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싫어하는 사람의 행복(7)
지난 가을 저 멀고 먼 독일에서 한 시인이 아직은 아까운 나이에 쓸쓸히 죽었다. 서점을
거닐다 보면, 그녀의 책들만을 진열한 코너가 마련돼 있다. 반가움보다는 슬픈 만감이
교차한다. 시인은 목숨을 저버리고 나서야 사람들 눈에 그나마 아른거리기라도 하는
존재가 돼 버린 지 오래다. 온 세상 시인들이 동시에 파업을 한들 누가 모래 먼지 한
톨만큼이나마 아쉬워해 주겠는가. 섭섭함 따윈 사치다. 이런 걸 시비 걸 요량이었으면
애초에 문학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 잘못이고, ‘망해 버린 시의 나라’의 시민들인
시인들 잘못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단신으로 독일에 유학한 그녀는 고대근동고고학
박사학위를 땄더랬다. 한국에서 독일박사가 얼마나 흔해지고 무용해졌는지는 모르겠으되,
한국인이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것이 얼마나 죽을 고생인지 독문학을 전공한 나는
잘 안다. 게다가 그녀는 그 독일제 고대근동고고학 박사학위를 이용해 뭔가 그럴듯한
이득을 챙기지도 못했다. 그래서인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저렇게 죽을
거였으면서 그녀는 왜 그토록 고통스럽게 살았던 것일까? 차라리 그 기간 동안 한국에서
대충 살았더라면 덜 억울하지 않았을까? 더 재밌지 않았을까? 더 뜻있지 않았을까? 그
몹쓸 병을 미리 발견하고 완치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인생은 정답이 없고 이래도 후회
저래도 후회인 것 같아, 늘 우리는 ‘운명’이라는 단어에 의지한다. 그러나 모호한 운명과는
달리 분명한 것이 여기 있어, 아득히 고독하고 많이 아팠던 그녀는 이 세상 그 어떤
어둠도 물리칠 만큼 아름다운 시와 산문 들을 남겼고, 삶의 무자비한 허무 속에서도
헛되지 않았다는 것. 무엇보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삶이 억울하다고 세상에게 말한
적이 없으니, 이번에는, ‘망해 버린 시의 나라’의 시민들인 시인들 가운데 오직 단 한 명의
천박한 시인인 내 잘못이다. 나는 세상이 싫다.
한 시절 집중적으로 정치칼럼을 이런저런 신문들에 연재했던 전과기록 탓인지, 사적인
술자리에서 국내외의 정세에 관한 질문을 받게 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다. 가령, 향후
북핵문제가 어떻게 진행될 것 같으냐는 식의. 공부하였기에 충분히 진단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는 설명만 늘어놓고 끝을 내면 좋으련만, 나는 꼭 이런 사족(蛇足) 아닌
‘뱀의 틀니’를 보탠다.
─……에,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중요한 것은, 올해 여름에 김정은이가 죽을 수도 있고,
가을에는 백두산이 화산폭발을 일으킬 수도 있죠, 북핵문제는.
타고난 천사 같은 심성에 비해 평소 시니컬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편이지만, 내 위의
저 말은 위악이 아니라 과학적 진심이다. 시간이 흐른 뒤 ‘역사’라는 것이 스스로 각본을
쓰고 각색을 해 줘서 그렇지, 원래 세상일들이란 누적된 연기(緣起) 속에서 어느 날 장난
같은 사고나 황당한 자연재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법이다. 깨달은 자가 별 건가. 멀리
내다보고 깊숙이 들여다보는 자, 그러한 자가 깨달은 자인 까닭은 그래서이다. 뉴스
속에는 바로 엊그저께까지 부러움의 대상이던 위인들이 포승줄에 묶인 채 감옥으로
끌려가고 있다. 설사 정작 그들이 무죄이고 도리어 그들을 잡아넣는 자들이 악당이라고
하더라도 이 아수라장의 규칙에는 공수(攻守)가 뒤바뀐들 그 교훈상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지금 감옥에 있는 재벌 총수는 재벌 총수가 되었을 적에 기뻤을 것이다. 지금 감옥에 있는
국회의원은 국회의원이 되었을 적에 기뻤을 것이다. 지금 감옥에 있는 장관은 장관이
되었을 적에 기뻤을 것이다. 지금 감옥에 있는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었을 적에 기뻤을
것이다. 저들을 저렇게 포승줄로 묶어 감옥에 처넣는 자들이 훗날 저들과 똑같이
포승줄에 묶여 감옥으로 간다손 치더라도 오늘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하고 있는 세상이
자신들의 지옥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으리라.
