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와 호연지기
얼마 전 뉴스에 경기도 경찰청내에「자전거순찰대」라는 것이 조직되었다고 한다. 4대강 유역의 자전거도로를 달리며 자전거 마니아의 애로와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순찰대가 운용된다는 소식이었다. 그걸 보자니 10여 년 전의 자전거 투어 행사에 대한 장면이 떠올랐다. 작은 녀석이 2001년도에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 형의 뒤를 이어 녹색소년단의 대원이 되었다. 새롭게 노란색 블랙캣으로 자전거를 장만해서 타게 되었다. 새벽녘에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다시 집으로 와서 가방을 챙겨 학교로 등교했다. 큰 녀석을 한번 시켜보았던 터라 어느 만큼은 익숙해졌으리라 했는데 그럼에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4학년부터 시작하면 앞으로 3년을 더 해야 하는 셈이었다. 일상적인 매일매일의 훈련은 어렵고 고생스러웠지만, 그런대로 잘 해내는 게 기특하기도 했다. 1년을 꼬박 따라다니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터라 별 무리는 없었다. 한번은 브레이크를 놓쳐 얼굴을 벽에 부딪쳐 상처를 입고 온 일도 있었다. 굳건한 의지의 소유자로 어려움을 극복해내는 능력을 길러주고 어린 시절 호연지기를 키우기 위해 시켰었다. 아무튼,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한다고 대답한 부분이 대견하긴 했다. 큰 녀석이 자전거를 타는 내내 자동차를 타고 뒤따르며 형들이 어떻게 자전거를 타는지를 보기만 했던 터였는데 이제부터는 자신의 일이 되었다. 오랫동안 아침 운동을 빠지지 않고 하던 훈련 덕택에 큰 어려움없이 저학년이었음에도 어려운 코스를 잘 따라붙었다. 여름방학 기간 중의 전국 일주 행사는 동해안 쪽이었다. 둘째 날로 예정된 한계령이 최고의 고비였다. 거의 10시경에서부터 시작해서 계속해서 오르막 길을 힘겹게 오르기 시작했다. 한 시간 남짓을 오른 후에야 겨우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1기의 졸업생 일부도 함께 참가했다. 플래카드를 펼쳐놓고 사진을 찍고 파이팅을 외쳤다. 차로도 오르기 어려운 한계령을 자전거로 정복한 것이었다. 첫날은 150여 킬로미터를 타는 힘든 여정이었다. 팔당에서 양평, 홍천으로 해서 신남까지의 여정이었다. 하천 변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지난 장마와 태풍으로 인해 황폐한 모습을 흉물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한계령을 내려가는 과정은 아주 순조로웠고 최고 속력으로 질주해 내려갔다. 올라오기는 그렇게 어려웠는데 내려오는 길은 순식간이었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양양으로 해서 동해안의 해변도로를 따라 내려가는 행로였다. 숙소는 정동진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간부진이 위로 방문을 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밤하늘의 별빛은 서울과는 다르게 눈이 시릴 만큼 총총했고 여행자의 피로를 단번에 녹아내리게 했다.
다음의 고비는 삼척고개였다. 한계령을 넘은 기백으로 삼척고개도 넘었다. 동해안 쪽으로는 총 13개의 고개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울진, 포항 등을 지났다. 경찰차들이 캄보이를 해주기도 했다. 막바지에 이른 울산고개도 만만치 않은 고개였었다. 포항에서도 일박을 했다. 바다를 보며 해안가를 달리는 것은 일반 내륙에서는 맛볼 수 없는 여러 장관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하얗게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를 보면서 바다의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항상 문제는 고개를 넘기 위한 체력이었다. 마지막 목적지는 해운대 동백섬으로 600여 킬로미터의 여정을 마치고 샴페인을 터트리며 완주축하를 기념했다. 다음날은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하고 서울로 기차를 타고 귀경을 하는 대장정이었다.
