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추억의 그림자
아주 오래전 얘기를 하자니 조금은 쑥스럽고 감회가 새롭다. 태어나서부터 초등시절까지를 얘기해 보려고 한다. 여러 가지 복잡한 얘기가 있지만, 부모님을 중심으로 태어나던 때의 상황을 재구성해볼까 한다. 아버지 쪽은 3남 2녀 중 막내였고 모친도 3남 3녀 중 막내였다. 부친은 의령군 가례면 갑을리에 살았고, 모친은 용덕면 가락리에 살았다. 두 분이 맺어지게 된 사연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모친의 큰오빠가 갑을부락에 문상을 가게 되었다. 그곳은 부인의 친정이었고, 서로 간의 속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두 집안 간 약조가 되었고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다. 20살의 떠꺼머리총각과 18세 시골처녀로서 맺어지게 된 것이다. 4년의 시집살이를 하면서 정말 고생을 많이 한 어머니는 한시라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부친은 8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상황이었던 만큼 많은 형제들 속에서 자랐다, 때는 음력으로 1959년 12월 21일 17:00경이었다고 한다. 맑은 날씨에 오후 늦은 시각에 경남 의령군 가례면갑을리256번지에서한아이가태어났다.아버지도없는상황에서집에서 낳았다. 대가족이 힘들게 삶을 살아가던 때로 아버지는 군 복무 중이었다. 모친은 시집살이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가족의 식구는 12명이었다. 할아버지, 백부, 백모, 딸 넷, 모친 등이었다. 곧이어 3월에 장손이
태어났다. 모두의 관심은 장손에게 쏠렸고 모친은 백모의 모자라는 젖을 보충해주기 위해 유모 노릇까지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큰아이가 네 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은 그야말로 혈혈단신 부산행을 감행했다. 버스로 함안 군복까지 오셔서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내려왔다. 오면서 생전 처음 타는 열차에서 심하게 멀미를 했다. 부산에는 먼저 내려와 자리를 잡고 계셨던 고모네 두 분이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조그만 슈퍼같은 가게라 할 수 있지만 그 시절로보면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작은 고모네 집 부근에 사글세 집을 얻었다. 처음에는 국수를 뽑아내는 기계작업을 해서는 납품하는 일을 했다. 부산에 내려온 지 얼마 후 여동생이 태어났다. 그런 속에서도 단칸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객식구도 또 있었다. 사돈네의 고학생이었는데 몇 년이 지나자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정착을 하게 되었고 2년 여가 지나자 고모네가 집을 사서 그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했다. 부친은 고모처럼 중앙시장이란 곳에 나가 포목장사를 시작했다. 그해 겨울에는 남동생이 태어났다. 부산으로 내려온 지 3년째 되는 해였다. 식구는 계속 늘어났음에도 생활은 고만고만했다. 산등성이 등에는 밭을 일구어 고구마, 감자, 콩 등을 심어 호구지책으로 삼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는 터를 닦고 블록를 만들어서는 집을 지었다. 방 두 칸 짜리를 얻고 다락방도 부엌 위에 있었다. 부산에 내려온 지도 5년이 지났다. 막내녀석이 태어났고 아주 우량하고 튼튼해서 우량아 선발대회를 나가니 할 정도가 되었다.
