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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노을

까까머리 시절의 단상

by 자한형 2023.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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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까머리 시절의 단상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였다. 입시제도가 없어지면서 일명 뺑뺑이라는 무 작위 배정제도가 생기면서 3번이란 번호를 받아 학교가 결정되었다. 공교롭게도 부산중학교를 배정받았다. 당시 부산 최고 명문으로 경남중학교와 쌍벽을 겨루는 학교였다. 5년 위의 형이 그렇게 가고 싶어 갈망했던 학교였다.학교이름도초량중학교로바뀌었고,버스를타고30여분을가야했다. 버스 요금은 입석이 10원이고 좌석은 20원이었다. 콩나물시루가 따로

없었다.짐짝처럼차를타고학교에가다보니파김치상태가되곤했다.이전까지걸어다녀도될거리여서문제가없었지만이제는무거운가방을들고 차를 30분이나 타다보니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사촌 형은 그의 가족이 이사오게 되면서 집에서 다니게 되었고, 이종누나가 내려와서 학교에 같이 다니게 되었다. 중학교에 올라가기 전 겨울방학 때에는 처음으로 접하게 된 영어 등을 배우느라 단짝 손영삼과 같이 부산대 공대 대학생에게서 과외를 받기도 했었다. 그는 수영중학으로 배정을 받았다. 명문중학이라 그런지 여러 가지로 다른 점이 많았다. 바로 옆에 부산고가 있었는데 드물게 강당까지 갖춰져 있었다. 야구부도 명문이었고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였다. 1학년 때는 10반이었고, 2학년 때는 5, 3학년 때에는 8반이었다. 그때 일 학년 담임은 국어 담당으로 박순도선생님이었고, 2학년 때는 이행남이란 국사 선생님이었다. 3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1학년 때에는 미술을 연속 2번 만점을 받았고, 2학년에 올라와서는 수학을 2번 연속해서 만점을 받기도 했다. 2학년 때에는 전국체전이 부산에서 열렸는데 본 개막식 전 리허설을 관람하는 행사에 초청되었다. 제일 모범이 되는 학생으로 한 반에 한 명씩초청되었는데 나도 그 명단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행사장의 매스게임 카드섹션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멋지게 연출되었다. 수학여행은 서울로 갔는데 도중에 아산 현충사에도 들렀다. 처음으로 서울에 가 지하철이라는 것을 보고 창경궁, 박물관 등도 둘러보았다. 2학년 여름방학 때에는 옆집 친구의 소개로 여름성경학교라는 곳에 따라가면서 처음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기독교 침례회 소속의 교회 목사는 노세백이라고 했다. 그곳에서 영어를 배우기도 했고 성경공부를 하기도 했다.2까지3년정도를빠져있었다.일요일뿐만아니라수요일도갔었다. 2학년때에는공작반동아리에들게되었다.처음으로톱질과망치질을 배웠고, 나중에는 목각까지 하게 되었다. 어떤 때는 왼쪽 손가락을 베이기도 했지만 대회에 나가서 우수상을 받을 정도가 되었다. 이 때문에 졸업할 때는 공로상을 받았다. 얼마 전 고향에 찾아갔는데 예술마을이라는 곳이 있었다. 폐교를 개량해 만든곳이었는데그곳에학교에서미술부장을했던김광중의작품이걸려 있었다. 미술부장을 맡았던 내게 후계자 문제는 상당히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항상 누구에게 바통을 터치할 것인가 하는 것이 하도 고민이 되어중3때는 성적이 크게 떨어지기도 했다. 인생을 살면서 시련기가 아닌 때가 얼마나 되겠는가. 한 번은 되돌아가보고싶기에아무튼홍역을앓은기간으로생각을하고너무먼기억속에남아 있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 보려고 한다. 암울한 시절의 자화상으로 남아있다. 때는 바야흐로 만물이 소생하던 봄이었던 것 같았다. 1970년대 초반서울에서는 지하철이 개통되었던 시절의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다.

