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고백(5)
(장르를 가리지 않는) 작가 생활을 어언 30년 정도 하다 보니 작업에 몰입할 적마다
반복되어지는 몇 가지 일들이 있게 마련이다. 물론 초기에는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라며 낯설어 하곤 했었지만, 인생 가운데 끊임없이 겪는 모든 특정한 일들이 대부분
그렇게 우리 각자 안에 홀연 정착되듯, 어느 시점부터는 뭐 그러려니 하게 되고, 결국 이
사랑은 클리셰 내지는 루틴, 무덤덤한 사랑이 돼 버리고 말았다.
이런 것이다. 뭔가를 쓰기 시작하면, 그 글에 관련한 정보와 정보의 원천 같은 것들이
실지로 내 앞에 불쑥불쑥 현현(顯顯)하는 것이다. 가령, UFO(미확인비행물체)가 등장하는
소설을 한참 쓰고 있을 때 조간신문에 UFO 심층취재기사가 실리고, 그날 저녁 어느
술자리에 우연히 앉게 되면 자신이 UFO를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초면의 사람을 만나게
되는 식이다. 내가 UFO의 U자조차 꺼내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런 것을 두고 신비까지
들먹이면 좀 지나치달 수 있겠으나, 그것이 무엇이든 집중도가 극으로 치닫는 창작에는
일종의 무속(巫俗)이 스며들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보다 훨씬 더 자주 작가로서 경험하게 되는 클리셰 내지는 루틴이
있다면, 제 삶을 내게 작품으로 만들어보길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수줍게 권하는
이들이 늘 주변에 꼬인다는 점인데, 막상 끈기 있게 들어보면 쓸 만한 거라고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내 몸 안 어딘가에 ‘소심한’ 자기과시형 정신병자들을 끌어당기는
자석이 박혀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은 전부 스스로의 인생이 유별나다고 믿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고백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사실상 그들이 내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란 ‘UFO 목격담’ 따위가 아니라 ‘고독’이 아닐까? ‘고독을 고백하고 싶은 인간’이
아닐까? 이래서 나는 20세기 이후의 작가란 어쩌면, 인간의 죄와 고독을 죄 사함 없이
경청해 주는 ‘현대의 사제(司祭)’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져보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뿔 달린 수도승’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져보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형수고 운이 좋아봐야 실존적으로든
실재적으로든 고아다. 소심한 자기과시형 정신병자들을 끌어당기는 자석이 내장된 유별난
나라고 한들 고독하지 않을 도리가 전혀 없다. 당신은 어느 때에 가장 고독한가?
개 한 마리와 단 둘이 살고 있는 나는 일상이 고독이지만, 그 일상 중의 것들을 추려
그래도 그럴듯한 것 하나를 골라낸다면, 이리 고백할 수밖에는 없다.
─세상만사가 다 쇼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세상만사를 전부 쇼라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세상만사가 다 쇼라는 사실을 화들짝 깨달아 버렸을 때. 지난번에 깨닫고 나서도
이번에 또 깨달아 버렸을 때. 이번에 이러고 나서도 조만간 다시금 문득 그걸 깨닫게
될 때.
내 위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 만약 당신이라면, 당신은, “나는 고독하다.”고 엄살을
부리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는 진정한 고독을 좀 안다.”고 자부해도 좋다.
지식인이나 예술가가 권력자에게 검열당하는 곳은 그래도 희망이 있다. 그러나.
지식인이나 예술가가 대중에게 검열당하는 곳은 절망적이다. 그런데. 지식인이나 예술가가
다른 지식인들이나 다른 예술가들에게 검열당하는 곳은 ‘절망’이다. 나는 내가 그런 곳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이런 나의 고백을 들은 나의 외우(畏友) 왈,
─그래도 다 아는 사람들이 있다. 다 보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 그런데?
─조용히 사는 사람들.
누군가는 언제 가장 낙담하는가?
그 누군가는 거짓말쟁이의 거짓보다는 거짓말쟁이를 존경하는 대중에게서 더 깊이
상처받는다. 증오가 무분별한 세상도 지옥에 가깝지만, 기실 그것보다 더 끔찍한 세상은
존경이 무분별한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조용히 다 보고 다 알며 사는 이는 더
고독하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은자(隱者)만을 진실로 존경한다. 요즘 젊은 친구들을
인터뷰하다보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유효기간에 대한 명쾌한 자의식’에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연애감정이야 3년에서 5년이면 거덜이 난다고 신앙하는 그들의 판단은
현실적인 것을 넘어서 과학적이다. 돌이킬 수 없는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요컨대,
돈(집, 자녀 교육문제 등등은 다 여기에 포함되는 것 아닌가.)이 없어서 결혼을 못한다는
논거보다 사람의 변심과 사랑의 시듦을 확신하는 비혼주의자들의 출현이 결혼제도 자체를
붕괴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일 적마다, 나는 사랑의 제도와 형식을 부정하면서도 사랑을
모색하고 시도하는 그들의 어둠과 빛이 다 부럽다.
마찬가지로, 은자(隱者)만을 존경하면서 살아가는 일이 사람의 변심과 사랑의 시듦을
확신하면서 사랑을 하는 일만큼 고독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 젊은 벗들처럼
명랑하지조차 못하다. 이 무슨 엄청난 어리석음이며 손해란 말인가. 그래서인가.
『法句經』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이것은 예전부터 말해온 것이고/ 지금 새삼스레 시작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침묵을
지켜도 비난을 하고/ 말을 많이 해도 비난하며/ 조금만 말해도 비난한다./ 이 세상에서
비난받지 않을 사람은 없다./ 비난만을 받는 사람도/ 칭찬만을 듣는 사람도/ 이 세상에는
없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으리라.”
