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서정(3)
어느덧 밤이 깊었고, 하루 종일 내가 보거나 들었던 모든 것이 하나같이 어제의 것이 되어 버렸다. 낮에는 오랜만에 그와 긴 전화통화를 했더랬다. 나는 언제나처럼 나의 괴로움을 털어놓았고, 그는 언제나처럼 자신은 아무 괴로움이 없다고 말하였다. 진실로 그는 그러한 사람이어서, 내가 “만약 이러는 게 죄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고 하니, “그럼 그러는 것이 좋겠다.”고도 말해주었다. 우리는 약간 즐거운 이야기도 나누었다. 누군가 그것을 엿듣고 있었더라면 무척 어두운 이야기라 여겼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는 위로 따위가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어느덧 밤이 깊었다. 어제나 오늘이나 마치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혹독하게 무더운 여름밤이다.
일 때문에 여기저기를 오가다 간혹 젊은 친구들을 만나면, 그들 가운데 비혼주의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고는 내심 놀라는 요즘이다. 물론 결혼제도는 문명 안에서 쇄락해 가는 중인지 오래다. 다만 나는 특히 이 나라에서 젊은이들이 결혼생활을 영위하기에는 경제적 어려움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결혼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만은 보이질 않는다. 그들은 결혼만 부정할 뿐 연애에 관하여서는 열려 있는 편인데, 대체로 사랑의 유효기간을 몇 년 안쪽으로 규정하고 있고 나는 공감했다. 긴 사랑의 실패라면 나도 일가견이 있는 몸이니까. 한 마디로 연인이 서로간의 오랜 사랑을 믿지 않는 것, 그러한 인간의 한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종의 ‘내려놓음’이 우격다짐 비슷한 제도의 도덕보다는 훨씬 지혜로울 수도 있다는 데에 다시 한 번 더 공감한다. 사랑을 하면서도 미구(未久)에 닥칠 이별을 준비하며 사랑한다는 것은 고약한 노릇일 뿐일까? 마음을 강하게 갖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평소 고난에 노출되어 있어야 근본이 강해진다. 그리고 좋은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알게 된다. 인간은 ‘하는 것’으로 혁명을 이루지만, ‘안 하는 것’으로 구원받는다. 위악에 기대어 살아간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어느 날 이 위악이 더 이상은 위악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이런 혼잣말을 되뇌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만 생각하자. 중요한 것만 생각하자. 중요한 것만을.
이 중요한 것 안에는 서글픔이 끼어들 겨를이 없다. 그리하여 이 중요한 것은 오로지 ‘사랑’일 것이다.
까닭을 밝히기는 싫다. 인생을 대략 80세 정도로 봤을 적에, 이미 50세 가까이를 살아온 나는, 내 인생이 여지없이 실패했다고 본다. 더욱이 향후 이것을 성공한 인생으로 역전시키고 싶은 의사가 전혀 없다. 그런다면 그것은 내 수많은 죄목들 앞에서 면목 없는 일이다. 수줍은 척 허세를 떠는 게 아니다. 진심이다. 그저 내게 자연(自然)으로서 주어진 삶은 끝까지 견뎌보고 싶다. 이미 실패를 자인한 인생으로서 고통은 고통대로 감당하는 대신 더 살고 싶은 대로 살다가 죽을 것이다. 다시금 나는 명백히 실패한 인생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 내 ‘자유’다. 나는 죄인이지만 자유인이며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며 살아가면 된다, 죽을 때까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인간을 믿는 것과 같은 ‘행위’다. 행복은 간사하다. 행복을 바라지 않으면, 불행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또한 문득문득 이런 생각도 하게 된다. 사람이 정말로 끝까지 이기적인 존재일 수만 있다면 이러한 사랑은 충분히 인간의 사랑을 사랑으로서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 없이 살아가거나 사랑을 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사실은 내가 강해지고 아름다워짐으로써 누군가를 기쁘게 해 주고 싶다는 동기가 부여되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답답하고 넘기 힘든 벽인가를 절감하게 되는 때가 있다. 사람은 이기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당신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강해지거나 아름다워지고 싶어 하는 이타심으로 환하게 차오르고, 그것이 요컨대 ‘사랑’일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막상 인간은 이기적이기는커녕 사랑에 있어서도 이기적인 척하고 싶어 하는 참으로 마음이 약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누군가에게서, “시는 지옥에서도 쓸 수가 있어서 좋지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시가 빛을 보는 것은 어둠, 곧 지옥 속이니, 시는 기적이 된다. 시는 사랑의 동의어다.