얼마만큼 중학 시절도 적응해 가고 있던 차에 특별활동부에서의 신입회원 모집이 있었다. 여러 가지 부가 있었지만 어쩌다보니 공작부라는 곳에

들어가게 되었다. 3-4명이 같이 부원이 되었다. 기존의 1학년 때부터 하던 이들도 있었고 3학년 부장도 있었다. 부장의 이름은 L모라 했고 오른쪽 다리를 저는 소아마비 장애인이었다. 일과를 마치고나서는 공작실에 들러 여러 가지를 만들고는 했다. 베니어 합판 같은 것으로 집이라든가 모형이라든가 여러 가지 오밀조밀한 것을 만들면서 작품을 만들었다. 미술부는 따로 있었다. 공작부 옆에는 야구부가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부장의 지도에 힘들어 하고 꾀가 난 아이들은 탈퇴해 나갔다. 늦은 시간에 일과가 끝나면 중국집 등에서 짜장면 등을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부장은 3학년이었지만 예상외로 상당한 외골수였고 비정상적으로 조숙하고 성숙해있었다. 술도 곧잘 마셨고 담배도 피우는 등 상당히 비뚤어져 있었다. 어른흉내를 내기도 했고 지도 선생님에 대하여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일반 학생들이 그린 그림을 폐지로 팔아서는 간식비로 충당하기도 했다. 학생수가 700명 가까이 되는 상황이다 보니 그렇게 모은 폐지도 상당한 가격이 되었다. 지도 담당선생님도 금속공예를 해서는 공모전에 출품을 해서 수상을 하기도 했다. 2학년에는 L모군, P모군 등이 있었다. P군은 1학년 때부터 한 상황이었고 1학년도 J군이 있었다.

2학년 때의 고민은 부장과 지도 선생님과의 갈등이었다. 부장은 지독하게 지도 선생님을 미워하고 있었고 여러 가지로 골탕을 먹이는 방법을 토설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교실의 화분에 소금물을 주어 화초를 다 못쓰게 만드는 등의 소행을 꿈꾸고 있었다. 하다하다 안되자 공상의 단계였지만 독살도 모의하기도 했다. 늦은 시간 교실로 유도를 해서는 계단을 내려가는 선생님을 밀어 넘어뜨리고는 나무총 같은 것에 주사약을 발사해서 독살을한다는계획을세우기도했다.학교운동장끝자락에는 20-30미터의 벼랑이 있었고 그 아래로는 실개천이 흘렀다. 그 끝자락에서 모의내용을 설명하고 가정을 해서 사람을 밀어 떨어뜨려 죽게 만든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되는 완전범죄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음모에 필요한 것이 독약이니 이를 구해 와야 한다고 종용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 황당한 음모를 계속적으로 구체화해가며 독약을 구해오라고 하니 14살의 어린 녀석이 얼마나 곤욕스러웠으며 고민에 쌓였겠는가. 참으로 암담한 상황이었고 곤욕스러운 처지였었다.

그런 속에서도 공부는 꽤 잘해나갔던 것이다. 상위 5-10% 수준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매일 늦은 시간까지 공작실에서 시간을 보내었음에도 전혀 주눅이나 위축됨이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부장이 홍익학원이라는 사설학원에 가서는 목각을 배워왔었다. 부조부터 시작해서 제법 근사한 것까지 만들었다. 처음에서 장승에서 시작해서는 어려운 것까지 만들어 나갔다. 거북모양, , 등 등 작품범위를 점점 복잡하고 어려운 것으로 넓혀나갔다. 손재주는 제법있었고 미술대회 등에 나가서는 상을 타오기도 했다. 3학년이 되어서는 부장을 물려받았다. 가장 큰 고민은 후계자를 물색하는 것이었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3학년 때에는 대회에 나가서 A4용지 만한 판대기에금붕어 2-3마리가 유영하는 것과 해초를 조각해서 출품했는데 우수상을 받았다. 최우수상은 도깨비상을 부조한 이에게 돌아갔다.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다보니 성적이 많이 떨어지고 나름대로의 스트레스를 받았다. 중학2학년 여름방학 때에는 고민의 해결책을 찾고자 해서는여름성경학교라는프로그램을하는인근의교회를찾았다.기도도하고찬송도부르고성경공부도하면서기독교세계에빠져들었다.아브라함을알았고그투철하고굳건한믿음에절로고개가숙여졌다.욥의그역경

