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왼편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오렌지 색 카나리아의 노랫소리(10)
신에게 변호가 필요한 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다. 하여 신을 위한 변론은 인간을 위한 변론이다. 모호한 것 같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분명하다. 다만 제대로 변호해 줄 누군가를 찾을 수 없을 뿐이다. 이게 인간이 고독한 이유다. 나는 고인(故人)의 것이 아닌 글은 거의 읽지를 않는다. 내 글이 내 생전에 세상 속에서 읽히지 않아도 별 불만이 없는 것은 그래서다. 사람들이 나를 볼 때에 나의 하나님에게 변호가 필요한 것은 그분의 탓이 아니다. 나의 어둠과 허물 때문인 것이다.
지하철 좌석에 앉아 친구를 만나러 가고 있는 저녁. 젊은이도 노인도 아닌 한 사내가 객차 중앙에 피뢰침처럼 꼿꼿이 서서 외계어(外界語)로 무언가를 줄기차게 호소하고 있다. 나 외에 다른 사람들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에게 눈길 한 번을 주지 않는다. 그들은 전부 자신의 스마트폰 속에 들어가 있다. 저 사내가 혐오스럽거나 무서워서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우선은 상관하기가 싫어서인 것 같다. 비단 저 사내에게만이 아니라, 누가 제 옆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 간들 그들은 자신의 스마트폰 속에서 타인에게로 걸어 나오지 않을지 모른다. 이윽고, 지치고 쓸쓸한 지구인처럼 생긴 외계인은 다른 객차 칸으로 건너간다. 나는 번개에 그을린 피뢰침이 꽂혀 있던 그 빈 공간을 멍하니 바라본다, 극도로 고통스러운 처지에서 도망칠 곳이 전혀 없고 자살할 수 있는 타입조차 되지 못할 적에 광인(狂人)이 발생한다던데, 저 사내는 대체 어떤 불행한 일을 겪었기에 저렇게 돼 버리고 만 것일까? 어쩌다가 ‘어린 왕자’가 그랬듯이 자신의 멀고 먼 작은 별에서 홀로 떨어져 나와 광막한 사막을 헤매고 있는 것일까? 저 사내 역시 자신을 물어 줄 맹독을 지닌 ‘노란 뱀’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설가가 되길 잘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은, 얼추 30년간 하도 인간과 인간의 스토리에 관해 탐구하다보니 내가 예상했던 캐릭터와 플롯을 벗어나서 행동하는 인간이 너무 드물어서이다. 이리 되면 살아가는 데에 감동이 없어진다. 반면 예나 지금이나, 내가 보기에는 그저 못돼 처먹은 사기꾼임에도 불구하고 몹시 훌륭하다며 세상이 떠받들어 주는 경우가 많고, 필경 그래서 내가 이제껏 이 거지꼴이 아닌가 싶다. 인간과 세상은 나의 무덤덤한 환멸과, 기를 쓰고 경건해지려는 분노 사이에 머물러 있다. 어려서부터 나는 선량한 척하는 자들이 지독히 싫었다. 기실 그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가장 악한 짓들을 일삼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자들보다는 그런 자들을 추앙하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우울한 적이 많았다. 내 위악의 버릇은 그래서 자라났고 이념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종의 신념으로 체계화됐다. 그게 내 정신병 같은 문장(文章)의 세속적 실체다.
존 F. 케네디 암살범 리 하비 오스왈트, 존 레논 암살범 마크 데이빗 채프먼, 로널드 레이건 암살미수범 존 헝클리 등이 열광했다는 『호밀밭의 파수꾼』은 근래까지 대강 6500만 부 이상이 판매됐다고 하는데, 세상에는 이처럼, 누구나 다 읽은 것 같지만 막상 일독한 사람이 의외로 적은, ‘성경 다음의 베스트셀러(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같은)’가 수두룩하다. 성경이라면 신약 위주로 매일 한두 페이지씩은 읽는 내가 1년에 꼭 한 번 4월이면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을 완독하는 두 가지 이유는 첫째, 내 생일이 있는 달이 4월이고 둘째, 아무리 나이가 들어가도 그 달에만큼은 이 문제적 작품의 주인공 홀든 코필드와 비슷했던 내 청소년 시절을 애도함으로써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다. 로버트 번스의 시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와 만난다면」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제목. 홀든은 여동생 피비에게 얘기한다.
