면 얼마나 바람직하겠습니까? 우선 목사님부터 이 일을 하시기가 훨씬 수월하실 것이고,,,, 나는 이런 생각도 해봤어요. 우리 나라는 현재 피가 부족해 외국에러 수입을 해 쓰는 형편인데 그런 걸 수입만 해 쓸 게 아니라 우리도 좀 수출을 할 수는 없을까 하는---, 피 아닌 신장이나 안구 같은 것도 우리 나라에서 쓰고 남아 수출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좋지 않겠어요? 꿈만은 아닐 것 같아요. 목사님같이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어쩌다가 큰 죄를 지은 사형수들이 남겨주는 그런 것만 가지고는 어림없는 일이---
신혜로서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이런 이야기들을 주고받다가 그들은 곧 떠나갔다. 그런데 떠나가기 바로 직전에 웃지 못할 뜻 아니한 사건이 벌어졌다. 집 앞 벤치에 앉아서 햇볕을 쬐고 있던 식구들 중의 한 명인 혁명 할아버지가 발작을 일으킨 것이었다. 4대 독자 외아들을4,19혁명 때 잃고 사업마저 5,16혁명이 일어나면서 망하게 되어 자기가 술만 마시다가 이 모양으로 폐인이 되고 말았다는 할아버지였다. 일주일에 한번씩 다녀가는 의사의 말로, 간경변이라 일 년을 더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주독으로 얼굴이 흉측스럽게 검붉은데다 정신도 황폐해 이따금 발작 증세를 보여 왔었다. 걸핏하면 식구들이나 봉사자들한테 시비를 벌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별별 험한 욕설을 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날도 그랬다. 무엇 때문인지, 떠나가기 위해 승용차에 오르려는 방문객들 앞에 나서서 느닷 없이 눈을 부라리고 손가락질, 삿대질을 해대며 큰소리로 욕설을 해 댄 것이었다.
"야, 이 개놈의 새끼들아! 내 똥이나 빨아먹을 새끼들! 우리를 어떻게 보고 그건 개수작들을....., !"
박 해준 선생님이 얼른 나서서 가로막아 끌어갔으니 망정이지, 하는 꼴로 봐서는 금방 누구의 멱살이라도 움켜잡을 기세였다. 미국인 부부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겠지만, 한국인들은 어리둥절해져 저 사람이 왜 저러냐고 중얼거렸다. 죄송하다고, 평소에 광기가 있는 사람이라 그러니 이해하시라며 목사님이 양해를 구해도 나이 많은 남자는 불쾌한 감정을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아무리 광기가 있어도 그렇지, 우리한테 저럴 수가 있어요? 우리가 뭘 잘못한 게 있다고, 가끔 와보려고 했더니 다시는 못 올 곳이구먼."
마치 멀쩡한 사람이 악감정을 가지고 그랬을 때나 똑같이 그러면서 운전기사에게
"갑시다!"
라고 소리친 후 떠나갔다.
이곳 식구들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것 같았던 그분이 그렇게 떠나가서인지 어이없다는 듯 목사님은 혼자 어색하게 쓴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그 일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지 밤에 하루 일과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을 때 봉사자들을 모아놓고 한마디하였다. 여러분들이 여 러 가지로 힘든 줄은 안다, 하지만 좀더 신경을 퍼서 다스리고 이끌어간다면 오늘 오후에 있었던 그런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분들의 근본적인 의도가 어디에 있든 간에 어쨌든 우리 '안식의 집'에 도움을 주려고 하는 분들인데 그런 식으로 보내드려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오늘 오후에 광기를 보인 그 식구가 아니더라도 평소에 광기가 심한 편이어서 위험하게 느껴지는 식구는 앞으로 손님이 오는 날은 밖에 나와 있지 못하게 하는 방향을 취해주기 바란다.
언제나 그랬지만, 목사님의 이 한마디에 대한 반응은 가볍지가 않았다. 목사님으로서는 어느 정도 심사숙고 끝에 한 말인지는 모르나, 목사님의 지시니 그대로 안 따를 수도 없고, 따르자니 그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 집 식구들 중 광기가 없는 식구들보다는 있는 식구들이 훨씬 더 많은데 어떻게 그 짓이 가능하겠는가.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것도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었다. 심하지 않은 사람도 갑자기 심해지는 일이 많은 것이었다. 물론 날씨가 추울 때라면 간단했다. 추울 때라면 나와 있으라고 해도 나와 있지 않겠지만 앞으로 몇 잘 동안은 갈수록 따뜻해지고 더워질 게 아닌가. 따뜻하고 더워 밖으로 나와 있으려는 사람들을 어떻게 강제로 방으로만 몰아넣는단 말인가. 그것도 손님이 올 때는 무조건 모두 다 그렇게 하라면 몰라도, 광기가 심한 식구만 골라 그러라니 난
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사님 앞에서는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있다가 목사님이 사라이자 제각기 한마디씩 하던 봉사자들은, 엉뚱하게 화살을 오늘 방문 온 손님들 쪽으로 돌렸다. 도대체 무엇 하는 사람들인데 우리 식구가 그런 욕 좀 했다고 그렇게 기분 나빠했는지 모르겠다, 무슨 그런 욕을 먹어도 될 짓을 하는 사람들이라 제 발이 저려 그런 것은 아닐까라고, 한 여자 봉사자가 말하자 다른 또 한 여자 봉사자가 그 며에 동조하며 박 해준 선생님을 향해 그분들이 무엇하는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총무 일을 맡고 있기 때문에 알고 있으리라고 믿어 물었을 텐데, 아는지 모르는지 박 해준 선생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굳은 표정만 지었다. 그러자 이번엔 그런 쪽에 비교적 밝은 조 금선 선생님한테도 물었다. 그러나 조 금선 선생님은, 몰라요, 내나 어떻게 알아요? 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신혜가 말을 꺼낸 건 그 때문이었다. 봉사자들 중엔 자기만큼도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던 것이다. 목사님 방에서 커피를 따를 때 그들이 주고받던 이야기를 들려주자, 한 여자 봉사자가, 어머, 그래요? 그럼 무엇 하는 분들일까요? 안락사며 신장과 안구 이야기를 했다면 의료 계통 사람들인 모양이죠? 라고 반응을 보였다. 정 태문 선생님이 나선 건 바로 이때였다. 진작부터 무언가 아는 체를 하고 싶었으면서도 전혀 몰라서 그랬던지 계속 아무 말도 않고 있다가 불쑥 내뱉었다.
"그분들이 무얼 하는 사람들인지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의료계통 사람이면 어떻고 고관나리면 어떻고 재벌이면 어떻다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아마 신장과 안구은행 같은 거라도 구상하고 있는 재벌쯤 되는 모양이죠. 혈액은행이야 우리 나라 에도 있고, 외국엔 그런 은행들이 많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신장과 안구만이 아니라 심장까지도 관할하는,,,,.. 그런 기업이 제자리를 잡는다면 굉장하겠는데요. 대량으로 위탁을 받아 갈아 끼우기를 원하는 돈 많은 사람들한테 판다면,,,,,, 그렇게 되면 이곳 '안식의 집'이 뭐가 되는 셈일까요? 뿔을 얻기 위해 사슴을 사육하고, 쓸개를 얻기 위해 곰을 사육하듯, 신장과 안구를 얻기 위해 임종을 지켜주는 인간 목장---? 모르겠습니다. 나야 곧 떠날 사람이니까 알아서 잘들 해 보시죠, 뭐."
이날 밤 신혜는 악몽에 시달렸다. 정 태문 선생님의 흰소리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자신이 직접 간병해 왔던, 그러나 죽음 직전이나 죽어서 앰블런스에 실려갔던 그 식구들이 눈과 신장이 없는 육신으로 나타나 덤벼드는 꿈이었다. 꿈이 아니고 반쯤 깨어 있는 상태에서의 환각인지도 몰랐다. 괴기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름끼치게 덤벼들며 자기의 눈과 신장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쳤다. 거짓말인지 정말인지는 몰라도 거의가 다 일제 때나 6,25사변 때, 월남전 때 또는4.19때나 무슨 데모사건 같은 역사적으로 큰 사건이 있었을 때 가족 전부나 일부를 잃었고 자신도 그 원인으로 해서 병을 얻었다고 주장하던 아저씨, 아주머니들이었다. 죽기 전에도 모두 비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는데 꿈과 환각 속에서는 그보다도 훨씬 더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소리를 지르다가 신혜는 끝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현실이 아닌 꿈과 환각이었다는 깨달음은 왔으나 그래도 무서움이 가시지를 않았다. 견딜 수 없도록 심장이 계속 격렬히 뛰었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자기가 어떤 상태에 이르러 이곳에 왔는데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절망의 끝에서 죽음을 택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해 그보다 더 비장한 각오로 이곳에 와 이런 일을 했던 게 아닌가. 물론 자기 능력으로는 너무나 부치는 일인 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이 세상에 이보다 더 희생적으로 남을 돌보고 사랑하는 일도 많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최선을 다해 왔지 않은가. 그런데 이 꿈과 환각, 이 견디기 힘든 흔들림은 무엇인가. 아무 데도 갈 곳 없는, 병들어 죽음에 임박한 식구들의 지붕은 될 수 있는 이곳이 자기의 지붕은 될 수 없단 말인가.
신혜가 이런 흔들림 속에 빠져 있는데, 더우기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 태문 선생님이 이곳을 떠났다. 흰소리를 잘해 그냥 괜히 한 말인 줄 알았더니 그날 밤 스치듯이 잠깐 비쳤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이곳에 와 이 년 가까이나 열심히 일해 온 그가 갑자기 떠나는데 대해 봉사자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그는 떠나가면서 별다른 이야기는 없이 이렇게만 말했다.
"한때는 못된 일,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받을 일만 해 왔었죠. 그런데 그 짓도 자꾸 하다 보니 별로 재미가 없더군요.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좋은 일, 맨주먹으로도 남을 위할 일을 찾아다니면서 해와 봤죠. 외딴 섬에 가서 선생 노릇도 해보고, 또 이런 일도...... 옛날 (상록수)의 주인공처럼 요즈음 세상에서 소위 말하는 봉사라는 것을 해 보려고 애써 왔는데, 글쎄요, 이것도 내게는,,,,,, 힘들어서가 아니라 이런 것이 과연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것이 될 수 있느냐는 데에 대한 회의가 와졌다고 할까,,,, 그러나 나야 뭐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렇게들 아시고 남아 계시는 분들은 잘해 보시도록.”
그가 떠났다고 해서 당장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관이야 그가 짜지 않더라도 그전처럼 사다 쓰면 될 것이고, 다른 일들도 여섯 사람이 나눠 조금씩 더 열심히 하면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일으키고 간 바람이 그리 약하지가 않았다. 봉사자들 거의 모두 흔들리는 말들을 했고, 특히 가장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조 금선 선생님마저 어느 날 조용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중에 가서 나를 원망할지 몰라 미리 말해두지만 나도 올 봄이 가기 전에 떠나게 될 거예요. 나는 이곳에 올 때부터 목사님께 말씀을 드렸어요. 정확히 이년 육개 월만 있겠다고, 그런데 다음 달이 약속한 달이거든요. 이 달이 될지 다음 달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남편이 교도소에서 나오게 되면 있고 싶더라도 더 이상 어떻게 있겠어요?"
떠난다는 말도 그렇지만 그보다도 교도소라는 말에 더욱 놀라 모두들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조 금선 선생님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심각히 말을 이었다.
"남편은 사상범으로 교도소 생활을 하는 마당에 내가 밖에서 이런 일 아닌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어요? 뒷바라지할 애들이라도 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도 않은데 돈벌이나 하겠다고 돌아다니겠어요, 어쩌겠어요? 그래서 해온 일인데 나도 모르겠어요, 잘한 일인지 어쩐 일인지 ,,,,,,"
이 집에 온 후 자기에게 기둥이나 마찬가지 역할을 해온 조 금선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말까지 듣고 나니 신혜는 정말 암담했다. 물론 자기의 신앙이 깊지 못한 탓일지 모르나 조 금선 선생님마저 떠나고 나면 이 집에서 자기가 과연 어떻게 버티어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렇 다고 이 집을 떠나서는 과연 어디로 가 더 이상의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그리하여 신혜는 낮이나 밤이나 틈나는 대로 기도하는 데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올 봄 들어 처음으로 비가 내렸다. 구질구질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오후가 되어도 멎지를 않았다. 집안에 켜켜이 굳어 있는 죽음의 냄새를 온통 들쑤셔 헤집어 놓은 그 비 때문이었을까.
신혜가 이 집에 온 후 가장 큰 사건이 벌어졌다. 목욕을 시키려고 목욕탕에 부축해 데려다 놓은 한 식구가 자해(自害)를 한 사건이었다. 일종의 발작이었으나 지난번 혁명 할아버지의 발작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목욕탕 타일 벽에 사정없이 자기 이
마를 짓찧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것이다. 봉사자들 사이에 침묵 아저씨라고 불리던 식구였다. 신혜가 이곳에 온 지 한 달 쯤된 지난 겨울 경찰서에서 데려온 사람이었다. 오십도 때 안 되어 보이는데 사지를 거의 못 쓰고 말을 못했다. 무슨 말을 물으면 눈빛이나 표정, 고개의 끄덕임만으로 겨우 대답했다. 밥도 늘 뜨는 등 마는 등 이제껏 내내 누워서만 지내오다시피 했고, 똥 오줌도 받아냈었다. 그런 그를 다른 식구들이나 마찬가지로 목욕을 시키기 위해 조 금선 선생님과 함께 목욕탕에 막 데려다 놓았는데, 아침 무슨 일 때문인지 한 봉사자가 와서 목사님께서 찾으신다며 조 금선 선생님을 불러갔다. 그와 둘이 목욕탕에 남게 된 신혜는 자기가 옷을 벗기기 어색해 조 금선 선생님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으로 잠깐 밖에 나와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신음소리를 듣고 놀라 신혜가 뛰어들었을 때는
이미 쓰러지고 난 다음이었다. 경악하는 신혜의 소리에 봉사자들은 물론 목사님까지도 달려왔다. 숨은 아직 붙어 있었으나 워낙 쇠약해 있었던 사람이라 살아나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을 뒤집어 살피던 목사님이 잠시 감았던 눈을 뜨며 담담히 말했다.
"앰블런스를 부르지. "
그러나 웬일일까. 목사님으로서는 일단 병원으로 옮기라는 말이었는지도 모르는데 봉사자들은 모두 그 말에서 신장과 안구 생각부터 한 것일까. 말은 못하고 사지는 잘 쓸 줄 모르나 이 식구도 분명히 기증서약서에 서명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일까. 봉사자들 중 어 느 누구도, 심지어는 총무 일을 맡고 있는 박 해준 선생님가지도 곧바로 전화통 있는 데로 달려가지는 않았다. 신혜 역시 언제까지나 움직이지 않을 자세로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아마 세상이 점차 콘크리트화 해가고, 거기에 따라 사람들의 의식 또한 메마를 대로 메말라간다고 생각되어서였을 것이다. 한때 신문이며 잡지며 방송에서 서로 다투듯이 전원(田園) 캠페인을 벌인 일이 있었다. 전원이라는 낱말이 들어가는 갖가지 제목으로 시골에 사는 유명인들의 생활을 취재하는 데 열을 올렸었던 것이라, 소설을 쓴다고는 하지만 결코 유명인은 못 되는 내가 어떻게 되어서 그 대상 중의 하나에까지 기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군청까지 있는 읍내니까 시골은 시골이라도 감히 전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은 못 되는데 잡지사에서 다녀간 한 달 후 또 신문사에서도 다녀갔다. 산을 배경으로 한 나의 전신 사진과 함께 원고지 네댓 장 분의 기사까지 곁들여 실려 나온 것이다. 기사는 나의 신변 이야기와 함께 내가 잡지에 쓴 일이 있는 전원에세이 중 다음 귀절에서 몇 마디를 요약해 쓰고 있었다.
“내가 서울을 떠난 건 스스로 떠난 게 아니라 떠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다가 어쩔 수 없이 밀려나고 만 것이라는 게 오히려 더 솔직한 표현이 될 것이다. 일의 터전이 없다거나 집 한간 마련할 수 없다거나 하는 외형적인 문제가 아니라 다방엘 가도 술집엘 가도 구석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는 내 의식으로는 도저히 더 이상 버텨가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젊어 덮어놓고 살 때는 잘 몰랐는데 이것저것 생각해 가며 살 나이가 되자 그야말로 미칠 것 같았다. 눈에 들어오는 사물 하나하나, 귀에 들리는 소리 따나하나, 의식을 건드리는 현상 하나하나가 모두 고문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좀 과장해서 말하면 결국 나는 미치지 않기 위해, 또는 이미 미쳐버린 나를 다스리기 위해 서울을 떠나와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확실히 신문이란 묘한 힘을 가지고 있는 물건이었다. 이 기사가 신문에 나가자마자 나한테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수십 통이나 되는 편지가 날아든 것이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별별 이상스런 내용의 사연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렇게 경치 좋은 곳에 사시면서 소설만 쓰신다니 얼마나 행복하시냐, 언제 한번 찾아가 뵐 테니 많은 도움을 주시기 바란다------
선생님의 소설집을 사려고 책방을 뒤졌으나 이곳에선 한 권도 구경할 수가 없었다. 구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라---
앞으로 저도 소설을 써 보고 싶은데 현재로선 편지 한 줄 제대로 못 쓰고 있다. 선생님께서 문장 지도를 좀 해 주실 수 없겠느냐---
신문에 난 사진을 보니까 굉장히 미남이신 것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그늘이 져 있어 보였다. 어디가 아프시거나 또는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어 숨어 사시는 게 아니냐,,,,,,
미친 병을 앓으신 적이 있다면서 요즈음은 괜찮으시냐, 저도 실은 육 개월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앞으로 대화나 나누고 싶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런 편지들이 날아든 건 어쩌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너절너절한 편지들 속에 대학교 때 은사이신 성 준식 교수님의 편지까지 끼여 있다는 건 정말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성 교수님의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
최군
신문에 난 자네 기사 읽었네. 자네가 그런 전원에 살고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네.
나는 정년퇴직을 한 후 집에서 줄곧 쉬어오고 있네. 언제 그곳이나 한번 방문해 볼까 하니 차편(車便)과 상세한 약도를 그려 보내 주게.
건투을 비네.
1980년 5월 24일
성 준 식
편지라기보다는 무슨 사무 서식 같은, 그렇게 간단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지만 나는 그 편지를 읽고 나서 뒤통수를 크게 한번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원래 사람됨 자체가 게으르고 칠칠치 못해서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 못하고 살아온 거야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성 교수님으로 하여금 스스로 이런 편지를 보내오시게까지 하다니, 그러고 보니 학교 졸업 후 십 사오 년이 지난 이제까지 내가 성 교수님을 찾아뵌 건 불과 서너 차례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도 졸업 직후 몇 년간, 처음엔 직장을 알선 받기 위해, 그리고 나중엔 직장을 알선해 주신 것이 고마와서 설날 같은 때에 세배를 드리기 위해 찾아뵌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성 교수님의 추천으로 나는 어떤 잡지사에 취직을 했었으나 병고와 실의, 삶에 대한 회의와 절망 등등 누구나 한때 당연히 치를 수밖에 없는 홍역 때문에 곧 그만두고 잠적해 버렸었다. 서울에 살긴 살면서도 아무런 직장 없이 월셋방에만 숨어살면서 지금의 아내가 된 여자뿐 거의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지금의 아내가 된 여자는 그 당시 내게 있어 말 그대로 구원의 여자였었다. 직장을 나가 번 돈으로 내게 월셋방을 얻어 주고 밥을 먹여 주었으며, 한번 기도했다가 실패한 자살을 계속 꿈꾸던 내게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일깨워 주었다. 그렇게 되니까 자연히 성 교수님이라는 존재는 내게 있으나마나 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아니, 내가 그 뒤 성 교수님을 한번도 찾아 뵙지 않은 것은 성 교수님이 내게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려서였다기보다 웃어른을 찾아가 인사드리는 일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나의 천성적인 게으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성 교수님한테는 그분이 애써 알선해 주신 직장을 스스로 그만두고 떳떳하지 못한 삶을 사는 자신이 염치없어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소설 나부랑이를 써 문단이며 세상에 이름을 내민 후에도 나는 한번도 찾아 뵙지 않았다. 찾아 뵙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두세 권의 소설집을 출간하고서도 소설집 한 권 보내드리는 성의조차 보이지를 않았다. 그래도 몇 년 전까지는 대학시절의 추억과 함께 이따금 문득문득 떠올리며 그분의 안부에 대해 마음속으로나마 궁금해한 적이 있었지만 근래에 와서는 그런 예의조차 갖추지를 못했다. 이제까지의 모든 다른 스승이나 마찬가지로 내게서 이미 까마득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뜻 아니한 편지를 받고 나니 그야말로 죽어 있다던 사람을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난 기분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꽤 길게 답장을 샜다. 그 동안의 나의 그릇됨과 몰예의에 대해 누누이 사죄의 뜻을 밝히고, 기다릴 테니 꼭 찾아오시라는 간곡한 당부와 아울러 차편과 상세한 약도를 그려 드렸다. 그러고 나서 일주일이나 지났을까 어느 화창한 날 오후에 불쑥 들이닥쳤다. 그날 따라 이상하게 더 글이 써지질 않아 오전 내내 책상 앞에서 끙끙거리기만 하다가 입이 깔깔하여 마루에 나와 점심 대신 막걸리로 혼자 목을 축이고 있던 중이었다. 첫눈에 봐도 성 교수님이 틀림없는 노신사가 열려진 대문 안으로 들어서며,
"말씀 좀 묻겠소. 이 집이,,,,,,"
라고 말하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학문의 깊이만큼이나 두꺼운 안경알 저쪽의 눈을 경련하듯 깜박거렸다.
"선생님, 접니다. 제가 최군이에요."
"오, 그렇군. 많이 변했는데,,,,,, 거리에서 만나면 잘 몰라 보겠어."
"선생님은 그대로시군요. 조금도 변하시지 않은 것 같아요."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첫눈에 알아볼 수야 있었지만, 성 교수님은 성 교수님이 나를 보고 느끼는 것 이상으로 많이 변해 있었다. 우선 얼굴의 주름살이며 백발이 처량하게 느껴질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옛날보다 더 바닥 야윈데다 살결도 고목 껍질을 연상시켰다. 손도 아직 따뜻하긴 했으나 이미 옛날에 잡아 본 손은 아니었다.
"열무김치에 막걸리라,,,,,,이곳에 오니까 확실히 다르긴 다르구먼. 여긴 막걸리 맛이 괜찮은가?"
"네, 좋아요. 선생님도 한 잔 하시겠어요?"
"아냐, 아냐. 요즈음엔 술이 조금 들어가면 운신을 못해. 더우기나 낮엔,,,,,"
아내로 하여금 인사를 드리게 하자 성 교수님은 아내에게 과자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최군을 만나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구먼. 애는 몇이나 두었소?"
"하나예요. "
"아들 ? "
“네."
"학교에 갔나?"
"아녜요. 이제 다섯 살이에요. 근처 어디 놀러 갔나봐요."
아내가 씻으시라고 세숫물을 떠다 내놓자 성 교수님은 들고 온 가방에서 부시럭 부시럭 세면도구들을 꺼냈다. 잠깐 다셔갈 계획치고는 가방이 왜 커 보였다. 세면도구들 외에 옷가지며 책 같은 것들을 넣어온 것 같았다. 성 교수님이 상의를 벗고 세수를 하는 동안 아내는 밥을 짓고 나는 방을 치웠다. 방이 두 개밖에 없으므로 내가 쓰는 방을 치워드릴 수밖에 없었다. 방의 꼴이 우스워 치우나마나 그게 그거였지만 책상으로 대용해온 호마이카 상위의 원고지들이며, 널려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책들을 대강이나마 정돈시켜 놓고 먼지를 쓸어내었다, 그러나 성 교수님은 세수를 하고 나더니 내가 쓰는 방에는 들어와 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 근처 민박할 데 있겠지?"
"민박을 하시다뇨? 저희 집에 계시죠 뭐."
"그럴까 했는데 와 보니 그렇게 되어 있지를 않구먼."
"물론 누추합니다만,,,,,,"
"누추한 게 문제가 아니라 방이 없지 않나? 둘밖에 없는 것 같은 데 내가 한 방을 차지해 버리면 자네는 어디에서 글을 쓰겠나?"
"그 점이야 염려 마세요. 글을 많이 쓰지 않으니까 안방에서 써도 상관없어요."
"아냐, 아냐. 그래선 안 되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나는 여기보다 좀더 조용한 곳에 있고 싶구먼. 산 속 같은 데가 좋겠어. 그런 마땅한 집 없을까?"
"오래 계시게요?"
"글쎄, 지금 계획으론 있기 싫을 때까지 있고 싶은데---"
"뭘 집필하시려구요?"
"뭐 그런 것은 아니고,,,,,,그냥 쉬더라도 어쨌든 산 있는 데가 좋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성 교수님이 우리 집에 있지 않으려는 게 꼭 우리한테 신세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만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민박 숙식비를 우리가 대신 내드리더라도 성 교수님이 마음에 들어하는 방을 구해 드리는 것이 옳은 처사일 것 같았다.
아내로선 시장까지 다녀와 성의를 다해 점심상을 차렸으나 성 교수님은 뜨는 둥 마는 둥 했다. 밥 두세 숟갈과 국물 몇 모금을 삼키기도 힘이 드는 듯 그는 몇 차례나 이마의 땀을 닦아내었다. 아니 처음엔 이마의 땀을 닦아내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얼굴에 땀이 전혀 배어 있지 않은데도 그는 손을 이따금 얼굴에 가져갔다. 땀을 닦아낸다기보다 얼굴에 붙어 있는 무엇을 잡아 뜯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옛날엔 볼 수 없었던 묘한 버릇이었다. 상을 물리고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그 동작은 신경을 거슬리기에 충분할 만큼 반복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분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그 당장엔 물어 볼 수조차 없었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그분이 원하는 대로 산 속 민가에 방을 얻어 주고 나서 며칠이 지난 후 그 집의 주인 아주머니를 통해서였다.
"거머리 때문이래요. 얼굴에 자꾸 거머리가 달라붙어 근질거리고 뜨끔거려 견디지를 못 하겠대요."
주인 아주머니는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외에도 성 교수님에 대해서 나로선 미처 모르고 있었던 몇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캄캄한 밤에 혼자 무덤 앞에 넋이 나가 있는 것처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계속 멍히 서 있는 일이 많으며 사소한 주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도 얼핏하면 어린애처럼 눈물을 글썽거린다는 것이었다. 그 집에 숙소를 정하던 날 밤의 일이었다고 한다. 바깥주인이 밖에 나갔다가 늦게 들어와 인사를 나누려고 보니 그분이 보이지를 않았다. 방에 없어 변소며 약수터며 서낭당 등 갈 만한 곳을 다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낮에 먼 길을 오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잠자리에 들 시간인데 도대체 어디를 갔단 말인가. 나이가 많은 데다 익숙치 못한 지역이라 어둠 속에 발을 헛디뎌 어디 골짜기로 굴러 떨어지기라도 한 것이 아닐까. 바깥주인은 덜컥 겁이 나 그분이 갈 만찬 전혀 엉뚱한 곳까지 찾아 헤매었다. 플래시를 가지고 골짜기는 물론 우거진 나무숲까지 일일이 비춰 보았다.
그리하여 결국 찾아냈는데 어이없게도 그분은 산등성이에 있는 무덤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던 것이다. 그 광경이 눈에 들써오자 바깥주인은 반가움은커녕 등골이 오싹했다. 그 무덤이 그분과 관계가 있는 무덤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이상 귀신에 홀리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바깥주인이 플래시를 비추며 여기서 무엇하고 계시냐고 하자, 아무렇지 않은 듯이 돌아서며, 주위가 하도 좋아 바람을 쐬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밤중에 하필 남의 무덤 앞에서 그러세요?"
"왠지 무덤이 좋아 보이는구료."
"네에 ? 무덤이 좋아 보이다뇨?"
"왜요? 이상하오? 나도 무덤으로 갈 날이 멀지 않아서인 모양이죠."
"핫, 선생님도,,,,"
“좋아 보이지 않더라도 좋아해 보려고 애를 써야 되겠죠."
웃어넘기기엔 너무나 점잖은 어조로 말을 해 바깥주인은 웃지도 못했지만 그분은 그 짓을 그날 밤으로만 끝내지도 않았다, 낮이나 밤이나 집에 없을 때 찾아보면 대개 무덤 부근에서
그렇게 넋이 나간 것처럼 멍히 서 있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하루는 마루에서 주인 내외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금 비참한 이야기가 나오자, 쯧쯧 혀를 차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산밑 굴속에서 문둥이 여자가 누구의 애인지도 모르는 갓난애를 혼자 낳아 키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랬고 지난봄에 그 산에서 여중학생 하나가 유린 살해된 사건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랬다는 것이었다.
주인 아주머니로부터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나는 한편으로는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고개가 갸웃거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가 들게 되면 사람은 자연히 육체만이 아니라 의식까지도 변하게 마련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옛날의 성 교수님을 생각하면 도무지 상상조차 가지 않은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사소한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글썽거린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이해하는 입장이 되려고 해도 웃음밖에 나와지지 않았다,
대학교 때 성 교수님은 다른 과목을 맡았던 것도 아니고 서양 철학을 맡았었다. 중학생만 되어도 그 이름 을 알 수 있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도 막상 이해해 보려고 접근해 보면 웬만한 의식을 가지고선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첫줄부터 어리둥절해지는 서양의 그 많은 철학자들이며 사상가들 -칸트, 헤겔, 쇼펜하워,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등등을 사상은 물론 혈통까지, 또는 취미며 좋아하는 음식까지 속속들이 주워꿰고 있는, 자기 친구들처럼 들먹이며, 인간과 신, 삶과 죽음, 사랑과 증오, 자유와 구속, 지배와 굴종, ,,,을 자유자재로 이야기했던 그분이었다. 그러니까 그분은 적어도 사십 년 이상을 인생에 대해서 학문적으로 깊은 연구를 해온 누구보다도 냉철한 이성과 뛰어난 지성을 갖춘 학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분이 체신 없이 어떻게 무덤 앞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죽음에 관해 그렇게 유치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며 한 방울의 눈물인들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보일 수 있단 말인가. 막연히 추상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그분은 얼핏 납득이 안 갈 정도로 냉철한 면을 내 앞에서 보인 적이 있었다. 문학병과 함께 광기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고질적인 병이 가장 나를 괴롭혔던 대학교 삼 학년 때의 일이었다. 세상에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조금도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고, 내가 온갖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선 오직 죽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그 무렵 어느 날 성 교수님과 과우들 몇몇과 함께 술집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술자리에선 대개 그랬듯이 그날도 나는 너무나 폭음을 한 나머지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 무슨 이야기 끝엔가 나는 성 교수님의 이야기에 비아냥거리는 투의 반발을 하다가 끝내는 유리잔을 벽에 던져 깨뜨리며 소리쳤다. 분명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당신이 교수면 다냐 교수라는 게 별것인 줄 아느냐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아니 나는 기억을 잘 할 수 없었는데 함께 앉아있었던 과우들 이야기를 들 으니 그랬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술에 취하면 모두가 다 개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하지만 실수라도 너무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성 교수님은 화를 내기는커녕 껄껄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는 것이었다.
"오늘 보니 최군에게도 아주 소중한 면이 있군. 광기, 천재들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광기가 있어."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성 교수님이 그자리에서 그런 태도를 보였다고 해서가 아니었다. 이튿날 잘못을 빌기 위해 그의 집으로 찾아가자 그분은 딱 잡아뗐던 것이다,
"뭐라구? 최군이 내 앞에서 실수를 했었다구? 실수라니, 무슨 실수 ? 모르겠는데,,,,,,나도 워낙 취해 있어서 모르겠어, 도무지 기억이 나지를 않아."
물론 거짓말이었겠지만, 그런 거짓말로써 제자의 체면을 세워 줄 수 있는 사실부터가 그분이 남달리 냉철한 이성을 갖지 않은 이상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서양철학을 담당하고 있는 우리 과의 교수라는 것뿐 나와 아무런 특별한 관계에 있지 않았던 성 교수님을 내가 다른 교수들과 좀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사건이 있고 나서부터였다. 교수들의 연구실을 드나드는 일을 벌을 쓰는 일만큼이나 싫어했던 내가 그분의 연구실을 아무렇지 않은 듯이 자주 드나들게 된 것도 그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분의 연구실을 드나들기 시작한 후 나는 또 한번 씻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분의 연구실엔 나 외에도 몇 학생이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자주 드나들었던 학생 중에 오 혜리라는 여학생이 있었다. 한마디로 학생답지 않게 성적 매력이 철철 넘치던 애였다. 살결이 곱고 몸매도 알맞게 빠진 데다 옷차림이며 말씨며 동작들이 그렇게 세련되어 보일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나보다 한 학년 후배였는데 그 애를 두고 학생들간에 말이 여간 많지 않았다. 남자관계가 이만저만 복잡한 여자가 아니라는 둥 밤에 술집에 아르바이트를 나가는 여자라는 둥 심지어는 성 교수님과의 사이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이야기조차 떠돌았다. 돌이켜보면 낮이 뜨거워지는 이야기지만, 나는 어느 날 그 여자를 한번 건드려보고 싶다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했다. 아니 솔직이 말하자면 생각은 불순하지만 그것이 나한테는 일종의 사랑의 감정 비슷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면서도 그 무렵 나는 누구에게 진실한 사랑이라고 할 만한 걸 쏟을 만큼 정신이 건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비꼬인 감정을 가졌던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어쨌든 한번 건드려 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기회를 노리다가 어느 날 나는 그 기회를 잡게 되었다.
축제 때라 대낮에 술까지 취해 있었는데 성 교수님의 연구실에 가 보니 성 교수님은 계시지 않고 그녀가 혼자 앉아 있었다. 아무리 그녀 혼자 앉아 있었다고 해도 물론 술에 취해 있지 않았다면 나는 그런 짓은 감히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그런데 술에 취해 있는데다 잔뜩 축제 분위기에 들떠 나는 순간적으로 발작 비슷한 걸 일으켰다. 미친놈처럼, 거리의 치한처럼 또는 먹이를 본 굶주린 맹수처럼 느닷없이 그녀에게 달려든 것이다.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자 그녀가 눈을 똥그랗게 뜨며 발딱 일어섰는데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억세게 끌어안으며 키스를 퍼부은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즉각 무슨 영화 속에서처럼 내 뺨을 후려치는 반응을 보여왔다. 뿐만 아니라 아주 노골적으로 치욕적인 빛과 함께 울그락불그락 분노의 감정을 감추지 못하며 뛰쳐나가더니 그 당장 학생과에 가 사실을 이야기해 버렸다. 그 결과 나는 무기정학을 당했고, 그것이 세상을 살고 싶지 않다는 평소의 내 고질적인 병을 한층 더 악화시켜 끝내는 자살 미수소동까지 벌이는 추태를 보였다. 장소를 산의 계곡으로 택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술을 마시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계곡으로 찾아가 동맥을 끊은 팔목을 흐르는 물에 담근 채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핏물 때문에 등산객들한테 발각이 된 것이었다. 과우들과 함께 병원에 나타난 성 교수님은 내게 아무 말도 없이 미소만 크게 지어 보였다. 아니, 처음엔 아무 말도 없다가 한참 후에야 말했다.
"어때? 지금 생각은? 지금도 죽고 싶나?"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눈물만 글썽거리자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주며 다시 말했다.
"그럼 됐어. 나중에 퇴원한 후 이야기하자구."
퇴원을 하고 나서 보니 나의 무기정학 징계가 풀려 있는 건 물론 오 혜리라는 여학생으로 하여금 연구실의 출입을 제한시켜 놓고 있었다. 과우들 이야기가, 성 교수님이 나보다도 오히려 오 해리를 더 나쁘게 이야기하며 출입을 삼가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남자가 아무리 예의에 벗어나는 행위를 보였다고 해도 같은 분야를 공부하는 학교의 한 선배인데 그 정도를 감싸주지 못하고 고발해 징계를 당하게 할 만큼 비정한 여자라면 여자로서 가장 소중한 면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 교수님은 나를 만나자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자살이라는 것에 대해서만 잠깐 이야기했다.
"나도 최군만한 나이 때 자살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봤었지. 최군만큼의 용기는 없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그 무렵엔 어느 하루 죽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 본 일이 없었어. 그런데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그것이 일종의 병이었던 것 같아. 의식이 깊어 있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고 애쓰다 보면 자연히 앓게 될 수밖에 없는 병. 상식적인 말이지만 그런 말들 흔히 하지 않아? 죽을 수 있는 그런 각오로 살려고 애를 쓴다면 어느 누구에 못지 않게 부러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물론 그렇게까지 살려고 애를 써야 할만큼 과연 삶이 가치 있는 것이냐고 물을지 모르나 가치가 있고 없고 문제를 떠나서 주어진 삶을 애써 살아
야 되는 건 이성을 가진 사암으로선 하나의 예의일 것 같거든."
성 교수님이 이곳에 와서 생활하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났다. 우리 집에서 모시고 있지 못한 이상 예의를 차리자면 아침이든 저녁이든 하루에 한번씩이라도 찾아가 문안을 드려야 옳겠지만 역시 천성적인 게으름 때문에 나는 전혀 그러지를 못했 다. 아내로 하여금 밑반찬이며 세탁물 같은 것이나 보살펴 드리라고 말한 후 나는 열흘 동안 두 차례, 그것도 잠깐 들어다보며 인삿말을 건네고 오는 정도에서 그쳤다. 술을 드시는 때라면 술이나 대접해 드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고 하지만 그렇지도 못하니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어쩌다가 무슨 말을 물어도 그전처럼 열을 내어 대답을 해주지 않고 어물어물 흐리멍덩하게 넘어가는 일이 많아 별로 묻고 싶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전혀 엉뚱한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자주 멍한 얼굴을 보였다. 거기다가 얼굴에서 거머리를 잡아내는 그 행동을 신경에 거슬릴 정도로 하는 통에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밑반찬을 가지고 그분한테 다녀온 아내가 웃음을 앞세우면서 말했다.
"참 이상해요."
"뭐가?"
"교수님 말이에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어린애가 된다더니 정말인가 봐요. 아, 글쎄 가방 속을 보니까,,,,,, 훗훗훗."
아내는 한차례 더 웃고 나서야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세탁을 해 주려고 세탁물을 찾으니 내놓은 게 하나도 없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빨아 주었는가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주인 아주머니 역시 빨아 주고 싶어도 내놓지를 않아 못 빨아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래 아내가 별수 없이 가방 속까지 뒤져 세탁물을 꺼냈는데 꺼내면서 보니 그 속에 이상한 책들이 있더라는 것이었다.
"이상한 책이라니?"
"홋홋홋."
"왜 ? 플레이보이지 같은 게 있었던 모양이지?"
"플레이보이지라면 괜찮게요. 플레이보이지야 당신도 잘 보지 않아요?"
"하하 이 여자, 사람 잡을 사람이군. 내가 언제 그런 걸 봤어 ?"
"그전에 봤지 않아요? 친구가 보는 걸 빼앗아 왔다고 해놓고선."
"그랬었나? 어쨌든 그렇다고 하고, 그래 가방 속에 무슨 책이 있었단 말이야?"
"만화들이 들어 있지 않아요?"
"만화?"
좀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나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그게 어때?"
"그게 어떻다뇨? 우습지가 않단 말이에요?"
"요즈음엔 만화도 예술이라고 떠드는 판인데 뭐. "
"그런 만화들이 아니라니까요. 누가 뭐 외국의 뛰어난 만화가들이 그린 만화 말하는 줄 알아요? 아주 유치한 만화들 있지 않아요? 우리나라 저질 만화들,,,,,,"
"성인용?"
"성인용만이 아니라 애들 보는 것도 있더라니까요. 한두 권이 아녜요"
"그런 것들을 왜 가지고 계실까? 손자들 주려고 산 거겠지."
"참 당신두, 손자들 줄 것을 서울에서 사 가지고 내려와요? 주인 아주머니 이야기가 교수님이 꺼내서 가끔 보시더래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잘 잡혀지지가 않았다. 물론 깊은 의식을 가진 가람들이 휴식의 한 수단으로서 상대적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행위나 또는 사물을 택하는 경우는 없는 건 아니다. 가령 누가 봐도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술집에 가서 작부들과 유치한 음담을 아무렇지 않게 즐기는 것도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옛날의 성 교수님을 생각하면 성 교수님과 만화란 아무리 두들겨 맞춰 보려고 애를 써도 맞춰지지가 않았다. 외국에 가서 생활한 적이 있어 그 사이 그런 습성이 몸에 배어버린 것인가, 나야 외국을 다녀오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프랑스 같은 데선 과연 예술이냐 아니냐로 논쟁을 일으킬 만큼 차원 있는 만화들을 차 속에서나 어디서나 신사숙녀들이 다반사처럼 즐겨 읽고 있다고 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렇다면 외국어에 능하니까 그런 차원 있는 외국 만화를 한 권 정도 가져올 수 있는 노릇 아닌가. 그런데 아내가 보기에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저질 만화를 한두 권도 아니고 여러 권씩 가지고 왔다는 건 무슨 이유인가. 어디 만화 협회 같은 회의 심의 위원이라도 되어 윤리 심의 같은 것이라도 하고 있는 중이란 말인가. 따지고 보면 구태여 갖지 않아도 좋을 궁금증이었으나 매사에 그렇듯이 나는 지나칠 정도의 궁금증에 사로 잡혀 있다가 드디어 어느 날 그것을 물어 보고야 말았다. 성 교수님이 묵고 있는 산동네에서도 불과 1킬로미터 남짓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저수지에 낚싯대 두 개를 드리워 놓고 함께 시간을 가지며 물어 보았던 것이다. 주로 낚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불쑥
"선생님께서도 만화를 보신다면서요?"
라고 묻자 성 교수님은 화들짝 놀라는 얼굴로 돌아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 나라고 해서 만화를 보면 안 되겠나?"
"안 되실 거야 없겠지만 좀 이상하게 느껴져요."
"이상하게? 어째서 그럴까? 철학교수였었으니까,,,,,,? 그래서 실망을 했다는 이야기군?"
