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바오밥나무와 하나님과
질문이 많은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스무 살 무렵부터 질문하는 게 직업이 돼 버려 지금에 이르렀다. 인간과 세상에 대해 질문이 많으면, 인간을 경멸하고 세상과 불화하기가 쉽다. 몸이 자주 아프고 마음이 심하게 무너진다. 은유나 상징이 아니다. 실제로 그렇다. 요즘은 더하다. 고질을 넘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아예 질문 자체가 답처럼 여겨지는 지경, 하긴. 그게 문학의 본질이긴 하지. 이게 내 파탄의 알리바이다. 어제도 나는 몸이 무너지고 마음이 아팠다. 불만은 없다. 나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뿐이다.
얼마 전, 어느 출판사의 대표인 시인 J형이 전화를 해 나더러 바오밥나무를 키우라고 말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바로 그 바오밥나무 말이다. 거대하게 자라 뿌리로 작은 별을 바수어 버리는. 어린 왕자가 양을 찾는 이유는 양이 작은 별을 돌아다니며 어린 바오밥나무를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 너 식물 돌보는 거 좋아하잖아. 바오밥나무를 씨앗부터 화분에다가 키우는 거야. 그 과정이 굉장히 선적(禪的)이거든.
─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요?
─ 그걸 매일매일 글로 써 나가는 거야. 변화가 생길 적마다 사진도 찍으면서. 이쯤 되니 알 수 있었다. 내게 그런 글을 쓰게 만들어서 자신의 출판사에서 책을 내게 하려는 요량인 것이다. 아직도 내가 어디에 쓸모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 나 어디가 좀 안 좋아서 병원 다니고 있어요. 그런 일 할 수 없어. 신경 쓰는 일은 될 수 있음 줄여야 해요.
나는 어느 출판사 대표이자 시인인 J형의 선적(禪的)이지 않은 계획을 무산시켰다. 바오밥나무는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열대와 아열대의 반사막지대에서 생육한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바오밥나무를 신성시해 죽은 이를 그 속에 집어넣기도 한다고 한다. 꼭 바오밥나무가 아니라도, 나는 모든 나무에게서 하나님을 본다. 동물이나 꽃에게서는 그렇지 않다. 나는 동물이나 꽃에게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흔들리는 인간 같은 것을 본다. 대단한 양반들이 단 한 순간에 몰락하는 소식이 낭자한 나라다. 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능력은 그것 자체만으로는 아직 능력이 아니다. 그 능력을 스스로 사용하고 무엇에게 이용되어지는 것까지가 그의 능력인 것이다. 능력이 있으면 뭘 하나. 무용지물에 악용까지 하고 또 그렇게 되는 인간들이 대부분인데. 겉으로 잘난 것들은 많아도 정작 진정한 능력자는 적은 까닭은 그래서이다. 나는 여러 죽음을 목도한 사람이다. 나는 안다. 그 어떤 위대한 인간도 일단 죽으면 한 줌 재만도 못하다는 것을. 예외는 제로. 그래도 위대하다면 그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풍문과 허무가 그럴듯할 뿐이다.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그저 불덩이일 뿐이다. 아무 의미 없이 이글거리는 죄일 뿐이고, 곧 꺼진다. 이 역시 예외 제로. 하여 인간은 차라리 고독한 게 낫다. 불필요한 죄를 비교적 덜 짓고, 죽어도 그뿐이라는 점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에 좋으니까.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데,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이 ‘해탈’이다. 언뜻 아닌 것 같지만, 불교의 이론이 그렇고 부처님의 현상(現象) 또한 그러하시다. 예수님도 세상 너무 사랑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하나님이 질투하는 하나님이신 것은 다 우리를 위해서다. 사탄까지는 잘 모르겠고, 우리가 욕심 부리다가 괴물이 될까 봐서. 사탄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사탄은 전직이 천사인 타락천사(墮落天使)다. 인간이 천사였을 리가 있나. 자신의 위선을 고백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은 결코 좋은 사람일 수가 없다. 시인들이 모이는 곳에 안 나간지가 한 20년도 더 된 거 같은데, 한 10년 전쯤인가 누구로부터, 요즘은 시인들이 모이면 문학 얘기는 안 하고 연예인 얘기만 한다는 소릴 전해들은 적이 있다. 나한테는 그 얘기가 무슨 나라가 망했다는 말 같았지만, 받아들였다. 워낙 어리석은 짓을 많이 저지르고 살아온 탓인지, 오히려 후회는 별로 안 하는 편이다. 나는 J형에게, 지난 내 인생 스무 살에 실수로 살인을 범하고 감옥에 들어가 30년 만기복역 뒤 출소한 거로 치겠다고 말했다. 세상이 더럽고 치사하고 지긋지긋하지만 세상에 대해 눈을 감아 버리면, 인간은, 특히 작가는, 자학보다 무서운 무기력에 빠지기가 쉽다. 그래서 내가 어쩔 수 없이 ‘위악’을 선택한 거다. 사랑할 가치가 없는 것들을 사랑해 주기는 싫은데, 나를 미워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러는 게 쉬운 게 아니다. 괴로운 진술에는 나의 위선을 고백하는 것만큼이나 용기가 필요하다. 내 인생의 모든 한 순간 속에서 내가 끝이 없는 검은 구멍처럼 여겨지는 밤이 지나가면, 대낮은 내게 읽을 수 없지만 버릴 수는 없는 어떤 책과 같다. 어제 오늘은 책을 많이 읽는다.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이 세상 어디로부터도 고립이 가능하다. 나는 사주(四柱)에 나무가 많고 꽃보다 나무를 더 좋아하는데, 책은 나무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만약 이러한 것도 가치가 있는 인생이라면 내 재산은 ‘고요함’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침묵함으로써 말하는 침묵이다. 들을 수 있는 자들만이 이 속삭임을 들으리라. 소란스러운 것들은 일제히 다 허접하고 비열하다. 인간은 침묵할 때 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된다. 침묵하는 인간은 행동하는 신을 볼 수 있다. 소란스러우면 나는 거지가 된다. 어쩌면 모든 인간들도. 며칠 전 집 앞 카페에서 무슨 일 때문에 누군가를 처음 만났는데, 휴대용 공기청정기를 가지고 다니고 있었다. 미세먼지 차단을 위한 마스크조차 착용하는 법이 없는 나로서는, 그의 제 삶에 대한 애착이 너무나도 신기했다. 집으로 걸어 돌아오는 내내 나는 뭐라 규정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내가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그의 저 다소간 병적인 자기애(自己愛)가 아니었다. 내가 나라는 모순덩어리 자체를 죽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이었다. 슬픔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를 어루만진다.