─나는 늘 드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는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그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 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소리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이에 한참 동안 침묵하던 피비는 이렇게 말한다.
─아빠가 오빠를 죽일 거야.
간혹 이런 질문을 받는다. 당신은 왜 작가가 되었느냐는. 나는 어릴 적부터, 선량한 척하는 사악한 인간들을 끔찍하게 싫어했던 것만큼, 나 자신이 싫었다. 나는 내가 나인 것이 항상 난해하고 괴로웠다. 그건 겨우 한시절 지나가고 마는 홍역(紅疫)이 아니었다. 아직도 나는 그러하다. 만약 내가 나를 좋아하거나 편하게 여기게 된다면 바로 그 순간부터 결단코 글 같은 것은 쓰지 않을 뿐더러, 설령 쓰고 싶다고 하더라도 쓸 능력이 이미 증발된 상태일 것이다. 나는 나를 포함한 ‘인간’을 의심하기에 글을 쓴다. 내가 만약 인간을 믿었더라면 정치를 하였지 문학과 문예(文藝)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에 어렴풋이나마 나를 버릴 수 없다. 이게 내가 자살을 하지 못하는 이유다. 살기가 그래도 견딜 만해서 자살하지 않는 게 아니라,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쳤기에 자살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하철 객차 중앙에서, 벼락같은 삶의 상처에 그을린 피뢰침처럼 꼿꼿이 서서, 하나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줄기차게 호소하고 있던 저 사내처럼.
‘희망’이란 무엇일까. 돌이켜보니, 뭐 거창한 게 아니라, ‘아직 지쳐 있지 않았던 시간’이 바로 희망이라는 꽃말이었던 것 같다. 순진한 사람이란 남들이 자신처럼 생각한다고 믿는 사람이고, 순수한 사람이란 남들이 자신처럼 생각해야 된다고 믿는 사람일진대, 공히 둘 다 세상살이에는 부적격이다. 나는 순진하지도 순수하지도 않은데 왜 자꾸 지쳐만 가는 것일까? 어째서 나는 늘 나 자신이 세상의 이물질처럼 느껴지는 걸까?
작가라는 직업상의 호기심 덕일 뿐이지, 나 또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 외로운 사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을 수 있고, 심지어는 누가 내 옆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 갈 적에 스마트폰 속에서 빠져나와 도움을 줄 거라 장담할 수 없다. 시쳇말로, 나라가 망할 적에 누가 총 들고 나가서 싸우는지는 그때 가 봐야 알게 되는 법이다. 새벽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부인했던 자는 다름 아닌 ‘믿음의 반석’ 베드로였다. 자신은 정의롭다고 만날 떠들어대는 자들을 내가 믿지 않는 까닭이다. 타인에게 연민을 품었는데, 어느새 내가 나를 연민하고 있기 마련이어서, 나는 타인에게 연민을 가지기 싫다. 그저 타인에게 연민을 받지 않는 내가 되고자 노력할 뿐이다. 솔직히 이것은 비인간적인 태도이며 교활한 전술이고 불량스런 전략이다. 나는 인간의 호의보다는 낙타, 코끼리, 고래, 거북이, 이런 동물들의 실존을 좋아한다. 이 녀석들의 이미지만 접촉해도 기분이 환해진다. 낙타는 사막이라는 바다의 배이고, 코끼리는 이 세계의 걸어 다니는 기둥이고, 고래는 공룡이 멸종된 뒤 지구의 가장 큰 동물이되 자유자재로 유영(遊泳)하고, 거북이는 500년도 넘는 일생의 거의 전부를 혼자서 살아간다. 순진하고 순수한 사람, 완전히 고갈되고 처절하게 낙담했을 때 불현듯 미쳐 버림으로써 간신히, 그러나 간절히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쉬운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마치 깨어진 거울 속의 누군가를 바라보는 일처럼 아프다. 알고 있다. 낙타, 코끼리, 고래, 거북이는 인간과는 달리 내게 상처를 주지 않으니, 나는 비겁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어린 왕자』에서 작가 생텍쥐페리의 분신이랄 수 있는 비행기 조종사와 어린왕자가 이별하는 부분과 그 앞뒤는 사뭇 아리송하다. 