"실망을 했다기보다 무슨 이유가 있으실 것 같아요. "
"이유? 글쎄, 이유야 재미가 있으니까 보는 거겠지. 최군은 만화를 보지 않는 모양이군? 소설을 쓰는 사람이 만화를 보지 않아서야 되나?"
“……”
"최군이 낸 책들은 잘 팔리나?"
"아뇨. 죄송해요, 선생님. 책을 펴내고서도 보내드리지 못해서, 실은 별로 떳떳이 내놓을 만한 책이 되지 못해서,,,,,,"
"아, 그거야 상관없는 일이고,----,사서 봤으니까 마찬가지지. 그런데 역시 안 팔리게 생겼더군. 소설도 만화처럼 쓰면 잘 팔릴 텐데 말이야. "
“……”
"출판사 사람이 그러더군. 요즈음엔 만화밖에 팔리는 것이 없다고 ..,.,내가 부끄러운 이야기 하나 할까?"
성 교수님은 한동안 침묵했다. 낚시의 찌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으나 찌를 보고 있는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눈이 어두워 안 보여서 그런지 몰라도 찌가 까땍거리는데도 전혀 낚아챌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애초부터 고기를 잡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도 아닌데 내가 대신 낚아챈다는 것도 우스워 그냥 보고만 있자 성 교수님이 말을 이었다.
"옛날 우리 선친은 자기 생전에 자기 책을 스스로 내는 일을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씀하셨었지. 아마 그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최군도 알다시피 나는 소위 학문을 연구한다는 사람이 삼사십 년 연구 기간 동안 한 권의 책도 내지를 않았거든. 논문이라고 해서 여기저기 발표한 것들이야 대여섯 권의 분량이 되기는 하지만 책을 내는 일이 어쩐지 쑥스러웠던 거야. 글답지도 않은 글들을 여기저기 발표한 것도 마지못해 찬 일인데 그걸 무슨 대수로운 것이라고 묶어서까지 내 부끄러움을 자초하겠어? 그런데 나이를 먹게 되니가 사람이 추해지
“……는 모양이야. 왠지 모르게 자꾸 허전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도대체 한 일이 무엇인가를 결산해 보니까 너무 허전해 견디지를 못하겠어, 그래 그 허전함을 조금이라도 메우고 자신한테라도 한 일이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기 위해 초라한 대로나마 한 권의 책이라도 내야 되겠다고 결심했지.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성 교수님은 어디를 앓고 있는 환자처럼 말을 하기도 힘이 드는지 다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숨을 한번 몰아쉬고 나서 한참 후에야 말했다.
"출판사에서 내 책 같은 책은 제작비를 내가 부담하지 않으면 내줄 수가 없다는 거야. 팔리지 않을 게 빤한데 적자 볼 줄 알면서 그냥이야 어떻게 내줄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었어. 그러면서 그러는 거야. 요즈음엔 학술서적이야 말할 것 없고 소설책도 여간해선 안 팔리고, 팔린다는 게 고작 만화들 정도라는 거야. 나쁜 책들만 내는 삼류 출판사라면 또 모르겠어, 그런데 그게 아니고 국내에서 몇째를 다투는 큰 출판사거든. 과거에 학술 서적들도 많이 냈고,,,,,, 그런데 알아보니 그게 거의가 다 자비 출판들이야. 웃음이 나와 그 잘 팔린다는 만화들 좀 보자고 했지. 그랬더니 내주더군. 그래서 읽어보니까 재미가 있어. 심오한 철학서에 못지 않은 철학이 바로 그 속에 있는 거야. 가령 최군도 읽었을 거야. 마키아 벨리의 <군주론(君主論))>. 1513년에 발표되었으니까 벌써 4, 5백 년이 지난 셈인데 아직도 한층에선 탄핵을 받고 있는 글이지. 인간의 약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목적을 달성할 필요가 있다는, 그러니까 악덕이라도 필요하면 좋은 것이라는 주장인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것을 탄핵한 군주들일수록 더 많이 그것을 이용해 먹은 일이지. 그런데 어떤 성인 만화를 보니까 그와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가 있어. 그 만화가가 누군지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아주 놀랄 만해. 그렇게 되니까 뭐가 뭔지 어리둥절해지더군. 그 많은 철학자들이 연구해 온 철학은 물론 이제껏 내가 생애를 바쳐 연구해 온 학문이라는 게 한 편의 만화보다 더 못한 것 같은 느낌조차 드는 거야. 도대체 사람에게 있어서 머리 아픈 학문이라는 게 왜 필요한 것인지 그런 국민학생 같은 회의까지 새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지."
물가에 앉아 있어 물의 장력에 취하기라도 한 것인가. 성 교수님의 의식이 아가보다 약간 젖어 있는 듯이 보였다. 격해지기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옛날의 강의시절을 떠오르게 할 정도로 억양에 힘이 생겨나 있었다. 마키아벨리에 대해서는 대학시절에도 열강을 한 적이 있었다. '짐은 인간성을 망가뜨리려는 괴물에 대해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서 일어났다. 짐은 궤변과 죄악에 대해 이성과 정의로써 대결할 것이다. 짐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해 장마다 반론을 펴놓았다'는 투의 서문과 함께 (반마키아벨리론)을 쓴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가 실은 당시의 정치가들 중에서 마키아벨리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히 실천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었다. 내가 미처 할말을 생각해 내지 못한 채 엷은 웃음만 웃고 있자 성 교수님은 혼잣말처럼 절망적으로 말했다.
"아무리 알다가도 모를 게 인생이라고 하지만 정말 뭐가 뭔지 갈수록 모르겠어."
성 교수님으로서는 그냥 가볍게 토해 놓은 말인지 모르나 나한테는 보통 충격적인 말이 아니었다. 사십 년간이나 인생에 대해서만 학문적으로 연구를 해 온 분이 인생을 모른다면 도대체 그 누가 인생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이날 나는 성 교수님에게 더 많은 것들, 가령 요즈음의 집안 생활은 구체적으로 어떠한지부터 물어 보고 싶었으나 자칫하다간 괜히 심사만 산란케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 같아 가능한 한 참았다. 그런데 며칠 후 서울에 살고 있는 성 교수님의 따님이 나를 찾아옴으로 해서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성 교수님과 함께 고기는 한 마리도 잡지 않은 낚시를 하고 돌아온(알고 보니 낚시를 하자고 한 나의 제안부터가 잘못이었다. 그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어도 찌는커녕 낚싯대 끝도 안 보일 정도로 시력이 나쁘다고 했다) 그날부터 나는 이상하게 몸살기 같은 게 느껴져 자리에 누워지내다시피 했다. 씌어지는 원고보다 파지가 훨씬 더 많은, 그 알량한 쓰는 행위마저 완전히 중단한 채 누워서 잡지나부랑이나 펼쳐 보고 있었는데 지난번 성 교수님이 우리 집에 찾아왔을 때나 비슷한 시각에 따님이 찾아왔던 것이다. 낮이 익다는 것뿐 처음엔 기억이 잘 나지 않았으나 스스로 성 교수님 이야기를 꺼내는 통에 곧 알 수 있었다. 아내 나이 또래이면서도 아내보다는 훨씬 여자 냄새를 짙게 풍겼다. 지상을 통해 나를 자주 뵈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녀는 그 동안 아버님을 보살펴 주셔서 고맙다고 말했다.
"저는 최 선생님 댁에 함께 계시는가 했는데 그렇지 않으시다니 다행이군요. 함께 계셔 글 쓰시는데 방해가 되면 어떻게 해요? 아버님이 옛날 같지 않으시고 요즈음엔 많이 달라지셨거든요. 학교에서 명예 교수직을 주겠다고 해도 마다 하시고 이러시는 거예요. 아마 평생 동안 학자 노릇 해오신 걸. 후회하시나 봐요."
따님은 여러 가지 구구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머니가 재작년에 돌아가시고 아들 내외는 미국에 가 살고 있으며 자기는 결혼해 시집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아버님은 현재 혼자 살고 있는데 가정부를 얻어 드려도 당신 스스로 내보내시고 혼자 사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들 내외가 미국에서 오시라고 초청장까지 보내왔는데도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이 마당에 그곳에 가면 뭘 하겠느냐면서 안 가셨다는 것이었다. 또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별로 그러시는 것 같지 않았는데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죽음에 대해서 부쩍 많이 생각하시는 것 같다고 했다. 텔리비전 같은 걸 보시면서도 눈물을 흘리시는 일이 많고 밤에 주무시지 않을 때도 불을 끈 채 어둠 속에 앉아 계시는 일이 많으며 지난번에 죽은 친구를 꿈에 보았는데 어떤 꼴을 하고 있더라는 등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는데도 누가 찾아온 것 같으니 문을 열어보라는 등 당신이 죽으면 관에 넣지 말고 수의만 입힌 채 묻되 염포로 묶는 짓을 하지 말라는 등의 엉뚱한 이야기를 자주 하시곤 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바람이나 쐬러 가게 애 아빠랑 함께 나오라고 하더니 산으로 데리고 가 엉뚱하게 남의 집 산역(山役)하는 광경을 보여 주시더라고 했다.
"평소에 우리에게 사람은 삶 못지 않게 죽음도 깨끗한 죽음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거든요. 그래서 그러시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아마 이곳에 와 산에 계시는 것도 죽음에 대한 어떤 연습을 하시기 위해서인지도 돌라요. "
죽음에 대한 연습이라는 말이 우습게 들렸으나 나는 웃지 않았다. 자살미수사건 소동을 벌였었던 옛날의 나를 잠깐 떠올렸을 뿐이었다. 아니 내 주변에서 죽어간 몇몇 사람들의 죽음을 떠올렸을 뿐이었다.
따님은 가능하면 아버님을 모시고 갈까 하고 왔다고 했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다. 따님 말대로 정말 죽음에 대한 연습을 하는 것인지 어떤지 아무런 하는 일도 없는 것 같은데도 성 교수님은 따님이 떠난 후 일주일 가량이나 더 있다가 떠나갔다. 떠나가는 날 버스터미널에 가서 버스 표를 끊어드리자 성 교수님은 얼굴에서 거머리를 잡아내는 그 동작과 함께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내가 살 걸 그랬어. 늙은 사람들 표는 함부로 끊어주는 게 아냐. 이 표가 저승으로 가는 표가 되면 어쩌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좀 이상하긴 했으나 그래도 나는 그것이 단순히, 비록 몇 푼 되지 않는 돈이라고 해도 나로 하여금 그것을 쓰게 한 것이 미안해서 그런 것으로만 가볍게 생각해 버렸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나는 불과 닷새 후에 알았다. 성 교수님이 묵고 있었던 집의 우인 아주머니로부터 성 교수님이 이곳을 떠나가기 전날 만화책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는 소리를 듣고 혼자 미소를 지었는데, 바로 그때 서울로부터 병사인지 횡사인지 자살인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성 교수님의 부음(訃音)이 날아들었던 것이다.
최창학(崔昌學: 1941- )
전북 익산 출생. 고려대 국문과 졸업. 1968년 중편 <창(槍)>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하여 등단함. 서울 예전 문예창작과 교수. 그는 현실 속에서의 삶의 왜곡과 훼손의 실상을 밝힘으로써 존재의 자아 상실을 그려내는 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적(敵)>, <긴 꿈속의 불>, <먼 소리 먼 땅>, <형>, <도예가의 마을>, <물을 수 없는 물음들> 등이 있다.
작 은 부 르 짖 음 속 의 숨
최창학
막걸리로 보충하는 피팔이의 피에 관하여
떠올리기조차 끔찍하지만, 우리는 첫애를 두 돌도 채 넘기지 못하고 병명조차 정확치 않은 악성병으로 잃었다. 병원마다 진단이 다르게 나오는 그 이상한 병으로 결국 대학병원에 입원한 지 열 여드레만에 죽은 것이다, 입원해 있는 동안 마누라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나로서도 한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고역을 겪어야만 되었다. 암이라든가 백혈병이라든가 매독 같은 것 말고도 그렇게 무서운 병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었다. 한쪽 코에 산소통과 이어진 호스를 끼고, 이마에 링겔병과 이어진 바늘을 꽃은 채 얼굴이 온통 반창고 투성이가 되어 새파랗게 굳어진 몸을 어린것은 바르르 바르르 바르르 계속 떨었다,
그 옆에서 우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걸 지켜보면서, 숨이 멎으면 의사나 간호원에게 알려 입의 오물을 빼내 주거나 심장 마사지를 시켜 회생시키곤 했다.
바로 그 무렵의 일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직장을 쉴 수는 없어 나는 점심 시간과 밤 동안만 거기에 가 있었는데, 한여름이었기 때문에 일 년 중 정초 때 말고 꼭 한차례 있는 며칠간의 휴가가 마침 그 때 주어져 그 휴가 기간 동안에는 줄곧 있게 되었다. 병원에서 밥을 한 그릇씩만 주었으므로 마누라가 그걸 먹고(원래는 환자 분이지만) 나는 사먹어야 되었다. 병원 밖으로 나와 종로 쪽으로 있는 길을 하나 건너 어떤 싸구려 집을 단골로 삼았다. 밥집이 아니라 왕대포집으로 다른 밥 종류는 없고 백반만 아주 싼 값에 팔고 있었다. 그 집을 드나들면서 나는 밥보다는 술을 더 많이 마셨다. 몇 끼니 연이어 안 먹기 전에는 밥 생각이 안 날 때였으므로 대개의 경우 술 한두 잔으로 때웠는데 막걸리도 먹고 소주도 먹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는 오후에 가서 소주를 찾으니까 주인 노파가 불쑥 말했다.
"오늘은 피팔이들이 안 와 막걸리가 잔뜩 있는데, 막걸리 들지 그래요?"
"피팔이라뇨?"
"왜 몰라요, 피를 팔러 다니는 사람들? 피를 팔아먹고 사는,,,,,,"
"아, 매혈자들 말씀이신 것 같은데 매혈자들 중에 그렇게 전문으로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까?"
"있다마다요. "
"그 사람들이 막걸리를 먹습니까?"
"먹어도 보통 먹는 게 아치죠. 사발로 몇 사발씩 쉬지 않고 들이켜지요. 그래야 빼낸 피만큼 보충이 된대요."
몸에 힘이 없을 때 술을 한두 잔 들이켜면 혈액순환이 빨라져 일시적으로 힘이 생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지는 건 나도 경험한 바라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듣고서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 후 그 사람들과 그 집에서 우연히 맞닥뜨렸는데 (물론 자리야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스무 살이 갓 넘어 보이는 사람들로부터 마흔이 넘어 보이는 사람까지 있었다. 주인 노파가 내게 눈짓을 해 알아차렸지만 그들끼리의 대화를 들으니 그들은 자신이 하나의 완전한 직업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장사꾼들이 밑천을 들여 촌을 벌 듯 막걸리 값의 밑천을 들여 돈을 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니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떳떳한 장사라고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제미랄, 이놈의 짓도 이제 그만 해먹어야지."
"왜? 이놈의 짓이 어때서? 우린 지금 헌혈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거야."
"헌혈 좋아하시네. "
"장사로 쳐도 그렇지. 씁 팔아먹고 사는 기집년들 말고는 이만큼 밑천 안 들이는 장사가 어딨어?"
"붕어 점심 먹는 소리하지 마. 몸이 망쳐지는 건 생각 않나?"
"몸이야 늙어 가면 다 망쳐지는 거야. 나는 요즈음 내가 왜 진작에 이런 걸 생각해 내지 못했나 하는 생각을 하는 때가 많아. 자넨 잘 모르겠지만 나도 안 해본 것 없는 놈이야. 강도, 도둑질, 도둑질 중에서도 시체 도둑이라는 거 아나? 군대에서 전방 복무를 했다면 알겠지만 시체 도둑이라는 게 있어. 시체를 도둑질 해다 병원에 수술 실험용으로 팔아먹는 건데 값이 왜 짭짤하지. 어떻게 훔치는지 아나? 울타리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전방 부대에서야 시체실이라는 게 한 데나 마찬가지 아닌가? 보초야 동초 한 명에 따로 둘이 동원되지만 그자들이야 대개 안에서 소주나 까고 있게 마련이지. 거기에 유령이 되어 나타나는 거지. 허연 광목을 뒤집어쓰고 히히히 웃음소리를 내는데 기절하지 않을 놈이 어디 있어? 기절하면 점잖게 떠매고 나오는 거고 달려들려고 하면 가지고 간 막대기로 한방 냅다 치는 거지. 그런 놈의 짓도 해먹었는데,,,,,,뿐만 아니야. 차 밑으로 뛰어들어 위자료 타먹는 짓, 시골에서 올라온 순진한 기집애들 팔아 넘기는 짓, 춤바람난 유부녀들 등쳐먹는 짓, 그런 오만 짓을 다 해먹은 난데, 요즈음의 이거야말로 얼마나 당당하고 신선한가?"
"젖 까고 나발부네. 너만 그런 짓 한 줄 아냐? 나는 씁 팔아먹는 년들한테 아편도 팔아먹은 놈이야. 어떻게 팔아먹는 줄 아나? 처음엔 착실한 단골이 되지. 알려진 값보다 몇 푼만 더 줘도 몇 차례 찾아가면 빨아 주고 돌려주고 별별 짓 다하는 그년들 아냐? 그년들한테 좋은 보혈제라고 하고 한 방 꽉 놓아주는 거야. 한 방 가지고는 안 되지. 직업이 의사라고 하고 한 서너 차례만 놓아주면 그 뒤부터는 살려 주십시오지. 그러면 그때부터 긁어내는 거야. 씁 팔아 번 돈 몽조리 다 긁어내는 거지.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제 그런 짓은 해먹을래도 해먹을 수 없게 되었지만 차마 어디 그게 해먹을 짓이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놈의 짓을 해먹고 있는데 뭐? 헌혈 운동? 내 머리가 이렇게 어지러운데 헌혈 운동? 개씹--- 아휴 어지러워."
나이 많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젊은 사람 중의 하나가 끼어들었다.
"정말 혀 먹을 게 없어라우. 노동을 혀 먹을래도 붙여 줘야 말이지라우. 아직 젊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피를 빼고 나면 오히려 시원해지며 정신이 더 맑아지는 것 같아라우. 그래서 직업치고는 이것이 괜찮다고 생각허는디,,,, "
남은 젊은 사람 하나가 여기에 맞장구를 쳤다.
"나도 그럽디데이. 피를 뺄 땐 시원한 게 꼭 용두질할 때 기분하고 같습디데이. 기분 좋고돈 버는데 나쁠 게 뭐 있습니껴? 우리가 뺀 피로 죽어 가는 사람 살리니 그 점에서도 우리는 긍지를 가질 필요가 있는 기라요."
분명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나와 같은 피부 빛깔을 떤 사람들의 이런 이야기들을 들은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그날도 역시 밥 대신 술로 때우고 병원으로 가자, 이마에 꽂았던 링겔 바늘을 손목에 꽃기 위해 핏줄을 찾느라 애의 손목 여기저기를 만지작거리며 땀을 흘리고 있는 의사 옆에서 마누라가 나한테 말했다.
"애가 너무 지쳐 있어 링겔만으로는 안 되겠대요, 다른 주사로도 안 되고 수혈을 해야 되는데 제 피나 당신 피는 안 된다니 어떡하죠?"
'피'라는 말에 나는 무엇보다 먼저 어제 그 피 팔이들을 떠올렸고 동시에 으스스 몸을 떨었다.
"왜? 왜 안 된단 말이야?"
내 소리가 너무 크다고 생각됐는지 의사가 고개를 들고 낮을 찌푸리며 메마른 어조로 말했다.
"혈액형이 맞지를 않습니다. 두 분은 모두 A형인데 애는 O형이니까요."
"부모와 자식간에 어떻게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까?"
사는 더 말하기 귀찮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고 대신 마누라가 말했다.
"부모가 양쪽 다 A일 언 아들은 A아니면 O가 된다는데 공교롭게도 이 애는 O라는군요."
어제 그 피팔이들의 피가 애의 핏줄에 흐르는 상상과 함께, 애가 커서 그들이나 비슷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숨이 막혀 왔다. 안 돼, 안 돼, 그런 삶을 살게 할 바엔 차라리 죽이는 게 나아, 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그러나 나는 무조건 살려놓고 보자는 얕은 생각에서가 아기라 흥분을 가라앉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한 나머지 이렇게 부르짖었다.
"괜찮아, 우리들의 피가 아닌 막걸리로 보충되는 피팔이들의 피도 괜찮다구. 흔히 피라는 건 속일 수 없고, 피에 따라 그의 삶이 결정 된다고들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는 않아. 그렇다면, 만일 그렇다면 천한 놈 자식은 항상 천하게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 아냐? 넣자구, 아무 피라도 괜찮으니까 넣어 살려서 우리 나름대로 한번 키워 보자구."
하나의 작품과 바꾼 전위화가의 목숨에 관하여
세상의 마누라들이 거의 다 그렇듯이 내 마누라도 가난하고 고된 생활에 찌들어 지금은 완전히 못사는 집의 여편네 티가 박혀 버렸지만 결혼 전엔 적어도 내 눈엔 왜 잘생기고 멋있는 여자로 보였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시내 중심가에 화실을 차려 놓고 애들을 가르치며 작품 제작을 했었는데 어울리지 않게 구상보다는 추상, 정통보다는 실험이라는 낱말에 더 매력을 느껴 전람회도 그런 계열의 작품으로 가졌었다. 국전에는 한번도 출품하지 않으면서 앙데팡당전 같은 생소한 작품전에는 출품하여 파리 비엔날레니 상파울로 비엔날레니 하는 국제전에 대한 꿈은 키울 줄 알았었다. 따라서 그 당시 사귀었던 화가들도 국내에 많이 알려진 돈을 잘 버는 화가들보다는 국외에 더 많이 알려지거나 무명인, 돈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통나무에 식탁보 같은 보자기를 씌워 놓는다든가 커다란 바윗덩어리에 밧줄을 묶어 놓는다든가 석고로 거대한 수십 개의 구(球)를 만들어 그 그림자들로써 무얼 보여준다든가 녹슨 철판의 일부분을 곱게 갈아 여자의 음부 비슷한 형상을 만든다든가 주머니에 얼음을 담아다 놓고 전시 기간 중 증발해 버리도록 만든다든가 닳아빠지고 때묻은 걸레조각, 단추가 떨어지고 찢겨진 군복, 흙덩이, 담배꽁초, 밀가루 등속으로 어떤 형체를 이룬다든가 심지어는 어떤 허술한 대포집의 형상을 그대로 전시장에 옮겨다 놓고 술을 마시게 하면서 그것 자체를 작품이라고 한다든가 전시장의 건물을 지붕 위까지 올라가 온통 광목으로 휘감아 묶어 놓고 그것 자체를 작품이라고 하는 등 어떻게 보면 정신병자들의 소행 같이도 보여지는 작품들에 골몰하고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그중엔 가짜가 있는 반면에 분명히 진짜도 있을 법한데 가짜인지 진짜인지 나로선 잘 분별할 수 없지만 그런 계통의 작품을 하는 황 호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무명인데도 동료들 간에 서 이상하게 귀재로 통하는(약간은 비아냥거리는 뜻도 있을지 모르나) 사람이었는데 마누라가 가지고 있던 화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화실을 가지고 있어 비교적 자주 만났다. 금방 무너 앉을 듯한 목조 건물의 이층으로 대여섯 평 될까, 애들을 가르치지는 않고 작업실로만 썼기 때문이겠지만 줄리앙이니 아그립파니 하는 흔한 석고상 하나 없는 건 물론 흔히 '그림'이라고 불려지는 액틀에 넣어진 유화 하나 걸려 있지 않고 화실 안이 온통 쓰레기장 같았다.
거지들이 들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깡통으로부터 시작해서 돌덩이, 쇳조각, 쇠막대, 철판, 나무토막, 나무뿌리, 송판, 새끼줄, 전깃줄, 밧줄, 쇠줄, 철사, 우산살, 자전거바퀴, 타이어, 탈바가지, 지게, 갈대, 짚, 깨어진 삽, 밀짚모자, 고무로 만든 손, 인형, 마포조각, 시멘트도구, 용 접기, ,,,,,, 등 온갖 잡동사니만이 가득 차 있는 것이었다. 조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회화를 한다는 사람의 방이 그러니, 아무리 웬만한 액틀 속의 그림에는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나라고 할지라도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물론 요즈음에 와선 동양화와 서양화의 구별은 물론 조각과 회화의 구별도 희미해져 가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마누라는 전적으로 관심을 갖는 눈치였고 나를 데리고 가 일부러 어울릴 기회를 갖게 해주곤 했다. 그러나 어울리는 동안 나는 그가 마누라의 말처럼 '몇십 년 후에는 틀림없이 이름을 크게 떨칠' 사람이라는 느낌은 갖지 못했다. 술을 잘 마셔 내 주량을 넘어섰고, 술을 마시면 평소보다 눈이 더 빛났으며, 순수함이라 말할 수 있는 광기가 있었고, 어쩌다가 이따금 그림을 하는 사람치고는 꽤 깊이 있는 말을 던져 오는 일이 있었지만 천성적인 듯한 그의 게으름이며 퇴폐성 같은 것은 결코 좋게 보여지지가 않았다.
그와 어울리면서 그가 던져 왔던 말 중에 비교적 잊혀지지 않는 말 하나만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명성이랄까 인기랄까, 작품을 하는 사람과 이 사회에서의 인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사회의 모순을 파헤치는 작가가 그 모순된 사회에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그것 자체가 얼마나 큰 모순이며 넌센스겠소?"
문학 작품이라면 몰라도 회화로써 사회의 모순을 파헤친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렸지만, 잘은 몰라도 그의 입체작품이라는 것들 중엔 그런 게 더러 있었다. 어느 땐가는 화실의 천장에 교수대의 형구처럼 목을 매달기 좋은 올가미를 밧줄로 만들어 놓은 적이 있었는데, 저것도 작품이냐고 우리가 묻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죽고 싶은 사람들은 한번 이용해 보라고 만들어 왔소. 주위에 하도 죽고 싶다는 사람이 많아서,,,,,, 최형도 이용해 보려면 한번 이용 해 보쇼."
"좋소. 삯이 얼마요?"
"글쎄, 뭐 소주 한 병이면 되겠죠. 핫하."
문제의 작품 -의자-라는 것도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일흔이 넘은, 망령기가 좀 있는 그의 할머니까지 동원해 가며 만든 그 엉성한 의자가 설마 작품이 되리라고 까지야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쇠막대와 전깃줄이 재료의 대부분을 이룬 그 의자를 만들 때 그는 유난히 열성이었다. 산소 용접을 하고, 그의 할머니한테 열심히 무얼 물어 보고, 심지어는 거기에 변압기까지 부착을 시켰는데 우리가 무엇이냐고 묻자 가볍게 대답했다.
"보다시피 의자요."
"의자에도 변압기가 다 필요하오?"
“전기 의자로 이용해 보고 싶은 사람한테는 필요하지 않겠소?"
"전기 의자라니 ? 사람 죽이는 데 써먹는 것 말이오?"
"죽일 때도 써먹고 그냥 고문산 할 때도 써먹을 수 있죠. 고문 한 번 당해 보겠소?"
"좋소. 그렇지 않아도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인데,,,,,,
"핫하, 조금만 더 기다리시오. 아직 미완성이니까."
그러고는 그는 망령든 그의 할머니한테 다시 무언가를 묻기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옛날 왜정시대 때 할머니가 전기 의자에 앉아 본 경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앉았었은데 할아버지는 그로 해서 죽고 할머니는 머리가 좀 이상해졌다고 했다, 그 경험담과 함께 그 의자의 생김새에 대해서 그가 묻는 대로 다 대답해 주고 할머니는 어린애처럼 천진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너도 그 높은 양반들처럼 조선 사람들 데려다가 그런 장난을 하고 싶으냐?"
"네, 할머니."
"재미있을 게다, 참 재미있을 게여. 그렇지만 조심해라. 잘못하다가는 다치니까 조심해."
"핫하 알았어요, 할머니, "
이 순간 나는 숙연함에 빠졌는데 그것은 그의 할머니와 말을 주고받던 그가 갈수록 눈에 빛을 더해가더니 끝내는 그 안 깊숙이 물기 같은 걸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가 그런 걸 보이지 않았다고 해도 나는 틀림없이 이상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미친놈과 미친 할머니의 하릴없는 놀음이라고 지나치기에는 무언가 걸려 오는 게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죽음의 빛깔 같은 유쾌하지 못한 빛 속에서 허위적거렸는데 아니나다를까 일은 크게 벌어졌다.
귀재로 통하던 황 호릉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가 그 며칠 후 그의 화실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누라와 나는 '정말 뜻밖'이마는 느낌을 별로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그런 놀이를 하던 그 의자에 앉은 채(변압기의 볼륨을 터무니없이 높이 올려놓은 채) 죽은 걸 어떤 사람은 순간적인 실수였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품에 지나치게 집념한 나머지의 순간적인 광기로 단정했고, 그는 끝내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잘했는데 마누라도 마찬가지였다.
"그것 보세요, 제가 귀재라고 하지 않았어요? 귀재는 역시 하나의 작품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줄도 알아야 되는 모양이에요."
마누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그가 죽은 건 작품 때문이 아니라 현실 때문이야. 그런 걸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지 않을 수 없는 현실---"
죽이기 전에 빼내는 염소의 흔에 관하여
아직 나이 마흔도 되지 않은, 전혀 내세울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 내가 건강 타령을 늘어놓는다면 어떤 사람은 메스꺼움을 느낄지 모르나요 몇 달 사이 내 건강이 그전처럼 다시 못쓰게 되어진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원래 거울 앞에 서기를 고문 받는 일만큼이나 싫어하는 나이긴 하지만 요즈음도 어쩌다가 거울이 아니라 전동차 속의 창에라도 비친 내 얼굴과 마주치게 되면 나는 무슨 보아서는 안 될 끔찍한 물건이라도 보았을 때처럼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돌려버리고 만다. '며칠 동안 죽 한 그릇도 못 얻어먹은 놈의 몰골'이라는 후한 표현이 있지만 그보다는 못 먹을 것을 먹어 부황이 난 놈의 몰골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오직 눈만이 약간의 광채를 띠고 있을 뿐 핏기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검누르퉁퉁한 얼굴이 상한 풀빵처럼 부석부석하다. 직접 느끼는 자각증상으로도 아무 곳에나 앉아서 눈을 감기만 하면 시들시들 졸음이 온다든가 잠 속에선 으례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꿈(예를 들자면 변소에서 막 나서려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어전 체구가 건장한 놈이 가로막으며 목덜미를 움켜잡아 변소통 속에 몰아 처넣는 꿈)을 꾼다든가 밥알이 모래알 같다든가 갑자기 알 수 없는 구역질이 난다든가 머리가 어질어질하면서 귀가 멍멍해 온다든가 오후가 되면 길을 걷다가도 길바닥에 주저앉고 싶어질 정도로 온몸에 맥이 없어지곤 한다. 따지자면 이런 증상이야 만성화된 지 이미 몇 년 되니까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견딜 수는 있었는데 몇 달 전부터는 견디기가 아주 힘이 드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작년에 꼭 한 차례 난생 처음으로 보약이라는 걸 먹은 후 괜찮은 것 같더니 다시 마찬가지가 된 것이다.
보약이라는 것도 먹으려 해서 먹은 것이 아니고 작년에 그런 일이 있었다. 낱낱이 공개할 이야기는 못 되나 어느 날 밤 마누라와의 잠자리에서 꽤 오랜만의 교접이었는데도 물건이 제대로 움직여 주지를 않아 끝내 절정에까지 이르지를 못하고 중도에서 쓰러져 버린 일이 있었다. 술에라도 취해 있었던 때라면 혹 그럴 수 있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아주 말짱해 있었는데도 그랬으니 보통 일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물론 강렬하게 욕구가 치솟아서 그 일을 벌였던 것은 아니고 마누라에 대한 의무랄까 보살피는 자로서의 따뜻함 같은 것 때문에 약간은 고의적으로 벌였던 것이지만 그래도 결과가 그렇게 되어진 건 처음 일이었다. 어느 면으로나 나 자신보다는 싱싱함이 남아 있는 마누라의 빛나는 눈의 움직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 그 일을 하면 더 낫지 않을까 해서 일부러 불까지 켜가며 해보았는데도 소용 없었다. 마누라는 마누라대로 자기의 어디가 잘못되어 그런 게 아닌가 하고 좀처럼 그러지 않던 음탕한 몸놀림까지 해가며 나를 위해 애를 썼지만 역시 헛수고였다. 겨우 마누라만을 절정에 이르게 했는지 어쨌는지 불분명한 상태에서 내가 쓰러지자 물걸레처럼 젖은 내 전신의
엄청난 땀을 닦아주며 마누라는 왜 그러느냐는 말을 몇 차례 반복했다. 그러더니 아마 그날 밤 그런 생각을 했는지 며칠 후 마누라가 친정엘 가더니 약 꾸러미를 들고 온 것이다. 말로는 친정어머니가 지어준 것이라고 했지만 직접 지어 온 게 분명할 것이었다.
"뭐, 보약?"
녹용에 인삼에 부자 등속이 큰 값비싼 보약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마누라가 고맙다는 생각보다는 순간적으로나마 불쾌한 생각이 앞섰다. 세상의 어느 누가 자기 몸을 위해 보약을 지어 왔는데 불쾌하겠는가만 며칠 전 밤의 일이 연상되자 마누라가 추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아니더라도, 나를 자랑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사실 내 체일 자체가 아무런 고민 없이 보약 같은 사치스러움을 즐길 수 있게 되어 있지를 못했다, 보약은커녕 그 무렵 몸이 그 지경이 되어 가지고도 병원을 찾는 일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져 꺼려온
것은 물론 쉽게 예를 들자면 공동목욕탕에서 자기 몸뚱이의 때를 때밀이한테 시켜 벗겨내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에도 심한 구역질을 느끼는 다인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먹고 살기 위해 직장을 나가는데 그 직장이라는 곳이 차를 두 번씩 갈아 타가며 무려 한 시간 이십 분씩을 시달려야만 겨우 출근이 되는 곳이다. 까딱하면 야근이고 공휴일이란 일요일뿐인데도 까딱하면 일요일마저 근무를 해야 되며 어쩌다가 집에서 쉬게 되는 날에도 까딱하면 동네 길 도치는 일(집이 경기도 산 부근이라 비가 조금만 와도 땅이 질퍽거려 차가 안 들어오는 통에 새마을운동을 해야 된다)에 동원되어야 한다든가 직장의 야근이 없는 밤에도 까딱하면 집에서도 밤을 꼬박 새우며 일을 해야만 하는 처지이면서도, 나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을 하면서 보상보다는 고통을 훨씬 더 심하게 받는 사람들이 무위에는 얼마나 많은가 하는 생각과 함께 지금 이런 세월에 내가 겪는 이 정도의 어려움이 무슨 어려움이 되며 이 정도의 애씀이 무슨 애씀이 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잊지 않는,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꽉 막혔거나 소년 취향적인 나인 것이다. 그러니 보약이라는 것이 나 같은 사람이 먹어도 전혀 상관이 없는 물건으로 쉽게 느껴지지 않을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보약? 아니 그래 당신은 내가 숨어가지고 보약이나 먹고 있어야만 좋겠어?"
좀 웃어가면서 반 농담 식으로 던진 말이지만 나로서는 거의 꾸밈이 없는 소견이었다.
"숨어서 먹긴 왜 숨어서 먹어요?"
"그럼 이렇게 멀쩡해져 가지고 보약을 떳떳하게 먹으란 말이야?"
"멀쩡해요? 당신이 멀쩡하단 말이에요?"
"그럼 멀쩡하지 않고,,,,,,"
"보약 먹는 것도 뭐 죄가 되는 줄 아시나봐."
"어쨌든 난 먹고 싶지 않으니까 장모님이나 잡수시라고 돌려드려."
"사람 체질에 맞춰 지어 온 걸 아무나 먹어도 되는 줄 알아요?"
"어쨌든,,,,,,"
"그만두세요. 꺼떡하면 세상, 세상 하시는데 세상이 뭐 어때요? 그렇게 세상 걱정하는 분이 술은 왜 드세요? 술 드시는 건 죄스럽지 않으세요?"
"그거야 다르지. "
"뭐가 달라요 ? "
"어쨌든,,,,,,"
"난 모르겠어요. 하여튼 달이긴 달일 테니까 드시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일이 그렇게 되어 결국 분에 겨운 보약을 먹기에까지 이르렀는데, 보름에 걸쳐 그것 스무 첩을 먹고 나자 몸이 확실히 달라지긴 달라졌다. 사흘이 멀다 하고 마셔대던 술을 약을 먹는 동안 끊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밥맛도 나아지고 거리를 걸어가다가 주저앉고 싶은 증세도
없어졌으며 마누라와의 교접에서 실패하는 일도 없게 되었다. 그러더니 다시 몸을 함부로 굴리게 되자 그 증세들이 하나둘 되살아나기 시작했고, 급기야 몇 달 전부터는 완전히 심해졌으며, 또 최근에는 작년 그 언젠가의 밤처럼 낭패스런 밤을 연거푸 두 차례나 겪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누라가 어느 날 느닷없이 염소를 한 마리 통째로 염소 집에서 약으로 만들어 가지고 왔다. 살코기는 고기대로 발라오고 뼈다귀 등속은 한약을 넣어 고아서 즙을 만들어 가지고 온 것이다. 나는 아찔했다.
"아니 이걸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어떻게 먹긴 어떻게 먹어요? 그냥 먹으면 되는 거죠. 잡기 전에 혼을 뺐으니까 노린내는 안 날 거예요."
"뭐, 혼?"
"옛날 영화 같은 걸 보면 왜 망나니들이 사람을 죽이기 전에 칼춤을 추어 혼을 빼잖아요? 그런 식으로 이것도 잡기 전에 혼을 빼면 냄새가 안 난대요."
“……"
"죽이기 전에 끌고 산 같은 델 정신없이 막 뛰어 다닌다든가 눈앞에서 손가락으로 뺑뺑이질을 하면 빠진대요."
"허, 참,,,,,,"
"먼저 무엇부터 드실래요? 고기부터 드실래요, 즙부터 드실래요?"
거의 강제적으로 나오려는 태도여서 나는 일부러라도 진저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안 먹겠어. 생각해 보라구. 그렇지 않아도 혼을 지키기 힘든 세상인데 죽이기도 전에 혼빼낸 걸 먹었다가 어떡하겠어? 이걸 먹었다가 이제까지 아득바득 지켜온 내 혼마저 빠져나가면 어떡하냐구?"
갓난애를 쌀과 바꿔먹은 이웃에 관하여
결혼을 해가지고도 줄곧 세 방만을 살다가 기를 쓰고 장만한 것이 현재 살고 있는 집이다. 값으로 따지면야 서울 변두리의 껄렁한 두 간 전셋값밖에 안 되지만, 경기도 지구에서도 교통이 아주 불편한 그린벨트 지역 부근이라 터만은 그 나름대로 시원하게 트인 감이 있다,
건물 자체도 내부 자재가 싸구려라 그렇지 기와 지붕에 붉은 벽돌을 쓴 새 집이기 때문에 겉모양은 그럴 듯하다. 다른 주택촌이나 마찬가지로 똑같은 규격의 집들이 팔십여 채가 들어서 있는데 땅 임자와 집을 지은 사람간에 싸움이 벌어져 소송에 걸려 있는 관계로 아직도
비어 있는 집이 몇 채 있다. 우리 이웃집이 바로 그런 집의 하나이다. 사람이 들어 살고 있기는 하나 진짜 주인이 아니고 아직은 아무에게도 팔 수 없는 집을, 이 동네 집들을 지을 때 고용되었던 듯한 한 인부 가족이 임시로 빌어 살고 있는 것이다.
처마의 물받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창에는 유리 대신 비닐이 씌워져 있으며 울안에는 아직 펌프 수도마저 놓여 있지 않다. 물론 이 집과 우리 집 사이에는 블록으로 된 담이 있지만 높이가 내 목 부근밖에 차지 않기 때문에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문짝 없는 변소에서 치마를 올린 채 쭈그리고 앉아 있는 기미 투성이의 아낙네 모습이라든가 악을 쓰며 울어대는 자기 애들에게 '저런 모가지를 비틀어 죽일 놈 봤나'라는 식의 욕설을 아무렇지 않게 해대는 사내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이웃사촌'이라는 낡은 말이 아니더라도 이웃간에 사이좋게 지내서 나쁠 일이 무엇이 있으랴. 열 번이면 열 번 다 우리가 손해를 보더라도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는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인데 마누라는 그렇지가 않다. 인정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따질 것을 지나치게 따지려
는 생활 태도 때문으로 알고 있는데 아마 일의 발단은 연탄 문제로부터였을 것이다. 한때 연탄 파동이 일어 카드제니 배급제니 하고 떠들 때 내가 집에 없자 마누라가 배급을 받은 연탄을 동네 입구에서 몇 장씩 머리에 이어 날랐던 모양이다. 그걸 보고 이웃집 사내가 기사 정신을 발휘했던 것까지는 좋았다. 어디서인지 리어카를 가져와 백여 장 되는 걸 한꺼번에 실어다 우리 집 연탄광에 쌓아 주었다. 거기에 감동한 마누라가 연탄 값에 오백 원을 더 얹어서 주었다. 사내는 처음에는 사양하는 체하다가 받아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반장 집에 지불이 되었어야 할 연탄 값이 지불되어 있지가 않았다. 어떻게 된 거냐고 추궁을 하자 사내는 이렇게 대답을 하더라는 것이다.
"양식 살 돈이 없어 내가 임시로 융통했으니 곧 갚아 드리죠."
두 번째는 하수도 문제 때문이었다. 한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비가 좀 오게 되자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 부엌에 물이 괴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것인가 알아보니 이웃집과 연결되어 있는 하수도가 이웃집 안에서 문제가 생겨 그랬다. 마누라 말로는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 같다고 했으나 설마 그랬을 리야 없을 것이고, 어쨌든 우리가 어찌 된 거냐고 성화를 부리자 사내는 작업을 시작했고,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안 되어 제대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끝내고 나서는 일당을 요구했다. 자기네 집 하수도를 고쳐 놓고 우리한테 일당을 요구하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고 마누라는 펄쩍 뛰었고, 사내는 사내대로 우리가 고치라고 해서 고쳤으니 주어야 단다고 떼를 썼다. 마누라가 말을 안 들어 줄 것 같자 나중엔 나한테 매달렸는데 사정이 딱해서 그러니 도와주는 셈 잡고 조금만 생각해 달라고 말했다. 결국 마누라 모르게 내 주머니 돈을 조금 내주어 무마가 되었다.
