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죽음은 과연 무엇인가? 참으로 쉬운 질문 같으면서도 복잡다기한 여러 가지를 내포하고 있고 쉽게 근접하기 힘든 포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다. 사형을 앞둔 여자 사형수가 사형장으로 울부짖으며 간수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는 장면을 바라보며 자조석인 독백으로 하는 말이 있다.“그렇게 죽음이 두려우면 죽을죄를 짓지 말았어야지. 이제 와서 그렇게 후회하고 눈물짓는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라고 말이다. 그 영화 속 여자 주인공은 죽음을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살고 있다고 한다. 핸드백 속에 독극물을 가지고 있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항상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필요하면 죽을 각오를 하고 살고 있다는 의
미인 셈이다. 참으로 담대함을 가졌다고 느꼈었고 섬뜩함이 있었다. 그 심오한 죽음을 쥐락펴락한다는 지혜가 생에 대한 달관이 없다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 주인공은 정사(情死)를 했는데 상대방 남자는 죽고 자신은 살아남아 곧 사형에 처할 상황에 있었고 그렇게 죽어가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었다. 대체로 죽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외면하고 남의 일로 치부하려 하고 먼훗날의 까마득한 일로 제쳐놓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공자님의 말씀처럼 사는 일도 다 모르는데 죽음에 대해 뭘 알 수 있으며 안들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태도도 있다. 죽음은 뇌가 정지되는 뇌사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심장박동이 멈춘 상태로 숨을 거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죽음의 형태로는 자연사, 타살, 자살, 사고사 등이 있다. 자연사는 하늘이 준 명을 다하여 편안하게 임종을 맞는 것이다. 물론 최후의 순간에 의료적 처치를 종료함으로써 종말을 맞게 되는 예도 있다. 얼마 전 한 할머니의 의학적 처치 종료가 큰 사회적 이슈로도 부각된 적이 있었다. 다음으로 타살이 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명확하게 구분짓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자살이냐 타살이냐 하는 부분이 애매한 상황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모호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일본의 할복 같은 경우에도 배를 가르는것에서는 자살이라 할 수 있지만, 목을 치는 다른 사람이 하는 부분에서는 타살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할복도 자신의 의지에 의하는 경우도 있지만 명예를 위해 부득이하게 하는 경우에는 그것은 실질적으로는 타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다음 죽음의 한 형태는 자살이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그래도 그 죄 값이 가장 가벼운 것이 소신공양이라는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한 몸을 불에 태워 공양하듯이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그 어떤 원을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다. 김동리의 등신불이라는 단편소설에서는 어머니를 위해 소신공양해서 부처가 된 사람에 관한 얘기를 풀어놓고 있다.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인간의 고통이 점철된 것이 화해서 된 불상, 그것은 인간적인 모습을 띠고 있고 보통의 불상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적인 고통을 처절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고사에 관한 것이다. 불의의 사고라고 표현되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뜻하지 않게 갑작스럽게 그 어떤 우연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어 불가피하게 당하게 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순리를 쫓아 이해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을 것이다. 말기암 환자가 암선고 이후 죽음을 받아 들이는 심리반응은 5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이는 인생수업이라는 것을 쓴 정신과 교수 퀴블러 로스가 주장한 것이다. 제1단계는 부정(격리)이라고 한다. 당신이 죽으면 죽었지 나는 아니다며 본인이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은 죽음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단계이다. 그리고는 엑스레이가 잘못되었거나 의사가 진단을 잘못했다고한다. 실제 그런 경우가 왕왕 발생하기도 한다. 오진인 경우도 있고 엉뚱한 결과가 재검 결과 발견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경우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경로를 밟아가는 사람에 한하여 적용되는 것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다음으로 분노(격노) 단계이다. 하필이면 왜 내가 죽을 병에 걸렸는가? 남에 대하여 해코지한 적이 없고 열심히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 오며 살아왔는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잘못된 암세포가 나에게 생겼다는 말인가? 다른사람들은 온갖 나쁜짓 다하면서 잘만 살아가는 데 하필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긴다는 말인가?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는 증상을 보인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타협(협상,교섭)의 단계이다.그래 인정을 하자. 암에 걸린 사실을 받아들인다.단조건부로받아들인다.자식이결혼할때까지,또는선영봉사 할 손자를 볼 때까지만 하면서 절대자와 운명에 대하여 타협을 구하는 때다. 평소보다 일도 많이 하고 더 활기차 보일 수도 있다. 그렇게라도 하면 암도 보다 천천히 퍼져가고 수명도 조금 더 연장된다고 믿는다. 그것이 그래도 어느 만큼의 양호한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울증이다. 이번에는 내 차례다. 