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배 속에서 등불을 켜고(9)
모든 인간이 다 죽는다는 사실은 나를 기쁘게 한다.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다 같이 함께’ 죽는 셈인 것이다. 이것이 내가 젊은 시절, 공산주의에 별 매력을 못 느낀 근본적인 이유다. 나는 어리고 무지하였으나, 내가 그런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희극도, 불행도 아니다. 그냥 그러했을 뿐.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어쩌면 그런 이야기다.
아무리 닦아 내도 지워지지 않는 유리병 속 지문.
그럴 리가. 내 참.
있을 수가 없는데 버젓이 있는 유리병 속 지문.
내 상심처럼.
이 시는 내 세 번째 시집 『애인』에 실려 있는 「유리병 속 지문」의 전문이다. 저 유리병은 이사 중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지만, 시적 판타지가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다. 내게는 저러한 유리병이 있었고, 나는 한참을 바라보며 당황했더랬다. 어떻게 유리병 속에 누군가의 지문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나의 지문일까?
인생은 너무 빠르게 흘러가 버린다. 십 대의 어느 날 어느 환한 대낮 창가의 햇살 속에서, ‘나는 언제나 늙을까?’ 하는 생각을 품었던 게 기억난다. ‘나는 언제나 어른이 될까?’가 아니라, ‘나는 언제나 늙게 되는 것일까?’ 하는. 그만큼 그 시절에는 시간이 너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이제 이미 육체적으로 늙어 버린 나는, 나이를 먹어 갈수록 가속도가 붙어 가는 시간 속에서 정신이 혼미하다. 왜 그럴까? 왜 십 대보다는 이십 대가, 이십 대보다는 삼십 대가, 삼십 대보다는 사십 대의 세월이 더 빠르게 왔다가는 이내 멀어져 가는 것일까? 나의 결론은 이렇다. ‘새삼스러움’이 증발돼 버린 탓일 게다. 세상과 삶에 대한 경험이 쌓일수록 모든 것들이 익숙해짐을 넘어서 심드렁해지고만 것이다. 같은 영화를 두 번 보고 세 번 보고 그렇게 반복해 보는 횟수가 늘어 갈수록 그 영화의 러닝타임이 짧게 받아들여지는 이치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길들여진다는 것은 시간에 대한 감각이 엷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젊은 시절은 천천히 흐르는 반면, 이후의 삶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빨리 달아나는 것이다.”라고 소설가 토마스 만은 갈파했다.
청춘의 시기에는,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견디다가 죽을지 모른다는 맘까지는 들지 않았는데 요즘은 견디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가끔씩 찾아온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당연히 젊어서도 죽을 수 있고 또 실지로 죽은 내 젊은 벗들도 종종 있었다. 엄밀히 말해, 언제 누가 죽고 언제까지 누가 사는 것은 우리가 결정하는 게 아니다. 누구는 전쟁터의 백병전에서도 살아 돌아와 늙은이가 되어서야 가까스로 죽고, 누구는 무균캡슐 안에서 지낸다 한들 쉽사리 시들어 죽는다. 가장 무서운 것은, 자기가 이미 죽은 인간인지도 모른 채 버젓이 살아가는 인생일 테지만. 오늘은 갑자기 우박과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한낮이 캄캄해져버렸다. ‘나는 언제나 늙을까?’하는 생각을 품었던 십 대의 어느 날 어느 환한 창가 햇살은 아예 존재해 본 적도 없었던 것처럼. 자살률이 전 세계 부동의 1위라는 이 나라에서 내 지인들 가운데 자살한 사람은 다행히 별로 없다. 대학교 시 쓰는 동아리에서 만난, 전기공학과 90학번 후배 하나가 십몇 년 전쯤 사업 실패로 돈빚에 몰리다가 자살했다는 연락을 받았었고 그때 나는 장례식장에 일부러 가지를 않았더랬다. 내게 육박해 오는 감정이 대체 무엇인지 잘 이해되지가 않아 겁을 먹었던 모양이다. 착하디착한 녀석이었다. 시도 잘 쓴 걸 한두 편 보고는 속으로 몰래 감탄했던 추억이 있다. 이 비와 우박의 어둠 속에서 유독 그 친구 얼굴만이 아련하다. 반면, 문인들 중에는 자살한 지인들이 적잖이 있고, 내용상 자살이라기보다는 자살에 가까운 사고사라든가 자연사라고 규정해야 할 죽음은 더 많았다. 문인들 팔자라는 게 예나 지금이나 다 그렇지 뭐. 가만 보면, 마음이 여린 축에 드는 글쟁이들이 여하간 일찍 죽는다. 개 같은 인간들, 말가죽을 생으로 씹는 것 같은 질감의 쓰레기들은 절대 안 죽는다. 백 살 이상은 살 것들 같고 실지로 온갖 만행들을 버젓이 저지르면서도 불멸이다. 걔들은 거짓말과 위선도 항시 성공적이어서, 세상이 존경해 주는 풍경이 마치 탁월한 요술쟁이의 위엄을 목도하는 착가마저 불러일으키는 바이다. 그들은 절망마저 코스튬 같다기보다는, 애초에 절망 자체가 유전자에 없는 거 같다. 물론 부럽진 않다. 우박과 비바람의 나날, 마음에 내려앉는 어둠이 무서운 세상이다.