또 한번은 전기 문제 때문이었다. 전기세 밀린 걸 안 내자 전기 회사에서 나와 이웃집 전기를 잘라 버렸는데 우리 집 전기줄에 잇지 않고는 끌어쓰지 못하도록 모조리 잘라 버렸다. 그러고는 우리더러 이웃집에서 전기를 끌어쓰려 해도 절대로 못 쓰게 하라고, 만일 쓰게 하면 우리도 함께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전기회사 사람은 반 공갈조의 소리를 하고 갔다. 그런데 이웃집 사내는 아니나다를까 우리 집으로 찾아와 사정을 했다. 요즈음 일거리가 없어 몇 푼 안 되는 것조차 못 내어 이 꼴이 되었지만 곧 풀리게 되면 갖다 내고 복구시킬 예정이니 그때까지만 좀 보아달라, 우리가 아무리 끌어써도 선생님네 계량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되어 있으니 그런 염려는 조금도 마시고 편리를 좀 보아달라, 이웃 좋다는 게 뭐냐, 어려운 때 피차간에 서로 도와가며 사는 게 이웃의 도리가 아니냐, 우리 집엔 라디오조차 없으니 부엌에 하나 방에 하나 해서 이십 촉짜리 꼭 두 등만 켜면 된다, 초를 사다 켤래도 촛값도 비싸 못 사다 켜겠다, 정말이지 요즘 같아선 약을 사먹고 죽을래도 약 사먹을 여유조차 없다, 죄송하다------
하지만 마누라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도둑 행위이며, 우리더러 거기에 동조하라는 건 도둑질에 공범으로 가담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웃끼리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건 그런 일에 도우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배운 사람이다, 그것이 나쁜 행위인 줄 알면서 어떻게 그 행위에 협조를 한단 말이냐, 우리는 양심상 도저히 그럴 수 없으니 다른 대책을 강구해 봐라---
나로서는 어떻게 해야 바른 태도가 될지 몰아 난처한 표정만을 짓다가 결국 이렇게 말했다.
"밀린 전기세가 얼마나 되는지 그걸 우리가 빌려드릴 테니까 갖다 회사에 내시고 복구해 달라고 하십시오."
그러고는 몇 푼 안 되는 그 돈을 나는 마누라의 과히 좋지 않은 눈길을 받으며 꺼내 주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돈을 갖다 내지 않았고 전기는 우리 집에서보다는 훨씬 더 먼 줄을 이어야 되는 앞 집에서 끌어다 쓰고 있었다,
또 한번은 말린 동태 때문이었다. 동태가 알을 많이 밴 데다가 파리가 없어 말리기가 좋은 봄철이 되면 마누라는 으례 그걸 상자로 들여다가 말린다. 내가 술을 많이 마시는 관계로 자주 북어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알은 알대로 창자는 창자대로 심지어는 아가미까지 버리지 않고 젓을 담글 수 있어 여러 면에서 이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번에도 한 상자를 들여다가 말렸는데 말릴 장소가 마땅치 않아 (마당에 널어 말리면 개가 그냥 두지 않는 관계로) 이웃집과 우리 집 사이의 블록담 위를 이용했다. 널빤지를 놓고 늘어놓자 볕이 좋아 사흘도 안 되어 거의 다 말랐는데 그걸 거둬들이면서 마누라는 첫날부터 한 마리가 빈다고 하더니 다음날엔 세 마리, 그 다음날엔 다섯 마리가 빈다고 이상하다, 이상하다,,,,,, 소리를 연발했다. 한 상자면 스물 대여섯 마리쯤 되니까 다섯 마리가 빈다면 세어 보지 않아도 눈에 띄긴 띄겠지만 세어 봤는지 어쨌는지 그러더니 그 다음날에는 아주 노골적으로 화를 냈다. 또 두 마리가 빈다는 것이다. 듣기가 거북해서 내가 말했다.
"쥐가 물어갔겠지."
"동태를 쥐가 물어가요?"
"아니면 개가 건드렸든지."
"개가 거길 어떻게 올라가요?"
"그럼,,,,,, ? "
"뻔하죠, 뭐. 그곳에다 말린 내가 잘못이지."
"이웃을 의심한단 말이야? "
"그만두세요. 이런 거야 뭐 서로 나눠먹을 수도 있는 거니까. 생각하면 소행이 괘씸하긴 하지만---"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알지도 못하긴, 그럼 붜 그게 다시 살아나서 바다라도 찾아갔단 말이에요?"
이런 일 외에도 그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이와 비슷한 일들이 가끔 일어났는데 어느 날인가 이 이웃집에서 이제까지는 들리지 않던 갓난애(올망졸망 두세 살이 더 되는 애들이야 있었지만 갓난애는 없었다.)울음소리가 들렸다. 만삭이었던 이웃집 아낙네가 해산을 했다는 것이었다.
"미역국도 제대로 못 끓여먹었을 거 아냐? "
“……"
"미역 한 가닥 정도야 사다 줄 수 있지 않아?"
"누군 뭐 그럴 줄 몰라서 그래요?"
갓난애 울음소리가 유난히 영악했다. 밤이면 계속 들려, 병적으로 쉽게 곯아떨어지는 그 무렵의 내 잠까지도 설치게 만들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날 때까지도 그 울음소리는 멎지 않았다. 첫애를 갓난애 때 병으로 잃은 경험이 있는 우리는 그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섬뜩섬뜩 놀라기까지 했다.
그런데 보름 가까이 된 어느 날 밤부터 갑자기 들리지 않았다. 어쩌다가 그러는 밤도 있나 하고 지나치다가 그 다음날도 여전히 들리지 않아 신기하게 생각한 내가 웬일이냐고 묻자 마누라는 웃으며 말했다.
"쌀하고 바꿔 먹었대요."
"뭐?"
"애 못 낳는 어떤 집에 주고 쌀 한 가마 받아왔대요."
"무슨 얘기야?"
"믿어지지가 않으시나 보죠 ? 애를 쌀하고 바꿔 먹었다니까......"
마누라는 계속 웃었다. 물론 나는 처음엔 믿지 않았다. 하지만 곧 이어서 그것이 사실임을 알았다. 그만큼 마누라의 웃음은 자연스런 것이 아니었고 어색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무엇엔가 크게 얻어 맞은 듯 멍한 상태로 있다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보기 싫어. 그런 이야기를 그렇게 웃으면서 스스럼없이 말하는 당신이 보기 싫다구. "
화신이 되어 나타난 어둠의 역사에 관하여
하나의 무슨 상징처럼 그 여인은 우리 집에 나타났다. 해방된 지 삼십 년이 되는 해라고 해서 '광복 삼십 년' 운운하는 말이 여기저기에 한참 오르내리던 무렵의 어느 비 내리는 밤이었다. 몸이 망가지는 것과는 상관없이 무모하게 마셔대던 이십대 시절의 술버릇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서 어쩌다 한번씩은 폭음을 하지 않고는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날 밤도 그렇게 몸이 흐물흐물하도록 마셔대다가 통금 시간이 다 되어서야 집 앞에 당도했다. 그런데 비틀걸음으로 세상의 어지러움에 대해 혼자 독백까지 해대며 집 앞까지 다가간 나는 초인종을 누르다가 눈을 흡뜬 채 오락가락하는 정신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둠의 덩어리 같기도 하고 쓰레기통 같기도 한, 아침가지만 해도 보지 못했던 한 물체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시멘트로 된 대문의 문턱에 놓여 있었는데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보니 그것은 물체가 아니라 남루를 걸친, 숨을 쉬고 있는 사람이었다. 거리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거지라고 곧 판단되었으나 그러면서도 나는 가볍게 지나쳐 버리지를 못했다. 그대로 그냥 두면 그 자리에서 죽을지도 모를 만큼 쇠약하고 늙은 여자인 데다가 잔뜩 비조차 맞은 채 움츠려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대문간들을 다 제쳐놓고 하필 우리 집 대문간에 앉아 있다는 사실과 함께 생각을 비약시키자 별별 생각이 다 들었기 때문이다. 가령 평생을 고생만 하다가 억울하게 죽은 어떤 한 많은 여인의 넋일지도 모른다는, 또는 어느 때보다도 어렵고 메마르고 거친 오늘의 이 세월을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시험하러 온 하늘의 사자일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가지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몹시 지쳐 있었는데도, 초인종소리를 듣고 나온 마누라와 함께 그 여인에게 관심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뭘 하시는 분인데 여기서 이러고 계세요?"
“……"
"가실 곳이 없으신 모양인데, 안으로 들어가시죠."
“……"
"이곳은 시골이라 야경원도 없고 파출소도 멀어 이렇게 계시다간 꼼짝없이 여기서 날을 새우셔야만 됩니다."
그래도 여인은 들은 체도 않다가 한참 후에야 비로소 우리를 올려다보더니 천식 기침 같은 개 울음소리와 비슷한 소리의 기침을 두어 차례 했다.
"정말 안 되겠어요, 들어가셔야지."
한 가정의 생활 가계부를 정리하는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이 냉정할 땐 냉정하고 따질 전 야박할 만큼 따져도 그래도 어느 면으로나 나보다는 훨씬 감상적이고 선량한 편인 마누라는 처음엔 무심코 지켜만 보았으나 여인이 기침을 하자 그때부터는 나보다 훨씬 더한 관심을 표명했다. 직접 여인의 손을 잡아 일으켰고, 집안으로 들인 후엔 젖은 옷을 자기의 헌 옷과 갈아입게 했으며 내 밥으로 남겨둔 밥을, 당신은 드셨죠? 라고 말한 후 차려 주었다.
마누라가 밥상을 건넌방으로 들여가는 걸 본 후 나는 그 여인에 대한 관심을 일단 마무리짓고 발도 씻지 않은 채 곯아떨어졌다. 여인을 보는 순간 싹 몰려가는 듯했던 취기가 방안에 있게 되자 다시 견딜 수 없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어느 때나 마찬가지로 악몽에 시달리다가 구갈을 느끼며 눈을 뜨자 방안의 줄에 낯이 익지 않은 빨래가 몇 가지 걸려 있는 게 보였는데 여인의 옷을 마누라가 빨아 넌 것임을 곧 알 수 있었다.
물그릇을 가까이 놓아주며 마누라가 말했다.
"얻어먹으러만 다니는 사람 같지 않고 좀 이상해요.
"왜 ?"
"몹시 지쳐 있는 것 같아 자세히 묻지는 않았지만 누구를 찾으러 다닌다나 봐요."
"누굴 ? "
"모르겠어요. "
우리가 아침을 먹을 때까지도 여인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깨워야 할지 어쩔지 망설이던 끝에, 푹 쉬도록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그냥 두기로 하고 나는 출근을 해 버렸다.
그런데 퇴근을 하고 돌아오자 마누라는 이미 우리 집을 떠나간 그 여인에 대해서 내가 귀찮아할 만큼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출근을 한 사이 심심풀이 삼아 모든 자초지종을 듣게 된 모양이었다.
어떤 사람의 생애를 이야기할 때 '기구하다'거나 '파란만장하다'라는 말을 곧잘 쓰는데 그 여인의 생애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런 생애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이야기가 너무 도식적이면서도 상징적인 것 같아 많은 생각에 부딪히게 되었다.
특히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는 우리 역사와 많은 관련을 갖고 있어 얼핏 그 여인이 우리 광복 삼십 년 역사의 어둠의 화신 같은 생각조차 들었던 것이다.
그 여인의 생애는 여순반란 사건 때부터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제 식민지하의 그런 끔찍한 세월 속에서도 양심에 크게 부끄러울 일 없이 결혼을 하고 3남1녀의 자녀까지 두어 복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을 누리며 살아왔는데 해방이 되고 미군정이 베풀어지고 그러다가 느닷없이 사건이 터져 남편을 잃은 것이다.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여수 주둔 국방 경비대가 일으킨 반란사건은 불과 일주일 만에 진압되긴 한 셈이지만 그때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은 적지 않았다. 남편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 후부터 여인의 생애는 그야말로 '필설을 가지고는 도저히 늘어놓을 수 없는' 생애가 되고 말알다.
첫아들은 사변 때 전사당했다. 아직 군대에 갈 나이도 아니었는데 붙들려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유골 상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 밑이었던 외동딸은 역시 사변 때 미군들로부터 집단 강간을 당하고 미쳐 돌아다니다가 기차에 치여 죽었다. 중학을 다니다가 그렇게 됐으니까 아직 사춘기도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둘째아들은 사월 학생의거에 앞장을 섰다가 부상을 당하고 병원에 입원한지 석 달만에 죽었다. 뇌를 다쳐 혼수 속을 헤매다가 끝내 죽은 것이다.
셋째 아들은 오윌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나서 십 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오 년 전에 행방불명이 된 후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여인이 몇 푼 모았던 재산을 깡그리 없애고 지금 꼴이 된 것도 이 셋째 아들을 찾기 위해서였는데 그러나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도 모르고 있다.
"우리나라 장편소설 같은 데서나 상투적으로 볼 수 있는 집안이군."
"글쎄 말이에요. 잘 곧이들어지지가 않아요. 아무리 기구하다고 해도 원 그렇게까지 꾸민 것처럼 기구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사실이긴 사실인 것 같았어요.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걸 느꼈어요.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딱하기에 가실 때 노자에 보태 쓰라고 돈 천 원을 드렸거든요. 그런데 받지를 않아요. 처음엔 사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앞가슴에 강제로 넣어 주다시피 했는데 끝까지 받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면서 정색을 하고 하는 말이, 자기는 거지가 아니라는 것이었어요. 우리가 강력하게 끌어 비록 하룻밤 신세는 졌다고 할지라도 구걸하면서까지 세상을 살고 싶지는 않다는 거예요. "
"최후의 긍지군."
"아들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제 생각으로는 죽었을 것만 같은데."
물론 마누라로서야 무심히 뱉은 말이겠지만 그 여인을 우리의 역사와 관련시켜 자꾸 상징적으로만 생각하던 나는 이렇게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 말버릇! 이왕이면 왜 그런 생각을 하지? 그런 긍지를 갖고 있는 한 틀림없이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찾아서 여생은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말이야."
1
이상한 일이었다. 죽어 저 세상에 가면서도 가능하면 한겨울의 강추위는 피해 가자는 것일까. 날씨가 풀리면서 죽는 식구들이 더 많았다. 아직 추위가 완전히 가신 건 아니나 우선 햇살과 바람이 한겨울의 그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그래서 그런지 사흘이 멀다 하고 죽는 식구가 나왔다. 어떤 날은 하루에 두 식구씩 죽기도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올해가 다 가기도 전에 이곳 백 오십여 명의 식구들이 모두 다 죽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오늘 새벽에도 한 식구가 죽었는데 여느 때와는 달리 앰블런스가 오지 않았다.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식구가 죽을 때는 대개 오게 되는 앰블런스가 오늘 새벽엔 왜 오지 않았는지 신혜는 알고 있었다.
오늘 새벽에 죽은 심 순자 아주머니는 신장(腎臟)이나 안구(眼球) 중 어느 것도 기증하기로 되어 있지 않은 식구이기 때문이었다.
새 식구가 들어올 때마다 목사님은 말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고 서러워 마십시오. 이 세상에 나와 어떤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되신다면 그 은혜를 갚을 길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에서 주신 가장 큰 재산의 하나인 신장이나 안구라도 남겨 꺼져 가는 생명을 구하고 앞을 못 보는 불행한 사람에게 광명을 주십시오.”
물론 지나친 노약자에게야 권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많고 다른 병을 앓고 있더라도 신장이나 눈만은 괜찮아 보이는 식구에게는 서슴지 않고 권했다. 그러면 처음에는 주저하던 식구도 나중에 가선 감화되어 대개는 기증 서약서를 써 내밀었다. 그러나 식구가 막 되었을 때는 물론 기회 있을 때마다 그런 설교를 해도 끝까지 기증 서약서를 써내지 않는 식구도 없지 않았다. 오늘 새벽에 죽은 심 순자 아주머니도 그런 식구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이야 이제 오십대였지만 심근경색증을 앓으면서 정신도 좀 정상이 아닌 것 같았던 그 아주머니는 목사님 아닌 그 누구에게서라도 신장이나 안구 기증에 대한 소리만 사오면 노발대발했었다.
"말도 꺼내지 마. 나는 못 줘. 날더러 계속 그렇게 서약서를 쓰라고 하면 나는 여기서 나갈 테여. 정말 더럽구만. 세상엔 공짜가 없다더니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녀. 그것 조금 먹여주고 재워주었다고 신장과 눈알을 내놓으라니,,,,,, 어이구, 생각만 해도 끔찍해라. 한번 죽는 것도 서러운데 왜 두 번씩 세 번씩 죽으라는 거여? 죽은 후에도 저 세상이 있다면서, 그런 걸 떼어주고 저 세상에 가서 나는 어떻게 살란 말이여?"
원 참, 무슨 그런 걱정을 다 하시느냐고, 천국에 가셔서 다시 태어나실 땐 깨끗한 육체를 새로 받으실 텐데 무슨 그런 걸 문제삼으시냐고, 어쩌다 봉사자들이 건네기라도 하면, 더 펄쩍 뛰었다. 너희들이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 옛날부터 제일 큰 형벌이 무엇이었는 줄 아느냐, 죽은 시체를 다시 토막내 죽인다는 말 듣지도 못했느냐, 죽어서도 육신이 온전해야 제대로 저 세상에 가지, 그렇지 않아 가지곤 악귀가 되어 떠돌아다닌다는 걸 모르느냐라고 소리질렀다. 대개의 식구들은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높임말을 쓰는 봉사자들한테 그 아주머니는 한번도 높임말을 쓰지 않았다. 딸이나 아들 대하듯 함부로 대했다. 그것을 다른 봉사자들은 불쾌해하기도 했지만 신혜는 그렇지는 않았다. 허물이 없어 오히려 한 식구 같은 느낌을 더 주어 대하기가 편하기도 했다. 그 아주머니에게서 문득문득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었던 것도 그 때문인지 몰랐다. 원래부터 그렇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도 집을 나가시기 직전, 실성기가 심해지셔서는 그 아주머니 못지 않게 성깔이 고약했었다. 걸핏하면 신혜에게도 이년, 저년 욕을 해대며, 만만한 가재도구를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다, 오빠가 대학에 다니다가 군대에 가 어처구니없게 죽게 된 걸 엉뚱하게 신혜 때문이라고 물아 붙이기도 했다.
죽은 식구는 앰블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가 안구나 신장을 기증하고 화장이 되거나, 아니면 이곳 임시 묘지에 묻혔다. 식구들이 기거하는 '안식의 집' 건물 남쪽 산 한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묘지에 봉분 없이 얄팍하게 묻혀 나뭇가지로 만들어진 십자가 하나를 품에 안았다. 심 순자 아주머니도 그런 과정을 밟았다. 신장이나 안구를 기증하지 않고 죽은 식구들에게도 목사님은 똑같이 정성껏 기도했다. 천국이라는 낱말이 세 번, 영생이라는 낱말이 두 번 반복되는 기도였다. 봉사자들과 불편한 대로나마 기동이 가능한 식구들을 동반한 그 의식은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 걸로 시간을 많이 끌래야 끌 수도 없었다. 식구들이야 상관없겠지만 봉사자들로선 그럴 여유가 없었다.
자기 몸뚱이조차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백 오십 명이 넘는 식구들을 불과 일곱 명밖에 되지 않는 봉사자가 치다꺼리해야 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 일곱 명도 남자는 두 명밖에 안 되고 모두 여자여서 더 힘이 들었다. 심지어는 남자 식구들의 목욕까지 여자 봉사자들이 시켜줘야 되었다, 식사준비나 설겆이, 빨래는 물론 똥 오줌을 받아내는 일까지도 괜찮은데 남자 식구들의 목욕까지 시켜주려면 웬만큼 이를 악물지 않고는 안 되었다. 그만큼 신앙심이 두터워서 그런지 다른 봉사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아니 어느 때는 오히려 더 재미있어하면서 그 일을 했지만, 신혜는 이곳에 온지 석 달이 넘은 아직까지도 그 일만은 자연스럽게 되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날씨가 풀리면서 목욕을 하고 싶어하는 식구가 더 많아진 데다, 하고 싶어하지 않아도 으례 시켜주지 않아서는 안 될 식구들 때문에, 신혜라고 해서 그 일만은 못하겠다고 버틸 수가 없었다.
이날도 그랬다. 잠시도 일손을 뗄 수가 없다가 오후가 되자 약간 틈이 생겼는데 그 틈을 같은 봉사자인 조 금선 선생님이 붙들고 나섰다, 목욕을 시켜주러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짜증이 나, 또 남자 식구라면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생각뿐 차마 그런 말이 나와지지는 않았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온 것도 아니고 스스로 택해 봉사자로 와서 좋은 일 궂은 일 가리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그래도 처음에 와서보다는 이제 천사가 다 된 셈이었다. 팔이 사랑이고 봉사지 처음에는 사실 죽지 못해 사는 여자로서의 자학하는
심정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니다 말기야 했지만 대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콧대깨나 높은 걸로 알려졌던, 남이라고는 도무지 위할 줄 모르며 살아온 여자가 전혀 그런 심정 없이 어떻게 스스로 이런 반송장들이 득시글거리는 집으로 뛰어들었겠는가. 겉으로야 '안식의 집'이라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이름이 붙어 있긴 했다. 이름만이 아니라 실제로 하늘 아래 그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는 이곳 식구들에게는 이 이상 안식을 느낄 수 있는 집이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봉사자의 입장에서는 이 집은 성자나 천사가 되지 않고는 버텨내기 힘든,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로 가득찬 죽음의 집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세상의 냄새 중에 썩어 가는 사람 냄새만큼 역겨운 게 또 있을까. 이곳에 온 첫날, 신혜는 몇 차례나 구역질을 했었다, 복도, 방, 식당, 주방, 변소, 목욕탕 할 것 없이 집안에 온통 배어 있는 형언할 길 없이 고약한 냄새 때문이었다. 어느 집에나 그 집 특유의 냄새는 있게 마련이지만 이 집안의 냄새는 그렇게 유별날 수가 없었다.
음식찌꺼기 냄새나 분뇨 냄새, 또는 시궁창 냄새와도 완연히 달랐다. 뿌려진 소독약 냄새까지 뒤엎고 일어나 코를 찔러오는 그 냄새가 무슨 냄새인지 신혜는 처음엔 몰랐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 그 냄새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그것이 다른 냄새 아닌 바로 사람 썩어 가는 냄새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이 집 식구들 중 몸의 어느 한 곳이라도 썩어가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저 노쇠해 있을 뿐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알고 보면 어디든 한두 군데씩은 심히 앓고 있었다. 하기야 아무리 노쇠해 있다고 해도 특별히 앓는 데가 없이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으면 이 집 식구가 될 자격이 없으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집도 가족도 없는 데다 얻어먹으러 돌아다닐 수마저도 없는 불구자나 병약자, 그 중에서도 어른소리를 들을 만한 사람만이 자격이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혼자 몸이지만 한번 결혼한 경험이 있다는 조 금선 선생님은 나이가 신혜보다 일곱 살이나 더 많고 성격이 남자처럼 시원시원했다. 다른 봉사자들도다도 특히 신혜를 좋아해 무슨 일이든 둘이 함께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꼭 신혜를 동반했다. 신혜는 그것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싫었다. 다른 봉사자들이 쉬고 있을 때도 자기는 쉴 수 없게 만드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조 금선 선생님은 천성적으로 일을 좋아했다. 일을 하지 않고는 잡생각이 들고 좀이 쑤셔 못 견디겠다는 말을 입버릇으로 달고 다닐 정도였다.
"누구부터 시키죠? 남자 식구부터 시킬까요, 여자 식구부터 시킬까요?"
"오늘은 몇 명이나 시켜줘야 되는데요? "
"많이 시켜줄수록 좋죠, 뭐. 적어도 네댓 명은.”
"그럼 여자 식구들이나 시켜주고 말아요."
"안돼요. 남자 식구들이 더 급해요. 남자 식구들은 모두 남자 봉사자들한테 미루고 안 시켜서 꼴들이 말이 아녜요. 강 신혜 선생도 뻔히 보면서 뭘,”
"그래도 남자 식구들 목욕시키는 건 싫어요."
"왜요? 부끄러워서요? 아직도 식구들한테 그런 기분이 남아 있어요?"
"그럼 조 금선 선생님은 남자 식구들 목욕을 시키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에요?"
"뭐가 어때요? 난 더 재미있던데
"뭐요? 재미?"
물론 농담으로 일부러 그런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농담 속에 진담이 있다고 조 금선 선생님은 어쩌면 정말로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켜주지 않고 넘어가도 상관없을 남자 식구들 목욕을 왜 그렇게 애써 시켜주려고 한단 말인가
"놀랄 게 뭐가 있어요? 재미있잖아요? 여자들에게는 달려 있지 않은 고추도 구경하고,,,,,,"
"어머, 참, 자꾸 그러실 거예요? 그러시면 난 안 갈 거예요."
봉사자들 방에서 나와 조 금선 선생님이 앞장서는 대로 식구들이 있는 방들 쪽으로 따라가다가 신혜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울상을 지었다.
"알았어요. 그런 말 안 할께요. 하지만 강 신혜 선생은 역시 봉사자가 되려면 아직도 멀었어요. 병들어 죽게 생긴 식구들 간병하면서 푸슨 그런 걸 다 따져요? 남자라고 해야 거의가 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뻘이 잖아요."
신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인지 조 금선 선생님은 처음부터 남자 식구들 방으로 가지는 않았다. 여자 식구들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거나 곧 죽게 생긴 식구들이 있는 방으로 갔다. 열 세 명의 식구 중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지 않은 식구는 하나도 없었다. 두 사람이 들어가도 눈을 뜨고 쳐다보지도 않고 모두 가느다란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날씨가 좀 풀렸다고는 해도 모두들 추위를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난방이 약한 상태라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기름 보일러로 된 방을 계속 따뜻하도록 땔 수는 없기 때문에 이렇게 견디도록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연탄 보일러로 바꾸는 편이 나을 거라는 생각을 신혜는 겨울 내내 해 왔었다. 조 금선 선생님이 첫 번 째로 일으켜 세운 식구는, 평소에 신혜로서도 유난히 냄새가 많이 난다고 느껴 왔었던 팔순으로 짐작되는 대동아 할머니였다. 노망기가 심한 편도 아니고 말도 어눌하나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은 하는 편인데, 척추가 심하게 굽고 똥 오줌을 받아내야 할 정도로 몸을 거의 쓰지 못했다. 자기 고향이 어디인지도 기억을 못하면서 이따금 대동아 전쟁 이야기와 일본에 떨어졌다는 원자폭탄 이야기를 해 그냥 그렇게 불렀다. 형식적으로나마 일주일에 한번 정도씩 다녀가는 의사의 말로도, 심하지는 않으나 원폭 피해를 입은 할머니 같다고 했다. 이 할머니에게서는 별 증상이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자식을 낳았다면 그 자식들에게선 아마 심한 증상이 나타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목욕을 하시자면서 두 사람이 부축해 목욕탕으로 데리고 가자,
"목, 욕 ---? 곧, 죽을, 틴디---목, 욕은-, 무슨,,, 죽, 더, 라도... 깨, 끗이---허고, 죽으라고? 고, 맙, 구, 먼.., 그, 려, 야, 지 ---천, 당에, 가, 더라도---깨, 끗, 허게,,, 허고,..-.가야, 하, 나님이---좋= 아, 따시, 겄지,,= 라고 느릿느릿 더듬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곧 죽을 사람을 무엇 때문에 목욕을 시켜드리겠느냐고, 할머니는 오래오래 사실 것 같아 특별히 시켜드리는 것이니 더욱더 오래오래 사시라고 큰소리로 말하면서, 조 금선 선생님은 할머니의 옷을 벗겼다. 때를 벗기는 것도 비누질을 하는 것도 조 금선 선생님이 다 하므로 신혜는 할머니의 몸을 붙잡아 드리기만 하면 되었다. 자기 몸을 가눌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구태여 두 사람씩 동원될 필요가 없겠지만, 그렇지를 못하니 어쩔 수가 없는 것이었다. 뼈에 가죽만을 입힌 듯 쭈글쭈글한 그 몸에서도 때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벗겨졌다. 기력이 떨어져서 그런지 시원해서 그런지 할머니는 눈을 감은 채 쌔근쌔근 숨만을 내쉴 뿐 아무 말도 없이 두 사람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한참 때를 벗겨가던 조 금선 선생님이 갑자기 에그머니나 ! 라고 소리를 질렀다. 신혜가 놀라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는 얼굴로 바라보자, 조 금선 선생님은 여간해선 짓지 않는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할머니의 샅 쪽을 내려다보았다. 순간적으로 눈을 감아야 할 만큼 신혜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비명조차 터져 나왔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틀림없었다, 자잘한 허연 구더기 떼였다. 항문에서인지 음부에서인지 구물구물 기어 나와 욕실 바닥으로 흩어져 갔다. 겉으로 어떤 상처가 있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돼서 저런 것들이 !I.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들 목욕을 시켜 왔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종기가 나 짓물러 터진 식구들에게서도 볼 수 없던 일이었다. 두 사람이 그토록 비명을 지르며 안절부절 못해도 할머니는 별로 반응이 없었다. 가려움을 느낄 신경조차 마비되어 있는지 아무렇지 않게
"왜, 그려?"
라고 중얼거리며 눈만 한번 가느다랗게 떴다 감았다. 역시 조 듬선 선생님은 천사가 다 되어 있었다. 구역질이 날 텐데도 측은하다는 듯 쯧쯧 혀만 두어 번 찰뿐 할머니가 눈치채지 않도록 깨끗이 닦아냈다. 밖으로 나와 있는 것들만이 아니라 속 깊숙이 있는 것들까지도 일일이 끄집어내고 샤워 물줄기로 몇 차례씩이나 씻어내었다.
그렇지 않아도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인데 어쩔 수 없이 하다가 그런 것까지 보게 되니 신혜는 정말 목욕시키는 일에는 더 이상 가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조 금선 선생님은 막무가내였다. 산 사람 몸에서 그런 것이 발견되도록까지 식구들을 방치해 둔 데 대해 봉사자들은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더 열을 내어 한 사람이라도 더 시켜주려고 애썼다. 의용군에 끌려간 자식이 언젠가는 꼭 돌아올 것이라고 아직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의용군 할머니,
원래부터 벙어리인지 아니면 실어증에 걸린 것인지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다가도 낮이든 밤이든 가리지 않고 느닷없이 괴성을 지르며 몸을 떠는 실어증 할머니까지 시켜주고 나서도 남자 식구를 세 명이나 더 시켰다.
시대를 잘못 만나 아직 이 꼴로 있지만 자기는 원래 큰 인물이 될 팔자를 타고났으니 언젠가는 꼭 큰 인물이 될 거라는, 자유당 때는 무슨 회사 사장으로 정치가들 정치자금까지 대됐다는, 마누라와 딸은 지금도 미국에서 잘살고 있다는, 하반신을 못 쓰는 큰 인물 할아버지, 이남으로 와서도 결혼을 두 번이나 했지만 이북에 두고 온 아내와 아들 생각 때문에 결국은 다 헤어졌다며, 아내야 몸이 약했으니 죽었을지 모르나 아들은 살아 있을 테니 통일이 되어 아들을 만나보기 전에는 결코 죽을 수 없다는, 반신불수에 천식이 심한 통일 할아버지, 자신이 말년에 이런 꼴이 되어 있는 건 젊은 날에 노름을 좋아한데다 술집 여자한테 미쳐 마누라와 자식들을 다 버렸기 때문이라며 걸핏하면 회한의 눈물을 줄줄 흘리는, 역시 반신을 잘 못 쓰는 바람둥이 할아버지--- 목욕을 시켜주는 동안에도 남자 식구들은 언제나 마찬가지로 짓궂었다. 마비되어 몸을 쓰지 못하면서도 여자 앞에서의 남자 행세를 하지 못해 안간힘을 썼다. 남자의 기능까지 완전히 마비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은 통일 할아버지나 바람둥이 할아버지는 물론 완전히 마비된 것 같은 큰 인물 할아버지까지도, 조 금선 선생님으로 하여금 그 부분을 오래오래 깨끗이 씻어주기를 바라며 그 순간을 즐기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신혜는 얼굴이 달아올랐으나 조 금선 선생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기분 좋은데 좀더 오래 깨끗이 씻겨 달라는 큰 인물 할아버지의 요구에도,
"쓰지도 못하는 물건 깨끗이 씻기만 하면 뭘해요? 냄새나 안 나면 되지"
라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며 그 부분에 물만 두어 차례 더 끼얹어 주었다. 그것을 보면서 신혜는 언젠가 있었던 부끄러운 기억을 되살렸다. 방에서 똥 오줌을 받아낼 정도가 아니고 부축을 해주면 변소로 가 용변을 볼 만한 식구는 부축을 해주는데, 그날 저녁엔 사이판도 할아버지라는 분을 부축해 췄더니 변소 안에서 신혜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2차 대전 때 징용으로 끌려가 사이판도에서 사람고기까지 먹고 살아났다는 분으로 위와 간이 나빠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나라의 난민처럼 기형적으로 깡마른 데다 부축을 해줘야 겨우 걸을 수 있는 칠순이나 된 할아버지라, 순간적으로 망령기가 발동한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넘겨버리기에는 자세가 너무 이상했다. 놀라 왜 이러시느냐는 표정으로 몸을 피해도 불량배처럼 노려보며 끌어안을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신혜가 결국 그 할아버지를 뿌리치고 변소에서 나와 조 금선 선생님으로 하여금 모시고 나오게 한 것은 그 자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용변을 보고 나서 집어넣지 않고 그대로 둔 듯 성기가 바지 앞자락 지퍼 밖으로 나온 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지야 않았지만 더우기나 그것은 결코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노인의 것으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그때도 조 금선 선생닝은 그 할아버지 지퍼를 잠가주고 부축해 나오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망령드셨수? 물건이라고 시들시들 구실도 못하게 생겼고만 무슨 주책이우?"
2
봉사자라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관(棺)짜는 일로 보내는 정 태문 선생님은 흰소리를 잘했다. 웬만한 우스개에도 곧잘 얼굴이 붉어지는 게 재미있어서인지 특히 신혜한테는 더 심하게 굴었다.
"내가 관상 잘 보는 것 모르죠? 강 신혜 선생은 겉으로는 얌전한 척해도, 언제나 눈에 눈물 같은 윤기라 감도는 걸 보면 남자를 상당히 좋아하게 생겼어요. 내가 강 신혜 선생 과거 한번 알아맞혀 볼까요? 어떻게 돼서 이런 험한 곳까지 오게 됐는지......?"
그런 식으로 말을 붙여와 뭐라고든 한마디 대꾸를 해주면 그 앞에서 쉽게 떠나지를 못하게 만들었다. 손으로 붙잡는 게 아니라 말로 붙잡았다. 관을 만들 나무에 톱질이나 대패질, 또는 망치질은 계속하면서 입만으로 묘하게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날도 그랬다.
신혜가 아침 내내 한 빨래를 양지바른 곳에 널고 주방 쪽으로 가는데, 그 사이에 있는, 정 태문 선생님이 대개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관 만드는 장소에서 소리가 들렸다.
"강 신혜 선생, 그러면 못써요."
햇볕을 받기 위해서인지, 허름한 창고 같은 그 건물의 문을 열어놓은 채 일을 하고 있던 정 태문 선생님이 이쪽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또 무슨 흰소리를 하려고 그러는가 하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하도 느닷없는 말이라 신혜는 자연히 눈을 깜박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원 그렇게 속일 수 있어요?"
"속여요? 제가 윌요?"
"애인은커녕 가족도 없다고 했잖아요?"
정 태문 선생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고, 조 금선 선생님이 물어 그와 비슷하게 어물어물 넘긴 적은 있었다.
"제가요? 언제요?"
"조 금선 선생한테 그랬다면서요?"
"모르겠는데요. 기억 안 나는데요. 그랬다 하구요. 그게 뭐 잘못 됐어요?"
"잘못 됐죠. 속인 거잖아요? 찾아왔던데.”
"찾아와요? 누가요?"
정 태문 선생님이 흰소리를 잘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잊을 만큼 신혜는 흠칫 놀랐다.
"부모님이랑 애인이랑, 부모님이 그렇게 의젓하신 분인 줄은 몰랐어요. 애인도 아주 미남이시고,,,,,, 키가 후리후리한데다 탄력이 넘치던데--- 그 누구죠, 영화배우? 아메리칸 플레이보이라는 영화의 주인공, 그 친구하고 비슷하던데,,,”
신혜가 더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눈을 흘기며 떠나오자 정 태문 선생님은 등뒤에다 대고 계속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어젯밤 꿈에 찾아왔었다구요. 알죠? 내 꿈은 보통사람 꿈과 다르다는 것?"
관 만드는 사람은 영통(靈通)을 한다는 것이 평소의 그의 주장이었다. 자기가 관상을 남달리 잘 본다든가 자기의 꿈이 보통사람 꿈과 다르다는 것도 바로 거기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생각해 보라, 그렇게 많은 죽은 사람들의 방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어떻게 영계를 드나들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우연이었거나 또는 어떤 방법으로든 미리 소식을 들어 그랬는지 몰라도 어떤 때는 실제로 희한한 생각이 들만큼 신통하게 알아맞힌 때도 없지 않았다. 관을 짜면서, 이 관은 어떤 식구의 것이 될 것이라든가, 며칟날엔 관이 몇 개 필요할 테니 미리 짜두는 게 좋을 것이라면서 짜면 그대로 맞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아무 날엔 이 집에 귀한 손님들이 들이닥칠 것이라고 하면 기자들이나 요인들, 선교사들, 또는 어떤 자선단체의 사람들이 선물 보따리를 차에 싣고 몰려오기도 했다.
어떤 식구나 봉사자들의 과거를 어림짐작 알아맞히는 솜씨도 보통 수준은 넘었다. 새 식구가 들어와 묻는 대로 잘 대답을 하지 않아 답답하면 정 태문 선생님이 유도 심문하는 식으로 물어 알아내는 일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 집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지혜로운 면이 있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했다. 원래 목수 노릇을 한 일도 없다는, 이제 삼십대밖에 안 된 젊은 사람이 관을 손택없이 짜내는 것만 해도 그랬다. 그전에는 사다 썼었는데 하도 많이 필요하게 되니까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스스로 나서서 짜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혜만이 아니라 이 집의 그 누구도 정 태문 선생님의 과거에 대해서 소상히는 알지 못했다. 무슨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노총각이라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여자 봉사자들 중에는 그에게 특별히 이성으로서의 관심을 갖는 사람도 있었는데 신혜는 언제 한번이라도 그런 적은 없었다. 다만 이따금 그가 던져오는 흰소리 때문에 신경을 써왔고, 이날도 그 엉뚱한 말들로 해서 내내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그
가 내세우는 그의 영통을 조금이라도 믿어, 그의 꿈이 현실화될까봐 그런 것은 물론 아니었다. 애인이라고 말할 만한 남자는 지금은 물론 과거 어느 때에도 없었다. 다만 자기의 순결을 앗아간 남자야 있었으나 그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는 아직도 알고 있지 못했고 구태여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빼앗겼다기보다 내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신혜는 죽음 이외의 그 무엇이고 자기를 구원해 줄 수 없을 것 같은 극한에까지 내몰려 있었다.
국회의원을 지낸 적까지 있지만 계속 야당만을 고수해 온데다 지병이 있어 집 한 채 남겨놓지 못하고 아버지가 죽은 후 집안은 말이 아니었다. 대학에 갓 입학한 신혜는 물론 삼 학년에 재학 중이던 오빠마저 당장 학교를 그만둬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무리 가진 게 없더라도 학교마저 다니지 않아서야 어떻게 되겠느냐고, 어머니는 있는 수단 없는 수단 다 동원해 온 채 전셋집을 방 두 간 짜리 전셋집으로 줄이면서까지 가르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런 꼴이 보기 싫어서였을까. 그런 상황에서 태연스럽게 배우려고 하는 자신이 못 견디게 혐오스러워져서였을까. 어느 날부턴가 오빠는 공부보다 다른 일에 더 열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대학에서나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던 시위에 앞장서는 것으로 학교생활을 일관했다. 어머니나 신혜가 눈물을 흘리며 말렸으나 소용없었다. 끝내 자기 고집을 꺾지 않더니 결국엔 영장이 나와 군대를 가게 되었다. 졸업하고 가기로 되어 있으니 영장이 나을 리가 없는데 나왔다고 오빠는 투덜거렸지만 어머니나 신혜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군대에 가 얽매이게 되면 자연히 여러 면에서 달라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군대에 간지 일 연도 못 되어 유골 상자가 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몰랐다. 사고사라고 했지만 어떤 사고로 어떻게 죽은 것인지 구체적으로는 누구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오발사고라느니 자살이라느니 동료들과 싸우다가 죽었다느니 간첩작전에 나가 크게 부상을 입어 고생하다가 죽었다느니 말들이 많았으나 어떤 말이 정말인지는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었다. 사람이 실성한다는 건 간단했다. 그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언제 한 번 흐트러짐 없이 아버지 뒷바라지에 병구완, 그리고 자식들 교육에 그토록 정성을 쏟아오던 어머니가 오빠가 그렇게 된 후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신혜의 힘으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도록 실성기가 심해져 결국엔 집을 나가버리고 말았다. 곧 돌아오려니 했으나 며칠, 몇 달이 지나도 종무소식이었다. 신혜가 다니던 학교까지 그만두고 친척집, 친구집, 병원, 절, 기도원 등 웬만큼 다녀볼 만한 데는 다 다녀보았으나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실종신고에 심인광고까지 냈어도 허사였다. 그런 와중에서 신혜가 아무리 마음을 다져먹는다고 해도 언제까지나 멀쩡하게 버틸 수 있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더 이상했을 것이다,
지치고 지척 절망의 끝에 이르러 죽음만이 구원해 줄 수 있으리라는 결론을 얻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접근해 오는 거리의 남자한테 순결을 내동댕이쳤던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망가짐으로 해서 좀더 쉽게 죽음에 닿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역시 죽는다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엔 이런 엉뚱한 집에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물론 도피하듯이 붙잡은 신앙이 동기가 되었지만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는 자학의 심정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런 마당에 애인이 어디 있고 부모님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설령 그 동안 어디엔가 살아 있었던 어머니가 회복이 되어 찾아오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물론 어머니가 찾아오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이 집의 식구가 되겠다고 찾아온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역시 날씨가 풀려서인 것 같았다. 교통이 불편한 곳이라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로서는 찬 겨울 강추위가 몰아칠 때는 찾아
오고 싶어도 찾아오기가 힘들 것이었다. 물론 단독으로 오는 일이야 없지만 누구의 안내를 받아 와도 그랬다. 그냥 두면 거리에서 얼어죽을 것 같아 어쩌다가 경찰서나 군청 같은 데서 어쩔 수 없이 데려오는 일은 있었으나 그것도 극히 드물었다. 데려오는 사람들로서도 강
추위가 몰아칠 전 더 부담스럽기 때문일 게 뻔했다. 또 데려온다고 해서 무조건 다 받아주지는 못하기 때문에 이 집으로서도 한겨울에 찾아온다고 해서 좋을 건 없었다. 받아줄 경우에는 괜찮아도 그렇지 못하고 돌려보내야 할 경우에는 그만큼 더 난처하기 때문이었다.