다 세상을 너무 좋아해서 생기는 일들이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같이 온다. 좋은 일이
왔을 적에 그 안에 숨어 있는 나쁜 일을 보아야 하고 나쁜 일이 왔을 적에는 그 안에 숨어
있는 좋은 일을 보아야 한다. 저들은 더 가지려다가 저렇게 된 게 아니다. 다 가지려다가
저렇게 된 것이다. 그 몇 가지를 더 가지지 않았더라면, 저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저렇게까지는 되지 않을 것이다. 이다지도 정의로움을 자처하는 자들이
사방에 득실득실한데 왜 세상은 한 치도 나아지질 않고 날이 갈수록 더욱 끔직해져만 가는
것일까. 그것이 궁금한 나는, 인간이란 어느 정도 염세적일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역사책을 뒤적여 보라. 불굴의 의지와 환한 희망과 강철이론으로 무장한 자들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나는 세상 사는 게 즐겁다고 그러니 우리 모두 즐겁자고 권하는
얼굴들이 전부 미친 얼굴로 보인다.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것이 있다. 피그말리온이라는 왕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상아(象牙)에 조각한 여인상에게 사랑을 느껴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어 달라고 미의 여신
비너스에게 간청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야기로서, 자식이 그린 낙서를 보고
부모가 ‘이 아이는 그림에 재능이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 아이가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게 된다는 식의 해석이 있는 가 본대. 내 생각은 전혀 다르다.
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한테 반하는 이야기가 토대이지만 피그말리온 효과는 잘난 자기가
만든 무엇에 반하는 이야기이니 병세가 더욱 고약지랄이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나르시시즘과 피그말리온 효과에 중독된 자들과 그 반대편에서 열등감을
나병(癩病)처럼 앓고 있는 자들이 가득하다. 다 세상과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벌어지는
비극들이다. 정치에 대한 불신이 있어야 올바른 정치적 판단이 가능하듯, 인생과 세상에
대한 허무주의가 있어야 적어도 뻔뻔한 얼굴로 죄를 짓지는 않을 수 있다.
가을에는 백두산이 화산폭발을 할까? 여름에는 김정은이가 죽을까? 그러거나 말 거나
내가 알 게 뭐냐. 나는 무서운 인간보다는 웃기는 인간이 되는 편이 더 마음에 든다. 다만
내가 이제야 알겠는 것은, 이 세상 그 어떤 어둠도 물리칠 만큼 아름다운 시와 산문 들을
남겼고, 삶의 무자비한 허무 속에서도 헛되지 않았던 그녀는 일부러 세상을 너무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녀에게 인생이란 이래도 후회 저래도 후회인 것
같아 정답이 없는 세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운명이라는 감옥에 갇힌 자가
아니었다. 나는 이 세상을 좋아하며 살다가 죽지는 않을 것이다.
친구여 이 어둡고 고독한 밤에 호루라기를 불어라
한겨울 속에서 길고양이들을 문득문득 본다. 저 녀석들 가운데 과연 몇이나 이 혹한을
견디고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언젠가 친분이 있는 수의사로부터 들은 바로는,
길고양이들의 수명과 생존율은 다양한 이유들에 의해 매우 짧고 희박하다 한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 우울 같은 걱정 뒤로 궁금한 것은, 어느 거리 어느 골목에서도
길고양이의 사체를 목격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만 그런가 싶어 주위에 물어봐도 다들
마찬가지라고 한다. 도시의 닭이 되어 버린 비둘기들의 사체는 종종 눈에 띄는데 말이다.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코끼리들은 각자 죽을 때가 임박하면 동일한 은폐된 장소로 스스로
가서 조용히 죽는 탓에 ‘코끼리 무덤’이라는 게 있다는데 혹시 길고양이들에게도
저들만의 그런 비밀스러운 공동 무덤이 있는 건 아닐까?
시를 쓰다 보면, ‘이것은 버림 받은 한 인간의 비극처럼 잘 씌어진 시’라는 판단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시를 잘 쓴다는 착각이나 건방이 절대 아니라(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좋은 시’라는 것은 ‘기쁜 시’라기보다는 ‘슬픈 시’이고, 좋은 ‘기쁜 시’라면
그 기쁨 안에는 슬픔이 도사리고 있을 수밖에는 없다는 게 내 미학적 신념이다. 세상에서
안 좋은 것이 미학에서 안 좋은 것만은 아닌 데다가,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들이란 사실 슬픈 것들인 까닭이다. 당신이 어떤 음악을 듣고, 아, 이 음악은 참
아름답다고 느낄 때의 그 감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라. 당신은 필경 슬픈 음악을 듣고 있을
것이다. 그 슬픔이 바로 아름다움이다. 슬픔은 기쁨보다 원초적인 감정일 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감정들의 원초적인 감정이다. 우리는 태어나 세상을 맨 처음 만날 적에 운다.