내 인생이 이미 허물어져 버렸다는 우울에 갇힐 적마다, 어느 유명 가수를 애처로운 습관마냥 애써 생각한다. 나는 참혹한 구렁텅이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그를 단 한 번 스치듯 만났더랬다. 그는 피가 새까맣게 타 버리고 살과 뼈와 영혼이 다 문드러져 있었다. 아무도 그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보였다. 어려서부터 그의 음악을 사랑하고 존경해왔던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치듯 만났으니, 스치듯 헤어졌고, 그 이후 그는 자신의 부모님이 나란히 누워계신 무덤가로 가서, 저 이제 그만 살래요, 라고 말하고는 시계와 지갑 등의 소지품들을 거기에 두고 자살하러 산을 내려갔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무슨 까닭에서였을까. 홀연 발걸음을 되돌려 다시 부모님의 무덤가 앞에 서서, 다시 시작해 볼 게요, 다시 정상에 서 볼 게요, 라고 혼잣말인지 약속인지를 내뱉고는 세상으로 돌아와, 다시 시작했고, 이윽고는, 다시금 정상에 선 지금의 그가 되었다. 삶이 중심을 잃고 한없이 지독하게 방황할 적에 그런 어둠을 이겨 낸 타인의 이야기는 빛이 된다. 우리가 어둠을 이겨내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누군가는 훗날 당신의 그러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재기할 수도 있다. 한 사람이 어둠에서 빛으로 변한들 그가 세상 전부를 어둠에서 빛으로 변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이 어둠에서 빛으로 변하면, 그의 세상은 어둠에서 빛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 빛이 다른 어떤 이를 어둠에서 빛으로 변하게 만들고, 나아가 세상의 많은 부분을 어둠에서 빛으로 변하게 만들 누군가를 호명(呼名)할 수는 있다. 사람이란 신이 아닌 이상 인생의 어느 시기에든 우울하고 슬프고 방황하고 부진하고 낙오되고 추락하고 고독하고 아플 때가 있는 법이다. 그때에도 떠나지 않고 지켜주는 것이 사랑이다. 힘들 때 옆에 있어 주는 친구가 진짜 친구다. 모두가 손가락질할 적에도, 단 한 사람만 편을 들어주면, 그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전쟁할 수 있다. 우리는 행복할 때 진짜 사랑과 우정을 만나기 어렵다. 삶의 아이러니고, 이것이 바로 우리 각자가 불행을 경험하고 이겨내 볼 만한 이유다.
유리병 속의 지문처럼, 세상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르며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뿐인가. 누구든 역사에 등장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그가 아무리 옳은 일을 했다손 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미움을 산다. 반면, 개 같은 인간들, 말가죽을 생으로 씹는 것 같은 질감의 쓰레기들은 흑마술을 부리며 세상의 존경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오로지 미움만을 받는 악마조차 없다. 히틀러나 스탈린도 사랑해 주는 인간들이 있다. 인간으로서 인간을 가장 많이 죽인 마오쩌둥도 추앙해 주는 인간들이 있다. 캄보디아에서 킬링필드를 연출한 폴포트를 옹호하는 부류들도 없을 것 같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인간의 마음 안에는 공정함이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러한 인간이 ‘인간들’이 되어 대중이 되어 갈수록 더 핏빛으로 선명해진다. 세상에 공정함이란 엄밀한 의미에서는 없다. 없으려고 없는 게 아니라, 가능하지가 않다. 어찌 보면 그저 선택과 결정이 있을 뿐이다. 역사가 특히 그러하고, 역사 속에 등장해 버린 인간이 더 더욱 그러하다. 하여 역사 앞에서 우리는 어쨌든 선택하고 결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행동하려는 이는, 지구인 절반쯤에게는 미움을 받아도 좋다는 각오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세상이 불공정한 만큼, 공정한 태도가 아니다. 그러나 이 사안에 있어서만큼은 옳은 태도다. 이런 것을 옳다고 믿어야 할 정도로 인간이 어리석고 무지하고 무능하고 악마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미움 받을 권리’ 같은 헛소리들일랑 제발 좀 집어치우고, 될 수 있는 한 역사에 등장하지 마라. 그것은 무서운 일이고, 괴로운 일이다. 역사 속에서 은자(隱者)로 살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불필요한 미움들로부터 쾌 많이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아무리 역사 속에서만큼은 숨어 살고 싶어도 역사에 끌려 나가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더욱 자중하여, 역사 속에 등장하지 마라.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자신감이 그렇게들 많아서인지, 역사 속에 등장해 막춤을 추고 싶어서 안달이 난 인간들로 세상은 우글우글 불타오른다. 삶의 절정과 정상(頂上)에 있다가 추락하는 인간들의 이야기, 그 소음으로 세상은 가득하다. 그들은 그것이 진정한 삶의 절정과 정상이 아니라는 점을 몰랐던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애초에, 삶의 절정과 정상을 만들지 않는다. 자신 안의 ‘고요’가, 삶의 진정한 절정과 정상이기 때문이다.
