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른 노을

by 자한형 2023. 2. 6.
728x90

대한민국은 산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서구에 우리보다 더 많은 명산을 보유한 곳도 많겠지만 우리나라는 68%가 산악지형으로 되어 있는 만큼 산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보통사람들의 취미로 꼽는 것이 대개 등산이다. 남한 최고 산은 한라산이요, 다음이 지리산이고, 세 번째가 설악산이다. 엊그제에 최고의 등반가 산악인으로 칭송되던 박영석 씨가 산속에 실종된 지 어느덧 4일째로 접어들고 있다. 식량의 보유치가 10일분이라고 하니 어떻게든 살아 있을 확률은 높으니 계속 찾아봐야 할 듯하다. 산에 대해 썩 좋은 기억을 갖고있지는 않다. 하도 군시절에 여러 산을 섭렵하는 과정에서 고생을 많이 한 터라 학을 띈다는 말이 적절할 듯싶다. 화악산인가를 자대 배치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올라가 본 적이 있다. 사람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것에 몸서리를 쳤었다. 한없이 올라가도 끝이 없는 길처럼 느껴졌었다. 그런데 몇 년 지나지않아서는 쉽게 넘을 수 있었다.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 등이 산에 대한 외경심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있었다. 설악산은 세 번을 올라갔었다. 두 번은 백담사로 해서 봉정암을 거쳐 일박을 하고 대청봉을 갔다가 천불동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코스였다. 천불동 계곡의 비경은 결코 인간이 만들 수 없을 만한 절경 그 자체 였었다. 천연계곡이었고 신의 신비로움이 경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었다. 백담사 경내에서는 전 전임대통령의 기거 처를 보기도 했고 한용운님의 시비를 보기도했다. 들어오는 길의 계곡의 청정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백담사를 지나서 등반하는 길에 만난 계곡에서는 신나게 물놀이를 즐기기도 했었다. 봉정암에서의 미역국밥은 꿀맛이었으며 남몰래 눈치 보며 마셨던 소주도 색다른 흥취를 북돋우어 주었다. 설악산에 대한 백과사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높이 1,708m이다. 신성하고 숭고한 산이라는 뜻에서 예로부터 설산(雪山)·설봉산(雪峰山)·설화산(雪華山)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고, 금강산(1,638m)을 서리뫼[霜嶽]라고 한 것과 관련해 우리말로 설뫼[雪嶽]라고도 했다. 남한에서는 한라산(1,950m)·지리산(1,915m)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백두대간의 중심부에 있으며, 최고봉은 대청봉이다. 명산은 다 그러한지 깨끗한 날씨나 청명한 날씨 속에 제대로의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을 만큼 날씨는 변덕이 심했고 궂은 날씨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맑고 좋은 날씨였는데 막상 정상을 정복하고 내려오는 순간부터는 악천후와의 사투였다. 비바람불고 억수같은 비가 볼기를 사정없이 내리치는 통에 제대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후지산을 가보면 그랬다. 산신의 심술인지 어떤 것인지 모를 일이었지만 쉽게 본 모습을 볼 수 있게 내버려 두질 않는다는 것을 들었다. 우리 겨레의 명산 백두산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천지의 신묘한 모습도 아무 때나 마음껏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맑고 투명한 천지의 그 물맑음도 수시로 요동치는 날씨에 의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했었다. 우리가 그곳을 등반할 때에도 그랬다. 정상의 기후나 기온은 일반 평지의 날씨나 기후와는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천 미터가 넘는 고지였고 한두 시간의 등반으로 볼 수 있는 봉우리가 아니었다. 세상사방 천지가 다 내려 보여야 함에도 그렇게 가소롭게 보여주질 않는 듯했다. 예전 어렸을 때의 수학여행 중에도 왔었던 기억이 있었다. 내설악 외설악이 뭔지도 몰랐었고 공릉능선을 왜 죽음의 능선이라 하는지도 몰랐다. 단지 알았던 울산바위가 설악산의 최고 봉우리인 줄 알았던 착각에 휩싸여 있었다. 비선대를 내려오는 계곡에는 물웅덩이 같은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품고 살았던 어느 여고생이 세상을 하직한 적도 있었다고 했었다. 그 물웅덩이는 깊지는 않지만 빠지기만 하면 물이 회오리를 돌기 때문에 빠져나올 수가 없는 곳이라고 했다. 전설에 의하면 하느님이 금강산을 명산으로 만들기 위해 전국의 바위를 불러 모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울산에서 금강산으로 가기 위해 올라가던 바위가 가다가다 힘들고 지치게 되어 설악산에 쉬어가다 눌러앉게

되었다고 했었다. 그 이후 울산 고을 원님이 그곳을 지나다 우리 바위가 왜 여기 있느냐고 하고는 세금을 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설악마을 사람들이 세금을 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신흥사 동자승이 그 세금을 내지말라고 했다. 그러자 울산에서 야단이 났다. 그래서 한 말이 재로 된 새끼로 묶어주면 데려가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영랑호 청초호 두 호수

사이의 풀로 묶고는 불로 태워 재로 된 새끼를 만들었는데 울산에서는 가져갈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속에서 묶을 속 풀초해서 속초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쯤의 여름이었던 듯하다. 부모님과 어린 두 아들이 설악산 대청봉을 가볼 것이라고 작정을 하고 올랐다. 한 시간여를 올랐을까 싶었는데 어린 두 아들이 그만 내려가겠다고 해서 내려보냈다. 그리고 부모님과 본인 셋이 등반을 시작했다. 오색약수에서 올라가는 최단 코스였기에 올라가는 것은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내려오는 길은 한계령

쪽으로 잡았다. 그런대로 무난한 길이라고 여겼는데 걸린 시간이 대여섯시간은 족히 걸린 듯했다.오르락내리락 산능선 길을 여러 번 반복하여 넘었. 그 길섶에 만난 것은 이름 모를 들꽃들이 지천으로 늘려 있었다. 그 중에 약이 된다는 약초가 하나 있었다. 초구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달여 먹으면 관절염에 즉효라는 모친의 설명이 있었다. 워낙 약효가 독해 처음 삶은 물은 버려야 한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신들린 듯이 초구를 발견하고 뿌리째 여러 뿌리를 캐기도 했다. 한참을 가도 끝이 보이질 않을 지경이었.거의 열시간 이상의 산행이다보니 지치고 힘들 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 연로하신 분이었음에도 평소에 자주 산을 접했던 덕에 쉽사리 등정을 마칠 수 있었다. 한계령 산장쯤에 도착했을 때에는 말 그대로의 파김치 자체였었던 듯하다. 어느 선승의 말에 의하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고 했다. 또 누군가는 그 쓸데없는 짓을 왜 하느냐고 묻기도 한다. 어느  산악인은 산이 그곳에 있기에 오른다.고 했다. 산의 오묘함은 그 어떤 필설로도 묘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거대한 자연의 웅대함에 겸손하게 다가가고 접근하며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기를 기대해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푸른 노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머니 고희연에  (0) 2023.02.06
희미한 추억의 그림자  (0) 2023.02.06
까까머리 시절의 단상  (0) 2023.02.06
소요산 산행기  (0) 2023.02.06
죽음  (0) 2023.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