우리는 슬퍼도 울지만 정말 기쁠 적에 웃지 않고 운다. 표정으로는 웃고 있을지언정
눈물을 흘린다. 아름다운 순간이 슬프고 그 순간이 슬픈 까닭에 아름다운 기쁨이기 때문이다.
슬픔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기쁨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고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다. 그래야 자신이 어떤 시를 가지고 있는 시인인지를 안다.
‘사람들은 모두 시인이다.’ 다만 자신이 시인임을 스스로 무시하고 살아가다가 죽거나
시인이면서도 시인인 줄 모르고 살다가 죽을 뿐이며 심지어 나는 자신 안의 시인을 일부러
살해하는 사람들조차 자주 본다.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애써 괴물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만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자신의 날개를 하늘에서 사용하지 않고
발의 부스러기나 계단쯤으로 여기다가 차에 치여 길에 찌그러져 말라붙어 있는 저
비둘기들의 사체처럼. 사실 우리는 인생의 대부분을 멍 때리거나 무언가에 쫓겨 다니다가
죽는다. 그것이 괴로움의 실체다. 시를 쓰다 보면, ‘이것은 버림 받은 한 인간의 비극처럼
잘 씌어진 시’라는 판단이 들 때가 있다고 했지만, 글을 쓰다 보면, 글을 쓰면서
살다 보면, 삶을 견디다 보면, 외로움이나 낙담보다는 ‘용기’에 대해, ‘용기 있는 사람’에
대해 쓰고 싶을 때가 있다.
한 시대의 첨예한 정신은 항상 자신의 몸과 영혼이 속한 세상을 그 자신까지 포함해서
타락했다고 여기는 법이다. 이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인 병(病)이다. 비정상이 아니라,
앓아야 정상인 병이다. 세상이 아름답다면 글 같은 건 왜 쓰겠는가 말이다. 세상이
아름다운데 아름다운 예술이 왜 필요하겠는가 말이다. 슬픈 세상에서 슬픈 인간에게,
슬프기에 진정 아름다운 것들이 왜 필요하겠는가 말이다. 백지 한가운데 세로로 선을 긋고
그 왼편과 오른편에 사랑하는 것들과 미워하는 것들을 나누어 쭉 써내려가 본다면,
사랑하는 것들은 거의 없고 미워하는 것들의 목록만 끝이 없을 수도 있다. 세상에 대한
성찰이란 세상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부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긍정 없이 살아가자는 게 아니다. 그래야 진짜 긍정이 찾아진다는 말이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드러난다. 그래야 우리는 빛과 어둠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작은 촛불도 아름다운 것은 어둠 때문이다. 인생을 맛있는 곶감들이 주르륵 꿰어진
막대라고 상상해 보자. 그 곶감들을 이미 거의 다 빼 먹은 이가 있을 것이고, 아직 한두
개도 빼 먹지 않은 이가 있다고 할 적에, 나는 당신과 내가 후자이면서도 이만큼
잘 버티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룬 것들이 적잖은 자이기를 바란다. 우리에게는
아직 좋은 일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도 되지 아니하였으나, 웬걸 크게 나쁘지는 않다.
그리고 훗날 우리는 전자의 쓸쓸함을 목도하는 동시에 우리가 후자에 속하였기에 곶감
같은 것들의 유무와는 아무 상관없이 멋진 인생을 살았다는 것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맨 처음 상상했던 그것은 사랑 그 자체이기도 했던 것이다. 희망은 쓸쓸해서 귀하다.
사실 코끼리 무덤이라는 것은 없다고 한다. 코끼리들을 마구 죽여 상아를 남획하는 불법
사냥꾼들이 지어 낸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길고양이들은 정말 어디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오늘도 나는 이 한겨울 혹한의 깊은 밤길을 혼자 걷다가 불현듯 가슴이 미칠 것처럼
답답해져 작은 호루라기라도 있으면 죽을힘을 다해 불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정말로 그러면, 내가 모르는, 아니 인간들은 모르는 어딘가에서 하얀 사체로 얼어붙어
가고 있는, 자신의 생에서 가장 약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홀로 고요히 어둠의 핵심
같은 죽음 속으로 잠들어 가고 있는 길고양이들이 전부 화들짝 깨어나 다시 움직이게
될 것만 같다. 이 고독하고 괴로운 세상의 밤 그 밑바닥에 시체처럼 누워 있던 당신이
벌떡 일어나 ‘나는 나의 시인이다.’라는 혼잣말을 내뱉게 될 것만 같다. 이것은 슬픈
생각인가, 기쁜 생각인가? 어리석은 나는 잘 모르겠으나, 어쩌면 이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하고픈 일이고, 세상에 지쳐 쓰러져 사라지려는 당신들과 나에 대한 내 슬프지만
기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