오늘 한낮 이 전대미문의 폭염 속에서도, 횡단보도에서 내 쪽으로 마주 걸어오던 젊고 수수한 연인은 꼭 잡은 서로의 뜨거운 손을 절대 놓지 않으며 대체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연신 깔깔거리고 있었다. 마치 이 세상 모든 불행더러 엿이나 먹으라는 듯이. 하긴 그런 것이지, 사랑이란. 그리고 청춘이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 사랑의 힘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위로 따위가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듯 과연 저들이 언제 이별하게 되건 간에 감히 저들을 위로할 수 없다. 그와 나는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약간은 즐겁게 나누었는데, 누군가 엿듣고 있었더라면 무척 어두운 이야기라 여길 수도 있었을 테지만, 만일 이러는 게 죄가 되지 않는다면 나는 삶에 있어서 가장 해 볼 만한 것은 사랑이라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어느덧 밤이 깊었다. 또다시 한 인간의 일생이 온통 이런 것만 같은 혹독하게 무더운 여름밤이다. 하루 종일 내가 보거나 들었던 모든 것이 하나같이 어제의 것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가을이 오면 꼭 만나자고 하였다.
4. 괴로운자의 행복
중동의 사막으로부터 메르스가 또다시 찾아왔다는 소문이 들리고, 유황불 이글거리던 여름은 어느새 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꿈같다. 이 감상이 고작 인생의 일부분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싶다. 인생 통째가 흉몽일지라도 꿈은 꿈 아닐까?
편도선이 퉁퉁 부어 고열과 오한이 나 병원에 한동안 누워 있었다. 쓸쓸한 가을바람이 쏘다니는 골목에는 곧 한파가 몰아치리라. 저녁과 밤의 눈보라가 귀가하는 행인들과 집 없는 고양이들을 지워 버린 뒤 북극성마저 얼어붙어 환하게 깨어지게 하리라. 혹여 길을 가다가 메르스를 옮긴다는 낙타와 마주치거든, 절대 악수 따윈 하지도 말고 딱 아홉 발자국만 떨어져서 내 근황을 전해 주길 바란다. 낙타들이 우울증에 걸렸을 때 맞을 법한 큰 주사 두 대를 엉덩이에 맞고 비틀비틀 퇴원했노라고.
여하튼 이제 토토 옆에 엎드려 녀석의 보드랍고 하얀 배를 쓰다듬고 있자니 문득 이렇게 속삭이고 있는 나 자신을 본다. ……토토. 어쩌다 아빠와 너 이렇게 둘이만 남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기가 막혀. 그지?
언제이던가. 내가 그녀에게 말했더랬다.
─나는 고래랑 낙타가 너무 좋아. 나는 걔들이 남 같지가 않아. 걔들이 사람보다 더 사람 같고, 사람들은 백과사전에도 나오질 않는 괴물 같아. 나는 고래랑 낙타가 너무 좋아.
그녀는 내가 한심해서인지 불쌍해서인지 외로운 표정으로 물끄러미 쳐다보았고, 나는 가슴이 아팠다. 내가 나에 대해서 뭘 알겠는가. 나를 사랑하고 있었던 당신보다 내가 나에 관해 뭘 더 알고 있었겠는가.
물론 이 나이를 먹도록 행복하지 않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나쁜 질문이란, 듣고 싶은 답을 자기가 미리 정해놓은 채 상대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나는 그런 질문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러한 질문들을 일삼으면서 살아왔다. 그것이 바로 내 불행의 요체였다. 나는 행복하거나 불행한 사람이기보다는 괴로운 사람에 가깝다. 이것이 내가 존중해야 하는 나의 실증이자 실존, 즉 진짜 현실이다. 어쩌면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아름다운 얼굴과 황홀한 목소리를 사용하지 않는 악마는 없으며 인간은 죄책감마저 무의식적으로 조작한다. 이 끔찍한 사실에 공감 못하는 자들과는 진정한 토론이 불가능하다.
누구는 이렇듯 괴로워하는 나더러 사랑을 해 보라지만, 사랑이 두려운 것은 사랑하던 사람들이 미워하게 되기 때문이 아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들이 업신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던 사람에게서 업신여김 당하는 것은 인생의 가장 잔인한 형벌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다신 사랑을 하지 않는다.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을 업신여길까 봐서.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에게서 업신여김 당할까 봐서. 불행이란 이런 것이다. 한 몸이었던 두 사람이, 어느 날 어느 순간, 하나는 낙타가 되고 하나는 고래가 되어, 하나는 사막으로 가 버리고 하나는 바다 속으로 없어진다. 화석이 되어서도 영원히 재회는커녕 해후할 일조차 없다. 천만번 양보해 다시 만난들, 화석끼리 뭘 어쩌겠는가? 나는 사람의 마음이 사람에게서 떠나는 것을 보았다.