타협 단계에서 여러 가지 시도를 했지만, 상태가 나빠지고 어려워지면서 우울과 체념의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극도의 상실감을 경험하게 되며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먼저 죽은 사람을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이 시기에는 힘내라는 격려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다음으로 5단계로서 수용의 단계다. 인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자신의운명에 더이상 분노하거나 우울해 하지 않으며 감정이 차분해지고 임종에 대해 준비를 하기도 한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면 죽음을 이겨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죽음은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이상의 5단계는 단계별로 순서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또한 분노의 단계에서 임종을 맞기도 한다. 각 단계별로 겪는 시간이 짧을수록 편안해질 수 있다고 한다. 참으로 잘 분석된 죽음에 이르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암환자가 아니더라도 그러한 것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올 만한 불행을 당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의 심리적 변화와 갈등을 겪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덧붙여 암환자가 갖고 있는 8가지 두려움에 대해서 살펴보자. 첫째는 죽음이 누구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라는 데서 생기는 두려움이라고 한다. 둘째는 가족이 친지 동료로부터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두려움이다. 셋째는 가족을 비롯해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헤어진다는 두려움이다. 넷째는 자기신체가 없어지는 데 대한 두려움. 다섯째는 병이 깊어감에 따라 자기 지배능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 여섯째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고, 일곱째 내가 무엇을 위해 세상을 살아 왔던가 하는 식의 주체성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병들어 어린애처럼 될지 모른다는 퇴행에 대한 두려움이다. 다음으로는 안락사라는 것이 있다. 거의 죽음 일보 직전에 있는 이에 대하여 더 이상의 의료적 처치가 불가능하고 회생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본인과 가족이 동의한 가운데 의료적 시술에 의해 여러 가지 고통을 감안하여 최대한 편하게 죽게 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원뜻으로는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것이 과연 적정한 죽음이냐, 종교적으로 용납될 수 있느냐 같이 여러 가지 의견들이 분분하다. 법제화가 되어있는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아무튼 이러한 안락사라는 것은 명분과 실리가 제대로 적정한 타협점을 찾고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때 제도화가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죽음에대하여구체적이고 보다 세부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던 것은 군 생활을 하던 때였다. 많은 위험요소가 산재해 있고 그런 일들이 실재 간헐적이긴 하지만 더러 일어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생관이라 해서 죽음에 대한 주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있다. 안중근 의사는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는 유훈을 남겼다. 위험에 처한 나라를 위해 헌신하여야 한다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라는 뜻이다. 자기 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칠수 있는 정신자세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목숨이라는 것이 덧없이 사라질 때도 있지만 값지고 보배로운 죽음을 죽어가는 이도 있는 것이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거룩한 죽음을 열거하지 않더라도 정말 모범적이고 본보기가 되고 표상이 되는 멋진 죽음도 수없이 많이 있었다. 그러면 과연 죽음에 대한 자세, 철학은 어떻게 정립해야 할 것인가. 죽어야한다면죽을수있다.그러나 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삶의 고통에서 빠져나오고 삶의 난관에 매몰된 채 구차한 삶을 이어갈 자신이 없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그 어떤 이유로도 바람직한 사생관이 될 수는 없을것이다. 한 번 부여받은 생에 대하여 보다 더 천착하고 제대로 된 생을 관조하기 위해 생에 대한 투철한 의지를 갖고 자기 앞의 생을 투철하게 살아가는 것이 정도가 아닌가 싶다. 주어진 상황이나 여건 등에 의해 필연적으로 죽어야 할 경우에 봉착된다면 죽을 수 있겠지만 그러한 죽음이 깨끗하고 바람직한 죽음일 수는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식들에게 고통을 주고 부담을 주고 아픔을 주는 것이 핍박받을 수 있겠지만 운명이 그러하다면 결국은 운명의 직녀 클로토의 베틀에 몸을 맡겨 버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주어진 생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느끼며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경주하다 보면 결국 그렇게 후회스러운 삶을 산 것이 되지는 않지 않겠는가 말이다. 죽음에 초연할 수 있는 것은 보통사람으로서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언젠가 <천년학>이란 영화 속의 죽음의 한 장면이 참으로 처연하게 묘사한 것이 멋있게 느껴졌었다. 돈 많은 노인네는 주인공의 판소리 한 곡조를 들으며 매화꽃 휘날리는 화창한 봄날에 이승과의 작별을 고하는 장면이 있었다. 들리던 바에 의하면 이 장면을 찍기 위해 감독은 3년의 세월을 기다렸다고 했었다. 인간은 충분히 주어진 운명내에서 자기의 소임과 역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인간은 담담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마음자세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사생관의 핵심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