드디어 큰아들이 학교에 들어간 해는 1966년이었다. 한참 경제개발계획이 시행되고 요원의 불길처럼 경제가 활성화되고 있었다. 학교는 제법 먼 곳에 있었다. 입학식에 부모님이 같이 가고 하는 것은 사치였다. 학교가 불타는 바람에 갑바로 된 텐트 속에서 수업을 했다. 여자 담임 선생님이었다. 1학년1반에 배정이 되었고 옥수수식빵 배급이 있었다. 하나만 먹어도 요기가 될 만했다. 그때 당시 150원이 월사금이었다. 월사금을 내면 빵을 하나씩 배급받을 수 있었다. 유리병에 든 우유도 있었다. 월사금 1년 치를 한꺼번에 낸 녀석은 12개의 빵을 한꺼번에 받아갔다. 이는 동급생간에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급장은 김소용이란 녀석이었다. 2학년 때에도 1반이었고 계속 같은 담임 선생님이었는데 한 번은 책 값을 잃어버려 혼찌검이 나기도 했다. 2학년이 지나자 그 선생님은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간 곳이 사립학교였고 배정국민학교였다. 김소용도 그쪽으로 전학을 갔다. 학교까지는 30분 정도가 걸렸던 것 같다. 3학년이 6반이 되었고 담임선생님도 조선규란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좀 학교생활에 적응이 되는 듯했다. 4학년이 되자 또 6반이 되었다. 담임은 이수인이라는 호랑이 선생님이었다. 체육부도 맡고 있었고 엄청 무서웠다. 처음으로 손영삼이라는 녀석을 알게 되었고 같이 과외도 받았다. 6개월 정도이었던 것 같았고 부산공전에 다니다 군대가기 위해 잠깐 쉬고 있던 선생님을 만나 과외를 받았었다. 공부에 취미를 붙였고 신나게 공부했다. 음악과 체육을 제외하고는 전부“수”였다. 2학기가 되어 그분이 군대로 가고 나자 성적은 예전 같지 않았다. 5학년 때에는 5반이었고 허경영선생님 이었다. 계속 과외를 받았지만 예전과 같은 성적은 나오지 않았다. 6학년 때에는5반이었고김석원선생님이었다.머리가벗겨진분으로장티푸스를 앓으신탓이라고했다.그시절에1반담임선생님이항상볶음밥을시켜먹 었는데그게참맛있어보였다.커서그것을비빔밥인줄알고시켰는데엉뚱하게 다른 것이 나왔다. 그래서 그것이 비빔밥이 아니고 볶음밥 인줄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3학년인가 언젠가는 그린 그림이 호평을 받아 소방차 등을 그리는 불조심 관련 사생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친구들이랑 몰려다니며 축구, 야구 등 운동장에서 뛰어놀면서 지냈다. 한번은 어린 시절에 고향을 간다고 갔다. 83번 버스를 타는데 멋모르고 홀로 탔다가 종점까지 가게 되었다. 종점 부근에는 버스터미널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 쪽을 지나다가 얼마 전에 방세를 떼어먹고 도망친 사람 비슷한 사람을 보고는 쫓아가기도 했다. 결국은 파출소로 가서 앉아 있었다. 대연국민학교를 25회로 졸업했다. 4학년부터 6학년까지 개근상을 탔다. 학교에는 야구부가 만들어졌다. 한 해 후배인 Y군이 있었는데 대단한 투수로 성장했고 프로야구 코치까지 되었다. 영도구에 항도병설초등학교가 있었는데 대단한 라이벌이었다. 대부분의 야구부원은 부산중학교로 진학했고 Y군은 동성중학교로 진학했다. 6학년 때에는 수학여행으로 경주를 갔다. 불국사, 첨성대, 석굴암, 포석정 등을 둘러보았고 흥겨운 한때를 보냈다. 봄 가을마다 소풍을 갔으며 설레는 마음에 밤잠을 설쳤다. 용돈으로 받는 것은 하루 10원 정도였다. 이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학교 갔다 돌아
오는 길에 있는 리어카 호떡집에서 호떡 한 개를 사먹는 것이었다. 그건 정말 즐거운 나만의 낙이었고 추억이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60년대 70년대 초반까지 먹을거리를 걱정해야 했고 생존에 급급했던 시절에의 삶은 아직도 아련한 옛 추억으로 남아 있다. 가죽으로 된 축구공 하나 없어 고무공이나 기타의 공으로 공놀이를 해야 했고 변변한 야구글러브 하나 없이도 야구를 즐겼던 춥고 배고픈 시절의 서러운 이야기를 추억하며 옛 향수에 젖어본다. 사람이 죽을 때에는 고향 방향을 바로 보게 되고 머리를 고향 쪽으로 두고 간다고 한다. 이제는 옛 모습을 찾을 길 없고 옛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정경을 꿈에서라도 만나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