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혼자다. 태어날 때부터 고독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외로움에 절절하게 몸부림치면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반추할 때도 있다. 그 지독한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사회를 만들고 관계를 만드는가 하면 그 속에 문화를 넣고 도덕과 규칙을 세우고 사회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인간이 과연 사회를 떠나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여러 가지로 실험되고 시도된 바 있지만 제대로 된 결과는 도출해내지는 못하고 있다. 교육을 받지 않고 완전한 자연의 상태로 인간이 본래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그 본질에 접근할 수는 있을까. 단독자라는 의미가 있고 독행도라는 것을 추구한 인물도 있긴 하다. 잠깐씩 그런 생각을 해본다. 독방에 갇혀 있으면서 인간이 사색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얼마만큼 인내할 수 있고 감내할 수 있을까? <콰이강의다리>라는 영화 속에서 영국군 장교는 장교를 모욕하는 데 격분해 결국 독방에 갇혀 햇볕없이 여러 날을 보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인간의 본모습을 참 적나라하게 표출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적국의 포로였지만 자신의 명예와 긍지에 한 점의 오욕도 용납하지 않는 그 당당한 모습에서 인간의 표상을 보는 것 같아 웬지 끌렸다. 고독이 얼마나 사람을 외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부분도 있었지만 외려 인간을 얼마나 더 강인하게 만드는지를보여주기도 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란 책 속에서는 독방 생활을 14년 동안이나 견뎌낸 단테스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강해지고 철두철미해지는가를 여실히 말해주었다. 신 앞에선 단독자라는 것으로 키에르케고르는 말하고 있다. 실존철학에서의 단독자를 말하며 주체적 인간의 삶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고독과 완전히 유리될 수는 없다. 가장 고독한 순간이 어떤 때일까. 몇 가지 경험담을 토로해보고자 한다. 혼자라고 느낀다는 건 일단 고독감의 시작이다. 제법 오래된 일로 산사에 앉아 선(禪)이란 걸 시도해본 적이 있다.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 침잠해서 제대로 생을 반추해 보는 경험이었다. 철없던 시절이었지만 나름 고독을 느꼈고 내부 속으로 침잠해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인간의 내면이자 존재의 근원에 대해서 숙고하고 고민했던 것 같다. 눈을 감으면 삼라만상에서 차단되어버리는 형태가 그 참선이란 것에 다 있었다. 기고만장했고 혈기왕성했던 때라 제대로 된 의미와 내포하고 있는 속내를 명확
히 파악하진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존재 자체의 의미가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되고 주체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있어야 했다. 즉 어떤 선험(先驗) 된 혹은 전제된 본질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창조하고 생성시켜가는 것이 결국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게 아주 중요한 인식의 전환점이 되었다.
다음으로, 군대에 가서 보면 그곳에서 철저하고 분명하게 자신을 인식해야 하고 주체성을 분명히 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그 자신을 대신해주지 않기 때문에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고, 스스로 책임도 져야한다. 주어진 임무가 어떤 일이라도 완수해내야 한다. 숨 막힐 만큼 촘촘히 돌아가는 병영 생활에서 누구에게도 그 어려움을 호소할 수 없다. 대신해 달라고 요구할 수는 더더욱 없다. 홀로 묵묵히 해내야 하며 극복해야만 하는 삶의 한 과정이 거기 있다. 고독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삶의 의지를 상실해 보면 그 나락에서 과연 어떻게 극복하고 헤쳐나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부터 된다. 타락하고 일탈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초극할 수 있을까, 또는 초인의 힘을 빌려야 하는 걸까, 아니면 종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걸까, 친구나 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