말 그대로 불분명하다는 뜻이다. 가령 어린 왕자가 우주선 같은 것을 타고 밤하늘의 작은 별로 날아갔다는 얘기 따윈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누구나 다 읽은 것 같지만 막상 일독한 사람이 의외로 적은 ‘성경 다음의 베스트셀러’이니 정식으로 읽어 보면 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또렷해질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어린왕자가, 사막의 맹독을 지닌 노란 뱀에게 자신을 물어 달라는 부탁을 하고, 그렇게 된 다음 서서히 죽어 가는 것으로 읽힌다. 어린 왕자는 자살을 한 것이다. 죽음을 통해 사막 같은 이 세상을 떠나 머나먼 자신의 소행성b612로 돌아간 것이다. 사람들은 『어린 왕자』를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들과 지혜를 구하는 어른들에게 적합한 예쁜 책으로만 여기는 모양인데 나는 그렇지 않다. 『어린 왕자』는 슬픔과 통증의 책이다. 그러하기에, 사람들 특히나 아이들의 심리적 충격을 완화하기 위하여 생텍쥐페리는 그 부분과 그 앞뒤를 그토록 시적으로 묘사한 것이리라(여기저기 발에 치이듯 굴러다니는, 어린이를 위한 요약본 『어린 왕자』에는 실제로 저 노란 뱀이 나오는 장면이 생략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문학이론가로서의 견해인데, 이러한 『어린 왕자』의 성격은 이 작품이 탄생할 당시의 문예사조와 호응하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알베르 카뮈 생전에 완성되고 출판된 첫 번째 소설인 『이방인』은 프랑스에서 1942년 5월 19일 판매되기 시작하였다. 어린 왕자나 홀든 코필드처럼 유명한 주인공 뫼르소는 햇빛 때문에 아랍인을 권총으로 쏴 살해하고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는다. 뫼르소는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 살고 있는 프랑스인으로서(작가인 카뮈 자신이 그러했다. 이를테면, 일제강점기 조선반도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프랑스인이었던 것이다.), 프랑스인이 아닌 알제리인을 죽인 것이니 사형은커녕 적당한 시기에 풀려날 수 있을 거라는 허풍이 아닌 위로를 주변으로부터 듣는다. 그런데 웬걸. 뫼르소는 재판 과정에서, 어머니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고 죽었는데도 슬프지 않고 그녀의 관 앞에서 담배를 피웠고 장례를 치룬 뒤 여자랑 잤고 햇빛 때문에 아랍인은 권총으로 쏴 죽였고 등등의 해괴한 진술들을 떠들어 댄 끝에 사형을 언도받는다. 무슨 말이냐 하며는, 사람을 권총으로 사살해 사형을 당하는 게 아니라,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개소리들을 늘어놓았기 때문에 사형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이게 바로 ‘부조리’고 이른바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을 받은 ‘부조리 문학’이다. 1943년 4월 7일은 미국에서 『어린왕자』의 영어판과 불어판이 서점에 깔린 첫날이다. 프랑스에서는 1945년 11월에야 출간됐는데 그것도 전후 인쇄용지 품귀 탓에 본격 서점 배포는 1946년 4월이었다. 이 ‘성경 다음의 베스트셀러’는 지금껏 정식 판매부수가 8000만 부가 넘고, 해적판까지 합치면 전 세계적으로 1억 부 이상 팔렸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뫼르소는 실존주의적 현실세계의 치하(治下)에서 실존주의문학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이고, 만약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소행성b612에서 태어나 지구의 사막에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이방인』의 시공간에서 성장한 청년이라면 있는 그대로 뫼르소가 되어 법정에서 사형에 처해졌을 거라고 나는 본다. 