을 극복하는 모습에 인간에 대한 경이로움이 일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없는 상황에서 다른 전도사의 강독이 있었다. 내용을 대충 소개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느님의 백성과 이교도간의 전쟁이 있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접전이었고 승부가 나지 않은 채 장기전에 돌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돌파구 내지는 제안으로 제시된 것이 성배상자를 끄는 소로 하여금 경계에서 어느 쪽으로 가느냐에 따라 승패를 정하기로 한다. 소는 하느님의 백성쪽으로 수레를 끌고가게 되고 하느님의 백성이 승리를 맛보게 한다. 문제는 그 다음에 있었다. 승리한 연후에 축제를 열고 제사를 드리게 되는데 그 제물이 그 수레를 끈 소의 피로써 제사 드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이 섭리라 했고 하늘의 뜻이라고 한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항이고 인간의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행태가 일어난 것이었다. 정말 오묘한 일이 아닐 수 없는 부분이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와 믿음을 갖지 않는 자의 차이가 적나라한 상황이었고 신앙이라는 부분의 특별함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원죄를 짓고 에덴의 동산에서 쫓겨나와 다시 그곳으로의 회향을 굴레처럼 안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기독교는 유일한 대안일 수 있는가. 고민되는 여러 가지 상황 가운데 유일한 위안이 종교를 통해서 어느 정도는 해결 될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날에는 밤새도록 돌아다니며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다. L부장은 그 후 모라동인가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부조로 된 병풍을 만드는 그런 공장 같은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지도 선생님과의 갈등은 선생님의 전근으로 끝이 난 듯했다. 기독교의 결별은 곧바로 찾아왔다. 고교 2학년시절이었다. 결별의 순간은 무척이나 힘들었고 어려웠다. 잠시 묻어둔다는 생각으로 결별을 고했다. 장남으로서 제사를 모시지 않을 작정이냐고 몰아붙이는 부모님에게 조선말엽의 순교자들처럼 그렇게 소신을 고수하기에는 너무 복잡다기한 부분이 많았다. 수험생활은 코앞이었고 부모님의 종용에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여러 가지 회한이 남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선교사를 통해 영어를 직접 배우기도 했고 성경의 내용을 여러 가지로 들을 수 있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 느낌, 삶 등에 대해 사고의 폭이 무척이나 확대되는 계기를 가졌었던 것이었다. 막판 무렵에는 직접 물속에 들어가 세례를 받기도 했었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에도 성경공부회 같은 곳에 빠져 있던 친구도 있었다. 학생 운동을 하던 도시산업선교회 등의 내용을 이해하는데도 일부 도움이 되기도 했다. 서구문명의 한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기독에의 신앙은 우리 내면에 깊숙이 침투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여러 가지 의문점은 그대로 미궁인 채 풀지 못한 수수께끼로 남겨져 있다.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가본 정점에는 지독한 어둠속에서의 방황이 있었지만 그러한 시련기를 거쳐 인간으로의 성숙과 완성에로의 접근이 이루어 진 것이라 위무(慰撫)해본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고민이었고 방황이었던 것으로 여겨졌으나 그 때의 상황이나 심정으로 돌아가보면 그렇게 고민될 수밖에 없었고 헤어나올 수 없는 미로에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을 가졌었다. 종교의 힘에 어느만큼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고 인간적인 성숙함과 성장통이었다고 치부해야 할 듯 여겨진다. 아픈 만큼 성숙해 진다고 하는 것이 있었다. 그런 것이었으라 자조하며 그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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