짐 크로치의 「Time in a Bottle」이 잔잔히 깔린다. ……만약 시간을 병 속에 담아 둘 수 있다면 내가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영원이 지나도록 그 모든 시간을 담아서 당신과 함께 나누는 겁니다…… 1973년 9월 20일, 짐 크로치가 탄 비행기가 루이지애나에서 텍사스로 향하는 도중 서서히 추락하고 있다. 아름다운 사랑의 시간을 유리병 안에 담아 간직하고 싶다는 이 노랫말의 이야기를, 나는 내 장편소설 『내 연애의 모든 것』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하였더랬다. 그러나 또한 이런 생각도 해 본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지문이 묻어 있는 유리병 속에 인생의 어느 한 시기만을 밀봉하는 것이 가능하건 가능하지 않건 간에, 과연 그것은 바람직하고 지혜로운 소원인가. 사진작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은 “평생 삶의 결정적 순간을 찍으려 발버둥 쳤으나,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희망이란 무엇일까. 대홍수가 그치자 노아는 방주의 창을 열고 한 마리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얼마 뒤 비둘기는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한 채 노아에게로 돌아왔다. 온 땅은 아직도 물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이레를 기다린 노아는 다시 그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냈다. 저녁 무렵 되돌아온 비둘기는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 이로서 노아는 물이 빠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노아는 이레를 더 기다려 그 비둘기를 또 날려 보냈다. 그러자 비둘기는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노아에게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희망이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유리병은 잊자. 까닭모를 상처가 안쪽에 묻어 있는 유리병도, 행복한 시간을 담아놓을 유리병도, 말짱 다 거짓이다. 분명히 존재한다고 한들 다 거짓이다. 모름지기 사람은 기쁘게 살아야 한다는 천진난만하지만 무책임한 권유에 나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사람이 슬프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에는 슬픔이 있어야 한다. 슬픔이 있어야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과 내 밖에 있는 모든 것들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쁨은 바라보는 눈을 잃게 만든다. ‘고통’은 인도말로 ‘두카’인데, 이는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그 고통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의미한다. 해탈이라는 것은 고통을 없앴다는 것이기보다는, 고통을 ‘이해해 버리는 것’에서 온다. 나는 나의 고통을 이해하고 싶다. 부처는 번뇌가 없는 신도 아니고, 번뇌가 없어진 사람도 아니다. 부처는 ‘번뇌의 질이 높아진 사람’이다.
우리는 대홍수 뒤에도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로 가서 이교도들을 개종시키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겁을 집어먹은 요나는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친다. 하나님은 큰 폭풍을 일으켰고, 제비뽑기 끝에 뱃사공들에게 주님을 피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고백한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져 버리라고 말한다. 뱃사공들은 부디 살인죄를 적용하지 말아 달라 하나님에게 부르짖으며 요나를 바다로 내던졌다. 성난 바다는 이내 잔잔해졌고, 하나님은 고래로 하여금 요나를 삼키게 했다. 요나가 고래 배 속에서 감사와 구원의 기도를 하자, 이윽고 고래는 요나를 육지로 내뱉었다. 사흘 낮과 사흘 밤 만이었다.
우박과 비바람의 어둠으로 가득한 이 한낮에, 나는 나의 지문이 묻어 있는 유리병 속이, 행복한 시절만을 담아두고 싶은 저 유리병이, 칠흑 같은 고래 배 속처럼 여겨진다. 어쩌면 ‘희망’이라는 것은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 일’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희망이라는 것은, 우리 각자가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왔다가는, 이레 뒤에 다시 날아가,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날들 속으로 영영 사라져 버리는 비둘기가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요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비둘기’라는 뜻이다. 이것은 우박과 비바람과 어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캄캄한 고래 배 속에서,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 낸 한 사람이 등불을 켜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