이날 처음에 온 사람은 어떤 젊은이가 오토바이에 싣고 왔다. 무슨 장사꾼인지 오토바이 뒤에 합판으로 짠 때가 끼고 퇴색한 커다란 상자를 싣고 있었는데 그 속네 넣어 가지고 왔다. 그가 집 앞에 바짝 다가왔을 때가지도 신혜는 그 속에 설마 사람이 들어 있으리라고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라면이나 헌옷가지 같은 무슨 구호품, 살아 있는 무엇이라면 돼지나 염소 같은 것쯤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사람이 나왔다. 젊은이가 두 손으로 들어 꺼내놓았는데 얼핏 봐선 한쪽 다치를 제대로 못 쓰는 것 외에는 그다지 큰 이상은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이도 별로 많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라는 호칭보다는 아저씨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날마다 하지는 않았을지 모르나 세수도 자주 한 얼굴이고, 깨끗하게 보이지는 않으나 옷도 두툼히 입은 편이었다.
다른 잡일도 하면서 총무 일도 함께 보는 남자 봉사자 박 해준 선생님이 사무실에서 나와 맞이하자 젊은이가 말했다.
"이분이 이 집에서 살고 싶다고 데려다 달라고 졸라대 데려왔는데 어떤 수속을 밟아야 되죠?"
으례 그렇듯이 박 해준 선생님이 싫을 것도 반가울 것도 없다는 덤덤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물었다.
"두 분은 어떤 사이신데요7"
이쪽에서 무는 의심이라도 할까봐 그러는지 젊은이는 지나칠이만큼 강한 어조로 나왔다.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 그냥 시장 길에서 오다가다 몇 차례 마주쳤었는데, 어찌나 졸라대는지,,,,,, 아, 글쎄 날더러 자기한테 껌 장사 밑천으로 쓰던 돈 오천 원이 있으니 그걸 줄 테니까 데려다 달라잖아요? 내가 그런 돈을 받겠어요?"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껌장사를 하며 살아왔단 말이군요?"
"말이 껌 장사지 비럭질을 한 거죠, 뭐. 더러 보셨을 거 아니에요? 다방이나 술집 같은 데서,,,,,, 가게에선 백 원씩 받는 껌을 이백 원씩 받는 거지들,,,,,,"
"그런데 이제는 왜 그렇게 살지를 못하겠다는 거예요?"
"몸이 아프대요. 몸이 너무 아파 돌아다니지를 못 하겠대요. 오래 전부터 아팠었지만 참아왔는데 이제는 더 이상 못 참겠대요."
"그럼 병원엘 가 보셔야지,,,,,,"
"병원에 육 개월이나 있다가 퇴원을 한 거라는데요, 뭐. 살림 조금 있는 것 병원에서 다 가먹고, 하나 있던 딸마저 어디로 달아나 버려 어쩔 수 없이 껌 장사를 하기 시작한 거래요."
알았다고, 목사님한테 함께 가 보시자며 박 해준 선생님이 앞장을 서자, 젊은이는 머뭇머뭇 뒤로 물러섰다.
"나는 그냥 돌아가면 안 됩니까? 필이 좀 바쁜데
"안 되죠. 결정 여부를 알고 가셔야 되니까."
"결정을 누가 하는데요?"
"목사님께서요. 물어볼 걸 물어보셔서 이 집에 있어야만 할 사람이면 있게 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돌려보내시니까."
다른 면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그 면에선 목사님은 아주 철저했다. 비단 식구만이 아니라 봉사자 한 명을 있게 하는 데도 그랬다. 와서 있으라고 사정을 한다고 해서 있을 사람도 드물겠지만, 스스로 와서 있겠다고 사정을 해도 다 받아주지는 않았다. 심지어는 신혜조차도 스물 세 살이라는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망설였었다. 여행하는 기분으로, 또는 대학생이 방학 때 며칠 동안 시골로 봉사활동 나가는 기분으로 있으려면 아예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었다
세 사람이 목사님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신혜는 자기가 해야 할 일로 돌아왔다. 결국 오토바이에 실려온 그 사람은 있는 걸로 결정이 되었다. 그러나 오후 좀 늦게 두 번째로 찾아온 사람은 있지 못하고 돌아갔다. 일에 쫓겨 신혜가 자세히 보지는 못하고 스치듯이 보았지만 두 번째 온 사람은 열 살이 갓 넘어 보이는 소녀의 손에 부축되어 왔다. 오토바이에 실려온 사람보다 나이도 훨씬 더 들어 보이고 몰골도 눈뜨고 자세히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화상을 입었는지 얼굴이 온통 흉터였고 눈도 한쪽은 흰창만이 있었다. 거기에다 무슨 병이 있는지 몸도 전체적으로 부석부석했다. 어서 빨리 따뜻한 방에 눕혀드리고 싶도록, 어쩐지 곧 죽을 병에 걸려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신혜의 판단으로는, 아간 오토바이에 실려 왔던 사람은 받아주지 않더라도 이 사람은 받아줘야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결국 있지 못하고 돌아간 것이다. 목사님 방에서 나와 돌아갈 때의 광경 역시 스치듯이 볼 수 있었는데 어린 소녀가 뺨이 젖도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물론 모든 건 목사님이 알아서 하니 자기가 신경쓸 일은 아니지만, 그 소녀의 눈물이 잠자리에 들 때가지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신혜가 잠자리에 누워 조 금선 선생님에게 그 이야기를 비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왜 나이도 별로 많지 않고 병도 그다지 깊어 보이지 않는 사람은 받아주면서 그보다 훨씬 더 비참해 보이는 사람은 안 받아주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조 금선 선생님은 한참 묵묵히 있다가 신중하게 말했다.
"나도 얼핏 보았었는데, 겉으로만 봐서야 알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겉이 괜찮아 보여도 속으로는 곧 죽을병을 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겉은 곧 죽게 생겼는데 속은 괜찮은 사람도 있으니까. 그리고 말 들으니까 나중에 온 사람은 그 소녀가 친손녀라던데 아무리 어려도 가족은 가족이니까,,,,,, 자기 할아버지는 여기에 두고 그 소녀는 고아원으로 갈 셈이었던 모양인데 그것도 바람직한 일일지는 생각해 봐야 될 문제고,,,,,"
그러나 다음날 낮에 어쩌다가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정 태문 선생님은 전혀 다르게 말했다.
"강 신혜 선생은 관상으로 봐서는 예술이라도 하게 생겼는데 말하는 걸 보면 영 둔쎈느란 말이야. 척하면 삼천 리라고, 그걸 판단 못 하겠어요? 소녀가 모시고 나중에 온 사람은 한쪽 눈이 불구잖아요? 그리고 몸이 퉁퉁 부었으니 신장도 나쁠 테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우리 식구들을 불쌍하게 생각해서 아무데서나 무조건 자선금을 주는 줄 아세요? 주는 사람들도 있죠. 하지만 그것 가지곤 이 식구들, 어림없어요. 세상엔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는 법이에요. 병원이든 환자든 신장이나 안구 같은 거라도 기증 받아야 한 푼이라도 좀 많이 내놓지 그런 것도 없는데 덮어놓고 내놓을 줄 알아요? 그리고 여기 식구들도 그래요. 대개 다 기증서약서를 쓰지만 여기서 공짜로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지를 않아 보세요. 그래도 그런 걸 그렇게 많은 사암들이 쓸 것 같아요? 목사님으로서도 처음에야 이런 것 저런 것 따지지 않으셨겠지만 세상이 워낙 갈수록 각박해져 이 집도 문을 닫아야 할 지경이 되니 어쩌실 수 없겠죠."
3
한 대의 앰블런스가 다녀갔다. 며칠이 지났다. 또 한 대의 앰블런스가 다녀갔다. 또 며칠이 지났다. 다른 또 한 대의 앰블런스가 다녀갔다. 또 다시 며칠이 지났다. 몇 대인지 모를 앵블런스가 다녀갔다.
완전히 봄이 왔다. 웬만큼 심히 앓고 있는 식구들도 밖으로 나와 햇볕을 쬘 수 있을 만큼 한낮은 따뜻했다. 식사 시간과 예배 시간, 성경 공부 시간을 제외한 자유 시간에는 많은 식구들이 집 앞과 옆에 놓여 있는 벤치에는 물론 우물가, 장독대 옆, 언덕배기, 비탈 등에 나와 웅크리고 앉아 있는 일이 많았다. 하늘을 보는 사람, 산의 나무를 보는 사람, 한없이 펼쳐진 벌판을 보는 사람, 저 멀리 이 집과 이어져 뻗어 있는 길을 보는 사람, 고개를 끄덕이며 옆 사람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 옆에 아무도 없는데 혼자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고 투덜거리다가 소리 없이 웃는 사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아무 곳도 보지 않는 사람.
그런 식구들을 향해서, 햇볕을 받아 번쩍번쩍 빛을 되쏘아내는 검은 빛깔의 승용차 두 대가 들이닥친 것은, 이 집으로서는 가장 한가로운 시간인 오후 세 시쯤이었다. 자연히 식구들의 눈은 일제히 그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승용차들이 이 집 앞으로 들이닥치는 일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지난 연말에만 해도 몇 대씩이나 들이닥쳤었다. 그러나 봄볕을 받아서인지 이날의 승용차들은 검은 빛깔인데도 이제까지의 승용차들과는 달리 유난히 호화스럽게 빛나 보였다. 몇몇은 일어섰고 몇몇은 웅성거렸다. 어떤 식구는 환성을 지르기 도 했다.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식구들까지도 그 웅성거림과 환성에 무슨 일인가 해서 눈을 비켜 뜨며 자리에서 움직였다,
전화 연락이 있었는지, 아니면 득이닥치는 걸 보고서 박 해준 선생님이 연락을 드린 것인지, 목사님이 안에서 알맞게 나왔다. 교회 일로 자주 드나드는 전도사님과 집사님도 마침 목사님 방에 와 있었던 듯 함께 나왔다. 미리 알고 와서 기다린 것인지도 몰랐다.
승용차에서는 정확히 여덟 사람이 내렸다. 운전기사 두 사람을 제외한 여섯 사람이 무얼 하는 사람인지는 신혜로서도 알 수 없었다.
미국인으로 보이는 의젓하게 생긴 늙수그레한 외국인 남녀와 역시 의젓하게 생긴 늙수그레한 한국인 남녀, 그리고 젊은 한국 남자 두 사람이었다. 젊은 한국 남자 두 사람 중 한 명은 어깨에 카메라를 메고 있는 걸로 보아 비서 아니면 기자 같았고, 다른 한 명은 외국인 남녀 옆에 바짝 들러붙어 떠나지를 않는 걸로 보아 통역 같았다. 하지만 나이 많은 외국인 남녀와 한국인 남녀는 성직자인지 재벌인지 고관인지 분별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겉모습만으로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볼 위치에 있는 사람들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승용차들이 들이닥칠 때는 대개의 경우 그랬듯이 이날도 절차는 비슷했다. 인사들이 교환되고 몇 개의 선물꾸러미들이 전달되고 사진이 찍혀지고 떠들썩한 말소리가 오고가고 웃음소리, 이날의 말소리와 웃음소리는 외국인이 섞여 있어서 그런지 좀 색달랐다. 외국인이라도
젊은 선교사들이 섞여 있었던 그전에는 이렇지 않았었다. 그때에는 자유로움과 훈훈함이 감돌았었는데, 지금은 질서정연함과 정중함이 감돌았다. 사진은 계속 찍혔다. 선물꾸러미가 전달되는 광경만이 아니라 각양각색의 식구들 모습도 찍혔다. 외국인 부부, 한국인 부부가 걸어가다가 잠시만 머뭇거리면 그곳은 다 찍혔다. 그곳에는 대개의 경우 사람의 물골과는 가능한 한 거리가 멀어 보이는 식구들이 있었다.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방안에서 쓰레기더미처럼 누워 있거나 쓰레기통처럼 앉아 있는 식구들도 찍혔다.
살펴될 만큼 살펴보고 둘러볼 만큼 둘러본 그들은 목사님 방으로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조 금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신혜가 가지고 가 따랐다. 목사님은 물론 교회 관계 사람들이 올 땐 혼자 도맡다시피 하여 따라왔던 차를 오늘만 유달리 자기에게 따르라고 시 키는 조 금선 선생님이 못마땅했으나 그런 걸 가지고 투정을 부릴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혜가 커피를 따르는 동안 그 안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는 뜻밖에도 고려장(高麗葬)에 관한 것이었다. 아마 생명의 존엄에 관한 이야기 끝에 한국인 부부 입에서 그 이야기가 나온 것 같았다. 통역을 맡은 사람이 외국인 부부에게 통역을 해주자, 외국인 부부는 고개를 내저으며 거기에 대한 자기들의 견해를 이야기했다.
외국인들이 하는 영어를 구체적으로 다 알아들을 만한 실력은 못 되기 때문에 신혜도 통역하는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 외국인들은 고려장에 관한 자기들의 견해에 이어 안락사(安樂死) 이야기까지 꺼냈다. 결론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는, 고려장이야 천만부당한 일인 건 말할 것도 없고, 요즈음도 세계적으로 논의가 되고 있는 안락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문제라고 했다. 설령 식물 인간으로 십 년씩 살더라도, 하나님에서 주신 생명을 어떻게 인간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목사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한
국인 남자가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스치듯 반문했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육체에 칼을 대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칼을 대다노?"
"신장이나 안구 같은 걸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는 행위 말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그에게 준 육체를 왜 다른 사람에게,,,,,,"
"아니죠. 그거야 별개의 문제죠. 그는 이미 죽었고, 죽은 그가 남긴 육체로 해서 새로 한 생명이 태어나게 되는 거니까."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도 이식 받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하지만 그 경우에도,,,,,,"
"모르겠습니다, 뭐가 뭔지,,,,,, 나도 물론 목사님께서 하시는 이 일이 보통 위대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죠. 내 생각으로는 안락사라는 제도도 찬성을 해야 될 것 같아요. 식물인간으로 십 년씩 살다니,,,,,, 그래가지고, 그 주위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 당사자에게도 좋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거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 운운하는 말을 끌어다 대는 건 설득력이 별로 없다는 이야기죠. 식물인간만이 아니라 소생 가망이 없는 불치병 환자들은 적당한 시기에 안락사 시켜 본인도 고통에서 헤어나게 해주고 또 그들로부터 신장이나 안구를 이식 받을 사람들에게도 알맞은 시기에 혜택을 준다면 얼마나 바람직하겠습니까? 우선 목사님부터 이 일을 하시기가 훨씬 수월하실 것이고,,,, 나는 이런 생각도 해봤어요. 우리 나라는 현재 피가 부족해 외국에러 수입을 해 쓰는 형편인데 그런 걸 수입만 해 쓸 게 아니라 우리도 좀 수출을 할 수는 없을까 하는---, 피 아닌 신장이나 안구 같은 것도 우리 나라에서 쓰고 남아 수출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좋지 않겠어요? 꿈만은 아닐 것 같아요. 목사님같이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어쩌다가 큰 죄를 지은 사형수들이 남겨주는 그런 것만 가지고는 어림없는 일이---
신혜로서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이런 이야기들을 주고받다가 그들은 곧 떠나갔다. 그런데 떠나가기 바로 직전에 웃지 못할 뜻 아니한 사건이 벌어졌다. 집 앞 벤치에 앉아서 햇볕을 쬐고 있던 식구들 중의 한 명인 혁명 할아버지가 발작을 일으킨 것이었다. 4대 독자 외아들을4,19혁명 때 잃고 사업마저 5,16혁명이 일어나면서 망하게 되어 자기가 술만 마시다가 이 모양으로 폐인이 되고 말았다는 할아버지였다. 일주일에 한번씩 다녀가는 의사의 말로, 간경변이라 일 년을 더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주독으로 얼굴이 흉측스럽게 검붉은데다 정신도 황폐해 이따금 발작 증세를 보여 왔었다. 걸핏하면 식구들이나 봉사자들한테 시비를 벌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별별 험한 욕설을 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날도 그랬다. 무엇 때문인지, 떠나가기 위해 승용차에 오르려는 방문객들 앞에 나서서 느닷 없이 눈을 부라리고 손가락질, 삿대질을 해대며 큰소리로 욕설을 해 댄 것이었다.
"야, 이 개놈의 새끼들아! 내 똥이나 빨아먹을 새끼들! 우리를 어떻게 보고 그건 개수작들을....., !"
박 해준 선생님이 얼른 나서서 가로막아 끌어갔으니 망정이지, 하는 꼴로 봐서는 금방 누구의 멱살이라도 움켜잡을 기세였다. 미국인 부부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겠지만, 한국인들은 어리둥절해져 저 사람이 왜 저러냐고 중얼거렸다. 죄송하다고, 평소에 광기가 있는 사람이라 그러니 이해하시라며 목사님이 양해를 구해도 나이 많은 남자는 불쾌한 감정을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아무리 광기가 있어도 그렇지, 우리한테 저럴 수가 있어요? 우리가 뭘 잘못한 게 있다고, 가끔 와보려고 했더니 다시는 못 올 곳이구먼."
마치 멀쩡한 사람이 악감정을 가지고 그랬을 때나 똑같이 그러면서 운전기사에게
"갑시다!"
라고 소리친 후 떠나갔다.
이곳 식구들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것 같았던 그분이 그렇게 떠나가서인지 어이없다는 듯 목사님은 혼자 어색하게 쓴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그 일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지 밤에 하루 일과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을 때 봉사자들을 모아놓고 한마디하였다. 여러분들이 여 러 가지로 힘든 줄은 안다, 하지만 좀더 신경을 퍼서 다스리고 이끌어간다면 오늘 오후에 있었던 그런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분들의 근본적인 의도가 어디에 있든 간에 어쨌든 우리 '안식의 집'에 도움을 주려고 하는 분들인데 그런 식으로 보내드려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오늘 오후에 광기를 보인 그 식구가 아니더라도 평소에 광기가 심한 편이어서 위험하게 느껴지는 식구는 앞으로 손님이 오는 날은 밖에 나와 있지 못하게 하는 방향을 취해주기 바란다.
언제나 그랬지만, 목사님의 이 한마디에 대한 반응은 가볍지가 않았다. 목사님으로서는 어느 정도 심사숙고 끝에 한 말인지는 모르나, 목사님의 지시니 그대로 안 따를 수도 없고, 따르자니 그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 집 식구들 중 광기가 없는 식구들보다는 있는 식구들이 훨씬 더 많은데 어떻게 그 짓이 가능하겠는가.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것도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었다. 심하지 않은 사람도 갑자기 심해지는 일이 많은 것이었다. 물론 날씨가 추울 때라면 간단했다. 추울 때라면 나와 있으라고 해도 나와 있지 않겠지만 앞으로 몇 잘 동안은 갈수록 따뜻해지고 더워질 게 아닌가. 따뜻하고 더워 밖으로 나와 있으려는 사람들을 어떻게 강제로 방으로만 몰아넣는단 말인가. 그것도 손님이 올 때는 무조건 모두 다 그렇게 하라면 몰라도, 광기가 심한 식구만 골라 그러라니 난
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사님 앞에서는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있다가 목사님이 사라이자 제각기 한마디씩 하던 봉사자들은, 엉뚱하게 화살을 오늘 방문 온 손님들 쪽으로 돌렸다. 도대체 무엇 하는 사람들인데 우리 식구가 그런 욕 좀 했다고 그렇게 기분 나빠했는지 모르겠다, 무슨 그런 욕을 먹어도 될 짓을 하는 사람들이라 제 발이 저려 그런 것은 아닐까라고, 한 여자 봉사자가 말하자 다른 또 한 여자 봉사자가 그 며에 동조하며 박 해준 선생님을 향해 그분들이 무엇하는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총무 일을 맡고 있기 때문에 알고 있으리라고 믿어 물었을 텐데, 아는지 모르는지 박 해준 선생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굳은 표정만 지었다. 그러자 이번엔 그런 쪽에 비교적 밝은 조 금선 선생님한테도 물었다. 그러나 조 금선 선생님은, 몰라요, 내나 어떻게 알아요? 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신혜가 말을 꺼낸 건 그 때문이었다. 봉사자들 중엔 자기만큼도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던 것이다. 목사님 방에서 커피를 따를 때 그들이 주고받던 이야기를 들려주자, 한 여자 봉사자가, 어머, 그래요? 그럼 무엇 하는 분들일까요? 안락사며 신장과 안구 이야기를 했다면 의료 계통 사람들인 모양이죠? 라고 반응을 보였다. 정 태문 선생님이 나선 건 바로 이때였다. 진작부터 무언가 아는 체를 하고 싶었으면서도 전혀 몰라서 그랬던지 계속 아무 말도 않고 있다가 불쑥 내뱉었다.
"그분들이 무얼 하는 사람들인지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의료계통 사람이면 어떻고 고관나리면 어떻고 재벌이면 어떻다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아마 신장과 안구은행 같은 거라도 구상하고 있는 재벌쯤 되는 모양이죠. 혈액은행이야 우리 나라 에도 있고, 외국엔 그런 은행들이 많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신장과 안구만이 아니라 심장까지도 관할하는,,,,.. 그런 기업이 제자리를 잡는다면 굉장하겠는데요. 대량으로 위탁을 받아 갈아 끼우기를 원하는 돈 많은 사람들한테 판다면,,,,,, 그렇게 되면 이곳 '안식의 집'이 뭐가 되는 셈일까요? 뿔을 얻기 위해 사슴을 사육하고, 쓸개를 얻기 위해 곰을 사육하듯, 신장과 안구를 얻기 위해 임종을 지켜주는 인간 목장---? 모르겠습니다. 나야 곧 떠날 사람이니까 알아서 잘들 해 보시죠, 뭐."
이날 밤 신혜는 악몽에 시달렸다. 정 태문 선생님의 흰소리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자신이 직접 간병해 왔던, 그러나 죽음 직전이나 죽어서 앰블런스에 실려갔던 그 식구들이 눈과 신장이 없는 육신으로 나타나 덤벼드는 꿈이었다. 꿈이 아니고 반쯤 깨어 있는 상태에서의 환각인지도 몰랐다. 괴기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름끼치게 덤벼들며 자기의 눈과 신장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쳤다. 거짓말인지 정말인지는 몰라도 거의가 다 일제 때나 6,25사변 때, 월남전 때 또는4.19때나 무슨 데모사건 같은 역사적으로 큰 사건이 있었을 때 가족 전부나 일부를 잃었고 자신도 그 원인으로 해서 병을 얻었다고 주장하던 아저씨, 아주머니들이었다. 죽기 전에도 모두 비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는데 꿈과 환각 속에서는 그보다도 훨씬 더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소리를 지르다가 신혜는 끝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현실이 아닌 꿈과 환각이었다는 깨달음은 왔으나 그래도 무서움이 가시지를 않았다. 견딜 수 없도록 심장이 계속 격렬히 뛰었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자기가 어떤 상태에 이르러 이곳에 왔는데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절망의 끝에서 죽음을 택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해 그보다 더 비장한 각오로 이곳에 와 이런 일을 했던 게 아닌가. 물론 자기 능력으로는 너무나 부치는 일인 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이 세상에 이보다 더 희생적으로 남을 돌보고 사랑하는 일도 많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최선을 다해 왔지 않은가. 그런데 이 꿈과 환각, 이 견디기 힘든 흔들림은 무엇인가. 아무 데도 갈 곳 없는, 병들어 죽음에 임박한 식구들의 지붕은 될 수 있는 이곳이 자기의 지붕은 될 수 없단 말인가.
신혜가 이런 흔들림 속에 빠져 있는데, 더우기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 태문 선생님이 이곳을 떠났다. 흰소리를 잘해 그냥 괜히 한 말인 줄 알았더니 그날 밤 스치듯이 잠깐 비쳤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이곳에 와 이 년 가까이나 열심히 일해 온 그가 갑자기 떠나는데 대해 봉사자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그는 떠나가면서 별다른 이야기는 없이 이렇게만 말했다.
"한때는 못된 일,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받을 일만 해 왔었죠. 그런데 그 짓도 자꾸 하다 보니 별로 재미가 없더군요.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좋은 일, 맨주먹으로도 남을 위할 일을 찾아다니면서 해와 봤죠. 외딴 섬에 가서 선생 노릇도 해보고, 또 이런 일도...... 옛날 (상록수)의 주인공처럼 요즈음 세상에서 소위 말하는 봉사라는 것을 해 보려고 애써 왔는데, 글쎄요, 이것도 내게는,,,,,, 힘들어서가 아니라 이런 것이 과연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것이 될 수 있느냐는 데에 대한 회의가 와졌다고 할까,,,, 그러나 나야 뭐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렇게들 아시고 남아 계시는 분들은 잘해 보시도록.”
그가 떠났다고 해서 당장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관이야 그가 짜지 않더라도 그전처럼 사다 쓰면 될 것이고, 다른 일들도 여섯 사람이 나눠 조금씩 더 열심히 하면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일으키고 간 바람이 그리 약하지가 않았다. 봉사자들 거의 모두 흔들리는 말들을 했고, 특히 가장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조 금선 선생님마저 어느 날 조용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중에 가서 나를 원망할지 몰라 미리 말해두지만 나도 올 봄이 가기 전에 떠나게 될 거예요. 나는 이곳에 올 때부터 목사님께 말씀을 드렸어요. 정확히 이년 육개 월만 있겠다고, 그런데 다음 달이 약속한 달이거든요. 이 달이 될지 다음 달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남편이 교도소에서 나오게 되면 있고 싶더라도 더 이상 어떻게 있겠어요?"
떠난다는 말도 그렇지만 그보다도 교도소라는 말에 더욱 놀라 모두들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조 금선 선생님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심각히 말을 이었다.
"남편은 사상범으로 교도소 생활을 하는 마당에 내가 밖에서 이런 일 아닌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어요? 뒷바라지할 애들이라도 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도 않은데 돈벌이나 하겠다고 돌아다니겠어요, 어쩌겠어요? 그래서 해온 일인데 나도 모르겠어요, 잘한 일인지 어쩐 일인지 ,,,,,,"
이 집에 온 후 자기에게 기둥이나 마찬가지 역할을 해온 조 금선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말까지 듣고 나니 신혜는 정말 암담했다. 물론 자기의 신앙이 깊지 못한 탓일지 모르나 조 금선 선생님마저 떠나고 나면 이 집에서 자기가 과연 어떻게 버티어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렇 다고 이 집을 떠나서는 과연 어디로 가 더 이상의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그리하여 신혜는 낮이나 밤이나 틈나는 대로 기도하는 데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올 봄 들어 처음으로 비가 내렸다. 구질구질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오후가 되어도 멎지를 않았다. 집안에 켜켜이 굳어 있는 죽음의 냄새를 온통 들쑤셔 헤집어 놓은 그 비 때문이었을까.
신혜가 이 집에 온 후 가장 큰 사건이 벌어졌다. 목욕을 시키려고 목욕탕에 부축해 데려다 놓은 한 식구가 자해(自害)를 한 사건이었다. 일종의 발작이었으나 지난번 혁명 할아버지의 발작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목욕탕 타일 벽에 사정없이 자기 이
마를 짓찧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것이다. 봉사자들 사이에 침묵 아저씨라고 불리던 식구였다. 신혜가 이곳에 온 지 한 달 쯤된 지난 겨울 경찰서에서 데려온 사람이었다. 오십도 때 안 되어 보이는데 사지를 거의 못 쓰고 말을 못했다. 무슨 말을 물으면 눈빛이나 표정, 고개의 끄덕임만으로 겨우 대답했다. 밥도 늘 뜨는 등 마는 등 이제껏 내내 누워서만 지내오다시피 했고, 똥 오줌도 받아냈었다. 그런 그를 다른 식구들이나 마찬가지로 목욕을 시키기 위해 조 금선 선생님과 함께 목욕탕에 막 데려다 놓았는데, 아침 무슨 일 때문인지 한 봉사자가 와서 목사님께서 찾으신다며 조 금선 선생님을 불러갔다. 그와 둘이 목욕탕에 남게 된 신혜는 자기가 옷을 벗기기 어색해 조 금선 선생님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으로 잠깐 밖에 나와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신음소리를 듣고 놀라 신혜가 뛰어들었을 때는
이미 쓰러지고 난 다음이었다. 경악하는 신혜의 소리에 봉사자들은 물론 목사님까지도 달려왔다. 숨은 아직 붙어 있었으나 워낙 쇠약해 있었던 사람이라 살아나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을 뒤집어 살피던 목사님이 잠시 감았던 눈을 뜨며 담담히 말했다.
"앰블런스를 부르지. "
그러나 웬일일까. 목사님으로서는 일단 병원으로 옮기라는 말이었는지도 모르는데 봉사자들은 모두 그 말에서 신장과 안구 생각부터 한 것일까. 말은 못하고 사지는 잘 쓸 줄 모르나 이 식구도 분명히 기증서약서에 서명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일까. 봉사자들 중 어 느 누구도, 심지어는 총무 일을 맡고 있는 박 해준 선생님가지도 곧바로 전화통 있는 데로 달려가지는 않았다. 신혜 역시 언제까지나 움직이지 않을 자세로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아마 세상이 점차 콘크리트화 해가고, 거기에 따라 사람들의 의식 또한 메마를 대로 메말라간다고 생각되어서였을 것이다. 한때 신문이며 잡지며 방송에서 서로 다투듯이 전원(田園) 캠페인을 벌인 일이 있었다. 전원이라는 낱말이 들어가는 갖가지 제목으로 시골에 사는 유명인들의 생활을 취재하는 데 열을 올렸었던 것이라, 소설을 쓴다고는 하지만 결코 유명인은 못 되는 내가 어떻게 되어서 그 대상 중의 하나에까지 기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군청까지 있는 읍내니까 시골은 시골이라도 감히 전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은 못 되는데 잡지사에서 다녀간 한 달 후 또 신문사에서도 다녀갔다. 산을 배경으로 한 나의 전신 사진과 함께 원고지 네댓 장 분의 기사까지 곁들여 실려 나온 것이다. 기사는 나의 신변 이야기와 함께 내가 잡지에 쓴 일이 있는 전원에세이 중 다음 귀절에서 몇 마디를 요약해 쓰고 있었다.
“내가 서울을 떠난 건 스스로 떠난 게 아니라 떠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다가 어쩔 수 없이 밀려나고 만 것이라는 게 오히려 더 솔직한 표현이 될 것이다. 일의 터전이 없다거나 집 한간 마련할 수 없다거나 하는 외형적인 문제가 아니라 다방엘 가도 술집엘 가도 구석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는 내 의식으로는 도저히 더 이상 버텨가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젊어 덮어놓고 살 때는 잘 몰랐는데 이것저것 생각해 가며 살 나이가 되자 그야말로 미칠 것 같았다. 눈에 들어오는 사물 하나하나, 귀에 들리는 소리 따나하나, 의식을 건드리는 현상 하나하나가 모두 고문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좀 과장해서 말하면 결국 나는 미치지 않기 위해, 또는 이미 미쳐버린 나를 다스리기 위해 서울을 떠나와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확실히 신문이란 묘한 힘을 가지고 있는 물건이었다. 이 기사가 신문에 나가자마자 나한테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수십 통이나 되는 편지가 날아든 것이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별별 이상스런 내용의 사연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렇게 경치 좋은 곳에 사시면서 소설만 쓰신다니 얼마나 행복하시냐, 언제 한번 찾아가 뵐 테니 많은 도움을 주시기 바란다------
선생님의 소설집을 사려고 책방을 뒤졌으나 이곳에선 한 권도 구경할 수가 없었다. 구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라---
앞으로 저도 소설을 써 보고 싶은데 현재로선 편지 한 줄 제대로 못 쓰고 있다. 선생님께서 문장 지도를 좀 해 주실 수 없겠느냐---
신문에 난 사진을 보니까 굉장히 미남이신 것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그늘이 져 있어 보였다. 어디가 아프시거나 또는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어 숨어 사시는 게 아니냐,,,,,,
미친 병을 앓으신 적이 있다면서 요즈음은 괜찮으시냐, 저도 실은 육 개월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앞으로 대화나 나누고 싶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런 편지들이 날아든 건 어쩌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너절너절한 편지들 속에 대학교 때 은사이신 성 준식 교수님의 편지까지 끼여 있다는 건 정말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성 교수님의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
최군
신문에 난 자네 기사 읽었네. 자네가 그런 전원에 살고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네.
나는 정년퇴직을 한 후 집에서 줄곧 쉬어오고 있네. 언제 그곳이나 한번 방문해 볼까 하니 차편(車便)과 상세한 약도를 그려 보내 주게.
건투을 비네.
1980년 5월 24일
성 준 식
편지라기보다는 무슨 사무 서식 같은, 그렇게 간단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지만 나는 그 편지를 읽고 나서 뒤통수를 크게 한번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원래 사람됨 자체가 게으르고 칠칠치 못해서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 못하고 살아온 거야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성 교수님으로 하여금 스스로 이런 편지를 보내오시게까지 하다니, 그러고 보니 학교 졸업 후 십 사오 년이 지난 이제까지 내가 성 교수님을 찾아뵌 건 불과 서너 차례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도 졸업 직후 몇 년간, 처음엔 직장을 알선 받기 위해, 그리고 나중엔 직장을 알선해 주신 것이 고마와서 설날 같은 때에 세배를 드리기 위해 찾아뵌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성 교수님의 추천으로 나는 어떤 잡지사에 취직을 했었으나 병고와 실의, 삶에 대한 회의와 절망 등등 누구나 한때 당연히 치를 수밖에 없는 홍역 때문에 곧 그만두고 잠적해 버렸었다. 서울에 살긴 살면서도 아무런 직장 없이 월셋방에만 숨어살면서 지금의 아내가 된 여자뿐 거의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지금의 아내가 된 여자는 그 당시 내게 있어 말 그대로 구원의 여자였었다. 직장을 나가 번 돈으로 내게 월셋방을 얻어 주고 밥을 먹여 주었으며, 한번 기도했다가 실패한 자살을 계속 꿈꾸던 내게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일깨워 주었다. 그렇게 되니까 자연히 성 교수님이라는 존재는 내게 있으나마나 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아니, 내가 그 뒤 성 교수님을 한번도 찾아 뵙지 않은 것은 성 교수님이 내게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려서였다기보다 웃어른을 찾아가 인사드리는 일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나의 천성적인 게으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성 교수님한테는 그분이 애써 알선해 주신 직장을 스스로 그만두고 떳떳하지 못한 삶을 사는 자신이 염치없어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소설 나부랑이를 써 문단이며 세상에 이름을 내민 후에도 나는 한번도 찾아 뵙지 않았다. 찾아 뵙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두세 권의 소설집을 출간하고서도 소설집 한 권 보내드리는 성의조차 보이지를 않았다. 그래도 몇 년 전까지는 대학시절의 추억과 함께 이따금 문득문득 떠올리며 그분의 안부에 대해 마음속으로나마 궁금해한 적이 있었지만 근래에 와서는 그런 예의조차 갖추지를 못했다. 이제까지의 모든 다른 스승이나 마찬가지로 내게서 이미 까마득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뜻 아니한 편지를 받고 나니 그야말로 죽어 있다던 사람을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난 기분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꽤 길게 답장을 샜다. 그 동안의 나의 그릇됨과 몰예의에 대해 누누이 사죄의 뜻을 밝히고, 기다릴 테니 꼭 찾아오시라는 간곡한 당부와 아울러 차편과 상세한 약도를 그려 드렸다. 그러고 나서 일주일이나 지났을까 어느 화창한 날 오후에 불쑥 들이닥쳤다. 그날 따라 이상하게 더 글이 써지질 않아 오전 내내 책상 앞에서 끙끙거리기만 하다가 입이 깔깔하여 마루에 나와 점심 대신 막걸리로 혼자 목을 축이고 있던 중이었다. 첫눈에 봐도 성 교수님이 틀림없는 노신사가 열려진 대문 안으로 들어서며,
"말씀 좀 묻겠소. 이 집이,,,,,,"
라고 말하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학문의 깊이만큼이나 두꺼운 안경알 저쪽의 눈을 경련하듯 깜박거렸다.
"선생님, 접니다. 제가 최군이에요."
"오, 그렇군. 많이 변했는데,,,,,, 거리에서 만나면 잘 몰라 보겠어."
"선생님은 그대로시군요. 조금도 변하시지 않은 것 같아요."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첫눈에 알아볼 수야 있었지만, 성 교수님은 성 교수님이 나를 보고 느끼는 것 이상으로 많이 변해 있었다. 우선 얼굴의 주름살이며 백발이 처량하게 느껴질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옛날보다 더 바닥 야윈데다 살결도 고목 껍질을 연상시켰다. 손도 아직 따뜻하긴 했으나 이미 옛날에 잡아 본 손은 아니었다.
"열무김치에 막걸리라,,,,,,이곳에 오니까 확실히 다르긴 다르구먼. 여긴 막걸리 맛이 괜찮은가?"
"네, 좋아요. 선생님도 한 잔 하시겠어요?"
"아냐, 아냐. 요즈음엔 술이 조금 들어가면 운신을 못해. 더우기나 낮엔,,,,,"
아내로 하여금 인사를 드리게 하자 성 교수님은 아내에게 과자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최군을 만나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구먼. 애는 몇이나 두었소?"
"하나예요. "
"아들 ? "
“네."
"학교에 갔나?"
"아녜요. 이제 다섯 살이에요. 근처 어디 놀러 갔나봐요."
아내가 씻으시라고 세숫물을 떠다 내놓자 성 교수님은 들고 온 가방에서 부시럭 부시럭 세면도구들을 꺼냈다. 잠깐 다셔갈 계획치고는 가방이 왜 커 보였다. 세면도구들 외에 옷가지며 책 같은 것들을 넣어온 것 같았다. 성 교수님이 상의를 벗고 세수를 하는 동안 아내는 밥을 짓고 나는 방을 치웠다. 방이 두 개밖에 없으므로 내가 쓰는 방을 치워드릴 수밖에 없었다. 방의 꼴이 우스워 치우나마나 그게 그거였지만 책상으로 대용해온 호마이카 상위의 원고지들이며, 널려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책들을 대강이나마 정돈시켜 놓고 먼지를 쓸어내었다, 그러나 성 교수님은 세수를 하고 나더니 내가 쓰는 방에는 들어와 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 근처 민박할 데 있겠지?"
"민박을 하시다뇨? 저희 집에 계시죠 뭐."
"그럴까 했는데 와 보니 그렇게 되어 있지를 않구먼."
"물론 누추합니다만,,,,,,"
"누추한 게 문제가 아니라 방이 없지 않나? 둘밖에 없는 것 같은 데 내가 한 방을 차지해 버리면 자네는 어디에서 글을 쓰겠나?"
"그 점이야 염려 마세요. 글을 많이 쓰지 않으니까 안방에서 써도 상관없어요."
"아냐, 아냐. 그래선 안 되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나는 여기보다 좀더 조용한 곳에 있고 싶구먼. 산 속 같은 데가 좋겠어. 그런 마땅한 집 없을까?"
"오래 계시게요?"
"글쎄, 지금 계획으론 있기 싫을 때까지 있고 싶은데---"
"뭘 집필하시려구요?"
"뭐 그런 것은 아니고,,,,,,그냥 쉬더라도 어쨌든 산 있는 데가 좋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성 교수님이 우리 집에 있지 않으려는 게 꼭 우리한테 신세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만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민박 숙식비를 우리가 대신 내드리더라도 성 교수님이 마음에 들어하는 방을 구해 드리는 것이 옳은 처사일 것 같았다.
아내로선 시장까지 다녀와 성의를 다해 점심상을 차렸으나 성 교수님은 뜨는 둥 마는 둥 했다. 밥 두세 숟갈과 국물 몇 모금을 삼키기도 힘이 드는 듯 그는 몇 차례나 이마의 땀을 닦아내었다. 아니 처음엔 이마의 땀을 닦아내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얼굴에 땀이 전혀 배어 있지 않은데도 그는 손을 이따금 얼굴에 가져갔다. 땀을 닦아낸다기보다 얼굴에 붙어 있는 무엇을 잡아 뜯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옛날엔 볼 수 없었던 묘한 버릇이었다. 상을 물리고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그 동작은 신경을 거슬리기에 충분할 만큼 반복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분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그 당장엔 물어 볼 수조차 없었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그분이 원하는 대로 산 속 민가에 방을 얻어 주고 나서 며칠이 지난 후 그 집의 주인 아주머니를 통해서였다.
"거머리 때문이래요. 얼굴에 자꾸 거머리가 달라붙어 근질거리고 뜨끔거려 견디지를 못 하겠대요."