작은 녀석이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때의 전국행사를 두 번째로 치렀다. 학부형으로서 1호차 선도 차량을 이끌었다. 한참 무더웠던 여름철 전국행사였다. 출발은 부산 을숙도 부근이었다. 자전거 20여 대를 트럭에 실어보내고 대원들은 열차 편으로 부산으로 갔다. 여관에서 하루를 묵은 후 새벽녘에 출발했다. 장마철이었다. 비닐로 된 우의를 착용한 채 달릴 수밖에 없었다. 빗물이 튀어 뒷덜미를 때렸지만, 그것은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잠깐씩 비가 그칠 때도 있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우의를 벗어버릴 수가 없었다. 한 시간을 타고 10분 정도씩 휴식을 취했지만 쉬는 장소가 마땅치 않은 경우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작년 행사에서는 더위와의 싸움이었다면 이번에는 비와의 싸움이었다. 갈증이나 피로감은 덜했으나 질척거리는 빗속에서의 행진이었기에 체력 소모가 훨씬 컸다. 가끔 오르막도 있었지만 대체로 무난한 코스였다. 목포를 지나 1번 국도를 따라 서울로 돌아오는 코스에서도 목포의 눈물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넘다보니 그렇게 힘든 줄을 모르고 넘기도 했다. 고창에서 하루를 쉬었다. 허름한 여관이 딸린 음식점에서 아침을 먹었는데 파김치 맛이 일품이었다. 얼마나 맛있었는지 한 학부형은 싸달라고 하더니 점심까지 그것으로 식사를 할 정도였다. 집이 서울 서부 쪽이라고 했다. 전형적인 남도음식의 정갈하고 맛깔스러운 맛에 너도나도 밥을 추가로 시키기도 했다. 새만금에서는 그 어마어마한 인간의 대역사 공사현장을 자전거로 돌아보기도 했다. 방파제 길을 자전거로 달린 것이다. 마지막 날의 밤을 보낸 곳은 온천이 있는 온양이었다. 집사람은 1호 차에서 호령하느라 목이 다 쉬어 있었다. 녹초가 되고 파김치가 되었다. 1기 회장 때는 허리를 다쳐 한동안 고생하기도 했다. 마지막 도착지는 학교운동장이었다. 그곳에서 완주기념행사를 했다. 선생님께서 완주증과 목걸이를 일일이 목에 걸어주고 수여했다. 모두 벅차오르는 감동과 해냈다는 자부심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3년 동안 녹색소년단에 소속해 있던 작은 녀석은 6학년이 되어서 대장이 되었다. 그래서 매사에 솔선수범했고 동료단원들을 이끌며 리더십을 키웠다. 졸업 후에도 전국행사에는 도우미로 참가하게 되었다. 학교에서의 봉사활동을 그것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녹색소년단에서는 산도 자주 갔고 다른 2박 3일이나 1박 2일의 행사도 다채롭게 마련되었다. 외국을 가서 견문을 넓히기도 했다. 미국이나 일본을 여행하는가 하면 유럽을 순회하기도 했고, 백두산을 등정하는 여정도 있었다.
학부형들은 아이들 졸업 후에도 모임을 만들어 계속적인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일요일마다 삼삼오오 모여서 자전거를 타며 우의를 돈독히 하기도 했다. 수리산을 산악자전거로 달리기도 했고 강촌마을까지 가서 산악자전거로 일주하는 코스를 달리기도 했다. 이러한 자전거 타기가 아이들이 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호연지기를 기르는데 기반이 되고 초석이 되었으리라.
이제는 1기생들은 군에도 다녀온 성인이 다되었다. 2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으니 어린 시절의 그 자전거 여행을 다 잊었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큰녀석은 군에 입대하기 전 마지막으로 자전거 여행을 갔다 왔다. 광주에서 서울까지 300킬로미터였다. 홀로 지도만 보고 4박 5일간의 여정이었는데 성공적으로 완주를 했다. 작은 녀석은 백두산까지 자전거를 타는 행사에 후배들을 위해 도우미 역할을 하며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제는 신물이 날 만큼 자전거에는 이골이 났겠지만, 여전히 우리 집 아파트 계단에는 자전거 두 대가 나란히 놓여 있다. 아이들이 내 곁에 없어도 집안을 드나들 때마다 그 자전거를 보면 마치 분신처럼 애틋함이 늘 새록새록 다가온다. 세상의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자전거를 매개로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말이다. 나는 오늘도 아이들의 앞날에 영광이 있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