『어린 왕자』는 아름다운 동화가 아니라 서늘하고 어두운 실존주의 소설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린 왕자가 『호밀밭의 파수꾼』의 시공간에서 청소년이 되었다면 틀림없이 홀든처럼 우울한 방황과 반항을 일삼다가 정신병원에 갇히고 말았을 것이다. 내게는 어린 왕자나 뫼르소나 홀든이나 다 한 사람으로 읽힌다. 나는 또다른 ‘성경 다음의 베스트셀러’인 『이방인』이 과연 얼마나 세상에서 팔려나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카뮈가 그 온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어머니는 청각장애인이었으며 평소 교통사고만큼 허무한 죽음은 없을 거라고 말하곤 했던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지 3년 뒤인 1960년 마흔네 살 아직은 젊은 나이에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는 것과 얼마 전 내가 알고 있던 한 90세 노인(국회의원을 두 번, 그리고 어느 커다란 도시의 시장까지 역임했던)이 지인을 만나러 가던 중 한강 다리 위에서 자신의 운전기사에게 갑자기 차를 세우라고 하더니 홀연 한강 속으로 뛰어내렸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만약 우리가 약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면 어느 정도의 이익이 있을지는 몰라도 극도의 죄악도 함께 존재할 것이다.
언젠가 찰스 다윈의 『인간의 유래』를 읽다가 이 구절을 만나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종의 선택’을 주장하는 학자의 견해 치고는 너무나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비 오는 4월의 깊은 밤이다. 글을 쓸 적마다 서재에 있는 아버지, 어머니의 사진 영정(影幀)에 촛불과 향을 올리곤 한다. 토토는 냉정해서 하루 한 번 내 성경 읽기와 같은 제 산책만 챙기면 집구석 어디론가 사라져 잠들어 있고, 나는 멀든 가깝든 아무런 가족이 없다. 그나마 단 한 사람이 있었는데, 나를 떠나 버렸다. 이래서 내가 위대한 단독자(單獨者)인 거북이를 존경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 작은 집에서 나와 함께 있다고 믿는다. 내가 그토록 어디서 어떻게 방황해도 아직 다치지 않고 죽지 않았던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지켜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매장을, 아버지는 화장(火葬)을 하였는데. 생전에 아버지는 자신이 사후(死後) 화장되면 영혼이 완전 소멸되어 나를 못 도와줄까 봐 염려하였더랬다. 그것이 명리(命理)의 일반적 이론인 것 같으나, 나는 부정한다. 나는 아버지의 혼령이 나를 돌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믿고 있으면 믿음은 믿음이 된다. 아무리 가치 있는 약속도 안 믿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한숨 소리가 돼 버리는 것처럼. 나는 아버지의 납골묘에도, 어머니의 무덤에도 더 이상은 가지를 않고 또 절대로 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병들었을 적에 최선을 다 해서 간호하였다. 여한이 없고, 여력도 없다. 아버지는 새어머니 일가의 가족납골묘에 있는데 그들이 잘 돌볼 것이고, 어머니의 무덤은 세월이 흐르면 더 낮은 땅속으로 녹아들어가 버릴 것이다.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데다가 더욱이 눈물이 싫은 나로서는 별다른 도리가 없고, 무엇보다 여러 모로 좋은 일이다. 어머니는 대단한 크리스천이었다. 천국에 있지 무덤 안에 갇혀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는 내 안에, 나의 살과 뼈와 피 속에 스미어 있다. 시간이 더 흘러 내가 죽으면, 그때 비로소 우리 셋은 함께 사라질 것이다. 눈을 감으면 빗소리는 내 안에서 내린다.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나는 이 빗소리를 듣는다. 이것이 나의 이승이다.