주인 아주머니는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외에도 성 교수님에 대해서 나로선 미처 모르고 있었던 몇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캄캄한 밤에 혼자 무덤 앞에 넋이 나가 있는 것처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계속 멍히 서 있는 일이 많으며 사소한 주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도 얼핏하면 어린애처럼 눈물을 글썽거린다는 것이었다. 그 집에 숙소를 정하던 날 밤의 일이었다고 한다. 바깥주인이 밖에 나갔다가 늦게 들어와 인사를 나누려고 보니 그분이 보이지를 않았다. 방에 없어 변소며 약수터며 서낭당 등 갈 만한 곳을 다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낮에 먼 길을 오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잠자리에 들 시간인데 도대체 어디를 갔단 말인가. 나이가 많은 데다 익숙치 못한 지역이라 어둠 속에 발을 헛디뎌 어디 골짜기로 굴러 떨어지기라도 한 것이 아닐까. 바깥주인은 덜컥 겁이 나 그분이 갈 만찬 전혀 엉뚱한 곳까지 찾아 헤매었다. 플래시를 가지고 골짜기는 물론 우거진 나무숲까지 일일이 비춰 보았다.
그리하여 결국 찾아냈는데 어이없게도 그분은 산등성이에 있는 무덤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던 것이다. 그 광경이 눈에 들써오자 바깥주인은 반가움은커녕 등골이 오싹했다. 그 무덤이 그분과 관계가 있는 무덤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이상 귀신에 홀리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바깥주인이 플래시를 비추며 여기서 무엇하고 계시냐고 하자, 아무렇지 않은 듯이 돌아서며, 주위가 하도 좋아 바람을 쐬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밤중에 하필 남의 무덤 앞에서 그러세요?"
"왠지 무덤이 좋아 보이는구료."
"네에 ? 무덤이 좋아 보이다뇨?"
"왜요? 이상하오? 나도 무덤으로 갈 날이 멀지 않아서인 모양이죠."
"핫, 선생님도,,,,"
“좋아 보이지 않더라도 좋아해 보려고 애를 써야 되겠죠."
웃어넘기기엔 너무나 점잖은 어조로 말을 해 바깥주인은 웃지도 못했지만 그분은 그 짓을 그날 밤으로만 끝내지도 않았다, 낮이나 밤이나 집에 없을 때 찾아보면 대개 무덤 부근에서
그렇게 넋이 나간 것처럼 멍히 서 있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하루는 마루에서 주인 내외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금 비참한 이야기가 나오자, 쯧쯧 혀를 차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산밑 굴속에서 문둥이 여자가 누구의 애인지도 모르는 갓난애를 혼자 낳아 키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랬고 지난봄에 그 산에서 여중학생 하나가 유린 살해된 사건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랬다는 것이었다.
주인 아주머니로부터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나는 한편으로는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고개가 갸웃거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가 들게 되면 사람은 자연히 육체만이 아니라 의식까지도 변하게 마련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옛날의 성 교수님을 생각하면 도무지 상상조차 가지 않은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사소한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글썽거린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이해하는 입장이 되려고 해도 웃음밖에 나와지지 않았다,
대학교 때 성 교수님은 다른 과목을 맡았던 것도 아니고 서양 철학을 맡았었다. 중학생만 되어도 그 이름 을 알 수 있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도 막상 이해해 보려고 접근해 보면 웬만한 의식을 가지고선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첫줄부터 어리둥절해지는 서양의 그 많은 철학자들이며 사상가들 -칸트, 헤겔, 쇼펜하워,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등등을 사상은 물론 혈통까지, 또는 취미며 좋아하는 음식까지 속속들이 주워꿰고 있는, 자기 친구들처럼 들먹이며, 인간과 신, 삶과 죽음, 사랑과 증오, 자유와 구속, 지배와 굴종, ,,,을 자유자재로 이야기했던 그분이었다. 그러니까 그분은 적어도 사십 년 이상을 인생에 대해서 학문적으로 깊은 연구를 해온 누구보다도 냉철한 이성과 뛰어난 지성을 갖춘 학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분이 체신 없이 어떻게 무덤 앞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죽음에 관해 그렇게 유치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며 한 방울의 눈물인들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보일 수 있단 말인가. 막연히 추상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그분은 얼핏 납득이 안 갈 정도로 냉철한 면을 내 앞에서 보인 적이 있었다. 문학병과 함께 광기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고질적인 병이 가장 나를 괴롭혔던 대학교 삼 학년 때의 일이었다. 세상에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조금도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고, 내가 온갖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선 오직 죽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그 무렵 어느 날 성 교수님과 과우들 몇몇과 함께 술집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술자리에선 대개 그랬듯이 그날도 나는 너무나 폭음을 한 나머지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 무슨 이야기 끝엔가 나는 성 교수님의 이야기에 비아냥거리는 투의 반발을 하다가 끝내는 유리잔을 벽에 던져 깨뜨리며 소리쳤다. 분명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당신이 교수면 다냐 교수라는 게 별것인 줄 아느냐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아니 나는 기억을 잘 할 수 없었는데 함께 앉아있었던 과우들 이야기를 들 으니 그랬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술에 취하면 모두가 다 개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하지만 실수라도 너무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성 교수님은 화를 내기는커녕 껄껄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는 것이었다.
"오늘 보니 최군에게도 아주 소중한 면이 있군. 광기, 천재들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광기가 있어."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성 교수님이 그자리에서 그런 태도를 보였다고 해서가 아니었다. 이튿날 잘못을 빌기 위해 그의 집으로 찾아가자 그분은 딱 잡아뗐던 것이다,
"뭐라구? 최군이 내 앞에서 실수를 했었다구? 실수라니, 무슨 실수 ? 모르겠는데,,,,,,나도 워낙 취해 있어서 모르겠어, 도무지 기억이 나지를 않아."
물론 거짓말이었겠지만, 그런 거짓말로써 제자의 체면을 세워 줄 수 있는 사실부터가 그분이 남달리 냉철한 이성을 갖지 않은 이상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서양철학을 담당하고 있는 우리 과의 교수라는 것뿐 나와 아무런 특별한 관계에 있지 않았던 성 교수님을 내가 다른 교수들과 좀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사건이 있고 나서부터였다. 교수들의 연구실을 드나드는 일을 벌을 쓰는 일만큼이나 싫어했던 내가 그분의 연구실을 아무렇지 않은 듯이 자주 드나들게 된 것도 그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분의 연구실을 드나들기 시작한 후 나는 또 한번 씻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분의 연구실엔 나 외에도 몇 학생이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자주 드나들었던 학생 중에 오 혜리라는 여학생이 있었다. 한마디로 학생답지 않게 성적 매력이 철철 넘치던 애였다. 살결이 곱고 몸매도 알맞게 빠진 데다 옷차림이며 말씨며 동작들이 그렇게 세련되어 보일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나보다 한 학년 후배였는데 그 애를 두고 학생들간에 말이 여간 많지 않았다. 남자관계가 이만저만 복잡한 여자가 아니라는 둥 밤에 술집에 아르바이트를 나가는 여자라는 둥 심지어는 성 교수님과의 사이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이야기조차 떠돌았다. 돌이켜보면 낮이 뜨거워지는 이야기지만, 나는 어느 날 그 여자를 한번 건드려보고 싶다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했다. 아니 솔직이 말하자면 생각은 불순하지만 그것이 나한테는 일종의 사랑의 감정 비슷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면서도 그 무렵 나는 누구에게 진실한 사랑이라고 할 만한 걸 쏟을 만큼 정신이 건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비꼬인 감정을 가졌던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어쨌든 한번 건드려 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기회를 노리다가 어느 날 나는 그 기회를 잡게 되었다.
축제 때라 대낮에 술까지 취해 있었는데 성 교수님의 연구실에 가 보니 성 교수님은 계시지 않고 그녀가 혼자 앉아 있었다. 아무리 그녀 혼자 앉아 있었다고 해도 물론 술에 취해 있지 않았다면 나는 그런 짓은 감히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그런데 술에 취해 있는데다 잔뜩 축제 분위기에 들떠 나는 순간적으로 발작 비슷한 걸 일으켰다. 미친놈처럼, 거리의 치한처럼 또는 먹이를 본 굶주린 맹수처럼 느닷없이 그녀에게 달려든 것이다.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자 그녀가 눈을 똥그랗게 뜨며 발딱 일어섰는데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억세게 끌어안으며 키스를 퍼부은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즉각 무슨 영화 속에서처럼 내 뺨을 후려치는 반응을 보여왔다. 뿐만 아니라 아주 노골적으로 치욕적인 빛과 함께 울그락불그락 분노의 감정을 감추지 못하며 뛰쳐나가더니 그 당장 학생과에 가 사실을 이야기해 버렸다. 그 결과 나는 무기정학을 당했고, 그것이 세상을 살고 싶지 않다는 평소의 내 고질적인 병을 한층 더 악화시켜 끝내는 자살 미수소동까지 벌이는 추태를 보였다. 장소를 산의 계곡으로 택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술을 마시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계곡으로 찾아가 동맥을 끊은 팔목을 흐르는 물에 담근 채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핏물 때문에 등산객들한테 발각이 된 것이었다. 과우들과 함께 병원에 나타난 성 교수님은 내게 아무 말도 없이 미소만 크게 지어 보였다. 아니, 처음엔 아무 말도 없다가 한참 후에야 말했다.
"어때? 지금 생각은? 지금도 죽고 싶나?"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눈물만 글썽거리자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주며 다시 말했다.
"그럼 됐어. 나중에 퇴원한 후 이야기하자구."
퇴원을 하고 나서 보니 나의 무기정학 징계가 풀려 있는 건 물론 오 혜리라는 여학생으로 하여금 연구실의 출입을 제한시켜 놓고 있었다. 과우들 이야기가, 성 교수님이 나보다도 오히려 오 해리를 더 나쁘게 이야기하며 출입을 삼가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남자가 아무리 예의에 벗어나는 행위를 보였다고 해도 같은 분야를 공부하는 학교의 한 선배인데 그 정도를 감싸주지 못하고 고발해 징계를 당하게 할 만큼 비정한 여자라면 여자로서 가장 소중한 면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 교수님은 나를 만나자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자살이라는 것에 대해서만 잠깐 이야기했다.
"나도 최군만한 나이 때 자살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봤었지. 최군만큼의 용기는 없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그 무렵엔 어느 하루 죽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 본 일이 없었어. 그런데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그것이 일종의 병이었던 것 같아. 의식이 깊어 있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고 애쓰다 보면 자연히 앓게 될 수밖에 없는 병. 상식적인 말이지만 그런 말들 흔히 하지 않아? 죽을 수 있는 그런 각오로 살려고 애를 쓴다면 어느 누구에 못지 않게 부러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물론 그렇게까지 살려고 애를 써야 할만큼 과연 삶이 가치 있는 것이냐고 물을지 모르나 가치가 있고 없고 문제를 떠나서 주어진 삶을 애써 살아
야 되는 건 이성을 가진 사암으로선 하나의 예의일 것 같거든."
성 교수님이 이곳에 와서 생활하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났다. 우리 집에서 모시고 있지 못한 이상 예의를 차리자면 아침이든 저녁이든 하루에 한번씩이라도 찾아가 문안을 드려야 옳겠지만 역시 천성적인 게으름 때문에 나는 전혀 그러지를 못했 다. 아내로 하여금 밑반찬이며 세탁물 같은 것이나 보살펴 드리라고 말한 후 나는 열흘 동안 두 차례, 그것도 잠깐 들어다보며 인삿말을 건네고 오는 정도에서 그쳤다. 술을 드시는 때라면 술이나 대접해 드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고 하지만 그렇지도 못하니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어쩌다가 무슨 말을 물어도 그전처럼 열을 내어 대답을 해주지 않고 어물어물 흐리멍덩하게 넘어가는 일이 많아 별로 묻고 싶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전혀 엉뚱한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자주 멍한 얼굴을 보였다. 거기다가 얼굴에서 거머리를 잡아내는 그 행동을 신경에 거슬릴 정도로 하는 통에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밑반찬을 가지고 그분한테 다녀온 아내가 웃음을 앞세우면서 말했다.
"참 이상해요."
"뭐가?"
"교수님 말이에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어린애가 된다더니 정말인가 봐요. 아, 글쎄 가방 속을 보니까,,,,,, 훗훗훗."
아내는 한차례 더 웃고 나서야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세탁을 해 주려고 세탁물을 찾으니 내놓은 게 하나도 없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빨아 주었는가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주인 아주머니 역시 빨아 주고 싶어도 내놓지를 않아 못 빨아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래 아내가 별수 없이 가방 속까지 뒤져 세탁물을 꺼냈는데 꺼내면서 보니 그 속에 이상한 책들이 있더라는 것이었다.
"이상한 책이라니?"
"홋홋홋."
"왜 ? 플레이보이지 같은 게 있었던 모양이지?"
"플레이보이지라면 괜찮게요. 플레이보이지야 당신도 잘 보지 않아요?"
"하하 이 여자, 사람 잡을 사람이군. 내가 언제 그런 걸 봤어 ?"
"그전에 봤지 않아요? 친구가 보는 걸 빼앗아 왔다고 해놓고선."
"그랬었나? 어쨌든 그렇다고 하고, 그래 가방 속에 무슨 책이 있었단 말이야?"
"만화들이 들어 있지 않아요?"
"만화?"
좀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나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그게 어때?"
"그게 어떻다뇨? 우습지가 않단 말이에요?"
"요즈음엔 만화도 예술이라고 떠드는 판인데 뭐. "
"그런 만화들이 아니라니까요. 누가 뭐 외국의 뛰어난 만화가들이 그린 만화 말하는 줄 알아요? 아주 유치한 만화들 있지 않아요? 우리나라 저질 만화들,,,,,,"
"성인용?"
"성인용만이 아니라 애들 보는 것도 있더라니까요. 한두 권이 아녜요"
"그런 것들을 왜 가지고 계실까? 손자들 주려고 산 거겠지."
"참 당신두, 손자들 줄 것을 서울에서 사 가지고 내려와요? 주인 아주머니 이야기가 교수님이 꺼내서 가끔 보시더래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잘 잡혀지지가 않았다. 물론 깊은 의식을 가진 가람들이 휴식의 한 수단으로서 상대적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행위나 또는 사물을 택하는 경우는 없는 건 아니다. 가령 누가 봐도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술집에 가서 작부들과 유치한 음담을 아무렇지 않게 즐기는 것도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옛날의 성 교수님을 생각하면 성 교수님과 만화란 아무리 두들겨 맞춰 보려고 애를 써도 맞춰지지가 않았다. 외국에 가서 생활한 적이 있어 그 사이 그런 습성이 몸에 배어버린 것인가, 나야 외국을 다녀오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프랑스 같은 데선 과연 예술이냐 아니냐로 논쟁을 일으킬 만큼 차원 있는 만화들을 차 속에서나 어디서나 신사숙녀들이 다반사처럼 즐겨 읽고 있다고 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렇다면 외국어에 능하니까 그런 차원 있는 외국 만화를 한 권 정도 가져올 수 있는 노릇 아닌가. 그런데 아내가 보기에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저질 만화를 한두 권도 아니고 여러 권씩 가지고 왔다는 건 무슨 이유인가. 어디 만화 협회 같은 회의 심의 위원이라도 되어 윤리 심의 같은 것이라도 하고 있는 중이란 말인가. 따지고 보면 구태여 갖지 않아도 좋을 궁금증이었으나 매사에 그렇듯이 나는 지나칠 정도의 궁금증에 사로 잡혀 있다가 드디어 어느 날 그것을 물어 보고야 말았다. 성 교수님이 묵고 있는 산동네에서도 불과 1킬로미터 남짓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저수지에 낚싯대 두 개를 드리워 놓고 함께 시간을 가지며 물어 보았던 것이다. 주로 낚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불쑥
"선생님께서도 만화를 보신다면서요?"
라고 묻자 성 교수님은 화들짝 놀라는 얼굴로 돌아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 나라고 해서 만화를 보면 안 되겠나?"
"안 되실 거야 없겠지만 좀 이상하게 느껴져요."
"이상하게? 어째서 그럴까? 철학교수였었으니까,,,,,,? 그래서 실망을 했다는 이야기군?"
"실망을 했다기보다 무슨 이유가 있으실 것 같아요. "
"이유? 글쎄, 이유야 재미가 있으니까 보는 거겠지. 최군은 만화를 보지 않는 모양이군? 소설을 쓰는 사람이 만화를 보지 않아서야 되나?"
“……”
"최군이 낸 책들은 잘 팔리나?"
"아뇨. 죄송해요, 선생님. 책을 펴내고서도 보내드리지 못해서, 실은 별로 떳떳이 내놓을 만한 책이 되지 못해서,,,,,,"
"아, 그거야 상관없는 일이고,----,사서 봤으니까 마찬가지지. 그런데 역시 안 팔리게 생겼더군. 소설도 만화처럼 쓰면 잘 팔릴 텐데 말이야. "
“……”
"출판사 사람이 그러더군. 요즈음엔 만화밖에 팔리는 것이 없다고 ..,.,내가 부끄러운 이야기 하나 할까?"
성 교수님은 한동안 침묵했다. 낚시의 찌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으나 찌를 보고 있는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눈이 어두워 안 보여서 그런지 몰라도 찌가 까땍거리는데도 전혀 낚아챌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애초부터 고기를 잡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도 아닌데 내가 대신 낚아챈다는 것도 우스워 그냥 보고만 있자 성 교수님이 말을 이었다.
"옛날 우리 선친은 자기 생전에 자기 책을 스스로 내는 일을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씀하셨었지. 아마 그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최군도 알다시피 나는 소위 학문을 연구한다는 사람이 삼사십 년 연구 기간 동안 한 권의 책도 내지를 않았거든. 논문이라고 해서 여기저기 발표한 것들이야 대여섯 권의 분량이 되기는 하지만 책을 내는 일이 어쩐지 쑥스러웠던 거야. 글답지도 않은 글들을 여기저기 발표한 것도 마지못해 찬 일인데 그걸 무슨 대수로운 것이라고 묶어서까지 내 부끄러움을 자초하겠어? 그런데 나이를 먹게 되니가 사람이 추해지
“……는 모양이야. 왠지 모르게 자꾸 허전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도대체 한 일이 무엇인가를 결산해 보니까 너무 허전해 견디지를 못하겠어, 그래 그 허전함을 조금이라도 메우고 자신한테라도 한 일이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기 위해 초라한 대로나마 한 권의 책이라도 내야 되겠다고 결심했지.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성 교수님은 어디를 앓고 있는 환자처럼 말을 하기도 힘이 드는지 다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숨을 한번 몰아쉬고 나서 한참 후에야 말했다.
"출판사에서 내 책 같은 책은 제작비를 내가 부담하지 않으면 내줄 수가 없다는 거야. 팔리지 않을 게 빤한데 적자 볼 줄 알면서 그냥이야 어떻게 내줄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었어. 그러면서 그러는 거야. 요즈음엔 학술서적이야 말할 것 없고 소설책도 여간해선 안 팔리고, 팔린다는 게 고작 만화들 정도라는 거야. 나쁜 책들만 내는 삼류 출판사라면 또 모르겠어, 그런데 그게 아니고 국내에서 몇째를 다투는 큰 출판사거든. 과거에 학술 서적들도 많이 냈고,,,,,, 그런데 알아보니 그게 거의가 다 자비 출판들이야. 웃음이 나와 그 잘 팔린다는 만화들 좀 보자고 했지. 그랬더니 내주더군. 그래서 읽어보니까 재미가 있어. 심오한 철학서에 못지 않은 철학이 바로 그 속에 있는 거야. 가령 최군도 읽었을 거야. 마키아 벨리의 <군주론(君主論))>. 1513년에 발표되었으니까 벌써 4, 5백 년이 지난 셈인데 아직도 한층에선 탄핵을 받고 있는 글이지. 인간의 약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목적을 달성할 필요가 있다는, 그러니까 악덕이라도 필요하면 좋은 것이라는 주장인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것을 탄핵한 군주들일수록 더 많이 그것을 이용해 먹은 일이지. 그런데 어떤 성인 만화를 보니까 그와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가 있어. 그 만화가가 누군지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아주 놀랄 만해. 그렇게 되니까 뭐가 뭔지 어리둥절해지더군. 그 많은 철학자들이 연구해 온 철학은 물론 이제껏 내가 생애를 바쳐 연구해 온 학문이라는 게 한 편의 만화보다 더 못한 것 같은 느낌조차 드는 거야. 도대체 사람에게 있어서 머리 아픈 학문이라는 게 왜 필요한 것인지 그런 국민학생 같은 회의까지 새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지."
물가에 앉아 있어 물의 장력에 취하기라도 한 것인가. 성 교수님의 의식이 아가보다 약간 젖어 있는 듯이 보였다. 격해지기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옛날의 강의시절을 떠오르게 할 정도로 억양에 힘이 생겨나 있었다. 마키아벨리에 대해서는 대학시절에도 열강을 한 적이 있었다. '짐은 인간성을 망가뜨리려는 괴물에 대해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서 일어났다. 짐은 궤변과 죄악에 대해 이성과 정의로써 대결할 것이다. 짐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해 장마다 반론을 펴놓았다'는 투의 서문과 함께 (반마키아벨리론)을 쓴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가 실은 당시의 정치가들 중에서 마키아벨리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히 실천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었다. 내가 미처 할말을 생각해 내지 못한 채 엷은 웃음만 웃고 있자 성 교수님은 혼잣말처럼 절망적으로 말했다.
"아무리 알다가도 모를 게 인생이라고 하지만 정말 뭐가 뭔지 갈수록 모르겠어."
성 교수님으로서는 그냥 가볍게 토해 놓은 말인지 모르나 나한테는 보통 충격적인 말이 아니었다. 사십 년간이나 인생에 대해서만 학문적으로 연구를 해 온 분이 인생을 모른다면 도대체 그 누가 인생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이날 나는 성 교수님에게 더 많은 것들, 가령 요즈음의 집안 생활은 구체적으로 어떠한지부터 물어 보고 싶었으나 자칫하다간 괜히 심사만 산란케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 같아 가능한 한 참았다. 그런데 며칠 후 서울에 살고 있는 성 교수님의 따님이 나를 찾아옴으로 해서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성 교수님과 함께 고기는 한 마리도 잡지 않은 낚시를 하고 돌아온(알고 보니 낚시를 하자고 한 나의 제안부터가 잘못이었다. 그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어도 찌는커녕 낚싯대 끝도 안 보일 정도로 시력이 나쁘다고 했다) 그날부터 나는 이상하게 몸살기 같은 게 느껴져 자리에 누워지내다시피 했다. 씌어지는 원고보다 파지가 훨씬 더 많은, 그 알량한 쓰는 행위마저 완전히 중단한 채 누워서 잡지나부랑이나 펼쳐 보고 있었는데 지난번 성 교수님이 우리 집에 찾아왔을 때나 비슷한 시각에 따님이 찾아왔던 것이다. 낮이 익다는 것뿐 처음엔 기억이 잘 나지 않았으나 스스로 성 교수님 이야기를 꺼내는 통에 곧 알 수 있었다. 아내 나이 또래이면서도 아내보다는 훨씬 여자 냄새를 짙게 풍겼다. 지상을 통해 나를 자주 뵈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녀는 그 동안 아버님을 보살펴 주셔서 고맙다고 말했다.
"저는 최 선생님 댁에 함께 계시는가 했는데 그렇지 않으시다니 다행이군요. 함께 계셔 글 쓰시는데 방해가 되면 어떻게 해요? 아버님이 옛날 같지 않으시고 요즈음엔 많이 달라지셨거든요. 학교에서 명예 교수직을 주겠다고 해도 마다 하시고 이러시는 거예요. 아마 평생 동안 학자 노릇 해오신 걸. 후회하시나 봐요."
따님은 여러 가지 구구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머니가 재작년에 돌아가시고 아들 내외는 미국에 가 살고 있으며 자기는 결혼해 시집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아버님은 현재 혼자 살고 있는데 가정부를 얻어 드려도 당신 스스로 내보내시고 혼자 사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들 내외가 미국에서 오시라고 초청장까지 보내왔는데도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이 마당에 그곳에 가면 뭘 하겠느냐면서 안 가셨다는 것이었다. 또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별로 그러시는 것 같지 않았는데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죽음에 대해서 부쩍 많이 생각하시는 것 같다고 했다. 텔리비전 같은 걸 보시면서도 눈물을 흘리시는 일이 많고 밤에 주무시지 않을 때도 불을 끈 채 어둠 속에 앉아 계시는 일이 많으며 지난번에 죽은 친구를 꿈에 보았는데 어떤 꼴을 하고 있더라는 등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는데도 누가 찾아온 것 같으니 문을 열어보라는 등 당신이 죽으면 관에 넣지 말고 수의만 입힌 채 묻되 염포로 묶는 짓을 하지 말라는 등의 엉뚱한 이야기를 자주 하시곤 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바람이나 쐬러 가게 애 아빠랑 함께 나오라고 하더니 산으로 데리고 가 엉뚱하게 남의 집 산역(山役)하는 광경을 보여 주시더라고 했다.
"평소에 우리에게 사람은 삶 못지 않게 죽음도 깨끗한 죽음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거든요. 그래서 그러시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아마 이곳에 와 산에 계시는 것도 죽음에 대한 어떤 연습을 하시기 위해서인지도 돌라요. "
죽음에 대한 연습이라는 말이 우습게 들렸으나 나는 웃지 않았다. 자살미수사건 소동을 벌였었던 옛날의 나를 잠깐 떠올렸을 뿐이었다. 아니 내 주변에서 죽어간 몇몇 사람들의 죽음을 떠올렸을 뿐이었다.
따님은 가능하면 아버님을 모시고 갈까 하고 왔다고 했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다. 따님 말대로 정말 죽음에 대한 연습을 하는 것인지 어떤지 아무런 하는 일도 없는 것 같은데도 성 교수님은 따님이 떠난 후 일주일 가량이나 더 있다가 떠나갔다. 떠나가는 날 버스터미널에 가서 버스 표를 끊어드리자 성 교수님은 얼굴에서 거머리를 잡아내는 그 동작과 함께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내가 살 걸 그랬어. 늙은 사람들 표는 함부로 끊어주는 게 아냐. 이 표가 저승으로 가는 표가 되면 어쩌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좀 이상하긴 했으나 그래도 나는 그것이 단순히, 비록 몇 푼 되지 않는 돈이라고 해도 나로 하여금 그것을 쓰게 한 것이 미안해서 그런 것으로만 가볍게 생각해 버렸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나는 불과 닷새 후에 알았다. 성 교수님이 묵고 있었던 집의 우인 아주머니로부터 성 교수님이 이곳을 떠나가기 전날 만화책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는 소리를 듣고 혼자 미소를 지었는데, 바로 그때 서울로부터 병사인지 횡사인지 자살인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성 교수님의 부음(訃音)이 날아들었던 것이다.
최창학(崔昌學: 1941- )
전북 익산 출생. 고려대 국문과 졸업. 1968년 중편 <창(槍)>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하여 등단함. 서울 예전 문예창작과 교수. 그는 현실 속에서의 삶의 왜곡과 훼손의 실상을 밝힘으로써 존재의 자아 상실을 그려내는 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적(敵)>, <긴 꿈속의 불>, <먼 소리 먼 땅>, <형>, <도예가의 마을>, <물을 수 없는 물음들> 등이 있다.
작 은 부 르 짖 음 속 의 숨
최창학
막걸리로 보충하는 피팔이의 피에 관하여
떠올리기조차 끔찍하지만, 우리는 첫애를 두 돌도 채 넘기지 못하고 병명조차 정확치 않은 악성병으로 잃었다. 병원마다 진단이 다르게 나오는 그 이상한 병으로 결국 대학병원에 입원한 지 열 여드레만에 죽은 것이다, 입원해 있는 동안 마누라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나로서도 한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고역을 겪어야만 되었다. 암이라든가 백혈병이라든가 매독 같은 것 말고도 그렇게 무서운 병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었다. 한쪽 코에 산소통과 이어진 호스를 끼고, 이마에 링겔병과 이어진 바늘을 꽃은 채 얼굴이 온통 반창고 투성이가 되어 새파랗게 굳어진 몸을 어린것은 바르르 바르르 바르르 계속 떨었다,
그 옆에서 우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걸 지켜보면서, 숨이 멎으면 의사나 간호원에게 알려 입의 오물을 빼내 주거나 심장 마사지를 시켜 회생시키곤 했다.
바로 그 무렵의 일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직장을 쉴 수는 없어 나는 점심 시간과 밤 동안만 거기에 가 있었는데, 한여름이었기 때문에 일 년 중 정초 때 말고 꼭 한차례 있는 며칠간의 휴가가 마침 그 때 주어져 그 휴가 기간 동안에는 줄곧 있게 되었다. 병원에서 밥을 한 그릇씩만 주었으므로 마누라가 그걸 먹고(원래는 환자 분이지만) 나는 사먹어야 되었다. 병원 밖으로 나와 종로 쪽으로 있는 길을 하나 건너 어떤 싸구려 집을 단골로 삼았다. 밥집이 아니라 왕대포집으로 다른 밥 종류는 없고 백반만 아주 싼 값에 팔고 있었다. 그 집을 드나들면서 나는 밥보다는 술을 더 많이 마셨다. 몇 끼니 연이어 안 먹기 전에는 밥 생각이 안 날 때였으므로 대개의 경우 술 한두 잔으로 때웠는데 막걸리도 먹고 소주도 먹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는 오후에 가서 소주를 찾으니까 주인 노파가 불쑥 말했다.
"오늘은 피팔이들이 안 와 막걸리가 잔뜩 있는데, 막걸리 들지 그래요?"
"피팔이라뇨?"
"왜 몰라요, 피를 팔러 다니는 사람들? 피를 팔아먹고 사는,,,,,,"
"아, 매혈자들 말씀이신 것 같은데 매혈자들 중에 그렇게 전문으로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까?"
"있다마다요. "
"그 사람들이 막걸리를 먹습니까?"
"먹어도 보통 먹는 게 아치죠. 사발로 몇 사발씩 쉬지 않고 들이켜지요. 그래야 빼낸 피만큼 보충이 된대요."
몸에 힘이 없을 때 술을 한두 잔 들이켜면 혈액순환이 빨라져 일시적으로 힘이 생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지는 건 나도 경험한 바라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듣고서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 후 그 사람들과 그 집에서 우연히 맞닥뜨렸는데 (물론 자리야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스무 살이 갓 넘어 보이는 사람들로부터 마흔이 넘어 보이는 사람까지 있었다. 주인 노파가 내게 눈짓을 해 알아차렸지만 그들끼리의 대화를 들으니 그들은 자신이 하나의 완전한 직업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장사꾼들이 밑천을 들여 촌을 벌 듯 막걸리 값의 밑천을 들여 돈을 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니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떳떳한 장사라고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제미랄, 이놈의 짓도 이제 그만 해먹어야지."
"왜? 이놈의 짓이 어때서? 우린 지금 헌혈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거야."
"헌혈 좋아하시네. "
"장사로 쳐도 그렇지. 씁 팔아먹고 사는 기집년들 말고는 이만큼 밑천 안 들이는 장사가 어딨어?"
"붕어 점심 먹는 소리하지 마. 몸이 망쳐지는 건 생각 않나?"
"몸이야 늙어 가면 다 망쳐지는 거야. 나는 요즈음 내가 왜 진작에 이런 걸 생각해 내지 못했나 하는 생각을 하는 때가 많아. 자넨 잘 모르겠지만 나도 안 해본 것 없는 놈이야. 강도, 도둑질, 도둑질 중에서도 시체 도둑이라는 거 아나? 군대에서 전방 복무를 했다면 알겠지만 시체 도둑이라는 게 있어. 시체를 도둑질 해다 병원에 수술 실험용으로 팔아먹는 건데 값이 왜 짭짤하지. 어떻게 훔치는지 아나? 울타리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전방 부대에서야 시체실이라는 게 한 데나 마찬가지 아닌가? 보초야 동초 한 명에 따로 둘이 동원되지만 그자들이야 대개 안에서 소주나 까고 있게 마련이지. 거기에 유령이 되어 나타나는 거지. 허연 광목을 뒤집어쓰고 히히히 웃음소리를 내는데 기절하지 않을 놈이 어디 있어? 기절하면 점잖게 떠매고 나오는 거고 달려들려고 하면 가지고 간 막대기로 한방 냅다 치는 거지. 그런 놈의 짓도 해먹었는데,,,,,,뿐만 아니야. 차 밑으로 뛰어들어 위자료 타먹는 짓, 시골에서 올라온 순진한 기집애들 팔아 넘기는 짓, 춤바람난 유부녀들 등쳐먹는 짓, 그런 오만 짓을 다 해먹은 난데, 요즈음의 이거야말로 얼마나 당당하고 신선한가?"
"젖 까고 나발부네. 너만 그런 짓 한 줄 아냐? 나는 씁 팔아먹는 년들한테 아편도 팔아먹은 놈이야. 어떻게 팔아먹는 줄 아나? 처음엔 착실한 단골이 되지. 알려진 값보다 몇 푼만 더 줘도 몇 차례 찾아가면 빨아 주고 돌려주고 별별 짓 다하는 그년들 아냐? 그년들한테 좋은 보혈제라고 하고 한 방 꽉 놓아주는 거야. 한 방 가지고는 안 되지. 직업이 의사라고 하고 한 서너 차례만 놓아주면 그 뒤부터는 살려 주십시오지. 그러면 그때부터 긁어내는 거야. 씁 팔아 번 돈 몽조리 다 긁어내는 거지.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제 그런 짓은 해먹을래도 해먹을 수 없게 되었지만 차마 어디 그게 해먹을 짓이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놈의 짓을 해먹고 있는데 뭐? 헌혈 운동? 내 머리가 이렇게 어지러운데 헌혈 운동? 개씹--- 아휴 어지러워."
나이 많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젊은 사람 중의 하나가 끼어들었다.
"정말 혀 먹을 게 없어라우. 노동을 혀 먹을래도 붙여 줘야 말이지라우. 아직 젊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피를 빼고 나면 오히려 시원해지며 정신이 더 맑아지는 것 같아라우. 그래서 직업치고는 이것이 괜찮다고 생각허는디,,,, "
남은 젊은 사람 하나가 여기에 맞장구를 쳤다.
"나도 그럽디데이. 피를 뺄 땐 시원한 게 꼭 용두질할 때 기분하고 같습디데이. 기분 좋고돈 버는데 나쁠 게 뭐 있습니껴? 우리가 뺀 피로 죽어 가는 사람 살리니 그 점에서도 우리는 긍지를 가질 필요가 있는 기라요."
분명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나와 같은 피부 빛깔을 떤 사람들의 이런 이야기들을 들은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그날도 역시 밥 대신 술로 때우고 병원으로 가자, 이마에 꽂았던 링겔 바늘을 손목에 꽃기 위해 핏줄을 찾느라 애의 손목 여기저기를 만지작거리며 땀을 흘리고 있는 의사 옆에서 마누라가 나한테 말했다.
"애가 너무 지쳐 있어 링겔만으로는 안 되겠대요, 다른 주사로도 안 되고 수혈을 해야 되는데 제 피나 당신 피는 안 된다니 어떡하죠?"
'피'라는 말에 나는 무엇보다 먼저 어제 그 피 팔이들을 떠올렸고 동시에 으스스 몸을 떨었다.
"왜? 왜 안 된단 말이야?"
내 소리가 너무 크다고 생각됐는지 의사가 고개를 들고 낮을 찌푸리며 메마른 어조로 말했다.
"혈액형이 맞지를 않습니다. 두 분은 모두 A형인데 애는 O형이니까요."
"부모와 자식간에 어떻게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까?"
사는 더 말하기 귀찮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고 대신 마누라가 말했다.
"부모가 양쪽 다 A일 언 아들은 A아니면 O가 된다는데 공교롭게도 이 애는 O라는군요."
어제 그 피팔이들의 피가 애의 핏줄에 흐르는 상상과 함께, 애가 커서 그들이나 비슷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숨이 막혀 왔다. 안 돼, 안 돼, 그런 삶을 살게 할 바엔 차라리 죽이는 게 나아, 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그러나 나는 무조건 살려놓고 보자는 얕은 생각에서가 아기라 흥분을 가라앉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한 나머지 이렇게 부르짖었다.
"괜찮아, 우리들의 피가 아닌 막걸리로 보충되는 피팔이들의 피도 괜찮다구. 흔히 피라는 건 속일 수 없고, 피에 따라 그의 삶이 결정 된다고들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는 않아. 그렇다면, 만일 그렇다면 천한 놈 자식은 항상 천하게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 아냐? 넣자구, 아무 피라도 괜찮으니까 넣어 살려서 우리 나름대로 한번 키워 보자구."
하나의 작품과 바꾼 전위화가의 목숨에 관하여
세상의 마누라들이 거의 다 그렇듯이 내 마누라도 가난하고 고된 생활에 찌들어 지금은 완전히 못사는 집의 여편네 티가 박혀 버렸지만 결혼 전엔 적어도 내 눈엔 왜 잘생기고 멋있는 여자로 보였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시내 중심가에 화실을 차려 놓고 애들을 가르치며 작품 제작을 했었는데 어울리지 않게 구상보다는 추상, 정통보다는 실험이라는 낱말에 더 매력을 느껴 전람회도 그런 계열의 작품으로 가졌었다. 국전에는 한번도 출품하지 않으면서 앙데팡당전 같은 생소한 작품전에는 출품하여 파리 비엔날레니 상파울로 비엔날레니 하는 국제전에 대한 꿈은 키울 줄 알았었다. 따라서 그 당시 사귀었던 화가들도 국내에 많이 알려진 돈을 잘 버는 화가들보다는 국외에 더 많이 알려지거나 무명인, 돈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통나무에 식탁보 같은 보자기를 씌워 놓는다든가 커다란 바윗덩어리에 밧줄을 묶어 놓는다든가 석고로 거대한 수십 개의 구(球)를 만들어 그 그림자들로써 무얼 보여준다든가 녹슨 철판의 일부분을 곱게 갈아 여자의 음부 비슷한 형상을 만든다든가 주머니에 얼음을 담아다 놓고 전시 기간 중 증발해 버리도록 만든다든가 닳아빠지고 때묻은 걸레조각, 단추가 떨어지고 찢겨진 군복, 흙덩이, 담배꽁초, 밀가루 등속으로 어떤 형체를 이룬다든가 심지어는 어떤 허술한 대포집의 형상을 그대로 전시장에 옮겨다 놓고 술을 마시게 하면서 그것 자체를 작품이라고 한다든가 전시장의 건물을 지붕 위까지 올라가 온통 광목으로 휘감아 묶어 놓고 그것 자체를 작품이라고 하는 등 어떻게 보면 정신병자들의 소행 같이도 보여지는 작품들에 골몰하고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그중엔 가짜가 있는 반면에 분명히 진짜도 있을 법한데 가짜인지 진짜인지 나로선 잘 분별할 수 없지만 그런 계통의 작품을 하는 황 호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무명인데도 동료들 간에 서 이상하게 귀재로 통하는(약간은 비아냥거리는 뜻도 있을지 모르나) 사람이었는데 마누라가 가지고 있던 화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화실을 가지고 있어 비교적 자주 만났다. 금방 무너 앉을 듯한 목조 건물의 이층으로 대여섯 평 될까, 애들을 가르치지는 않고 작업실로만 썼기 때문이겠지만 줄리앙이니 아그립파니 하는 흔한 석고상 하나 없는 건 물론 흔히 '그림'이라고 불려지는 액틀에 넣어진 유화 하나 걸려 있지 않고 화실 안이 온통 쓰레기장 같았다.
거지들이 들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깡통으로부터 시작해서 돌덩이, 쇳조각, 쇠막대, 철판, 나무토막, 나무뿌리, 송판, 새끼줄, 전깃줄, 밧줄, 쇠줄, 철사, 우산살, 자전거바퀴, 타이어, 탈바가지, 지게, 갈대, 짚, 깨어진 삽, 밀짚모자, 고무로 만든 손, 인형, 마포조각, 시멘트도구, 용 접기, ,,,,,, 등 온갖 잡동사니만이 가득 차 있는 것이었다. 조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회화를 한다는 사람의 방이 그러니, 아무리 웬만한 액틀 속의 그림에는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나라고 할지라도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물론 요즈음에 와선 동양화와 서양화의 구별은 물론 조각과 회화의 구별도 희미해져 가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마누라는 전적으로 관심을 갖는 눈치였고 나를 데리고 가 일부러 어울릴 기회를 갖게 해주곤 했다. 그러나 어울리는 동안 나는 그가 마누라의 말처럼 '몇십 년 후에는 틀림없이 이름을 크게 떨칠' 사람이라는 느낌은 갖지 못했다. 술을 잘 마셔 내 주량을 넘어섰고, 술을 마시면 평소보다 눈이 더 빛났으며, 순수함이라 말할 수 있는 광기가 있었고, 어쩌다가 이따금 그림을 하는 사람치고는 꽤 깊이 있는 말을 던져 오는 일이 있었지만 천성적인 듯한 그의 게으름이며 퇴폐성 같은 것은 결코 좋게 보여지지가 않았다.
그와 어울리면서 그가 던져 왔던 말 중에 비교적 잊혀지지 않는 말 하나만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명성이랄까 인기랄까, 작품을 하는 사람과 이 사회에서의 인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사회의 모순을 파헤치는 작가가 그 모순된 사회에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그것 자체가 얼마나 큰 모순이며 넌센스겠소?"
문학 작품이라면 몰라도 회화로써 사회의 모순을 파헤친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렸지만, 잘은 몰라도 그의 입체작품이라는 것들 중엔 그런 게 더러 있었다. 어느 땐가는 화실의 천장에 교수대의 형구처럼 목을 매달기 좋은 올가미를 밧줄로 만들어 놓은 적이 있었는데, 저것도 작품이냐고 우리가 묻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죽고 싶은 사람들은 한번 이용해 보라고 만들어 왔소. 주위에 하도 죽고 싶다는 사람이 많아서,,,,,, 최형도 이용해 보려면 한번 이용 해 보쇼."
"좋소. 삯이 얼마요?"
"글쎄, 뭐 소주 한 병이면 되겠죠. 핫하."
문제의 작품 -의자-라는 것도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일흔이 넘은, 망령기가 좀 있는 그의 할머니까지 동원해 가며 만든 그 엉성한 의자가 설마 작품이 되리라고 까지야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쇠막대와 전깃줄이 재료의 대부분을 이룬 그 의자를 만들 때 그는 유난히 열성이었다. 산소 용접을 하고, 그의 할머니한테 열심히 무얼 물어 보고, 심지어는 거기에 변압기까지 부착을 시켰는데 우리가 무엇이냐고 묻자 가볍게 대답했다.
"보다시피 의자요."
"의자에도 변압기가 다 필요하오?"