그럼 사랑이야 욕심이라고 치고, 요령이 아예 서지 않는 것은 아니어서, 행복을 바라지 않으면 최소한 불행하지는 않을 수 있다. 인생이 혹독한 슬럼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시절에는 일주일에 3일 독서 3일 등산을 하며 지내는 것이 비책이라고들 하지만, 한 지혜로운 명리학자(命理學者)는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가 보는 것과 용한 점쟁이 옆에서 온종일 앉아 불행한 이들의 사연을 주구장창 들어볼 것을 권하더라. 요컨대 타인의 불행을 통해서 자신의 다행을 확인하라는 소린데. 얼마 전까지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살았던 아파트 단지에서는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젊은 아들(아마도 뇌졸중 환자?)을 부축하여 동네를 아주 천천히 정말이지 못 견딜 정도로 천천히 돌고 도는 한 어머니가 있었다. 그 모자는 틀림없이 요즘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러할 것이다. 타인의 불행을 통해 지금의 내 행복을 발견하는 것은 죄일까? 아니다. 동정도 아니고 교만도 아닌 그것은 진정 죄가 아니다. 타인의 불행을 향해 깔보고 즐거워하는 것은 악행이지만, 내가 엄연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평소 무시하거나 까먹고 있는 행복을 자각하는 것은 겸손이자 깨달음일 것이다. 또한 백과사전에도 안 나오는 괴물이 되기 싫거든 인간은 속된 말로 잘나가는 타인과 평범 이하의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 불행의 씨앗임은 물론이요 평범 이하의 현재 자신과 잘나가던 과거의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곧바로 파멸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자기 자신 안에 감금당해 있는 상태는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사안일지라도 남에겐 오로지 우스꽝스러운 짓으로 비추어질 뿐이다. 때로는 경멸이 우리를 구원한다. 경멸하면 미워하기는커녕 그 옆에 가기가 싫고 그것에 관한 어떤 소리조차 듣기 싫다. 악과는 일단 그렇게 싸움을 시작해야 하는 법이다. 미워하지 마라. 미워하면 그가 너의 옆에 있게 될 것이고, 어느 날 어느 순간 네가 미워하던 그와 비슷해져 있는 너를 발견하게 될지니. 언제부터인가 글이라는 것은 감정을 제어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요즘은 글이라는 것이 감정을 제거하는 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자꾸 싫어져서 너무 무서울 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 됨이니라.
누구나 예외 없이 혼자라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은 어리석다. 교활한 머리로는 온갖 것들을 다 알면서도 이 ‘작은 평화’ 하나 지키기가 왜 이리 힘들까. 행복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흔히 불행이라고 말하는 그 중심에 있으면서도 내가 지금 불행하지 않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행복은 자극이 아니라, 잔잔함 가운데에 있다. 지금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은 내가 잔잔하지 못하는 이유를 고뇌하고 그 원인을 제거하면 된다. 행복은 그 어느 인간보다도 더 간사하다. 하물며 사막도 예전에는 바다였다.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고마운 말씀이지만, 성경이니 불경이니 다 필요 없다. 가볍게 살아야 한다. 지옥에서건 천국에서건 가볍게 살아야 한다. 낙타처럼 살아야 한다. 사막의 배처럼.
나에 대한 믿음을 잃으면 용기를 잃게 된다. 세상에 대한 용기가 없으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된다. 나라고 행복하지 않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은지는 모르겠으나, 불행 속에서도 불행하지는 않다. 이것은 불쌍한 모습이 아니다. 불행을 이기는 나의 모습은 누군가에게는 불행이 아니라 겸손과 용기가 된다. 조용한 음악을 들으면서 차 한 잔 마시는 시간이 불행으로부터 가장 멀다. 죄인이면서도 죄인이 아닌 척하는 자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시간이다. 방황이라는 게 그렇다. 열병처럼 닥쳐와서 안 앓고 넘어가기는 쉽지가 않다. 타인에게 상처와 손해를 입히지 않은 채 자신의 본령을 지키는 과정에서 견뎌냈다면 오히려 다행으로 알고 가만히 숨죽여 기뻐해야 한다. 행복은 행운이다. 스스로가 만드는 행운이다. 길을 가다가 낙타와 마주치거든 딱 아홉 발자국 떨어진 채로 내 이 모든 말들을 전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고래보다는 낙타를 더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말도. 왜냐. 고래는 나를 아프게 하지 못 했지만, 낙타 너는 나를 너무나 아프게 했으니까. 사랑이란 서로가 주고받았던 상처에 관해 아무런 미움도 없이 쓸쓸히 생각하게 되는 일이니까. 그런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