요즘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속으로만 기도를 한다. 생각을 할 적에도 그런 기도로 대신하여 기도처럼 한다. 빈티지에 대한 취향은 삶에 관련된 모든 물건들에는 물론이요 삶 자체에까지 적용되는 것이 좋다. 상처와 흠집을 좌절과 핸디캡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능력과 매력으로 받아들이는 쪽이 훨씬 지혜롭고 멋있기 때문이다. 어떤 삶도 어떤 물건도 상처가 나고 흠집이 생긴다. 낡고 바래진다. 구멍이 나고 꿰맨 바늘자국이 남는다. 이것을 미학으로 수용하는 태도는 강자의 태도다. 강자의 유머다. 강자의 패션이자, 자기합리화가 아닌 실제로 아름다운 전투력이다. 사람은 예민함만큼이나 둔감력이 필요하다. 둔감력이 부족한 예민함은 예리함으로 승화되지 못한다. 그 누구도, 그 어떤 물건도, 죽거나 불태워지기 전에 상처와 흠집을 피해갈 수는 없다. 삶과 그 삶에 관련된 모든 물건들에 대한 빈티지 취향은, ‘가장 아름다운 것이 사실은 가장 튼튼하다. 아닌 것 같지만, 막상 만들어 놓거나 대면해 보면 그렇다.’라는 ‘나의 미학적 모토’가 참이자 그 역도 참임을 증명해 줄 뿐만이 아니라, 상처와 흠집이 우리를 강하게 함과 동시에 아름답게 한다는 이론의 요술 같은 실현이다. 나는 낡은 나 자신과 낡은 그대의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고 기도한다. 그리고 그대여. 또 그리고 나여. 부디 아무것도 기다리지 마라. 기다리면 함정과 늪에 빠지게 된다. 전부 잊어라. 잊는 것이 기다리는 것보다 뛰어나고 옳은 방법이다. 물론 나는 진실의 힘을 믿는다. 그러나 거짓의 힘도 믿는다. 거짓을 따르는 이들이 이렇게 많은데 무슨 수로 거짓의 힘을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진실은 강하다. 그러나 거짓 또한 적어도 그 이상은 힘이 세다. 진실과 거짓은 비슷한 힘을 가지고 매번 승부를 가릴 뿐인 것이다. 그게 뿔 달린 고양이에 관해서일지라도. 바로 이것이 인간과 세계에 관한 진실이다. 그러니 나는 죽음 앞에서라도 강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여전히 질문으로 가득 찬 내 생의 이 여름은 나의 독선 같다. 벌레를 먹고 자란 예쁜 새 같은 우리, 내가 몰래 지어 부르는 사랑의 노래는 나의 독설 같다. 하지만 ‘사랑에 관하여’의 반대말은 ‘이별에 관하여’가 아니라 ‘멸망에 관하여’이어서, 내가 스스로 바로서면, 설령 불행이 찾아온다고 해도, 그것은 그냥 ‘불행’이라는 고체일 뿐이다. 만지면 벽돌처럼 감각되는. 그래서 그것으로 멋진 집을 지을 수 있는. 내가 남몰래 좋은 종교인이 될 수 있다면, 나는 나의 좋은 군인이 될 수 있다.
시인 J형은 전화를 끊기 전 내게 이렇게 말했다.
─ 스무 살에 실수로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가 30년 만기복역 뒤 출소한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
─ 그냥 빵 하나 훔쳐서 살고 나온 거라고 생각해. 장발장처럼.
과연 나는 시인과 대화를 나눈 것이었고, 그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하루 하고도 반나절 가까운 긴 잠 끝 새벽녘에 눈을 떴는데, 베개가 무언가에 좀 젖어 있었지만, 꿈에서 나는 내가 아프리카의 사막 같은 평원 위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바오밥나무 속에 시체가 되어 누워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같은 바오밥나무와 그 그늘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편히 쉬고 있는 걸 보고 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