“전기 의자로 이용해 보고 싶은 사람한테는 필요하지 않겠소?"
"전기 의자라니 ? 사람 죽이는 데 써먹는 것 말이오?"
"죽일 때도 써먹고 그냥 고문산 할 때도 써먹을 수 있죠. 고문 한 번 당해 보겠소?"
"좋소. 그렇지 않아도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인데,,,,,,
"핫하, 조금만 더 기다리시오. 아직 미완성이니까."
그러고는 그는 망령든 그의 할머니한테 다시 무언가를 묻기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옛날 왜정시대 때 할머니가 전기 의자에 앉아 본 경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앉았었은데 할아버지는 그로 해서 죽고 할머니는 머리가 좀 이상해졌다고 했다, 그 경험담과 함께 그 의자의 생김새에 대해서 그가 묻는 대로 다 대답해 주고 할머니는 어린애처럼 천진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너도 그 높은 양반들처럼 조선 사람들 데려다가 그런 장난을 하고 싶으냐?"
"네, 할머니."
"재미있을 게다, 참 재미있을 게여. 그렇지만 조심해라. 잘못하다가는 다치니까 조심해."
"핫하 알았어요, 할머니, "
이 순간 나는 숙연함에 빠졌는데 그것은 그의 할머니와 말을 주고받던 그가 갈수록 눈에 빛을 더해가더니 끝내는 그 안 깊숙이 물기 같은 걸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가 그런 걸 보이지 않았다고 해도 나는 틀림없이 이상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미친놈과 미친 할머니의 하릴없는 놀음이라고 지나치기에는 무언가 걸려 오는 게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죽음의 빛깔 같은 유쾌하지 못한 빛 속에서 허위적거렸는데 아니나다를까 일은 크게 벌어졌다.
귀재로 통하던 황 호릉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가 그 며칠 후 그의 화실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누라와 나는 '정말 뜻밖'이마는 느낌을 별로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그런 놀이를 하던 그 의자에 앉은 채(변압기의 볼륨을 터무니없이 높이 올려놓은 채) 죽은 걸 어떤 사람은 순간적인 실수였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품에 지나치게 집념한 나머지의 순간적인 광기로 단정했고, 그는 끝내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잘했는데 마누라도 마찬가지였다.
"그것 보세요, 제가 귀재라고 하지 않았어요? 귀재는 역시 하나의 작품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줄도 알아야 되는 모양이에요."
마누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그가 죽은 건 작품 때문이 아니라 현실 때문이야. 그런 걸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지 않을 수 없는 현실---"
죽이기 전에 빼내는 염소의 흔에 관하여
아직 나이 마흔도 되지 않은, 전혀 내세울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 내가 건강 타령을 늘어놓는다면 어떤 사람은 메스꺼움을 느낄지 모르나요 몇 달 사이 내 건강이 그전처럼 다시 못쓰게 되어진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원래 거울 앞에 서기를 고문 받는 일만큼이나 싫어하는 나이긴 하지만 요즈음도 어쩌다가 거울이 아니라 전동차 속의 창에라도 비친 내 얼굴과 마주치게 되면 나는 무슨 보아서는 안 될 끔찍한 물건이라도 보았을 때처럼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돌려버리고 만다. '며칠 동안 죽 한 그릇도 못 얻어먹은 놈의 몰골'이라는 후한 표현이 있지만 그보다는 못 먹을 것을 먹어 부황이 난 놈의 몰골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오직 눈만이 약간의 광채를 띠고 있을 뿐 핏기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검누르퉁퉁한 얼굴이 상한 풀빵처럼 부석부석하다. 직접 느끼는 자각증상으로도 아무 곳에나 앉아서 눈을 감기만 하면 시들시들 졸음이 온다든가 잠 속에선 으례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꿈(예를 들자면 변소에서 막 나서려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어전 체구가 건장한 놈이 가로막으며 목덜미를 움켜잡아 변소통 속에 몰아 처넣는 꿈)을 꾼다든가 밥알이 모래알 같다든가 갑자기 알 수 없는 구역질이 난다든가 머리가 어질어질하면서 귀가 멍멍해 온다든가 오후가 되면 길을 걷다가도 길바닥에 주저앉고 싶어질 정도로 온몸에 맥이 없어지곤 한다. 따지자면 이런 증상이야 만성화된 지 이미 몇 년 되니까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견딜 수는 있었는데 몇 달 전부터는 견디기가 아주 힘이 드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작년에 꼭 한 차례 난생 처음으로 보약이라는 걸 먹은 후 괜찮은 것 같더니 다시 마찬가지가 된 것이다.
보약이라는 것도 먹으려 해서 먹은 것이 아니고 작년에 그런 일이 있었다. 낱낱이 공개할 이야기는 못 되나 어느 날 밤 마누라와의 잠자리에서 꽤 오랜만의 교접이었는데도 물건이 제대로 움직여 주지를 않아 끝내 절정에까지 이르지를 못하고 중도에서 쓰러져 버린 일이 있었다. 술에라도 취해 있었던 때라면 혹 그럴 수 있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아주 말짱해 있었는데도 그랬으니 보통 일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물론 강렬하게 욕구가 치솟아서 그 일을 벌였던 것은 아니고 마누라에 대한 의무랄까 보살피는 자로서의 따뜻함 같은 것 때문에 약간은 고의적으로 벌였던 것이지만 그래도 결과가 그렇게 되어진 건 처음 일이었다. 어느 면으로나 나 자신보다는 싱싱함이 남아 있는 마누라의 빛나는 눈의 움직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 그 일을 하면 더 낫지 않을까 해서 일부러 불까지 켜가며 해보았는데도 소용 없었다. 마누라는 마누라대로 자기의 어디가 잘못되어 그런 게 아닌가 하고 좀처럼 그러지 않던 음탕한 몸놀림까지 해가며 나를 위해 애를 썼지만 역시 헛수고였다. 겨우 마누라만을 절정에 이르게 했는지 어쨌는지 불분명한 상태에서 내가 쓰러지자 물걸레처럼 젖은 내 전신의
엄청난 땀을 닦아주며 마누라는 왜 그러느냐는 말을 몇 차례 반복했다. 그러더니 아마 그날 밤 그런 생각을 했는지 며칠 후 마누라가 친정엘 가더니 약 꾸러미를 들고 온 것이다. 말로는 친정어머니가 지어준 것이라고 했지만 직접 지어 온 게 분명할 것이었다.
"뭐, 보약?"
녹용에 인삼에 부자 등속이 큰 값비싼 보약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마누라가 고맙다는 생각보다는 순간적으로나마 불쾌한 생각이 앞섰다. 세상의 어느 누가 자기 몸을 위해 보약을 지어 왔는데 불쾌하겠는가만 며칠 전 밤의 일이 연상되자 마누라가 추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아니더라도, 나를 자랑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사실 내 체일 자체가 아무런 고민 없이 보약 같은 사치스러움을 즐길 수 있게 되어 있지를 못했다, 보약은커녕 그 무렵 몸이 그 지경이 되어 가지고도 병원을 찾는 일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져 꺼려온
것은 물론 쉽게 예를 들자면 공동목욕탕에서 자기 몸뚱이의 때를 때밀이한테 시켜 벗겨내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에도 심한 구역질을 느끼는 다인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먹고 살기 위해 직장을 나가는데 그 직장이라는 곳이 차를 두 번씩 갈아 타가며 무려 한 시간 이십 분씩을 시달려야만 겨우 출근이 되는 곳이다. 까딱하면 야근이고 공휴일이란 일요일뿐인데도 까딱하면 일요일마저 근무를 해야 되며 어쩌다가 집에서 쉬게 되는 날에도 까딱하면 동네 길 도치는 일(집이 경기도 산 부근이라 비가 조금만 와도 땅이 질퍽거려 차가 안 들어오는 통에 새마을운동을 해야 된다)에 동원되어야 한다든가 직장의 야근이 없는 밤에도 까딱하면 집에서도 밤을 꼬박 새우며 일을 해야만 하는 처지이면서도, 나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을 하면서 보상보다는 고통을 훨씬 더 심하게 받는 사람들이 무위에는 얼마나 많은가 하는 생각과 함께 지금 이런 세월에 내가 겪는 이 정도의 어려움이 무슨 어려움이 되며 이 정도의 애씀이 무슨 애씀이 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잊지 않는,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꽉 막혔거나 소년 취향적인 나인 것이다. 그러니 보약이라는 것이 나 같은 사람이 먹어도 전혀 상관이 없는 물건으로 쉽게 느껴지지 않을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보약? 아니 그래 당신은 내가 숨어가지고 보약이나 먹고 있어야만 좋겠어?"
좀 웃어가면서 반 농담 식으로 던진 말이지만 나로서는 거의 꾸밈이 없는 소견이었다.
"숨어서 먹긴 왜 숨어서 먹어요?"
"그럼 이렇게 멀쩡해져 가지고 보약을 떳떳하게 먹으란 말이야?"
"멀쩡해요? 당신이 멀쩡하단 말이에요?"
"그럼 멀쩡하지 않고,,,,,,"
"보약 먹는 것도 뭐 죄가 되는 줄 아시나봐."
"어쨌든 난 먹고 싶지 않으니까 장모님이나 잡수시라고 돌려드려."
"사람 체질에 맞춰 지어 온 걸 아무나 먹어도 되는 줄 알아요?"
"어쨌든,,,,,,"
"그만두세요. 꺼떡하면 세상, 세상 하시는데 세상이 뭐 어때요? 그렇게 세상 걱정하는 분이 술은 왜 드세요? 술 드시는 건 죄스럽지 않으세요?"
"그거야 다르지. "
"뭐가 달라요 ? "
"어쨌든,,,,,,"
"난 모르겠어요. 하여튼 달이긴 달일 테니까 드시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일이 그렇게 되어 결국 분에 겨운 보약을 먹기에까지 이르렀는데, 보름에 걸쳐 그것 스무 첩을 먹고 나자 몸이 확실히 달라지긴 달라졌다. 사흘이 멀다 하고 마셔대던 술을 약을 먹는 동안 끊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밥맛도 나아지고 거리를 걸어가다가 주저앉고 싶은 증세도
없어졌으며 마누라와의 교접에서 실패하는 일도 없게 되었다. 그러더니 다시 몸을 함부로 굴리게 되자 그 증세들이 하나둘 되살아나기 시작했고, 급기야 몇 달 전부터는 완전히 심해졌으며, 또 최근에는 작년 그 언젠가의 밤처럼 낭패스런 밤을 연거푸 두 차례나 겪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누라가 어느 날 느닷없이 염소를 한 마리 통째로 염소 집에서 약으로 만들어 가지고 왔다. 살코기는 고기대로 발라오고 뼈다귀 등속은 한약을 넣어 고아서 즙을 만들어 가지고 온 것이다. 나는 아찔했다.
"아니 이걸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어떻게 먹긴 어떻게 먹어요? 그냥 먹으면 되는 거죠. 잡기 전에 혼을 뺐으니까 노린내는 안 날 거예요."
"뭐, 혼?"
"옛날 영화 같은 걸 보면 왜 망나니들이 사람을 죽이기 전에 칼춤을 추어 혼을 빼잖아요? 그런 식으로 이것도 잡기 전에 혼을 빼면 냄새가 안 난대요."
“……"
"죽이기 전에 끌고 산 같은 델 정신없이 막 뛰어 다닌다든가 눈앞에서 손가락으로 뺑뺑이질을 하면 빠진대요."
"허, 참,,,,,,"
"먼저 무엇부터 드실래요? 고기부터 드실래요, 즙부터 드실래요?"
거의 강제적으로 나오려는 태도여서 나는 일부러라도 진저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안 먹겠어. 생각해 보라구. 그렇지 않아도 혼을 지키기 힘든 세상인데 죽이기도 전에 혼빼낸 걸 먹었다가 어떡하겠어? 이걸 먹었다가 이제까지 아득바득 지켜온 내 혼마저 빠져나가면 어떡하냐구?"
갓난애를 쌀과 바꿔먹은 이웃에 관하여
결혼을 해가지고도 줄곧 세 방만을 살다가 기를 쓰고 장만한 것이 현재 살고 있는 집이다. 값으로 따지면야 서울 변두리의 껄렁한 두 간 전셋값밖에 안 되지만, 경기도 지구에서도 교통이 아주 불편한 그린벨트 지역 부근이라 터만은 그 나름대로 시원하게 트인 감이 있다,
건물 자체도 내부 자재가 싸구려라 그렇지 기와 지붕에 붉은 벽돌을 쓴 새 집이기 때문에 겉모양은 그럴 듯하다. 다른 주택촌이나 마찬가지로 똑같은 규격의 집들이 팔십여 채가 들어서 있는데 땅 임자와 집을 지은 사람간에 싸움이 벌어져 소송에 걸려 있는 관계로 아직도
비어 있는 집이 몇 채 있다. 우리 이웃집이 바로 그런 집의 하나이다. 사람이 들어 살고 있기는 하나 진짜 주인이 아니고 아직은 아무에게도 팔 수 없는 집을, 이 동네 집들을 지을 때 고용되었던 듯한 한 인부 가족이 임시로 빌어 살고 있는 것이다.
처마의 물받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창에는 유리 대신 비닐이 씌워져 있으며 울안에는 아직 펌프 수도마저 놓여 있지 않다. 물론 이 집과 우리 집 사이에는 블록으로 된 담이 있지만 높이가 내 목 부근밖에 차지 않기 때문에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문짝 없는 변소에서 치마를 올린 채 쭈그리고 앉아 있는 기미 투성이의 아낙네 모습이라든가 악을 쓰며 울어대는 자기 애들에게 '저런 모가지를 비틀어 죽일 놈 봤나'라는 식의 욕설을 아무렇지 않게 해대는 사내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이웃사촌'이라는 낡은 말이 아니더라도 이웃간에 사이좋게 지내서 나쁠 일이 무엇이 있으랴. 열 번이면 열 번 다 우리가 손해를 보더라도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는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인데 마누라는 그렇지가 않다. 인정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따질 것을 지나치게 따지려
는 생활 태도 때문으로 알고 있는데 아마 일의 발단은 연탄 문제로부터였을 것이다. 한때 연탄 파동이 일어 카드제니 배급제니 하고 떠들 때 내가 집에 없자 마누라가 배급을 받은 연탄을 동네 입구에서 몇 장씩 머리에 이어 날랐던 모양이다. 그걸 보고 이웃집 사내가 기사 정신을 발휘했던 것까지는 좋았다. 어디서인지 리어카를 가져와 백여 장 되는 걸 한꺼번에 실어다 우리 집 연탄광에 쌓아 주었다. 거기에 감동한 마누라가 연탄 값에 오백 원을 더 얹어서 주었다. 사내는 처음에는 사양하는 체하다가 받아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반장 집에 지불이 되었어야 할 연탄 값이 지불되어 있지가 않았다. 어떻게 된 거냐고 추궁을 하자 사내는 이렇게 대답을 하더라는 것이다.
"양식 살 돈이 없어 내가 임시로 융통했으니 곧 갚아 드리죠."
두 번째는 하수도 문제 때문이었다. 한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비가 좀 오게 되자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 부엌에 물이 괴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것인가 알아보니 이웃집과 연결되어 있는 하수도가 이웃집 안에서 문제가 생겨 그랬다. 마누라 말로는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 같다고 했으나 설마 그랬을 리야 없을 것이고, 어쨌든 우리가 어찌 된 거냐고 성화를 부리자 사내는 작업을 시작했고,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안 되어 제대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끝내고 나서는 일당을 요구했다. 자기네 집 하수도를 고쳐 놓고 우리한테 일당을 요구하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고 마누라는 펄쩍 뛰었고, 사내는 사내대로 우리가 고치라고 해서 고쳤으니 주어야 단다고 떼를 썼다. 마누라가 말을 안 들어 줄 것 같자 나중엔 나한테 매달렸는데 사정이 딱해서 그러니 도와주는 셈 잡고 조금만 생각해 달라고 말했다. 결국 마누라 모르게 내 주머니 돈을 조금 내주어 무마가 되었다.
또 한번은 전기 문제 때문이었다. 전기세 밀린 걸 안 내자 전기 회사에서 나와 이웃집 전기를 잘라 버렸는데 우리 집 전기줄에 잇지 않고는 끌어쓰지 못하도록 모조리 잘라 버렸다. 그러고는 우리더러 이웃집에서 전기를 끌어쓰려 해도 절대로 못 쓰게 하라고, 만일 쓰게 하면 우리도 함께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전기회사 사람은 반 공갈조의 소리를 하고 갔다. 그런데 이웃집 사내는 아니나다를까 우리 집으로 찾아와 사정을 했다. 요즈음 일거리가 없어 몇 푼 안 되는 것조차 못 내어 이 꼴이 되었지만 곧 풀리게 되면 갖다 내고 복구시킬 예정이니 그때까지만 좀 보아달라, 우리가 아무리 끌어써도 선생님네 계량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되어 있으니 그런 염려는 조금도 마시고 편리를 좀 보아달라, 이웃 좋다는 게 뭐냐, 어려운 때 피차간에 서로 도와가며 사는 게 이웃의 도리가 아니냐, 우리 집엔 라디오조차 없으니 부엌에 하나 방에 하나 해서 이십 촉짜리 꼭 두 등만 켜면 된다, 초를 사다 켤래도 촛값도 비싸 못 사다 켜겠다, 정말이지 요즘 같아선 약을 사먹고 죽을래도 약 사먹을 여유조차 없다, 죄송하다------
하지만 마누라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도둑 행위이며, 우리더러 거기에 동조하라는 건 도둑질에 공범으로 가담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웃끼리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건 그런 일에 도우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배운 사람이다, 그것이 나쁜 행위인 줄 알면서 어떻게 그 행위에 협조를 한단 말이냐, 우리는 양심상 도저히 그럴 수 없으니 다른 대책을 강구해 봐라---
나로서는 어떻게 해야 바른 태도가 될지 몰아 난처한 표정만을 짓다가 결국 이렇게 말했다.
"밀린 전기세가 얼마나 되는지 그걸 우리가 빌려드릴 테니까 갖다 회사에 내시고 복구해 달라고 하십시오."
그러고는 몇 푼 안 되는 그 돈을 나는 마누라의 과히 좋지 않은 눈길을 받으며 꺼내 주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돈을 갖다 내지 않았고 전기는 우리 집에서보다는 훨씬 더 먼 줄을 이어야 되는 앞 집에서 끌어다 쓰고 있었다,
또 한번은 말린 동태 때문이었다. 동태가 알을 많이 밴 데다가 파리가 없어 말리기가 좋은 봄철이 되면 마누라는 으례 그걸 상자로 들여다가 말린다. 내가 술을 많이 마시는 관계로 자주 북어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알은 알대로 창자는 창자대로 심지어는 아가미까지 버리지 않고 젓을 담글 수 있어 여러 면에서 이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번에도 한 상자를 들여다가 말렸는데 말릴 장소가 마땅치 않아 (마당에 널어 말리면 개가 그냥 두지 않는 관계로) 이웃집과 우리 집 사이의 블록담 위를 이용했다. 널빤지를 놓고 늘어놓자 볕이 좋아 사흘도 안 되어 거의 다 말랐는데 그걸 거둬들이면서 마누라는 첫날부터 한 마리가 빈다고 하더니 다음날엔 세 마리, 그 다음날엔 다섯 마리가 빈다고 이상하다, 이상하다,,,,,, 소리를 연발했다. 한 상자면 스물 대여섯 마리쯤 되니까 다섯 마리가 빈다면 세어 보지 않아도 눈에 띄긴 띄겠지만 세어 봤는지 어쨌는지 그러더니 그 다음날에는 아주 노골적으로 화를 냈다. 또 두 마리가 빈다는 것이다. 듣기가 거북해서 내가 말했다.
"쥐가 물어갔겠지."
"동태를 쥐가 물어가요?"
"아니면 개가 건드렸든지."
"개가 거길 어떻게 올라가요?"
"그럼,,,,,, ? "
"뻔하죠, 뭐. 그곳에다 말린 내가 잘못이지."
"이웃을 의심한단 말이야? "
"그만두세요. 이런 거야 뭐 서로 나눠먹을 수도 있는 거니까. 생각하면 소행이 괘씸하긴 하지만---"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알지도 못하긴, 그럼 붜 그게 다시 살아나서 바다라도 찾아갔단 말이에요?"
이런 일 외에도 그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이와 비슷한 일들이 가끔 일어났는데 어느 날인가 이 이웃집에서 이제까지는 들리지 않던 갓난애(올망졸망 두세 살이 더 되는 애들이야 있었지만 갓난애는 없었다.)울음소리가 들렸다. 만삭이었던 이웃집 아낙네가 해산을 했다는 것이었다.
"미역국도 제대로 못 끓여먹었을 거 아냐? "
“……"
"미역 한 가닥 정도야 사다 줄 수 있지 않아?"
"누군 뭐 그럴 줄 몰라서 그래요?"
갓난애 울음소리가 유난히 영악했다. 밤이면 계속 들려, 병적으로 쉽게 곯아떨어지는 그 무렵의 내 잠까지도 설치게 만들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날 때까지도 그 울음소리는 멎지 않았다. 첫애를 갓난애 때 병으로 잃은 경험이 있는 우리는 그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섬뜩섬뜩 놀라기까지 했다.
그런데 보름 가까이 된 어느 날 밤부터 갑자기 들리지 않았다. 어쩌다가 그러는 밤도 있나 하고 지나치다가 그 다음날도 여전히 들리지 않아 신기하게 생각한 내가 웬일이냐고 묻자 마누라는 웃으며 말했다.
"쌀하고 바꿔 먹었대요."
"뭐?"
"애 못 낳는 어떤 집에 주고 쌀 한 가마 받아왔대요."
"무슨 얘기야?"
"믿어지지가 않으시나 보죠 ? 애를 쌀하고 바꿔 먹었다니까......"
마누라는 계속 웃었다. 물론 나는 처음엔 믿지 않았다. 하지만 곧 이어서 그것이 사실임을 알았다. 그만큼 마누라의 웃음은 자연스런 것이 아니었고 어색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무엇엔가 크게 얻어 맞은 듯 멍한 상태로 있다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보기 싫어. 그런 이야기를 그렇게 웃으면서 스스럼없이 말하는 당신이 보기 싫다구. "
화신이 되어 나타난 어둠의 역사에 관하여
하나의 무슨 상징처럼 그 여인은 우리 집에 나타났다. 해방된 지 삼십 년이 되는 해라고 해서 '광복 삼십 년' 운운하는 말이 여기저기에 한참 오르내리던 무렵의 어느 비 내리는 밤이었다. 몸이 망가지는 것과는 상관없이 무모하게 마셔대던 이십대 시절의 술버릇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서 어쩌다 한번씩은 폭음을 하지 않고는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날 밤도 그렇게 몸이 흐물흐물하도록 마셔대다가 통금 시간이 다 되어서야 집 앞에 당도했다. 그런데 비틀걸음으로 세상의 어지러움에 대해 혼자 독백까지 해대며 집 앞까지 다가간 나는 초인종을 누르다가 눈을 흡뜬 채 오락가락하는 정신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둠의 덩어리 같기도 하고 쓰레기통 같기도 한, 아침가지만 해도 보지 못했던 한 물체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시멘트로 된 대문의 문턱에 놓여 있었는데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보니 그것은 물체가 아니라 남루를 걸친, 숨을 쉬고 있는 사람이었다. 거리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거지라고 곧 판단되었으나 그러면서도 나는 가볍게 지나쳐 버리지를 못했다. 그대로 그냥 두면 그 자리에서 죽을지도 모를 만큼 쇠약하고 늙은 여자인 데다가 잔뜩 비조차 맞은 채 움츠려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대문간들을 다 제쳐놓고 하필 우리 집 대문간에 앉아 있다는 사실과 함께 생각을 비약시키자 별별 생각이 다 들었기 때문이다. 가령 평생을 고생만 하다가 억울하게 죽은 어떤 한 많은 여인의 넋일지도 모른다는, 또는 어느 때보다도 어렵고 메마르고 거친 오늘의 이 세월을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시험하러 온 하늘의 사자일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가지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몹시 지쳐 있었는데도, 초인종소리를 듣고 나온 마누라와 함께 그 여인에게 관심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뭘 하시는 분인데 여기서 이러고 계세요?"
“……"
"가실 곳이 없으신 모양인데, 안으로 들어가시죠."
“……"
"이곳은 시골이라 야경원도 없고 파출소도 멀어 이렇게 계시다간 꼼짝없이 여기서 날을 새우셔야만 됩니다."
그래도 여인은 들은 체도 않다가 한참 후에야 비로소 우리를 올려다보더니 천식 기침 같은 개 울음소리와 비슷한 소리의 기침을 두어 차례 했다.
"정말 안 되겠어요, 들어가셔야지."
한 가정의 생활 가계부를 정리하는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이 냉정할 땐 냉정하고 따질 전 야박할 만큼 따져도 그래도 어느 면으로나 나보다는 훨씬 감상적이고 선량한 편인 마누라는 처음엔 무심코 지켜만 보았으나 여인이 기침을 하자 그때부터는 나보다 훨씬 더한 관심을 표명했다. 직접 여인의 손을 잡아 일으켰고, 집안으로 들인 후엔 젖은 옷을 자기의 헌 옷과 갈아입게 했으며 내 밥으로 남겨둔 밥을, 당신은 드셨죠? 라고 말한 후 차려 주었다.
마누라가 밥상을 건넌방으로 들여가는 걸 본 후 나는 그 여인에 대한 관심을 일단 마무리짓고 발도 씻지 않은 채 곯아떨어졌다. 여인을 보는 순간 싹 몰려가는 듯했던 취기가 방안에 있게 되자 다시 견딜 수 없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어느 때나 마찬가지로 악몽에 시달리다가 구갈을 느끼며 눈을 뜨자 방안의 줄에 낯이 익지 않은 빨래가 몇 가지 걸려 있는 게 보였는데 여인의 옷을 마누라가 빨아 넌 것임을 곧 알 수 있었다.
물그릇을 가까이 놓아주며 마누라가 말했다.
"얻어먹으러만 다니는 사람 같지 않고 좀 이상해요.
"왜 ?"
"몹시 지쳐 있는 것 같아 자세히 묻지는 않았지만 누구를 찾으러 다닌다나 봐요."
"누굴 ? "
"모르겠어요. "
우리가 아침을 먹을 때까지도 여인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깨워야 할지 어쩔지 망설이던 끝에, 푹 쉬도록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그냥 두기로 하고 나는 출근을 해 버렸다.
그런데 퇴근을 하고 돌아오자 마누라는 이미 우리 집을 떠나간 그 여인에 대해서 내가 귀찮아할 만큼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출근을 한 사이 심심풀이 삼아 모든 자초지종을 듣게 된 모양이었다.
어떤 사람의 생애를 이야기할 때 '기구하다'거나 '파란만장하다'라는 말을 곧잘 쓰는데 그 여인의 생애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런 생애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이야기가 너무 도식적이면서도 상징적인 것 같아 많은 생각에 부딪히게 되었다.
특히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는 우리 역사와 많은 관련을 갖고 있어 얼핏 그 여인이 우리 광복 삼십 년 역사의 어둠의 화신 같은 생각조차 들었던 것이다.
그 여인의 생애는 여순반란 사건 때부터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제 식민지하의 그런 끔찍한 세월 속에서도 양심에 크게 부끄러울 일 없이 결혼을 하고 3남1녀의 자녀까지 두어 복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을 누리며 살아왔는데 해방이 되고 미군정이 베풀어지고 그러다가 느닷없이 사건이 터져 남편을 잃은 것이다.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여수 주둔 국방 경비대가 일으킨 반란사건은 불과 일주일 만에 진압되긴 한 셈이지만 그때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은 적지 않았다. 남편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 후부터 여인의 생애는 그야말로 '필설을 가지고는 도저히 늘어놓을 수 없는' 생애가 되고 말알다.
첫아들은 사변 때 전사당했다. 아직 군대에 갈 나이도 아니었는데 붙들려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유골 상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 밑이었던 외동딸은 역시 사변 때 미군들로부터 집단 강간을 당하고 미쳐 돌아다니다가 기차에 치여 죽었다. 중학을 다니다가 그렇게 됐으니까 아직 사춘기도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둘째아들은 사월 학생의거에 앞장을 섰다가 부상을 당하고 병원에 입원한지 석 달만에 죽었다. 뇌를 다쳐 혼수 속을 헤매다가 끝내 죽은 것이다.
셋째 아들은 오윌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나서 십 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오 년 전에 행방불명이 된 후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여인이 몇 푼 모았던 재산을 깡그리 없애고 지금 꼴이 된 것도 이 셋째 아들을 찾기 위해서였는데 그러나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도 모르고 있다.
"우리나라 장편소설 같은 데서나 상투적으로 볼 수 있는 집안이군."
"글쎄 말이에요. 잘 곧이들어지지가 않아요. 아무리 기구하다고 해도 원 그렇게까지 꾸민 것처럼 기구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사실이긴 사실인 것 같았어요.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걸 느꼈어요.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딱하기에 가실 때 노자에 보태 쓰라고 돈 천 원을 드렸거든요. 그런데 받지를 않아요. 처음엔 사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앞가슴에 강제로 넣어 주다시피 했는데 끝까지 받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면서 정색을 하고 하는 말이, 자기는 거지가 아니라는 것이었어요. 우리가 강력하게 끌어 비록 하룻밤 신세는 졌다고 할지라도 구걸하면서까지 세상을 살고 싶지는 않다는 거예요. "
"최후의 긍지군."
"아들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제 생각으로는 죽었을 것만 같은데."
물론 마누라로서야 무심히 뱉은 말이겠지만 그 여인을 우리의 역사와 관련시켜 자꾸 상징적으로만 생각하던 나는 이렇게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 말버릇! 이왕이면 왜 그런 생각을 하지? 그런 긍지를 갖고 있는 한 틀림없이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찾아서 여생은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말이야."
1
이상한 일이었다. 죽어 저 세상에 가면서도 가능하면 한겨울의 강추위는 피해 가자는 것일까. 날씨가 풀리면서 죽는 식구들이 더 많았다. 아직 추위가 완전히 가신 건 아니나 우선 햇살과 바람이 한겨울의 그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그래서 그런지 사흘이 멀다 하고 죽는 식구가 나왔다. 어떤 날은 하루에 두 식구씩 죽기도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올해가 다 가기도 전에 이곳 백 오십여 명의 식구들이 모두 다 죽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오늘 새벽에도 한 식구가 죽었는데 여느 때와는 달리 앰블런스가 오지 않았다.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식구가 죽을 때는 대개 오게 되는 앰블런스가 오늘 새벽엔 왜 오지 않았는지 신혜는 알고 있었다.
오늘 새벽에 죽은 심 순자 아주머니는 신장(腎臟)이나 안구(眼球) 중 어느 것도 기증하기로 되어 있지 않은 식구이기 때문이었다.
새 식구가 들어올 때마다 목사님은 말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고 서러워 마십시오. 이 세상에 나와 어떤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되신다면 그 은혜를 갚을 길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에서 주신 가장 큰 재산의 하나인 신장이나 안구라도 남겨 꺼져 가는 생명을 구하고 앞을 못 보는 불행한 사람에게 광명을 주십시오.”
물론 지나친 노약자에게야 권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많고 다른 병을 앓고 있더라도 신장이나 눈만은 괜찮아 보이는 식구에게는 서슴지 않고 권했다. 그러면 처음에는 주저하던 식구도 나중에 가선 감화되어 대개는 기증 서약서를 써 내밀었다. 그러나 식구가 막 되었을 때는 물론 기회 있을 때마다 그런 설교를 해도 끝까지 기증 서약서를 써내지 않는 식구도 없지 않았다. 오늘 새벽에 죽은 심 순자 아주머니도 그런 식구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이야 이제 오십대였지만 심근경색증을 앓으면서 정신도 좀 정상이 아닌 것 같았던 그 아주머니는 목사님 아닌 그 누구에게서라도 신장이나 안구 기증에 대한 소리만 사오면 노발대발했었다.
"말도 꺼내지 마. 나는 못 줘. 날더러 계속 그렇게 서약서를 쓰라고 하면 나는 여기서 나갈 테여. 정말 더럽구만. 세상엔 공짜가 없다더니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녀. 그것 조금 먹여주고 재워주었다고 신장과 눈알을 내놓으라니,,,,,, 어이구, 생각만 해도 끔찍해라. 한번 죽는 것도 서러운데 왜 두 번씩 세 번씩 죽으라는 거여? 죽은 후에도 저 세상이 있다면서, 그런 걸 떼어주고 저 세상에 가서 나는 어떻게 살란 말이여?"
원 참, 무슨 그런 걱정을 다 하시느냐고, 천국에 가셔서 다시 태어나실 땐 깨끗한 육체를 새로 받으실 텐데 무슨 그런 걸 문제삼으시냐고, 어쩌다 봉사자들이 건네기라도 하면, 더 펄쩍 뛰었다. 너희들이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 옛날부터 제일 큰 형벌이 무엇이었는 줄 아느냐, 죽은 시체를 다시 토막내 죽인다는 말 듣지도 못했느냐, 죽어서도 육신이 온전해야 제대로 저 세상에 가지, 그렇지 않아 가지곤 악귀가 되어 떠돌아다닌다는 걸 모르느냐라고 소리질렀다. 대개의 식구들은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높임말을 쓰는 봉사자들한테 그 아주머니는 한번도 높임말을 쓰지 않았다. 딸이나 아들 대하듯 함부로 대했다. 그것을 다른 봉사자들은 불쾌해하기도 했지만 신혜는 그렇지는 않았다. 허물이 없어 오히려 한 식구 같은 느낌을 더 주어 대하기가 편하기도 했다. 그 아주머니에게서 문득문득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었던 것도 그 때문인지 몰랐다. 원래부터 그렇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도 집을 나가시기 직전, 실성기가 심해지셔서는 그 아주머니 못지 않게 성깔이 고약했었다. 걸핏하면 신혜에게도 이년, 저년 욕을 해대며, 만만한 가재도구를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다, 오빠가 대학에 다니다가 군대에 가 어처구니없게 죽게 된 걸 엉뚱하게 신혜 때문이라고 물아 붙이기도 했다.
죽은 식구는 앰블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가 안구나 신장을 기증하고 화장이 되거나, 아니면 이곳 임시 묘지에 묻혔다. 식구들이 기거하는 '안식의 집' 건물 남쪽 산 한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묘지에 봉분 없이 얄팍하게 묻혀 나뭇가지로 만들어진 십자가 하나를 품에 안았다. 심 순자 아주머니도 그런 과정을 밟았다. 신장이나 안구를 기증하지 않고 죽은 식구들에게도 목사님은 똑같이 정성껏 기도했다. 천국이라는 낱말이 세 번, 영생이라는 낱말이 두 번 반복되는 기도였다. 봉사자들과 불편한 대로나마 기동이 가능한 식구들을 동반한 그 의식은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 걸로 시간을 많이 끌래야 끌 수도 없었다. 식구들이야 상관없겠지만 봉사자들로선 그럴 여유가 없었다.
자기 몸뚱이조차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백 오십 명이 넘는 식구들을 불과 일곱 명밖에 되지 않는 봉사자가 치다꺼리해야 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 일곱 명도 남자는 두 명밖에 안 되고 모두 여자여서 더 힘이 들었다. 심지어는 남자 식구들의 목욕까지 여자 봉사자들이 시켜줘야 되었다, 식사준비나 설겆이, 빨래는 물론 똥 오줌을 받아내는 일까지도 괜찮은데 남자 식구들의 목욕까지 시켜주려면 웬만큼 이를 악물지 않고는 안 되었다. 그만큼 신앙심이 두터워서 그런지 다른 봉사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아니 어느 때는 오히려 더 재미있어하면서 그 일을 했지만, 신혜는 이곳에 온지 석 달이 넘은 아직까지도 그 일만은 자연스럽게 되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날씨가 풀리면서 목욕을 하고 싶어하는 식구가 더 많아진 데다, 하고 싶어하지 않아도 으례 시켜주지 않아서는 안 될 식구들 때문에, 신혜라고 해서 그 일만은 못하겠다고 버틸 수가 없었다.
이날도 그랬다. 잠시도 일손을 뗄 수가 없다가 오후가 되자 약간 틈이 생겼는데 그 틈을 같은 봉사자인 조 금선 선생님이 붙들고 나섰다, 목욕을 시켜주러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짜증이 나, 또 남자 식구라면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생각뿐 차마 그런 말이 나와지지는 않았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온 것도 아니고 스스로 택해 봉사자로 와서 좋은 일 궂은 일 가리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그래도 처음에 와서보다는 이제 천사가 다 된 셈이었다. 팔이 사랑이고 봉사지 처음에는 사실 죽지 못해 사는 여자로서의 자학하는
심정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니다 말기야 했지만 대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콧대깨나 높은 걸로 알려졌던, 남이라고는 도무지 위할 줄 모르며 살아온 여자가 전혀 그런 심정 없이 어떻게 스스로 이런 반송장들이 득시글거리는 집으로 뛰어들었겠는가. 겉으로야 '안식의 집'이라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이름이 붙어 있긴 했다. 이름만이 아니라 실제로 하늘 아래 그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는 이곳 식구들에게는 이 이상 안식을 느낄 수 있는 집이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봉사자의 입장에서는 이 집은 성자나 천사가 되지 않고는 버텨내기 힘든,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로 가득찬 죽음의 집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세상의 냄새 중에 썩어 가는 사람 냄새만큼 역겨운 게 또 있을까. 이곳에 온 첫날, 신혜는 몇 차례나 구역질을 했었다, 복도, 방, 식당, 주방, 변소, 목욕탕 할 것 없이 집안에 온통 배어 있는 형언할 길 없이 고약한 냄새 때문이었다. 어느 집에나 그 집 특유의 냄새는 있게 마련이지만 이 집안의 냄새는 그렇게 유별날 수가 없었다.
음식찌꺼기 냄새나 분뇨 냄새, 또는 시궁창 냄새와도 완연히 달랐다. 뿌려진 소독약 냄새까지 뒤엎고 일어나 코를 찔러오는 그 냄새가 무슨 냄새인지 신혜는 처음엔 몰랐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 그 냄새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그것이 다른 냄새 아닌 바로 사람 썩어 가는 냄새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이 집 식구들 중 몸의 어느 한 곳이라도 썩어가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저 노쇠해 있을 뿐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알고 보면 어디든 한두 군데씩은 심히 앓고 있었다. 하기야 아무리 노쇠해 있다고 해도 특별히 앓는 데가 없이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으면 이 집 식구가 될 자격이 없으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집도 가족도 없는 데다 얻어먹으러 돌아다닐 수마저도 없는 불구자나 병약자, 그 중에서도 어른소리를 들을 만한 사람만이 자격이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혼자 몸이지만 한번 결혼한 경험이 있다는 조 금선 선생님은 나이가 신혜보다 일곱 살이나 더 많고 성격이 남자처럼 시원시원했다. 다른 봉사자들도다도 특히 신혜를 좋아해 무슨 일이든 둘이 함께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꼭 신혜를 동반했다. 신혜는 그것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싫었다. 다른 봉사자들이 쉬고 있을 때도 자기는 쉴 수 없게 만드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조 금선 선생님은 천성적으로 일을 좋아했다. 일을 하지 않고는 잡생각이 들고 좀이 쑤셔 못 견디겠다는 말을 입버릇으로 달고 다닐 정도였다.
"누구부터 시키죠? 남자 식구부터 시킬까요, 여자 식구부터 시킬까요?"
"오늘은 몇 명이나 시켜줘야 되는데요? "
"많이 시켜줄수록 좋죠, 뭐. 적어도 네댓 명은.”
"그럼 여자 식구들이나 시켜주고 말아요."
"안돼요. 남자 식구들이 더 급해요. 남자 식구들은 모두 남자 봉사자들한테 미루고 안 시켜서 꼴들이 말이 아녜요. 강 신혜 선생도 뻔히 보면서 뭘,”
"그래도 남자 식구들 목욕시키는 건 싫어요."
"왜요? 부끄러워서요? 아직도 식구들한테 그런 기분이 남아 있어요?"
"그럼 조 금선 선생님은 남자 식구들 목욕을 시키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에요?"
"뭐가 어때요? 난 더 재미있던데
"뭐요? 재미?"
물론 농담으로 일부러 그런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농담 속에 진담이 있다고 조 금선 선생님은 어쩌면 정말로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켜주지 않고 넘어가도 상관없을 남자 식구들 목욕을 왜 그렇게 애써 시켜주려고 한단 말인가
"놀랄 게 뭐가 있어요? 재미있잖아요? 여자들에게는 달려 있지 않은 고추도 구경하고,,,,,,"
"어머, 참, 자꾸 그러실 거예요? 그러시면 난 안 갈 거예요."
봉사자들 방에서 나와 조 금선 선생님이 앞장서는 대로 식구들이 있는 방들 쪽으로 따라가다가 신혜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울상을 지었다.
"알았어요. 그런 말 안 할께요. 하지만 강 신혜 선생은 역시 봉사자가 되려면 아직도 멀었어요. 병들어 죽게 생긴 식구들 간병하면서 푸슨 그런 걸 다 따져요? 남자라고 해야 거의가 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뻘이 잖아요."