술을 마시지 않은 한 사내가 얼마 전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 불을 지른 뒤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흉기로 찔러 죽였다. 십수 명이 상처를 입었고 15명이 넘는 사망자들 가운데는 어린이도 있었다. 범행동기? 삶에 대한 비관과 세상을 향한 적개심? 명백한 것은 악마보다 더 흉측한 한 길 사람의 마음속이 아니라, 우리가 아무리 잘 돌아가는 슈퍼컴퓨터처럼 살아간들 이러한 불행이 무시로 무작위로 닥쳐오는 것이 세상이라는 점이다. 내게는 그런 일 절대 안 일어난다고 절대 장담할 수 없는 게 인생이다. 거대한 산불을 바라보면, 부처님의 말씀처럼 삼계(三界)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다. 죽음이 찾아올 거라면 내가 어디에 숨어 있다 한들 찾아오리라. 겸손과 숙고와 명상만이 그나마 준비할 수 있는 내 안전의 전부이다. 아무리 잘 돌아가는 슈퍼컴퓨터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잘 돌아가는 슈퍼컴퓨터처럼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문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세상과 인생은 카오스다. 우리는 이 사실을 순순히 인정해야 하고 여기에서 자포자기보다는 겸손과 아이러니 같은 여유를 얻어야 한다. 오히려 그리하여, 부족한 우리 각자를 스스로 용서할 수 있고 잔인무도하고 황당무계한 이 세계를 개선해야겠다는 의지를 잃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우며 크고 깊은 사랑으로 가득 찬 곳이기 때문에 증거도 없이 포장된 사후 세계에 관한 이야기로 나 자신을 속일 이유가 없다. 그보다는 약자 편에 서서 죽음을 똑바로 보고 생이 제공하는 짧지만 강렬한 기회에 매일 감사하는 게 낫다.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했던 저 말은 맞는 말이지만, 어쩐지 내게 어린 왕자의 죽음보다 더 깊은 슬픔을 준다. 그러나 그래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러한 생각을 전쟁에 임하듯 하려 한다. 삶의 전부가 방황과 반항일 필요는 없지만, 방황이 없는 삶은 배움이 없는 삶이고 반항이 없는 삶은 죽어 있는 삶이다. 방황과 반항 없이도 자신이 제대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시체들은, 이 진실을 모른다. 세상에는 승리와 패배가 있기 마련이다. 승자가 패자가 되기도 하고 패자가 승자가 되기도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승리 뒤의 승자의 겸손, 패배 뒤의 패자의 반성이다. 그리고 절망적인 것은, 자신의 패배를 승리로 위장하는 것과 자신의 승리를 패배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한 가장 절망적인 것은, 자신의 패배를 승리로 착각하는 것과 자신의 승리를 패배로 만드는 것이다. 인생이 헛것 같고 다른 인간들이 말짱 다 거짓말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갈 길을 잃고 시들어 가거나 파괴된다. 이럴 적에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수공업’이다. 종교도 바람직할 적에는 사실 수공업인 건 바로 그 때문이다. 내가 관념주의자들을 한심하게 여기고 자신의 수공업이 없는 자들을 멀리 하는 까닭은, 그들이 자신의 허망함에 대한 화풀이를 타인과 세상에 함부로 해 대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위대한 무기(武器)이자 부적(符籍)이다. 죽음을 각오하면 우리는 삶에서 못해낼 일이 없다. 그 어떤 적도 멸망시킬 수 있으며 그 어떤 재앙도 씹어 삼켜 소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 일을 다 한 뒤에 당당히 죽을 수가 있다. 우리는 이런 기가 막힌 무기이자 부적을 공평하게 하나씩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이다. 죽음은 제대로 살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삶에서 도망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인간에게 가장 익숙한 새인 카나리아. 불행과 죽음을 왼편 어깨 위에 오렌지색 카나리아로 올려놓고 우리 생의 남은 날들 내내 노래하게 하자. 그 노랫소리로써 잊지 않음이 오히려 평안과 용기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볼 때에 나의 하나님에게 변호가 필요한 것은 그분의 탓이 아니다. 나의 허물과 죄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의 내 방황과 반항은, 내 가슴 속에 금강석 심장이 되어 빛나고 있다. 절대로 깨어지지 않는 이것을 보지 못하는 자는, 어둠이다. 고작 이것이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 대한 나의 변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