하긴. 세상만사가 다 쇼면 어떤가. 가짜의 거짓보다는 가짜 자체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득실득실하고 무분별한 존경이 무분별한 증오보다 더 무분별하게 창궐하는 세상이면 또
어떤가. 내가 천치(天癡)인 것은 세상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
마음이 아픈 것을 보니, 적어도 내 이 사랑은 무덤덤한 사랑은 아니다.
꽃나무의 일(6)
얼마간 몸과 마음이 많이 아팠다. 세상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아픔이 있는가 하면,
원인은 물론이요 그 결과 역시 잘 알지 못하겠는 아픔이 있다. 마음이 아프기에 몸이
아프게 된 알 수 없는 병이라든가, 몸의 병이 아직 드러나지 않아 마음이 아픈 병처럼.
아픔만이 딱딱한 물질인 채 그 나머지는 전부 안개 같은 아픔. 병원 입원실에 하루 이틀
누워 있기도 했고 조금 나아질 것 같으면 탕진 같은 방황이 있기도 했다. 인생은 정답이
없으며 그저 끝이 없는 문제해결의 과정일 뿐이라지만 이것이 위로라기보다는 막막함일 때
사람은 산 채로 삶에 숨이 막힌다.
본시 나는 식물을 길러 봤자 거의 다 죽이는 편이었다. 태반(太半) 정도가 아니라 거의 다.
그런 한심한 노릇이 자주 반복되다 보니 자연 집 안에 아예 식물을 들이지 않았더랬다.
그런데 내가 8개월 남짓 전 새집으로 이사한 뒤로는 집 안 여기저기에 거짓말처럼 화분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종일 지나치게 과묵한 토토와 단 둘이 지내는 것에 한계를
느껴서이었을 것이다. 외로워서 식물을 키운다? 말 못하는 식물을? 웃기는 소리로
들리겠으나 그게 정말로 그랬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더 이상 내가 식물들을 죽이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상당히 잘 돌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성을 다 해서만이 아니라,
내가 비로소 식물 속에 깃든 침묵의 맛을 배운 까닭이 아닌가 싶다. 깨달음에는 고독이
정성보다 상책인지도 모를 일이다.
일전에는 한적한 골목 귀퉁이 작은 화원에서 이 한겨울 꽃이 없는 꽃나무 분재를 보았다.
내가 꽃보다 나무를 한참 더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꽃이라는 존재를 경멸하기까지
하던 것은 꽃이 지는 꼴이 너무 추하고 허무하게 느껴지는 탓이었다. 그러나 문득 그날은
꽃이 보고 싶었다. 한겨울에도 내 집 안에서 꽃을 본다면 몸이든 마음이든 아니면 둘
다이든 회복되는 기적을 만나게 될 것만 같았다. 와중에 그 작은 화원의 주인인
청년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꽃은 상황이 안온할 적에 피는 게 아니라 도리어
시달리게 되는 경우에 스스로 살고자 하는 몸부림 안에서 피게 되는 거라고. 창가에 두어
기온과 풍광의 부침을 겪는 난(蘭)과 꽃나무가 오히려 자주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이것이 원예(園藝)의 정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요즘 아침마다
꽃나무에 물을 주고 있는 나는 굳이 그 말을 믿고 싶다. 더 정확하게 그날 나는 꽃보다는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어제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중절모들을 내가 좋아하는 어느 형님에게 드렸는데
마음에 들어 하시기에, 무척 기쁜 나는 내 아버지께서 형님을 지켜주실 거라고 말했다.
어차피 중절모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는 식구라고는, 친척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독신(獨身)에 천애고아(天涯孤兒)이기에 그런 물건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 내가 홀연 죽고 나면 그런 것들이 덩그러니 남아서 이 세상에서 천하게 떠돌다가
버려질까 봐서. 내가 죽기 전에 가지고 있는 물건들 가운데 좋은 것들은 다 그런 식으로
의미 있게 처분하고 죽을 것이다. 내 책들과 음반들도 그렇게 할 것이다. 후일 지금의
토토가 예전의 토토처럼 무지개다리를 건너가게 되면, 개마저도 더 이상은 키우지 않을
것이다. 남은 인생 스스로를 승려 내지는 괴승(怪僧)이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히 살다가
죽겠다. 결국 이 모두가 ‘마음’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고, 이윽고 나는 이러한 생각에
잠긴다. 누가 나를 시달리는 자리에 놓으셨는가?
꽃은 상황이 안온할 적에 피는 게 아니라 도리어 시달리게 되는 경우에 스스로 살고자
하는 몸부림 안에서 피게 되는 거라고? 창가에 두어 기온과 풍광의 부침을 겪는 난(蘭)과
꽃나무가 오히려 자주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이것이 자연의
정설이건 아니건 간에, 요즘 아침마다 꽃나무에 물을 주고 있는 나는 그 말을 굳이 믿고
싶어도 차마 가슴이 아파 나의 꽃나무를 시달리는 창가에 두지는 못하였다. 누가 나를
괴로운 자리에 두셨을까? 나보다 마음이 강한 하나님께서 그러셨을 것이다. 꽃 피우라고.
어서 꽃 피라고 그러셨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원래 그런 일이고 구원 또한 그런 것이다. 사랑도 아마 그런
것이리라.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의 중절모가 어느 한 사내를 지켜주시는
일처럼 나를 지켜주시는 일. 괴로움 속에서도 나와, 언젠가는 내게로 다가올 당신을 믿는
일. 꽃나무의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