신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인지 조 금선 선생님은 처음부터 남자 식구들 방으로 가지는 않았다. 여자 식구들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거나 곧 죽게 생긴 식구들이 있는 방으로 갔다. 열 세 명의 식구 중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지 않은 식구는 하나도 없었다. 두 사람이 들어가도 눈을 뜨고 쳐다보지도 않고 모두 가느다란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날씨가 좀 풀렸다고는 해도 모두들 추위를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난방이 약한 상태라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기름 보일러로 된 방을 계속 따뜻하도록 땔 수는 없기 때문에 이렇게 견디도록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연탄 보일러로 바꾸는 편이 나을 거라는 생각을 신혜는 겨울 내내 해 왔었다. 조 금선 선생님이 첫 번 째로 일으켜 세운 식구는, 평소에 신혜로서도 유난히 냄새가 많이 난다고 느껴 왔었던 팔순으로 짐작되는 대동아 할머니였다. 노망기가 심한 편도 아니고 말도 어눌하나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은 하는 편인데, 척추가 심하게 굽고 똥 오줌을 받아내야 할 정도로 몸을 거의 쓰지 못했다. 자기 고향이 어디인지도 기억을 못하면서 이따금 대동아 전쟁 이야기와 일본에 떨어졌다는 원자폭탄 이야기를 해 그냥 그렇게 불렀다. 형식적으로나마 일주일에 한번 정도씩 다녀가는 의사의 말로도, 심하지는 않으나 원폭 피해를 입은 할머니 같다고 했다. 이 할머니에게서는 별 증상이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자식을 낳았다면 그 자식들에게선 아마 심한 증상이 나타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목욕을 하시자면서 두 사람이 부축해 목욕탕으로 데리고 가자,
"목, 욕 ---? 곧, 죽을, 틴디---목, 욕은-, 무슨,,, 죽, 더, 라도... 깨, 끗이---허고, 죽으라고? 고, 맙, 구, 먼.., 그, 려, 야, 지 ---천, 당에, 가, 더라도---깨, 끗, 허게,,, 허고,..-.가야, 하, 나님이---좋= 아, 따시, 겄지,,= 라고 느릿느릿 더듬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곧 죽을 사람을 무엇 때문에 목욕을 시켜드리겠느냐고, 할머니는 오래오래 사실 것 같아 특별히 시켜드리는 것이니 더욱더 오래오래 사시라고 큰소리로 말하면서, 조 금선 선생님은 할머니의 옷을 벗겼다. 때를 벗기는 것도 비누질을 하는 것도 조 금선 선생님이 다 하므로 신혜는 할머니의 몸을 붙잡아 드리기만 하면 되었다. 자기 몸을 가눌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구태여 두 사람씩 동원될 필요가 없겠지만, 그렇지를 못하니 어쩔 수가 없는 것이었다. 뼈에 가죽만을 입힌 듯 쭈글쭈글한 그 몸에서도 때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벗겨졌다. 기력이 떨어져서 그런지 시원해서 그런지 할머니는 눈을 감은 채 쌔근쌔근 숨만을 내쉴 뿐 아무 말도 없이 두 사람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한참 때를 벗겨가던 조 금선 선생님이 갑자기 에그머니나 ! 라고 소리를 질렀다. 신혜가 놀라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는 얼굴로 바라보자, 조 금선 선생님은 여간해선 짓지 않는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할머니의 샅 쪽을 내려다보았다. 순간적으로 눈을 감아야 할 만큼 신혜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비명조차 터져 나왔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틀림없었다, 자잘한 허연 구더기 떼였다. 항문에서인지 음부에서인지 구물구물 기어 나와 욕실 바닥으로 흩어져 갔다. 겉으로 어떤 상처가 있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돼서 저런 것들이 !I.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들 목욕을 시켜 왔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종기가 나 짓물러 터진 식구들에게서도 볼 수 없던 일이었다. 두 사람이 그토록 비명을 지르며 안절부절 못해도 할머니는 별로 반응이 없었다. 가려움을 느낄 신경조차 마비되어 있는지 아무렇지 않게
"왜, 그려?"
라고 중얼거리며 눈만 한번 가느다랗게 떴다 감았다. 역시 조 듬선 선생님은 천사가 다 되어 있었다. 구역질이 날 텐데도 측은하다는 듯 쯧쯧 혀만 두어 번 찰뿐 할머니가 눈치채지 않도록 깨끗이 닦아냈다. 밖으로 나와 있는 것들만이 아니라 속 깊숙이 있는 것들까지도 일일이 끄집어내고 샤워 물줄기로 몇 차례씩이나 씻어내었다.
그렇지 않아도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인데 어쩔 수 없이 하다가 그런 것까지 보게 되니 신혜는 정말 목욕시키는 일에는 더 이상 가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조 금선 선생님은 막무가내였다. 산 사람 몸에서 그런 것이 발견되도록까지 식구들을 방치해 둔 데 대해 봉사자들은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더 열을 내어 한 사람이라도 더 시켜주려고 애썼다. 의용군에 끌려간 자식이 언젠가는 꼭 돌아올 것이라고 아직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의용군 할머니,
원래부터 벙어리인지 아니면 실어증에 걸린 것인지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다가도 낮이든 밤이든 가리지 않고 느닷없이 괴성을 지르며 몸을 떠는 실어증 할머니까지 시켜주고 나서도 남자 식구를 세 명이나 더 시켰다.
시대를 잘못 만나 아직 이 꼴로 있지만 자기는 원래 큰 인물이 될 팔자를 타고났으니 언젠가는 꼭 큰 인물이 될 거라는, 자유당 때는 무슨 회사 사장으로 정치가들 정치자금까지 대됐다는, 마누라와 딸은 지금도 미국에서 잘살고 있다는, 하반신을 못 쓰는 큰 인물 할아버지, 이남으로 와서도 결혼을 두 번이나 했지만 이북에 두고 온 아내와 아들 생각 때문에 결국은 다 헤어졌다며, 아내야 몸이 약했으니 죽었을지 모르나 아들은 살아 있을 테니 통일이 되어 아들을 만나보기 전에는 결코 죽을 수 없다는, 반신불수에 천식이 심한 통일 할아버지, 자신이 말년에 이런 꼴이 되어 있는 건 젊은 날에 노름을 좋아한데다 술집 여자한테 미쳐 마누라와 자식들을 다 버렸기 때문이라며 걸핏하면 회한의 눈물을 줄줄 흘리는, 역시 반신을 잘 못 쓰는 바람둥이 할아버지--- 목욕을 시켜주는 동안에도 남자 식구들은 언제나 마찬가지로 짓궂었다. 마비되어 몸을 쓰지 못하면서도 여자 앞에서의 남자 행세를 하지 못해 안간힘을 썼다. 남자의 기능까지 완전히 마비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은 통일 할아버지나 바람둥이 할아버지는 물론 완전히 마비된 것 같은 큰 인물 할아버지까지도, 조 금선 선생님으로 하여금 그 부분을 오래오래 깨끗이 씻어주기를 바라며 그 순간을 즐기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신혜는 얼굴이 달아올랐으나 조 금선 선생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기분 좋은데 좀더 오래 깨끗이 씻겨 달라는 큰 인물 할아버지의 요구에도,
"쓰지도 못하는 물건 깨끗이 씻기만 하면 뭘해요? 냄새나 안 나면 되지"
라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며 그 부분에 물만 두어 차례 더 끼얹어 주었다. 그것을 보면서 신혜는 언젠가 있었던 부끄러운 기억을 되살렸다. 방에서 똥 오줌을 받아낼 정도가 아니고 부축을 해주면 변소로 가 용변을 볼 만한 식구는 부축을 해주는데, 그날 저녁엔 사이판도 할아버지라는 분을 부축해 췄더니 변소 안에서 신혜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2차 대전 때 징용으로 끌려가 사이판도에서 사람고기까지 먹고 살아났다는 분으로 위와 간이 나빠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나라의 난민처럼 기형적으로 깡마른 데다 부축을 해줘야 겨우 걸을 수 있는 칠순이나 된 할아버지라, 순간적으로 망령기가 발동한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넘겨버리기에는 자세가 너무 이상했다. 놀라 왜 이러시느냐는 표정으로 몸을 피해도 불량배처럼 노려보며 끌어안을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신혜가 결국 그 할아버지를 뿌리치고 변소에서 나와 조 금선 선생님으로 하여금 모시고 나오게 한 것은 그 자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용변을 보고 나서 집어넣지 않고 그대로 둔 듯 성기가 바지 앞자락 지퍼 밖으로 나온 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지야 않았지만 더우기나 그것은 결코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노인의 것으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그때도 조 금선 선생닝은 그 할아버지 지퍼를 잠가주고 부축해 나오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망령드셨수? 물건이라고 시들시들 구실도 못하게 생겼고만 무슨 주책이우?"
2
봉사자라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관(棺)짜는 일로 보내는 정 태문 선생님은 흰소리를 잘했다. 웬만한 우스개에도 곧잘 얼굴이 붉어지는 게 재미있어서인지 특히 신혜한테는 더 심하게 굴었다.
"내가 관상 잘 보는 것 모르죠? 강 신혜 선생은 겉으로는 얌전한 척해도, 언제나 눈에 눈물 같은 윤기라 감도는 걸 보면 남자를 상당히 좋아하게 생겼어요. 내가 강 신혜 선생 과거 한번 알아맞혀 볼까요? 어떻게 돼서 이런 험한 곳까지 오게 됐는지......?"
그런 식으로 말을 붙여와 뭐라고든 한마디 대꾸를 해주면 그 앞에서 쉽게 떠나지를 못하게 만들었다. 손으로 붙잡는 게 아니라 말로 붙잡았다. 관을 만들 나무에 톱질이나 대패질, 또는 망치질은 계속하면서 입만으로 묘하게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날도 그랬다.
신혜가 아침 내내 한 빨래를 양지바른 곳에 널고 주방 쪽으로 가는데, 그 사이에 있는, 정 태문 선생님이 대개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관 만드는 장소에서 소리가 들렸다.
"강 신혜 선생, 그러면 못써요."
햇볕을 받기 위해서인지, 허름한 창고 같은 그 건물의 문을 열어놓은 채 일을 하고 있던 정 태문 선생님이 이쪽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또 무슨 흰소리를 하려고 그러는가 하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하도 느닷없는 말이라 신혜는 자연히 눈을 깜박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원 그렇게 속일 수 있어요?"
"속여요? 제가 윌요?"
"애인은커녕 가족도 없다고 했잖아요?"
정 태문 선생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고, 조 금선 선생님이 물어 그와 비슷하게 어물어물 넘긴 적은 있었다.
"제가요? 언제요?"
"조 금선 선생한테 그랬다면서요?"
"모르겠는데요. 기억 안 나는데요. 그랬다 하구요. 그게 뭐 잘못 됐어요?"
"잘못 됐죠. 속인 거잖아요? 찾아왔던데.”
"찾아와요? 누가요?"
정 태문 선생님이 흰소리를 잘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잊을 만큼 신혜는 흠칫 놀랐다.
"부모님이랑 애인이랑, 부모님이 그렇게 의젓하신 분인 줄은 몰랐어요. 애인도 아주 미남이시고,,,,,, 키가 후리후리한데다 탄력이 넘치던데--- 그 누구죠, 영화배우? 아메리칸 플레이보이라는 영화의 주인공, 그 친구하고 비슷하던데,,,”
신혜가 더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눈을 흘기며 떠나오자 정 태문 선생님은 등뒤에다 대고 계속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어젯밤 꿈에 찾아왔었다구요. 알죠? 내 꿈은 보통사람 꿈과 다르다는 것?"
관 만드는 사람은 영통(靈通)을 한다는 것이 평소의 그의 주장이었다. 자기가 관상을 남달리 잘 본다든가 자기의 꿈이 보통사람 꿈과 다르다는 것도 바로 거기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생각해 보라, 그렇게 많은 죽은 사람들의 방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어떻게 영계를 드나들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우연이었거나 또는 어떤 방법으로든 미리 소식을 들어 그랬는지 몰라도 어떤 때는 실제로 희한한 생각이 들만큼 신통하게 알아맞힌 때도 없지 않았다. 관을 짜면서, 이 관은 어떤 식구의 것이 될 것이라든가, 며칟날엔 관이 몇 개 필요할 테니 미리 짜두는 게 좋을 것이라면서 짜면 그대로 맞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아무 날엔 이 집에 귀한 손님들이 들이닥칠 것이라고 하면 기자들이나 요인들, 선교사들, 또는 어떤 자선단체의 사람들이 선물 보따리를 차에 싣고 몰려오기도 했다.
어떤 식구나 봉사자들의 과거를 어림짐작 알아맞히는 솜씨도 보통 수준은 넘었다. 새 식구가 들어와 묻는 대로 잘 대답을 하지 않아 답답하면 정 태문 선생님이 유도 심문하는 식으로 물어 알아내는 일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 집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지혜로운 면이 있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했다. 원래 목수 노릇을 한 일도 없다는, 이제 삼십대밖에 안 된 젊은 사람이 관을 손택없이 짜내는 것만 해도 그랬다. 그전에는 사다 썼었는데 하도 많이 필요하게 되니까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스스로 나서서 짜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혜만이 아니라 이 집의 그 누구도 정 태문 선생님의 과거에 대해서 소상히는 알지 못했다. 무슨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노총각이라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여자 봉사자들 중에는 그에게 특별히 이성으로서의 관심을 갖는 사람도 있었는데 신혜는 언제 한번이라도 그런 적은 없었다. 다만 이따금 그가 던져오는 흰소리 때문에 신경을 써왔고, 이날도 그 엉뚱한 말들로 해서 내내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그
가 내세우는 그의 영통을 조금이라도 믿어, 그의 꿈이 현실화될까봐 그런 것은 물론 아니었다. 애인이라고 말할 만한 남자는 지금은 물론 과거 어느 때에도 없었다. 다만 자기의 순결을 앗아간 남자야 있었으나 그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는 아직도 알고 있지 못했고 구태여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빼앗겼다기보다 내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신혜는 죽음 이외의 그 무엇이고 자기를 구원해 줄 수 없을 것 같은 극한에까지 내몰려 있었다.
국회의원을 지낸 적까지 있지만 계속 야당만을 고수해 온데다 지병이 있어 집 한 채 남겨놓지 못하고 아버지가 죽은 후 집안은 말이 아니었다. 대학에 갓 입학한 신혜는 물론 삼 학년에 재학 중이던 오빠마저 당장 학교를 그만둬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무리 가진 게 없더라도 학교마저 다니지 않아서야 어떻게 되겠느냐고, 어머니는 있는 수단 없는 수단 다 동원해 온 채 전셋집을 방 두 간 짜리 전셋집으로 줄이면서까지 가르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런 꼴이 보기 싫어서였을까. 그런 상황에서 태연스럽게 배우려고 하는 자신이 못 견디게 혐오스러워져서였을까. 어느 날부턴가 오빠는 공부보다 다른 일에 더 열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대학에서나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던 시위에 앞장서는 것으로 학교생활을 일관했다. 어머니나 신혜가 눈물을 흘리며 말렸으나 소용없었다. 끝내 자기 고집을 꺾지 않더니 결국엔 영장이 나와 군대를 가게 되었다. 졸업하고 가기로 되어 있으니 영장이 나을 리가 없는데 나왔다고 오빠는 투덜거렸지만 어머니나 신혜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군대에 가 얽매이게 되면 자연히 여러 면에서 달라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군대에 간지 일 연도 못 되어 유골 상자가 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몰랐다. 사고사라고 했지만 어떤 사고로 어떻게 죽은 것인지 구체적으로는 누구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오발사고라느니 자살이라느니 동료들과 싸우다가 죽었다느니 간첩작전에 나가 크게 부상을 입어 고생하다가 죽었다느니 말들이 많았으나 어떤 말이 정말인지는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었다. 사람이 실성한다는 건 간단했다. 그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언제 한 번 흐트러짐 없이 아버지 뒷바라지에 병구완, 그리고 자식들 교육에 그토록 정성을 쏟아오던 어머니가 오빠가 그렇게 된 후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신혜의 힘으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도록 실성기가 심해져 결국엔 집을 나가버리고 말았다. 곧 돌아오려니 했으나 며칠, 몇 달이 지나도 종무소식이었다. 신혜가 다니던 학교까지 그만두고 친척집, 친구집, 병원, 절, 기도원 등 웬만큼 다녀볼 만한 데는 다 다녀보았으나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실종신고에 심인광고까지 냈어도 허사였다. 그런 와중에서 신혜가 아무리 마음을 다져먹는다고 해도 언제까지나 멀쩡하게 버틸 수 있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더 이상했을 것이다,
지치고 지척 절망의 끝에 이르러 죽음만이 구원해 줄 수 있으리라는 결론을 얻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접근해 오는 거리의 남자한테 순결을 내동댕이쳤던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망가짐으로 해서 좀더 쉽게 죽음에 닿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역시 죽는다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엔 이런 엉뚱한 집에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물론 도피하듯이 붙잡은 신앙이 동기가 되었지만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는 자학의 심정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런 마당에 애인이 어디 있고 부모님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설령 그 동안 어디엔가 살아 있었던 어머니가 회복이 되어 찾아오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물론 어머니가 찾아오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이 집의 식구가 되겠다고 찾아온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역시 날씨가 풀려서인 것 같았다. 교통이 불편한 곳이라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로서는 찬 겨울 강추위가 몰아칠 때는 찾아
오고 싶어도 찾아오기가 힘들 것이었다. 물론 단독으로 오는 일이야 없지만 누구의 안내를 받아 와도 그랬다. 그냥 두면 거리에서 얼어죽을 것 같아 어쩌다가 경찰서나 군청 같은 데서 어쩔 수 없이 데려오는 일은 있었으나 그것도 극히 드물었다. 데려오는 사람들로서도 강
추위가 몰아칠 전 더 부담스럽기 때문일 게 뻔했다. 또 데려온다고 해서 무조건 다 받아주지는 못하기 때문에 이 집으로서도 한겨울에 찾아온다고 해서 좋을 건 없었다. 받아줄 경우에는 괜찮아도 그렇지 못하고 돌려보내야 할 경우에는 그만큼 더 난처하기 때문이었다.
이날 처음에 온 사람은 어떤 젊은이가 오토바이에 싣고 왔다. 무슨 장사꾼인지 오토바이 뒤에 합판으로 짠 때가 끼고 퇴색한 커다란 상자를 싣고 있었는데 그 속네 넣어 가지고 왔다. 그가 집 앞에 바짝 다가왔을 때가지도 신혜는 그 속에 설마 사람이 들어 있으리라고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라면이나 헌옷가지 같은 무슨 구호품, 살아 있는 무엇이라면 돼지나 염소 같은 것쯤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사람이 나왔다. 젊은이가 두 손으로 들어 꺼내놓았는데 얼핏 봐선 한쪽 다치를 제대로 못 쓰는 것 외에는 그다지 큰 이상은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이도 별로 많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라는 호칭보다는 아저씨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날마다 하지는 않았을지 모르나 세수도 자주 한 얼굴이고, 깨끗하게 보이지는 않으나 옷도 두툼히 입은 편이었다.
다른 잡일도 하면서 총무 일도 함께 보는 남자 봉사자 박 해준 선생님이 사무실에서 나와 맞이하자 젊은이가 말했다.
"이분이 이 집에서 살고 싶다고 데려다 달라고 졸라대 데려왔는데 어떤 수속을 밟아야 되죠?"
으례 그렇듯이 박 해준 선생님이 싫을 것도 반가울 것도 없다는 덤덤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물었다.
"두 분은 어떤 사이신데요7"
이쪽에서 무는 의심이라도 할까봐 그러는지 젊은이는 지나칠이만큼 강한 어조로 나왔다.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 그냥 시장 길에서 오다가다 몇 차례 마주쳤었는데, 어찌나 졸라대는지,,,,,, 아, 글쎄 날더러 자기한테 껌 장사 밑천으로 쓰던 돈 오천 원이 있으니 그걸 줄 테니까 데려다 달라잖아요? 내가 그런 돈을 받겠어요?"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껌장사를 하며 살아왔단 말이군요?"
"말이 껌 장사지 비럭질을 한 거죠, 뭐. 더러 보셨을 거 아니에요? 다방이나 술집 같은 데서,,,,,, 가게에선 백 원씩 받는 껌을 이백 원씩 받는 거지들,,,,,,"
"그런데 이제는 왜 그렇게 살지를 못하겠다는 거예요?"
"몸이 아프대요. 몸이 너무 아파 돌아다니지를 못 하겠대요. 오래 전부터 아팠었지만 참아왔는데 이제는 더 이상 못 참겠대요."
"그럼 병원엘 가 보셔야지,,,,,,"
"병원에 육 개월이나 있다가 퇴원을 한 거라는데요, 뭐. 살림 조금 있는 것 병원에서 다 가먹고, 하나 있던 딸마저 어디로 달아나 버려 어쩔 수 없이 껌 장사를 하기 시작한 거래요."
알았다고, 목사님한테 함께 가 보시자며 박 해준 선생님이 앞장을 서자, 젊은이는 머뭇머뭇 뒤로 물러섰다.
"나는 그냥 돌아가면 안 됩니까? 필이 좀 바쁜데
"안 되죠. 결정 여부를 알고 가셔야 되니까."
"결정을 누가 하는데요?"
"목사님께서요. 물어볼 걸 물어보셔서 이 집에 있어야만 할 사람이면 있게 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돌려보내시니까."
다른 면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그 면에선 목사님은 아주 철저했다. 비단 식구만이 아니라 봉사자 한 명을 있게 하는 데도 그랬다. 와서 있으라고 사정을 한다고 해서 있을 사람도 드물겠지만, 스스로 와서 있겠다고 사정을 해도 다 받아주지는 않았다. 심지어는 신혜조차도 스물 세 살이라는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망설였었다. 여행하는 기분으로, 또는 대학생이 방학 때 며칠 동안 시골로 봉사활동 나가는 기분으로 있으려면 아예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었다
세 사람이 목사님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신혜는 자기가 해야 할 일로 돌아왔다. 결국 오토바이에 실려온 그 사람은 있는 걸로 결정이 되었다. 그러나 오후 좀 늦게 두 번째로 찾아온 사람은 있지 못하고 돌아갔다. 일에 쫓겨 신혜가 자세히 보지는 못하고 스치듯이 보았지만 두 번째 온 사람은 열 살이 갓 넘어 보이는 소녀의 손에 부축되어 왔다. 오토바이에 실려온 사람보다 나이도 훨씬 더 들어 보이고 몰골도 눈뜨고 자세히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화상을 입었는지 얼굴이 온통 흉터였고 눈도 한쪽은 흰창만이 있었다. 거기에다 무슨 병이 있는지 몸도 전체적으로 부석부석했다. 어서 빨리 따뜻한 방에 눕혀드리고 싶도록, 어쩐지 곧 죽을 병에 걸려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신혜의 판단으로는, 아간 오토바이에 실려 왔던 사람은 받아주지 않더라도 이 사람은 받아줘야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결국 있지 못하고 돌아간 것이다. 목사님 방에서 나와 돌아갈 때의 광경 역시 스치듯이 볼 수 있었는데 어린 소녀가 뺨이 젖도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물론 모든 건 목사님이 알아서 하니 자기가 신경쓸 일은 아니지만, 그 소녀의 눈물이 잠자리에 들 때가지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신혜가 잠자리에 누워 조 금선 선생님에게 그 이야기를 비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왜 나이도 별로 많지 않고 병도 그다지 깊어 보이지 않는 사람은 받아주면서 그보다 훨씬 더 비참해 보이는 사람은 안 받아주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조 금선 선생님은 한참 묵묵히 있다가 신중하게 말했다.
"나도 얼핏 보았었는데, 겉으로만 봐서야 알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겉이 괜찮아 보여도 속으로는 곧 죽을병을 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겉은 곧 죽게 생겼는데 속은 괜찮은 사람도 있으니까. 그리고 말 들으니까 나중에 온 사람은 그 소녀가 친손녀라던데 아무리 어려도 가족은 가족이니까,,,,,, 자기 할아버지는 여기에 두고 그 소녀는 고아원으로 갈 셈이었던 모양인데 그것도 바람직한 일일지는 생각해 봐야 될 문제고,,,,,"
그러나 다음날 낮에 어쩌다가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정 태문 선생님은 전혀 다르게 말했다.
"강 신혜 선생은 관상으로 봐서는 예술이라도 하게 생겼는데 말하는 걸 보면 영 둔쎈느란 말이야. 척하면 삼천 리라고, 그걸 판단 못 하겠어요? 소녀가 모시고 나중에 온 사람은 한쪽 눈이 불구잖아요? 그리고 몸이 퉁퉁 부었으니 신장도 나쁠 테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우리 식구들을 불쌍하게 생각해서 아무데서나 무조건 자선금을 주는 줄 아세요? 주는 사람들도 있죠. 하지만 그것 가지곤 이 식구들, 어림없어요. 세상엔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는 법이에요. 병원이든 환자든 신장이나 안구 같은 거라도 기증 받아야 한 푼이라도 좀 많이 내놓지 그런 것도 없는데 덮어놓고 내놓을 줄 알아요? 그리고 여기 식구들도 그래요. 대개 다 기증서약서를 쓰지만 여기서 공짜로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지를 않아 보세요. 그래도 그런 걸 그렇게 많은 사암들이 쓸 것 같아요? 목사님으로서도 처음에야 이런 것 저런 것 따지지 않으셨겠지만 세상이 워낙 갈수록 각박해져 이 집도 문을 닫아야 할 지경이 되니 어쩌실 수 없겠죠."
3
한 대의 앰블런스가 다녀갔다. 며칠이 지났다. 또 한 대의 앰블런스가 다녀갔다. 또 며칠이 지났다. 다른 또 한 대의 앰블런스가 다녀갔다. 또 다시 며칠이 지났다. 몇 대인지 모를 앵블런스가 다녀갔다.
완전히 봄이 왔다. 웬만큼 심히 앓고 있는 식구들도 밖으로 나와 햇볕을 쬘 수 있을 만큼 한낮은 따뜻했다. 식사 시간과 예배 시간, 성경 공부 시간을 제외한 자유 시간에는 많은 식구들이 집 앞과 옆에 놓여 있는 벤치에는 물론 우물가, 장독대 옆, 언덕배기, 비탈 등에 나와 웅크리고 앉아 있는 일이 많았다. 하늘을 보는 사람, 산의 나무를 보는 사람, 한없이 펼쳐진 벌판을 보는 사람, 저 멀리 이 집과 이어져 뻗어 있는 길을 보는 사람, 고개를 끄덕이며 옆 사람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 옆에 아무도 없는데 혼자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고 투덜거리다가 소리 없이 웃는 사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아무 곳도 보지 않는 사람.
그런 식구들을 향해서, 햇볕을 받아 번쩍번쩍 빛을 되쏘아내는 검은 빛깔의 승용차 두 대가 들이닥친 것은, 이 집으로서는 가장 한가로운 시간인 오후 세 시쯤이었다. 자연히 식구들의 눈은 일제히 그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승용차들이 이 집 앞으로 들이닥치는 일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지난 연말에만 해도 몇 대씩이나 들이닥쳤었다. 그러나 봄볕을 받아서인지 이날의 승용차들은 검은 빛깔인데도 이제까지의 승용차들과는 달리 유난히 호화스럽게 빛나 보였다. 몇몇은 일어섰고 몇몇은 웅성거렸다. 어떤 식구는 환성을 지르기 도 했다.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식구들까지도 그 웅성거림과 환성에 무슨 일인가 해서 눈을 비켜 뜨며 자리에서 움직였다,
전화 연락이 있었는지, 아니면 득이닥치는 걸 보고서 박 해준 선생님이 연락을 드린 것인지, 목사님이 안에서 알맞게 나왔다. 교회 일로 자주 드나드는 전도사님과 집사님도 마침 목사님 방에 와 있었던 듯 함께 나왔다. 미리 알고 와서 기다린 것인지도 몰랐다.
승용차에서는 정확히 여덟 사람이 내렸다. 운전기사 두 사람을 제외한 여섯 사람이 무얼 하는 사람인지는 신혜로서도 알 수 없었다.
미국인으로 보이는 의젓하게 생긴 늙수그레한 외국인 남녀와 역시 의젓하게 생긴 늙수그레한 한국인 남녀, 그리고 젊은 한국 남자 두 사람이었다. 젊은 한국 남자 두 사람 중 한 명은 어깨에 카메라를 메고 있는 걸로 보아 비서 아니면 기자 같았고, 다른 한 명은 외국인 남녀 옆에 바짝 들러붙어 떠나지를 않는 걸로 보아 통역 같았다. 하지만 나이 많은 외국인 남녀와 한국인 남녀는 성직자인지 재벌인지 고관인지 분별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겉모습만으로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볼 위치에 있는 사람들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승용차들이 들이닥칠 때는 대개의 경우 그랬듯이 이날도 절차는 비슷했다. 인사들이 교환되고 몇 개의 선물꾸러미들이 전달되고 사진이 찍혀지고 떠들썩한 말소리가 오고가고 웃음소리, 이날의 말소리와 웃음소리는 외국인이 섞여 있어서 그런지 좀 색달랐다. 외국인이라도
젊은 선교사들이 섞여 있었던 그전에는 이렇지 않았었다. 그때에는 자유로움과 훈훈함이 감돌았었는데, 지금은 질서정연함과 정중함이 감돌았다. 사진은 계속 찍혔다. 선물꾸러미가 전달되는 광경만이 아니라 각양각색의 식구들 모습도 찍혔다. 외국인 부부, 한국인 부부가 걸어가다가 잠시만 머뭇거리면 그곳은 다 찍혔다. 그곳에는 대개의 경우 사람의 물골과는 가능한 한 거리가 멀어 보이는 식구들이 있었다.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방안에서 쓰레기더미처럼 누워 있거나 쓰레기통처럼 앉아 있는 식구들도 찍혔다.
살펴될 만큼 살펴보고 둘러볼 만큼 둘러본 그들은 목사님 방으로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조 금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신혜가 가지고 가 따랐다. 목사님은 물론 교회 관계 사람들이 올 땐 혼자 도맡다시피 하여 따라왔던 차를 오늘만 유달리 자기에게 따르라고 시 키는 조 금선 선생님이 못마땅했으나 그런 걸 가지고 투정을 부릴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혜가 커피를 따르는 동안 그 안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는 뜻밖에도 고려장(高麗葬)에 관한 것이었다. 아마 생명의 존엄에 관한 이야기 끝에 한국인 부부 입에서 그 이야기가 나온 것 같았다. 통역을 맡은 사람이 외국인 부부에게 통역을 해주자, 외국인 부부는 고개를 내저으며 거기에 대한 자기들의 견해를 이야기했다.
외국인들이 하는 영어를 구체적으로 다 알아들을 만한 실력은 못 되기 때문에 신혜도 통역하는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 외국인들은 고려장에 관한 자기들의 견해에 이어 안락사(安樂死) 이야기까지 꺼냈다. 결론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는, 고려장이야 천만부당한 일인 건 말할 것도 없고, 요즈음도 세계적으로 논의가 되고 있는 안락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문제라고 했다. 설령 식물 인간으로 십 년씩 살더라도, 하나님에서 주신 생명을 어떻게 인간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목사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한
국인 남자가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스치듯 반문했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육체에 칼을 대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칼을 대다노?"
"신장이나 안구 같은 걸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는 행위 말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그에게 준 육체를 왜 다른 사람에게,,,,,,"
"아니죠. 그거야 별개의 문제죠. 그는 이미 죽었고, 죽은 그가 남긴 육체로 해서 새로 한 생명이 태어나게 되는 거니까."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도 이식 받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하지만 그 경우에도,,,,,,"
"모르겠습니다, 뭐가 뭔지,,,,,, 나도 물론 목사님께서 하시는 이 일이 보통 위대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죠. 내 생각으로는 안락사라는 제도도 찬성을 해야 될 것 같아요. 식물인간으로 십 년씩 살다니,,,,,, 그래가지고, 그 주위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 당사자에게도 좋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거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 운운하는 말을 끌어다 대는 건 설득력이 별로 없다는 이야기죠. 식물인간만이 아니라 소생 가망이 없는 불치병 환자들은 적당한 시기에 안락사 시켜 본인도 고통에서 헤어나게 해주고 또 그들로부터 신장이나 안구를 이식 받을 사람들에게도 알맞은 시기에 혜택을 준다면 얼마나 바람직하겠습니까? 우선 목사님부터 이 일을 하시기가 훨씬 수월하실 것이고,,,, 나는 이런 생각도 해봤어요. 우리 나라는 현재 피가 부족해 외국에러 수입을 해 쓰는 형편인데 그런 걸 수입만 해 쓸 게 아니라 우리도 좀 수출을 할 수는 없을까 하는---, 피 아닌 신장이나 안구 같은 것도 우리 나라에서 쓰고 남아 수출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좋지 않겠어요? 꿈만은 아닐 것 같아요. 목사님같이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어쩌다가 큰 죄를 지은 사형수들이 남겨주는 그런 것만 가지고는 어림없는 일이---
신혜로서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이런 이야기들을 주고받다가 그들은 곧 떠나갔다. 그런데 떠나가기 바로 직전에 웃지 못할 뜻 아니한 사건이 벌어졌다. 집 앞 벤치에 앉아서 햇볕을 쬐고 있던 식구들 중의 한 명인 혁명 할아버지가 발작을 일으킨 것이었다. 4대 독자 외아들을4,19혁명 때 잃고 사업마저 5,16혁명이 일어나면서 망하게 되어 자기가 술만 마시다가 이 모양으로 폐인이 되고 말았다는 할아버지였다. 일주일에 한번씩 다녀가는 의사의 말로, 간경변이라 일 년을 더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주독으로 얼굴이 흉측스럽게 검붉은데다 정신도 황폐해 이따금 발작 증세를 보여 왔었다. 걸핏하면 식구들이나 봉사자들한테 시비를 벌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별별 험한 욕설을 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날도 그랬다. 무엇 때문인지, 떠나가기 위해 승용차에 오르려는 방문객들 앞에 나서서 느닷 없이 눈을 부라리고 손가락질, 삿대질을 해대며 큰소리로 욕설을 해 댄 것이었다.
"야, 이 개놈의 새끼들아! 내 똥이나 빨아먹을 새끼들! 우리를 어떻게 보고 그건 개수작들을....., !"
박 해준 선생님이 얼른 나서서 가로막아 끌어갔으니 망정이지, 하는 꼴로 봐서는 금방 누구의 멱살이라도 움켜잡을 기세였다. 미국인 부부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겠지만, 한국인들은 어리둥절해져 저 사람이 왜 저러냐고 중얼거렸다. 죄송하다고, 평소에 광기가 있는 사람이라 그러니 이해하시라며 목사님이 양해를 구해도 나이 많은 남자는 불쾌한 감정을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아무리 광기가 있어도 그렇지, 우리한테 저럴 수가 있어요? 우리가 뭘 잘못한 게 있다고, 가끔 와보려고 했더니 다시는 못 올 곳이구먼."
마치 멀쩡한 사람이 악감정을 가지고 그랬을 때나 똑같이 그러면서 운전기사에게
"갑시다!"
라고 소리친 후 떠나갔다.
이곳 식구들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것 같았던 그분이 그렇게 떠나가서인지 어이없다는 듯 목사님은 혼자 어색하게 쓴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그 일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지 밤에 하루 일과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을 때 봉사자들을 모아놓고 한마디하였다. 여러분들이 여 러 가지로 힘든 줄은 안다, 하지만 좀더 신경을 퍼서 다스리고 이끌어간다면 오늘 오후에 있었던 그런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분들의 근본적인 의도가 어디에 있든 간에 어쨌든 우리 '안식의 집'에 도움을 주려고 하는 분들인데 그런 식으로 보내드려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오늘 오후에 광기를 보인 그 식구가 아니더라도 평소에 광기가 심한 편이어서 위험하게 느껴지는 식구는 앞으로 손님이 오는 날은 밖에 나와 있지 못하게 하는 방향을 취해주기 바란다.
언제나 그랬지만, 목사님의 이 한마디에 대한 반응은 가볍지가 않았다. 목사님으로서는 어느 정도 심사숙고 끝에 한 말인지는 모르나, 목사님의 지시니 그대로 안 따를 수도 없고, 따르자니 그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 집 식구들 중 광기가 없는 식구들보다는 있는 식구들이 훨씬 더 많은데 어떻게 그 짓이 가능하겠는가.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것도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었다. 심하지 않은 사람도 갑자기 심해지는 일이 많은 것이었다. 물론 날씨가 추울 때라면 간단했다. 추울 때라면 나와 있으라고 해도 나와 있지 않겠지만 앞으로 몇 잘 동안은 갈수록 따뜻해지고 더워질 게 아닌가. 따뜻하고 더워 밖으로 나와 있으려는 사람들을 어떻게 강제로 방으로만 몰아넣는단 말인가. 그것도 손님이 올 때는 무조건 모두 다 그렇게 하라면 몰라도, 광기가 심한 식구만 골라 그러라니 난
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사님 앞에서는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있다가 목사님이 사라이자 제각기 한마디씩 하던 봉사자들은, 엉뚱하게 화살을 오늘 방문 온 손님들 쪽으로 돌렸다. 도대체 무엇 하는 사람들인데 우리 식구가 그런 욕 좀 했다고 그렇게 기분 나빠했는지 모르겠다, 무슨 그런 욕을 먹어도 될 짓을 하는 사람들이라 제 발이 저려 그런 것은 아닐까라고, 한 여자 봉사자가 말하자 다른 또 한 여자 봉사자가 그 며에 동조하며 박 해준 선생님을 향해 그분들이 무엇하는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총무 일을 맡고 있기 때문에 알고 있으리라고 믿어 물었을 텐데, 아는지 모르는지 박 해준 선생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굳은 표정만 지었다. 그러자 이번엔 그런 쪽에 비교적 밝은 조 금선 선생님한테도 물었다. 그러나 조 금선 선생님은, 몰라요, 내나 어떻게 알아요? 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신혜가 말을 꺼낸 건 그 때문이었다. 봉사자들 중엔 자기만큼도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던 것이다. 목사님 방에서 커피를 따를 때 그들이 주고받던 이야기를 들려주자, 한 여자 봉사자가, 어머, 그래요? 그럼 무엇 하는 분들일까요? 안락사며 신장과 안구 이야기를 했다면 의료 계통 사람들인 모양이죠? 라고 반응을 보였다. 정 태문 선생님이 나선 건 바로 이때였다. 진작부터 무언가 아는 체를 하고 싶었으면서도 전혀 몰라서 그랬던지 계속 아무 말도 않고 있다가 불쑥 내뱉었다.
"그분들이 무얼 하는 사람들인지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의료계통 사람이면 어떻고 고관나리면 어떻고 재벌이면 어떻다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아마 신장과 안구은행 같은 거라도 구상하고 있는 재벌쯤 되는 모양이죠. 혈액은행이야 우리 나라 에도 있고, 외국엔 그런 은행들이 많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신장과 안구만이 아니라 심장까지도 관할하는,,,,.. 그런 기업이 제자리를 잡는다면 굉장하겠는데요. 대량으로 위탁을 받아 갈아 끼우기를 원하는 돈 많은 사람들한테 판다면,,,,,, 그렇게 되면 이곳 '안식의 집'이 뭐가 되는 셈일까요? 뿔을 얻기 위해 사슴을 사육하고, 쓸개를 얻기 위해 곰을 사육하듯, 신장과 안구를 얻기 위해 임종을 지켜주는 인간 목장---? 모르겠습니다. 나야 곧 떠날 사람이니까 알아서 잘들 해 보시죠, 뭐."
이날 밤 신혜는 악몽에 시달렸다. 정 태문 선생님의 흰소리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자신이 직접 간병해 왔던, 그러나 죽음 직전이나 죽어서 앰블런스에 실려갔던 그 식구들이 눈과 신장이 없는 육신으로 나타나 덤벼드는 꿈이었다. 꿈이 아니고 반쯤 깨어 있는 상태에서의 환각인지도 몰랐다. 괴기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름끼치게 덤벼들며 자기의 눈과 신장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쳤다. 거짓말인지 정말인지는 몰라도 거의가 다 일제 때나 6,25사변 때, 월남전 때 또는4.19때나 무슨 데모사건 같은 역사적으로 큰 사건이 있었을 때 가족 전부나 일부를 잃었고 자신도 그 원인으로 해서 병을 얻었다고 주장하던 아저씨, 아주머니들이었다. 죽기 전에도 모두 비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는데 꿈과 환각 속에서는 그보다도 훨씬 더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소리를 지르다가 신혜는 끝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현실이 아닌 꿈과 환각이었다는 깨달음은 왔으나 그래도 무서움이 가시지를 않았다. 견딜 수 없도록 심장이 계속 격렬히 뛰었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자기가 어떤 상태에 이르러 이곳에 왔는데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절망의 끝에서 죽음을 택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해 그보다 더 비장한 각오로 이곳에 와 이런 일을 했던 게 아닌가. 물론 자기 능력으로는 너무나 부치는 일인 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이 세상에 이보다 더 희생적으로 남을 돌보고 사랑하는 일도 많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최선을 다해 왔지 않은가. 그런데 이 꿈과 환각, 이 견디기 힘든 흔들림은 무엇인가. 아무 데도 갈 곳 없는, 병들어 죽음에 임박한 식구들의 지붕은 될 수 있는 이곳이 자기의 지붕은 될 수 없단 말인가.
신혜가 이런 흔들림 속에 빠져 있는데, 더우기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 태문 선생님이 이곳을 떠났다. 흰소리를 잘해 그냥 괜히 한 말인 줄 알았더니 그날 밤 스치듯이 잠깐 비쳤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이곳에 와 이 년 가까이나 열심히 일해 온 그가 갑자기 떠나는데 대해 봉사자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그는 떠나가면서 별다른 이야기는 없이 이렇게만 말했다.
"한때는 못된 일,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받을 일만 해 왔었죠. 그런데 그 짓도 자꾸 하다 보니 별로 재미가 없더군요.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좋은 일, 맨주먹으로도 남을 위할 일을 찾아다니면서 해와 봤죠. 외딴 섬에 가서 선생 노릇도 해보고, 또 이런 일도...... 옛날 (상록수)의 주인공처럼 요즈음 세상에서 소위 말하는 봉사라는 것을 해 보려고 애써 왔는데, 글쎄요, 이것도 내게는,,,,,, 힘들어서가 아니라 이런 것이 과연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것이 될 수 있느냐는 데에 대한 회의가 와졌다고 할까,,,, 그러나 나야 뭐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렇게들 아시고 남아 계시는 분들은 잘해 보시도록.”
그가 떠났다고 해서 당장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관이야 그가 짜지 않더라도 그전처럼 사다 쓰면 될 것이고, 다른 일들도 여섯 사람이 나눠 조금씩 더 열심히 하면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일으키고 간 바람이 그리 약하지가 않았다. 봉사자들 거의 모두 흔들리는 말들을 했고, 특히 가장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조 금선 선생님마저 어느 날 조용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중에 가서 나를 원망할지 몰라 미리 말해두지만 나도 올 봄이 가기 전에 떠나게 될 거예요. 나는 이곳에 올 때부터 목사님께 말씀을 드렸어요. 정확히 이년 육개 월만 있겠다고, 그런데 다음 달이 약속한 달이거든요. 이 달이 될지 다음 달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남편이 교도소에서 나오게 되면 있고 싶더라도 더 이상 어떻게 있겠어요?"