생에 대한 절대적 의지를 표현하는 것 중에 이런 속담도 있다.‘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 또는 설사 태평양의 절대고도에 한 발만 내밀어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곳에 있다 하더라도 목숨이 붙어 있다면 살아있어야 한다.정말 그런 상황에 살아남을 사람은 과연 몇이나 있을지 의문이긴 하다. 예전에 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내용의 영화를 본 기억이 난다. 백척간두 같은 곳에 결혼반지를 놓고 그걸 가져오는 사람과 딸의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하는 아버지가 있었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했던가. 이 또한 존재의 극명한 가치를 꺾을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삶은 가치가 있다는 걸 여실히 말해주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고독이 처절하게 내려앉을 때 가슴 속에 떠오르는 이가 과연 누굴까. 하나님인가, 나라마다 지닌 절대자인가, 그렇게 종교를 통한 구원을 희망하는 자도 있을 수 있다. 그런 부분에서 충분히 인간의 의지에 의해 극복 가능하고 홀로서기를 할 수 있다고도 한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부분과의 절연을 감수해야 하는 순간에 갖는 고통과 고독감은 인간이 초극해야 할 부분일 수도 있다. 트로이의 전쟁 이야기를 인용하자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순풍이 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딸의 목숨이 필요했다. 희생은 참으로 감내하기 힘든 결정이고 어려운 과제이다. 결국 딸의 목을 칼로 내려치자 드디어 순풍은 불어오기 시작한다. 참으로 고독한 결단이 필요하고 인간이 인간임을 의심케 하는 패륜이고 반인륜적 행위이지만 어떤 지독한 섭리 같은 게 묻어나는 건 왜일까. 가족이 난도질당한 그런 끔찍한 상황에서의 승리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고, 그런 희생을 통한 대가가 인간
의 욕심을 얼마만큼 충족시켜줄 것인가가 내게는 의문이었다. 홀로 있다는 것이 곧 고독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얼마의 고독감을 감내할 수 있고, 이를 넘어설 수 있을까가 어쩌면 더 큰 관건이지 않을까 싶었다. 홀로라고 해도 자신의 자존과 긍지를 갖고 극복해 간다면 어떤 상황에 부닥친다고 해도 거뜬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생은 본래 고(苦)라고 했고,
또한 고해(苦海)라고도 했다. 고통은 반드시 수반되는 부분이다. 이를 어떻게 감내하고 바람직한 상황에로의 전환을 끌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인간이 고통에 민감하고 적극적인지를 잘 말해주는 예가 손에 박힌 가시가 아닐까 싶다.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상황에서 가시 하나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하지만 제대로 손에 박힌 채 인간에게 고통을 가할 때에는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의 통증으로 다가와 정신을 피폐하게 만든다.
전혀 관심도 없고 무관심했던 가시가 자기 몸의 일부가 되었을 때에는 그에 비례해 모든 신경이 그 가시 하나에 집중되고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것처럼 정신적 고독에 빠져들게 되면 그것을 은근히 즐기게 되고 빠져나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특히 낙엽이 지는 가을날이나 눈 내리는 겨울날에는 더욱더 고독함에 빠져들게 된다. 과연 그러면 이러한 고독감을 어느 정도 즐겨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 떨쳐 버려야 하는 걸까. 인간은 아무리 많은 친구와 지인을 갖고 있다고 해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언제나 고독해지고 홀로 남을 수밖에 없다. 고독을 잘 다스리고 이겨내는 사람만이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있고 바람직한 인간으로의 접근이 가능할 것이라 믿는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부대끼고 목표지향적인 인간이 되다 보면 그런 상념에 빠져드는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사치일 것이다. 삶에서 고통은 현재의 고통, 과거의 고통, 미래의 고통이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과거의 고통은 병으로 나타나게 되고 현재의 고통은 분쟁에서 현실화되고 미래의 고통은 절대자를 통해서 해결될 수 있다고 한다. 과거의 고통을 해결해주는 이는 의사이고 현재의 고통을 이기도록 해주는 자는 변호사라고 한다. 그 다음에 미래의 고통을 잠재워주는 자는 성직자라고 한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대단히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고통은 다 고독과 면면히 서로 이어주고 있으며 관계를 주고받으며 소통하고 있는 것은 같다. 고독은 마음에 관한 것이고 정신적인 부분에 속한다. 마음고생이라고 표현되는 말도 있듯이 이 말의 뿌리가 고독이 아닐까 한다. 고독한 사람은 생의 의미를 충분히 생각해 보았을 것이고 인간의 존재를 깊이 파악하려 했을 것이다. 너무 고독에 빠져 지내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에 지나치게 빠지지 않으려고만 하는 것도 어느 정도 자신을 가장 깊숙이 들여다볼 기회를 놓친다는 의미에서 안타까움이 남는다. 나이가 들수록 때때로 적절한 고독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삶의 쉼표 같은 역할이리라. 조용한 산사나 명상센터 등에서 자신의 인생주기에서 언제든 자신의 생을 반추하고 존재의 의미에 침잠해보는 것도 각박한 일상의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른한 일상에 젖어 존재의 무기력에 얹혀 있지 말고 잠깐이라도 고독의 심연에 나를 내려놓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