떠난다는 말도 그렇지만 그보다도 교도소라는 말에 더욱 놀라 모두들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조 금선 선생님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심각히 말을 이었다.
"남편은 사상범으로 교도소 생활을 하는 마당에 내가 밖에서 이런 일 아닌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어요? 뒷바라지할 애들이라도 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도 않은데 돈벌이나 하겠다고 돌아다니겠어요, 어쩌겠어요? 그래서 해온 일인데 나도 모르겠어요, 잘한 일인지 어쩐 일인지 ,,,,,,"
이 집에 온 후 자기에게 기둥이나 마찬가지 역할을 해온 조 금선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말까지 듣고 나니 신혜는 정말 암담했다. 물론 자기의 신앙이 깊지 못한 탓일지 모르나 조 금선 선생님마저 떠나고 나면 이 집에서 자기가 과연 어떻게 버티어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렇 다고 이 집을 떠나서는 과연 어디로 가 더 이상의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그리하여 신혜는 낮이나 밤이나 틈나는 대로 기도하는 데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올 봄 들어 처음으로 비가 내렸다. 구질구질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오후가 되어도 멎지를 않았다. 집안에 켜켜이 굳어 있는 죽음의 냄새를 온통 들쑤셔 헤집어 놓은 그 비 때문이었을까.
신혜가 이 집에 온 후 가장 큰 사건이 벌어졌다. 목욕을 시키려고 목욕탕에 부축해 데려다 놓은 한 식구가 자해(自害)를 한 사건이었다. 일종의 발작이었으나 지난번 혁명 할아버지의 발작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목욕탕 타일 벽에 사정없이 자기 이
마를 짓찧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것이다. 봉사자들 사이에 침묵 아저씨라고 불리던 식구였다. 신혜가 이곳에 온 지 한 달 쯤된 지난 겨울 경찰서에서 데려온 사람이었다. 오십도 때 안 되어 보이는데 사지를 거의 못 쓰고 말을 못했다. 무슨 말을 물으면 눈빛이나 표정, 고개의 끄덕임만으로 겨우 대답했다. 밥도 늘 뜨는 등 마는 등 이제껏 내내 누워서만 지내오다시피 했고, 똥 오줌도 받아냈었다. 그런 그를 다른 식구들이나 마찬가지로 목욕을 시키기 위해 조 금선 선생님과 함께 목욕탕에 막 데려다 놓았는데, 아침 무슨 일 때문인지 한 봉사자가 와서 목사님께서 찾으신다며 조 금선 선생님을 불러갔다. 그와 둘이 목욕탕에 남게 된 신혜는 자기가 옷을 벗기기 어색해 조 금선 선생님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으로 잠깐 밖에 나와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신음소리를 듣고 놀라 신혜가 뛰어들었을 때는
이미 쓰러지고 난 다음이었다. 경악하는 신혜의 소리에 봉사자들은 물론 목사님까지도 달려왔다. 숨은 아직 붙어 있었으나 워낙 쇠약해 있었던 사람이라 살아나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을 뒤집어 살피던 목사님이 잠시 감았던 눈을 뜨며 담담히 말했다.
"앰블런스를 부르지. "
그러나 웬일일까. 목사님으로서는 일단 병원으로 옮기라는 말이었는지도 모르는데 봉사자들은 모두 그 말에서 신장과 안구 생각부터 한 것일까. 말은 못하고 사지는 잘 쓸 줄 모르나 이 식구도 분명히 기증서약서에 서명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일까. 봉사자들 중 어 느 누구도, 심지어는 총무 일을 맡고 있는 박 해준 선생님가지도 곧바로 전화통 있는 데로 달려가지는 않았다. 신혜 역시 언제까지나 움직이지 않을 자세로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아마 세상이 점차 콘크리트화 해가고, 거기에 따라 사람들의 의식 또한 메마를 대로 메말라간다고 생각되어서였을 것이다. 한때 신문이며 잡지며 방송에서 서로 다투듯이 전원(田園) 캠페인을 벌인 일이 있었다. 전원이라는 낱말이 들어가는 갖가지 제목으로 시골에 사는 유명인들의 생활을 취재하는 데 열을 올렸었던 것이라, 소설을 쓴다고는 하지만 결코 유명인은 못 되는 내가 어떻게 되어서 그 대상 중의 하나에까지 기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군청까지 있는 읍내니까 시골은 시골이라도 감히 전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은 못 되는데 잡지사에서 다녀간 한 달 후 또 신문사에서도 다녀갔다. 산을 배경으로 한 나의 전신 사진과 함께 원고지 네댓 장 분의 기사까지 곁들여 실려 나온 것이다. 기사는 나의 신변 이야기와 함께 내가 잡지에 쓴 일이 있는 전원에세이 중 다음 귀절에서 몇 마디를 요약해 쓰고 있었다.
“내가 서울을 떠난 건 스스로 떠난 게 아니라 떠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다가 어쩔 수 없이 밀려나고 만 것이라는 게 오히려 더 솔직한 표현이 될 것이다. 일의 터전이 없다거나 집 한간 마련할 수 없다거나 하는 외형적인 문제가 아니라 다방엘 가도 술집엘 가도 구석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는 내 의식으로는 도저히 더 이상 버텨가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젊어 덮어놓고 살 때는 잘 몰랐는데 이것저것 생각해 가며 살 나이가 되자 그야말로 미칠 것 같았다. 눈에 들어오는 사물 하나하나, 귀에 들리는 소리 따나하나, 의식을 건드리는 현상 하나하나가 모두 고문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좀 과장해서 말하면 결국 나는 미치지 않기 위해, 또는 이미 미쳐버린 나를 다스리기 위해 서울을 떠나와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확실히 신문이란 묘한 힘을 가지고 있는 물건이었다. 이 기사가 신문에 나가자마자 나한테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수십 통이나 되는 편지가 날아든 것이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별별 이상스런 내용의 사연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렇게 경치 좋은 곳에 사시면서 소설만 쓰신다니 얼마나 행복하시냐, 언제 한번 찾아가 뵐 테니 많은 도움을 주시기 바란다------
선생님의 소설집을 사려고 책방을 뒤졌으나 이곳에선 한 권도 구경할 수가 없었다. 구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라---
앞으로 저도 소설을 써 보고 싶은데 현재로선 편지 한 줄 제대로 못 쓰고 있다. 선생님께서 문장 지도를 좀 해 주실 수 없겠느냐---
신문에 난 사진을 보니까 굉장히 미남이신 것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그늘이 져 있어 보였다. 어디가 아프시거나 또는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어 숨어 사시는 게 아니냐,,,,,,
미친 병을 앓으신 적이 있다면서 요즈음은 괜찮으시냐, 저도 실은 육 개월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앞으로 대화나 나누고 싶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런 편지들이 날아든 건 어쩌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너절너절한 편지들 속에 대학교 때 은사이신 성 준식 교수님의 편지까지 끼여 있다는 건 정말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성 교수님의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
최군
신문에 난 자네 기사 읽었네. 자네가 그런 전원에 살고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네.
나는 정년퇴직을 한 후 집에서 줄곧 쉬어오고 있네. 언제 그곳이나 한번 방문해 볼까 하니 차편(車便)과 상세한 약도를 그려 보내 주게.
건투을 비네.
1980년 5월 24일
성 준 식
편지라기보다는 무슨 사무 서식 같은, 그렇게 간단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지만 나는 그 편지를 읽고 나서 뒤통수를 크게 한번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원래 사람됨 자체가 게으르고 칠칠치 못해서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 못하고 살아온 거야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성 교수님으로 하여금 스스로 이런 편지를 보내오시게까지 하다니, 그러고 보니 학교 졸업 후 십 사오 년이 지난 이제까지 내가 성 교수님을 찾아뵌 건 불과 서너 차례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도 졸업 직후 몇 년간, 처음엔 직장을 알선 받기 위해, 그리고 나중엔 직장을 알선해 주신 것이 고마와서 설날 같은 때에 세배를 드리기 위해 찾아뵌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성 교수님의 추천으로 나는 어떤 잡지사에 취직을 했었으나 병고와 실의, 삶에 대한 회의와 절망 등등 누구나 한때 당연히 치를 수밖에 없는 홍역 때문에 곧 그만두고 잠적해 버렸었다. 서울에 살긴 살면서도 아무런 직장 없이 월셋방에만 숨어살면서 지금의 아내가 된 여자뿐 거의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지금의 아내가 된 여자는 그 당시 내게 있어 말 그대로 구원의 여자였었다. 직장을 나가 번 돈으로 내게 월셋방을 얻어 주고 밥을 먹여 주었으며, 한번 기도했다가 실패한 자살을 계속 꿈꾸던 내게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일깨워 주었다. 그렇게 되니까 자연히 성 교수님이라는 존재는 내게 있으나마나 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아니, 내가 그 뒤 성 교수님을 한번도 찾아 뵙지 않은 것은 성 교수님이 내게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려서였다기보다 웃어른을 찾아가 인사드리는 일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나의 천성적인 게으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성 교수님한테는 그분이 애써 알선해 주신 직장을 스스로 그만두고 떳떳하지 못한 삶을 사는 자신이 염치없어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소설 나부랑이를 써 문단이며 세상에 이름을 내민 후에도 나는 한번도 찾아 뵙지 않았다. 찾아 뵙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두세 권의 소설집을 출간하고서도 소설집 한 권 보내드리는 성의조차 보이지를 않았다. 그래도 몇 년 전까지는 대학시절의 추억과 함께 이따금 문득문득 떠올리며 그분의 안부에 대해 마음속으로나마 궁금해한 적이 있었지만 근래에 와서는 그런 예의조차 갖추지를 못했다. 이제까지의 모든 다른 스승이나 마찬가지로 내게서 이미 까마득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뜻 아니한 편지를 받고 나니 그야말로 죽어 있다던 사람을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난 기분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꽤 길게 답장을 샜다. 그 동안의 나의 그릇됨과 몰예의에 대해 누누이 사죄의 뜻을 밝히고, 기다릴 테니 꼭 찾아오시라는 간곡한 당부와 아울러 차편과 상세한 약도를 그려 드렸다. 그러고 나서 일주일이나 지났을까 어느 화창한 날 오후에 불쑥 들이닥쳤다. 그날 따라 이상하게 더 글이 써지질 않아 오전 내내 책상 앞에서 끙끙거리기만 하다가 입이 깔깔하여 마루에 나와 점심 대신 막걸리로 혼자 목을 축이고 있던 중이었다. 첫눈에 봐도 성 교수님이 틀림없는 노신사가 열려진 대문 안으로 들어서며,
"말씀 좀 묻겠소. 이 집이,,,,,,"
라고 말하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학문의 깊이만큼이나 두꺼운 안경알 저쪽의 눈을 경련하듯 깜박거렸다.
"선생님, 접니다. 제가 최군이에요."
"오, 그렇군. 많이 변했는데,,,,,, 거리에서 만나면 잘 몰라 보겠어."
"선생님은 그대로시군요. 조금도 변하시지 않은 것 같아요."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첫눈에 알아볼 수야 있었지만, 성 교수님은 성 교수님이 나를 보고 느끼는 것 이상으로 많이 변해 있었다. 우선 얼굴의 주름살이며 백발이 처량하게 느껴질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옛날보다 더 바닥 야윈데다 살결도 고목 껍질을 연상시켰다. 손도 아직 따뜻하긴 했으나 이미 옛날에 잡아 본 손은 아니었다.
"열무김치에 막걸리라,,,,,,이곳에 오니까 확실히 다르긴 다르구먼. 여긴 막걸리 맛이 괜찮은가?"
"네, 좋아요. 선생님도 한 잔 하시겠어요?"
"아냐, 아냐. 요즈음엔 술이 조금 들어가면 운신을 못해. 더우기나 낮엔,,,,,"
아내로 하여금 인사를 드리게 하자 성 교수님은 아내에게 과자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최군을 만나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구먼. 애는 몇이나 두었소?"
"하나예요. "
"아들 ? "
“네."
"학교에 갔나?"
"아녜요. 이제 다섯 살이에요. 근처 어디 놀러 갔나봐요."
아내가 씻으시라고 세숫물을 떠다 내놓자 성 교수님은 들고 온 가방에서 부시럭 부시럭 세면도구들을 꺼냈다. 잠깐 다셔갈 계획치고는 가방이 왜 커 보였다. 세면도구들 외에 옷가지며 책 같은 것들을 넣어온 것 같았다. 성 교수님이 상의를 벗고 세수를 하는 동안 아내는 밥을 짓고 나는 방을 치웠다. 방이 두 개밖에 없으므로 내가 쓰는 방을 치워드릴 수밖에 없었다. 방의 꼴이 우스워 치우나마나 그게 그거였지만 책상으로 대용해온 호마이카 상위의 원고지들이며, 널려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책들을 대강이나마 정돈시켜 놓고 먼지를 쓸어내었다, 그러나 성 교수님은 세수를 하고 나더니 내가 쓰는 방에는 들어와 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 근처 민박할 데 있겠지?"
"민박을 하시다뇨? 저희 집에 계시죠 뭐."
"그럴까 했는데 와 보니 그렇게 되어 있지를 않구먼."
"물론 누추합니다만,,,,,,"
"누추한 게 문제가 아니라 방이 없지 않나? 둘밖에 없는 것 같은 데 내가 한 방을 차지해 버리면 자네는 어디에서 글을 쓰겠나?"
"그 점이야 염려 마세요. 글을 많이 쓰지 않으니까 안방에서 써도 상관없어요."
"아냐, 아냐. 그래선 안 되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나는 여기보다 좀더 조용한 곳에 있고 싶구먼. 산 속 같은 데가 좋겠어. 그런 마땅한 집 없을까?"
"오래 계시게요?"
"글쎄, 지금 계획으론 있기 싫을 때까지 있고 싶은데---"
"뭘 집필하시려구요?"
"뭐 그런 것은 아니고,,,,,,그냥 쉬더라도 어쨌든 산 있는 데가 좋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성 교수님이 우리 집에 있지 않으려는 게 꼭 우리한테 신세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만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민박 숙식비를 우리가 대신 내드리더라도 성 교수님이 마음에 들어하는 방을 구해 드리는 것이 옳은 처사일 것 같았다.
아내로선 시장까지 다녀와 성의를 다해 점심상을 차렸으나 성 교수님은 뜨는 둥 마는 둥 했다. 밥 두세 숟갈과 국물 몇 모금을 삼키기도 힘이 드는 듯 그는 몇 차례나 이마의 땀을 닦아내었다. 아니 처음엔 이마의 땀을 닦아내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얼굴에 땀이 전혀 배어 있지 않은데도 그는 손을 이따금 얼굴에 가져갔다. 땀을 닦아낸다기보다 얼굴에 붙어 있는 무엇을 잡아 뜯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옛날엔 볼 수 없었던 묘한 버릇이었다. 상을 물리고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그 동작은 신경을 거슬리기에 충분할 만큼 반복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분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그 당장엔 물어 볼 수조차 없었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그분이 원하는 대로 산 속 민가에 방을 얻어 주고 나서 며칠이 지난 후 그 집의 주인 아주머니를 통해서였다.
"거머리 때문이래요. 얼굴에 자꾸 거머리가 달라붙어 근질거리고 뜨끔거려 견디지를 못 하겠대요."
주인 아주머니는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외에도 성 교수님에 대해서 나로선 미처 모르고 있었던 몇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캄캄한 밤에 혼자 무덤 앞에 넋이 나가 있는 것처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계속 멍히 서 있는 일이 많으며 사소한 주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도 얼핏하면 어린애처럼 눈물을 글썽거린다는 것이었다. 그 집에 숙소를 정하던 날 밤의 일이었다고 한다. 바깥주인이 밖에 나갔다가 늦게 들어와 인사를 나누려고 보니 그분이 보이지를 않았다. 방에 없어 변소며 약수터며 서낭당 등 갈 만한 곳을 다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낮에 먼 길을 오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잠자리에 들 시간인데 도대체 어디를 갔단 말인가. 나이가 많은 데다 익숙치 못한 지역이라 어둠 속에 발을 헛디뎌 어디 골짜기로 굴러 떨어지기라도 한 것이 아닐까. 바깥주인은 덜컥 겁이 나 그분이 갈 만찬 전혀 엉뚱한 곳까지 찾아 헤매었다. 플래시를 가지고 골짜기는 물론 우거진 나무숲까지 일일이 비춰 보았다.
그리하여 결국 찾아냈는데 어이없게도 그분은 산등성이에 있는 무덤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던 것이다. 그 광경이 눈에 들써오자 바깥주인은 반가움은커녕 등골이 오싹했다. 그 무덤이 그분과 관계가 있는 무덤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이상 귀신에 홀리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바깥주인이 플래시를 비추며 여기서 무엇하고 계시냐고 하자, 아무렇지 않은 듯이 돌아서며, 주위가 하도 좋아 바람을 쐬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밤중에 하필 남의 무덤 앞에서 그러세요?"
"왠지 무덤이 좋아 보이는구료."
"네에 ? 무덤이 좋아 보이다뇨?"
"왜요? 이상하오? 나도 무덤으로 갈 날이 멀지 않아서인 모양이죠."
"핫, 선생님도,,,,"
“좋아 보이지 않더라도 좋아해 보려고 애를 써야 되겠죠."
웃어넘기기엔 너무나 점잖은 어조로 말을 해 바깥주인은 웃지도 못했지만 그분은 그 짓을 그날 밤으로만 끝내지도 않았다, 낮이나 밤이나 집에 없을 때 찾아보면 대개 무덤 부근에서
그렇게 넋이 나간 것처럼 멍히 서 있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하루는 마루에서 주인 내외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금 비참한 이야기가 나오자, 쯧쯧 혀를 차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산밑 굴속에서 문둥이 여자가 누구의 애인지도 모르는 갓난애를 혼자 낳아 키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랬고 지난봄에 그 산에서 여중학생 하나가 유린 살해된 사건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랬다는 것이었다.
주인 아주머니로부터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나는 한편으로는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고개가 갸웃거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가 들게 되면 사람은 자연히 육체만이 아니라 의식까지도 변하게 마련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옛날의 성 교수님을 생각하면 도무지 상상조차 가지 않은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사소한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글썽거린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이해하는 입장이 되려고 해도 웃음밖에 나와지지 않았다,
대학교 때 성 교수님은 다른 과목을 맡았던 것도 아니고 서양 철학을 맡았었다. 중학생만 되어도 그 이름 을 알 수 있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도 막상 이해해 보려고 접근해 보면 웬만한 의식을 가지고선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첫줄부터 어리둥절해지는 서양의 그 많은 철학자들이며 사상가들 -칸트, 헤겔, 쇼펜하워,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등등을 사상은 물론 혈통까지, 또는 취미며 좋아하는 음식까지 속속들이 주워꿰고 있는, 자기 친구들처럼 들먹이며, 인간과 신, 삶과 죽음, 사랑과 증오, 자유와 구속, 지배와 굴종, ,,,을 자유자재로 이야기했던 그분이었다. 그러니까 그분은 적어도 사십 년 이상을 인생에 대해서 학문적으로 깊은 연구를 해온 누구보다도 냉철한 이성과 뛰어난 지성을 갖춘 학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분이 체신 없이 어떻게 무덤 앞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죽음에 관해 그렇게 유치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며 한 방울의 눈물인들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보일 수 있단 말인가. 막연히 추상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그분은 얼핏 납득이 안 갈 정도로 냉철한 면을 내 앞에서 보인 적이 있었다. 문학병과 함께 광기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고질적인 병이 가장 나를 괴롭혔던 대학교 삼 학년 때의 일이었다. 세상에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조금도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고, 내가 온갖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선 오직 죽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그 무렵 어느 날 성 교수님과 과우들 몇몇과 함께 술집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술자리에선 대개 그랬듯이 그날도 나는 너무나 폭음을 한 나머지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 무슨 이야기 끝엔가 나는 성 교수님의 이야기에 비아냥거리는 투의 반발을 하다가 끝내는 유리잔을 벽에 던져 깨뜨리며 소리쳤다. 분명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당신이 교수면 다냐 교수라는 게 별것인 줄 아느냐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아니 나는 기억을 잘 할 수 없었는데 함께 앉아있었던 과우들 이야기를 들 으니 그랬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술에 취하면 모두가 다 개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하지만 실수라도 너무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성 교수님은 화를 내기는커녕 껄껄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는 것이었다.
"오늘 보니 최군에게도 아주 소중한 면이 있군. 광기, 천재들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광기가 있어."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성 교수님이 그자리에서 그런 태도를 보였다고 해서가 아니었다. 이튿날 잘못을 빌기 위해 그의 집으로 찾아가자 그분은 딱 잡아뗐던 것이다,
"뭐라구? 최군이 내 앞에서 실수를 했었다구? 실수라니, 무슨 실수 ? 모르겠는데,,,,,,나도 워낙 취해 있어서 모르겠어, 도무지 기억이 나지를 않아."
물론 거짓말이었겠지만, 그런 거짓말로써 제자의 체면을 세워 줄 수 있는 사실부터가 그분이 남달리 냉철한 이성을 갖지 않은 이상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서양철학을 담당하고 있는 우리 과의 교수라는 것뿐 나와 아무런 특별한 관계에 있지 않았던 성 교수님을 내가 다른 교수들과 좀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사건이 있고 나서부터였다. 교수들의 연구실을 드나드는 일을 벌을 쓰는 일만큼이나 싫어했던 내가 그분의 연구실을 아무렇지 않은 듯이 자주 드나들게 된 것도 그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분의 연구실을 드나들기 시작한 후 나는 또 한번 씻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분의 연구실엔 나 외에도 몇 학생이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자주 드나들었던 학생 중에 오 혜리라는 여학생이 있었다. 한마디로 학생답지 않게 성적 매력이 철철 넘치던 애였다. 살결이 곱고 몸매도 알맞게 빠진 데다 옷차림이며 말씨며 동작들이 그렇게 세련되어 보일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나보다 한 학년 후배였는데 그 애를 두고 학생들간에 말이 여간 많지 않았다. 남자관계가 이만저만 복잡한 여자가 아니라는 둥 밤에 술집에 아르바이트를 나가는 여자라는 둥 심지어는 성 교수님과의 사이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이야기조차 떠돌았다. 돌이켜보면 낮이 뜨거워지는 이야기지만, 나는 어느 날 그 여자를 한번 건드려보고 싶다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했다. 아니 솔직이 말하자면 생각은 불순하지만 그것이 나한테는 일종의 사랑의 감정 비슷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면서도 그 무렵 나는 누구에게 진실한 사랑이라고 할 만한 걸 쏟을 만큼 정신이 건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비꼬인 감정을 가졌던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어쨌든 한번 건드려 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기회를 노리다가 어느 날 나는 그 기회를 잡게 되었다.
축제 때라 대낮에 술까지 취해 있었는데 성 교수님의 연구실에 가 보니 성 교수님은 계시지 않고 그녀가 혼자 앉아 있었다. 아무리 그녀 혼자 앉아 있었다고 해도 물론 술에 취해 있지 않았다면 나는 그런 짓은 감히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그런데 술에 취해 있는데다 잔뜩 축제 분위기에 들떠 나는 순간적으로 발작 비슷한 걸 일으켰다. 미친놈처럼, 거리의 치한처럼 또는 먹이를 본 굶주린 맹수처럼 느닷없이 그녀에게 달려든 것이다.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자 그녀가 눈을 똥그랗게 뜨며 발딱 일어섰는데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억세게 끌어안으며 키스를 퍼부은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즉각 무슨 영화 속에서처럼 내 뺨을 후려치는 반응을 보여왔다. 뿐만 아니라 아주 노골적으로 치욕적인 빛과 함께 울그락불그락 분노의 감정을 감추지 못하며 뛰쳐나가더니 그 당장 학생과에 가 사실을 이야기해 버렸다. 그 결과 나는 무기정학을 당했고, 그것이 세상을 살고 싶지 않다는 평소의 내 고질적인 병을 한층 더 악화시켜 끝내는 자살 미수소동까지 벌이는 추태를 보였다. 장소를 산의 계곡으로 택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술을 마시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계곡으로 찾아가 동맥을 끊은 팔목을 흐르는 물에 담근 채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핏물 때문에 등산객들한테 발각이 된 것이었다. 과우들과 함께 병원에 나타난 성 교수님은 내게 아무 말도 없이 미소만 크게 지어 보였다. 아니, 처음엔 아무 말도 없다가 한참 후에야 말했다.
"어때? 지금 생각은? 지금도 죽고 싶나?"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눈물만 글썽거리자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주며 다시 말했다.
"그럼 됐어. 나중에 퇴원한 후 이야기하자구."
퇴원을 하고 나서 보니 나의 무기정학 징계가 풀려 있는 건 물론 오 혜리라는 여학생으로 하여금 연구실의 출입을 제한시켜 놓고 있었다. 과우들 이야기가, 성 교수님이 나보다도 오히려 오 해리를 더 나쁘게 이야기하며 출입을 삼가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남자가 아무리 예의에 벗어나는 행위를 보였다고 해도 같은 분야를 공부하는 학교의 한 선배인데 그 정도를 감싸주지 못하고 고발해 징계를 당하게 할 만큼 비정한 여자라면 여자로서 가장 소중한 면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 교수님은 나를 만나자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자살이라는 것에 대해서만 잠깐 이야기했다.
"나도 최군만한 나이 때 자살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봤었지. 최군만큼의 용기는 없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그 무렵엔 어느 하루 죽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 본 일이 없었어. 그런데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그것이 일종의 병이었던 것 같아. 의식이 깊어 있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고 애쓰다 보면 자연히 앓게 될 수밖에 없는 병. 상식적인 말이지만 그런 말들 흔히 하지 않아? 죽을 수 있는 그런 각오로 살려고 애를 쓴다면 어느 누구에 못지 않게 부러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물론 그렇게까지 살려고 애를 써야 할만큼 과연 삶이 가치 있는 것이냐고 물을지 모르나 가치가 있고 없고 문제를 떠나서 주어진 삶을 애써 살아
야 되는 건 이성을 가진 사암으로선 하나의 예의일 것 같거든."
성 교수님이 이곳에 와서 생활하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났다. 우리 집에서 모시고 있지 못한 이상 예의를 차리자면 아침이든 저녁이든 하루에 한번씩이라도 찾아가 문안을 드려야 옳겠지만 역시 천성적인 게으름 때문에 나는 전혀 그러지를 못했 다. 아내로 하여금 밑반찬이며 세탁물 같은 것이나 보살펴 드리라고 말한 후 나는 열흘 동안 두 차례, 그것도 잠깐 들어다보며 인삿말을 건네고 오는 정도에서 그쳤다. 술을 드시는 때라면 술이나 대접해 드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고 하지만 그렇지도 못하니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어쩌다가 무슨 말을 물어도 그전처럼 열을 내어 대답을 해주지 않고 어물어물 흐리멍덩하게 넘어가는 일이 많아 별로 묻고 싶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전혀 엉뚱한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자주 멍한 얼굴을 보였다. 거기다가 얼굴에서 거머리를 잡아내는 그 행동을 신경에 거슬릴 정도로 하는 통에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밑반찬을 가지고 그분한테 다녀온 아내가 웃음을 앞세우면서 말했다.
"참 이상해요."
"뭐가?"
"교수님 말이에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어린애가 된다더니 정말인가 봐요. 아, 글쎄 가방 속을 보니까,,,,,, 훗훗훗."
아내는 한차례 더 웃고 나서야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세탁을 해 주려고 세탁물을 찾으니 내놓은 게 하나도 없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빨아 주었는가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주인 아주머니 역시 빨아 주고 싶어도 내놓지를 않아 못 빨아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래 아내가 별수 없이 가방 속까지 뒤져 세탁물을 꺼냈는데 꺼내면서 보니 그 속에 이상한 책들이 있더라는 것이었다.
"이상한 책이라니?"
"홋홋홋."
"왜 ? 플레이보이지 같은 게 있었던 모양이지?"
"플레이보이지라면 괜찮게요. 플레이보이지야 당신도 잘 보지 않아요?"
"하하 이 여자, 사람 잡을 사람이군. 내가 언제 그런 걸 봤어 ?"
"그전에 봤지 않아요? 친구가 보는 걸 빼앗아 왔다고 해놓고선."
"그랬었나? 어쨌든 그렇다고 하고, 그래 가방 속에 무슨 책이 있었단 말이야?"
"만화들이 들어 있지 않아요?"
"만화?"
좀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나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그게 어때?"
"그게 어떻다뇨? 우습지가 않단 말이에요?"
"요즈음엔 만화도 예술이라고 떠드는 판인데 뭐. "
"그런 만화들이 아니라니까요. 누가 뭐 외국의 뛰어난 만화가들이 그린 만화 말하는 줄 알아요? 아주 유치한 만화들 있지 않아요? 우리나라 저질 만화들,,,,,,"
"성인용?"
"성인용만이 아니라 애들 보는 것도 있더라니까요. 한두 권이 아녜요"
"그런 것들을 왜 가지고 계실까? 손자들 주려고 산 거겠지."
"참 당신두, 손자들 줄 것을 서울에서 사 가지고 내려와요? 주인 아주머니 이야기가 교수님이 꺼내서 가끔 보시더래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잘 잡혀지지가 않았다. 물론 깊은 의식을 가진 가람들이 휴식의 한 수단으로서 상대적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행위나 또는 사물을 택하는 경우는 없는 건 아니다. 가령 누가 봐도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술집에 가서 작부들과 유치한 음담을 아무렇지 않게 즐기는 것도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옛날의 성 교수님을 생각하면 성 교수님과 만화란 아무리 두들겨 맞춰 보려고 애를 써도 맞춰지지가 않았다. 외국에 가서 생활한 적이 있어 그 사이 그런 습성이 몸에 배어버린 것인가, 나야 외국을 다녀오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프랑스 같은 데선 과연 예술이냐 아니냐로 논쟁을 일으킬 만큼 차원 있는 만화들을 차 속에서나 어디서나 신사숙녀들이 다반사처럼 즐겨 읽고 있다고 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렇다면 외국어에 능하니까 그런 차원 있는 외국 만화를 한 권 정도 가져올 수 있는 노릇 아닌가. 그런데 아내가 보기에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저질 만화를 한두 권도 아니고 여러 권씩 가지고 왔다는 건 무슨 이유인가. 어디 만화 협회 같은 회의 심의 위원이라도 되어 윤리 심의 같은 것이라도 하고 있는 중이란 말인가. 따지고 보면 구태여 갖지 않아도 좋을 궁금증이었으나 매사에 그렇듯이 나는 지나칠 정도의 궁금증에 사로 잡혀 있다가 드디어 어느 날 그것을 물어 보고야 말았다. 성 교수님이 묵고 있는 산동네에서도 불과 1킬로미터 남짓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저수지에 낚싯대 두 개를 드리워 놓고 함께 시간을 가지며 물어 보았던 것이다. 주로 낚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불쑥
"선생님께서도 만화를 보신다면서요?"
라고 묻자 성 교수님은 화들짝 놀라는 얼굴로 돌아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 나라고 해서 만화를 보면 안 되겠나?"
"안 되실 거야 없겠지만 좀 이상하게 느껴져요."
"이상하게? 어째서 그럴까? 철학교수였었으니까,,,,,,? 그래서 실망을 했다는 이야기군?"
"실망을 했다기보다 무슨 이유가 있으실 것 같아요. "
"이유? 글쎄, 이유야 재미가 있으니까 보는 거겠지. 최군은 만화를 보지 않는 모양이군? 소설을 쓰는 사람이 만화를 보지 않아서야 되나?"
“……”
"최군이 낸 책들은 잘 팔리나?"
"아뇨. 죄송해요, 선생님. 책을 펴내고서도 보내드리지 못해서, 실은 별로 떳떳이 내놓을 만한 책이 되지 못해서,,,,,,"
"아, 그거야 상관없는 일이고,----,사서 봤으니까 마찬가지지. 그런데 역시 안 팔리게 생겼더군. 소설도 만화처럼 쓰면 잘 팔릴 텐데 말이야. "
“……”
"출판사 사람이 그러더군. 요즈음엔 만화밖에 팔리는 것이 없다고 ..,.,내가 부끄러운 이야기 하나 할까?"
성 교수님은 한동안 침묵했다. 낚시의 찌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으나 찌를 보고 있는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눈이 어두워 안 보여서 그런지 몰라도 찌가 까땍거리는데도 전혀 낚아챌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애초부터 고기를 잡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도 아닌데 내가 대신 낚아챈다는 것도 우스워 그냥 보고만 있자 성 교수님이 말을 이었다.
"옛날 우리 선친은 자기 생전에 자기 책을 스스로 내는 일을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씀하셨었지. 아마 그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최군도 알다시피 나는 소위 학문을 연구한다는 사람이 삼사십 년 연구 기간 동안 한 권의 책도 내지를 않았거든. 논문이라고 해서 여기저기 발표한 것들이야 대여섯 권의 분량이 되기는 하지만 책을 내는 일이 어쩐지 쑥스러웠던 거야. 글답지도 않은 글들을 여기저기 발표한 것도 마지못해 찬 일인데 그걸 무슨 대수로운 것이라고 묶어서까지 내 부끄러움을 자초하겠어? 그런데 나이를 먹게 되니가 사람이 추해지
“……는 모양이야. 왠지 모르게 자꾸 허전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도대체 한 일이 무엇인가를 결산해 보니까 너무 허전해 견디지를 못하겠어, 그래 그 허전함을 조금이라도 메우고 자신한테라도 한 일이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기 위해 초라한 대로나마 한 권의 책이라도 내야 되겠다고 결심했지.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성 교수님은 어디를 앓고 있는 환자처럼 말을 하기도 힘이 드는지 다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숨을 한번 몰아쉬고 나서 한참 후에야 말했다.
"출판사에서 내 책 같은 책은 제작비를 내가 부담하지 않으면 내줄 수가 없다는 거야. 팔리지 않을 게 빤한데 적자 볼 줄 알면서 그냥이야 어떻게 내줄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었어. 그러면서 그러는 거야. 요즈음엔 학술서적이야 말할 것 없고 소설책도 여간해선 안 팔리고, 팔린다는 게 고작 만화들 정도라는 거야. 나쁜 책들만 내는 삼류 출판사라면 또 모르겠어, 그런데 그게 아니고 국내에서 몇째를 다투는 큰 출판사거든. 과거에 학술 서적들도 많이 냈고,,,,,, 그런데 알아보니 그게 거의가 다 자비 출판들이야. 웃음이 나와 그 잘 팔린다는 만화들 좀 보자고 했지. 그랬더니 내주더군. 그래서 읽어보니까 재미가 있어. 심오한 철학서에 못지 않은 철학이 바로 그 속에 있는 거야. 가령 최군도 읽었을 거야. 마키아 벨리의 <군주론(君主論))>. 1513년에 발표되었으니까 벌써 4, 5백 년이 지난 셈인데 아직도 한층에선 탄핵을 받고 있는 글이지. 인간의 약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목적을 달성할 필요가 있다는, 그러니까 악덕이라도 필요하면 좋은 것이라는 주장인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것을 탄핵한 군주들일수록 더 많이 그것을 이용해 먹은 일이지. 그런데 어떤 성인 만화를 보니까 그와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가 있어. 그 만화가가 누군지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아주 놀랄 만해. 그렇게 되니까 뭐가 뭔지 어리둥절해지더군. 그 많은 철학자들이 연구해 온 철학은 물론 이제껏 내가 생애를 바쳐 연구해 온 학문이라는 게 한 편의 만화보다 더 못한 것 같은 느낌조차 드는 거야. 도대체 사람에게 있어서 머리 아픈 학문이라는 게 왜 필요한 것인지 그런 국민학생 같은 회의까지 새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지."
물가에 앉아 있어 물의 장력에 취하기라도 한 것인가. 성 교수님의 의식이 아가보다 약간 젖어 있는 듯이 보였다. 격해지기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옛날의 강의시절을 떠오르게 할 정도로 억양에 힘이 생겨나 있었다. 마키아벨리에 대해서는 대학시절에도 열강을 한 적이 있었다. '짐은 인간성을 망가뜨리려는 괴물에 대해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서 일어났다. 짐은 궤변과 죄악에 대해 이성과 정의로써 대결할 것이다. 짐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해 장마다 반론을 펴놓았다'는 투의 서문과 함께 (반마키아벨리론)을 쓴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가 실은 당시의 정치가들 중에서 마키아벨리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히 실천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었다. 내가 미처 할말을 생각해 내지 못한 채 엷은 웃음만 웃고 있자 성 교수님은 혼잣말처럼 절망적으로 말했다.
"아무리 알다가도 모를 게 인생이라고 하지만 정말 뭐가 뭔지 갈수록 모르겠어."
성 교수님으로서는 그냥 가볍게 토해 놓은 말인지 모르나 나한테는 보통 충격적인 말이 아니었다. 사십 년간이나 인생에 대해서만 학문적으로 연구를 해 온 분이 인생을 모른다면 도대체 그 누가 인생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이날 나는 성 교수님에게 더 많은 것들, 가령 요즈음의 집안 생활은 구체적으로 어떠한지부터 물어 보고 싶었으나 자칫하다간 괜히 심사만 산란케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 같아 가능한 한 참았다. 그런데 며칠 후 서울에 살고 있는 성 교수님의 따님이 나를 찾아옴으로 해서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성 교수님과 함께 고기는 한 마리도 잡지 않은 낚시를 하고 돌아온(알고 보니 낚시를 하자고 한 나의 제안부터가 잘못이었다. 그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어도 찌는커녕 낚싯대 끝도 안 보일 정도로 시력이 나쁘다고 했다) 그날부터 나는 이상하게 몸살기 같은 게 느껴져 자리에 누워지내다시피 했다. 씌어지는 원고보다 파지가 훨씬 더 많은, 그 알량한 쓰는 행위마저 완전히 중단한 채 누워서 잡지나부랑이나 펼쳐 보고 있었는데 지난번 성 교수님이 우리 집에 찾아왔을 때나 비슷한 시각에 따님이 찾아왔던 것이다. 낮이 익다는 것뿐 처음엔 기억이 잘 나지 않았으나 스스로 성 교수님 이야기를 꺼내는 통에 곧 알 수 있었다. 아내 나이 또래이면서도 아내보다는 훨씬 여자 냄새를 짙게 풍겼다. 지상을 통해 나를 자주 뵈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녀는 그 동안 아버님을 보살펴 주셔서 고맙다고 말했다.
"저는 최 선생님 댁에 함께 계시는가 했는데 그렇지 않으시다니 다행이군요. 함께 계셔 글 쓰시는데 방해가 되면 어떻게 해요? 아버님이 옛날 같지 않으시고 요즈음엔 많이 달라지셨거든요. 학교에서 명예 교수직을 주겠다고 해도 마다 하시고 이러시는 거예요. 아마 평생 동안 학자 노릇 해오신 걸. 후회하시나 봐요."
따님은 여러 가지 구구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머니가 재작년에 돌아가시고 아들 내외는 미국에 가 살고 있으며 자기는 결혼해 시집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아버님은 현재 혼자 살고 있는데 가정부를 얻어 드려도 당신 스스로 내보내시고 혼자 사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들 내외가 미국에서 오시라고 초청장까지 보내왔는데도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이 마당에 그곳에 가면 뭘 하겠느냐면서 안 가셨다는 것이었다. 또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별로 그러시는 것 같지 않았는데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죽음에 대해서 부쩍 많이 생각하시는 것 같다고 했다. 텔리비전 같은 걸 보시면서도 눈물을 흘리시는 일이 많고 밤에 주무시지 않을 때도 불을 끈 채 어둠 속에 앉아 계시는 일이 많으며 지난번에 죽은 친구를 꿈에 보았는데 어떤 꼴을 하고 있더라는 등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는데도 누가 찾아온 것 같으니 문을 열어보라는 등 당신이 죽으면 관에 넣지 말고 수의만 입힌 채 묻되 염포로 묶는 짓을 하지 말라는 등의 엉뚱한 이야기를 자주 하시곤 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바람이나 쐬러 가게 애 아빠랑 함께 나오라고 하더니 산으로 데리고 가 엉뚱하게 남의 집 산역(山役)하는 광경을 보여 주시더라고 했다.
"평소에 우리에게 사람은 삶 못지 않게 죽음도 깨끗한 죽음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거든요. 그래서 그러시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아마 이곳에 와 산에 계시는 것도 죽음에 대한 어떤 연습을 하시기 위해서인지도 돌라요. "
죽음에 대한 연습이라는 말이 우습게 들렸으나 나는 웃지 않았다. 자살미수사건 소동을 벌였었던 옛날의 나를 잠깐 떠올렸을 뿐이었다. 아니 내 주변에서 죽어간 몇몇 사람들의 죽음을 떠올렸을 뿐이었다.
따님은 가능하면 아버님을 모시고 갈까 하고 왔다고 했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다. 따님 말대로 정말 죽음에 대한 연습을 하는 것인지 어떤지 아무런 하는 일도 없는 것 같은데도 성 교수님은 따님이 떠난 후 일주일 가량이나 더 있다가 떠나갔다. 떠나가는 날 버스터미널에 가서 버스 표를 끊어드리자 성 교수님은 얼굴에서 거머리를 잡아내는 그 동작과 함께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내가 살 걸 그랬어. 늙은 사람들 표는 함부로 끊어주는 게 아냐. 이 표가 저승으로 가는 표가 되면 어쩌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좀 이상하긴 했으나 그래도 나는 그것이 단순히, 비록 몇 푼 되지 않는 돈이라고 해도 나로 하여금 그것을 쓰게 한 것이 미안해서 그런 것으로만 가볍게 생각해 버렸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나는 불과 닷새 후에 알았다. 성 교수님이 묵고 있었던 집의 우인 아주머니로부터 성 교수님이 이곳을 떠나가기 전날 만화책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는 소리를 듣고 혼자 미소를 지었는데, 바로 그때 서울로부터 병사인지 횡사인지 자살인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성 교수님의 부음(訃音)이 날아들었던 것이다.
최창학(崔昌學: 1941- )
전북 익산 출생. 고려대 국문과 졸업. 1968년 중편 <창(槍)>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하여 등단함. 서울 예전 문예창작과 교수. 그는 현실 속에서의 삶의 왜곡과 훼손의 실상을 밝힘으로써 존재의 자아 상실을 그려내는 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적(敵)>, <긴 꿈속의 불>, <먼 소리 먼 땅>, <형>, <도예가의 마을>, <물을 수 없는 물음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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