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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노을

주말부부

by 자한형 2023.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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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부부

주말부부란 직장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평소에는 따로 지내다가 주말에만 함께 지내는 부부를 말한다. 말 그대로 주말에만 제대로의 정상적인 부부가 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면 적절할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일 수도 있지만피치못할사정에의한경우도많이있을것이다.어떤경우는 아내의 자아실현을 위해 부득이하고 불가피한 경우일 수도 있고, 서로간의 협의가 원만히 이루어지지 못했거나 혹은 서로 간의 자기 세계를 존중해 주다보니 일어난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맞벌이가 늘어나게 되고 경제적인 부분이 상당히 중요한 부분으로 부각되면서 이러한 현상은 증가하고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얼마 전에 고교 동창 녀석을 한 명 만났다. 10여 년만에 만난 친구였다.

포스코에 다녔는데 포항에서 갑자기 서울로 발령을 받아 올라오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녀석은 주말이면 내려갔다 다시 올라와야 하는 상황이 되다보니 봄에 올라온 녀석을 가을에야만나게된것이었다.이친구를만나얘기를 들어보니 그동안 애환이 참 많았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계속 주말부부로 살고 있다. 아내가 부산시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은 주로 포항에서 근무했고 젊은 시절에는 광양에서도 6년간을 지냈다고 한

. 혼자 사는 것에 이골이 난 듯했다. 어떤 불가피한 일이 있더라도 만사를 젖혀두고 주말에는 기필코 부산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한다. 하도 주말부부로 지내는 것이 애처로워 부모가 포항으로 이주해 와 생활을 했다고 한다. 아들의 밥을 해주는 등 조력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하니 참으로 가슴 아픈 사연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은 아들도 서울로 가고 했으니 포항 근교로 이주하여 전원생활을 하면서 노후를 안락하게 보내고있다고 했다. 텃밭도 가꾸시고 한적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명절에는 부산, 포항을 다녀왔다고 한다. 부모님께서 아들에게 100만 원의 용돈을 주었다고 했다. 자신들의 연금을 아끼고 모아서 아들에게 주었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요즘세태에 부모가 장성한 자식에세 용돈을 주었다는 것은 보기드문 일이 아닌가 했다. 젊은 친구들에게 주말부부 하겠다고 하면 도시락 싸들고 말기고 말리라고 한다. 평생을 주말부부로 지낸 부분에 대하여 많은 회한을 지니고 있는 듯 했다.

나도 이제 결혼생활이 24년 차로 접어들고 있다. 그 중에 8년을 주말부부로 살았다. 지금도 그렇게 주말부부 생활을 해나가는 중에 있다. 전체 결혼생활의 삼 분의 일이다. 가족이 같이 지낸다는 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 의외로 주변을 둘러보면 그렇게 주말부부로 지내는 이들이 꽤 있는 듯해 보인다. 가족이란 한울타리 내에서 지지고 볶고하는 속에서 정이 두터워지고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할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초창기 주말부부를 할 때에는 정말 가슴 아픈 추억이 많았다. 남편은 통영에 있었고 아내는 고흥에 있었다. 서너 시간을 가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버스를 서너 번씩 갈아타고 가야 하는 것이었다. 피땀 흘려 번 돈을 길거리에 다 깔아버린다는 속설이 실감났다. 그러다 아이가 생겨나자 아이는 부산에서 시부모가 키우는 상황이 되었다. 가족 셋이 모두 각자의 삶을 영위해가는 이산가족의 신세였었다. 그런 것을 회상해보면 지금의 상황은 양반인 셈이다. 얼마 후 남편이 서울로 발령을 받아버렸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번 만나려면 8시간 넘게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고역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비행기를 탈 수도 없었다. 토요일 오후에 출발하면 도착하는 시간이 밤 11시였다. 녹초가 되어 도착하면 반나절 정도를 지내고 정오쯤이면 또다시 길을 떠나야 하는 것이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놓으며 별리의 아픔을 곱씹어야 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서울에 도착하면 저녁 8시였다. 열여섯 시간을 길에서 보내고 다시 또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손꼽아 휴일을 기다려야 했다. 유일한 희망은 방학이었다. 그래도 일년에 두어달은 같이 지낼 수 있는 기간이 유일한 희망이요낙이었다.과연 이렇게 어렵고 힘든 삶을 영위하여야 하는가?하는 회의가 불쑥불쑥 일어나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신혼이어야 할 3년을 주말부부로 살았다. 그러다 아내가 서울로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3개월 후 남편이 제주로 발령을 받은 것이었다. 운명의 장난 앞에 어찌할 줄을 몰라 했었다. 아내는 매일 밤마다 울었다. 일주일 동안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 상황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결국, 남편은 제주로 내려갔고 또다시 주말부부가 되었다. 여름방학이 되어 아내가 내려왔다. 한 달 동안 설득을 해서 육아휴직을 하기로 했다. 4개월의 주말부부 생활이 막을 내리고 겨우 처음으로 같이 동고동락하게 되었다. 이후 10여 년을 같이 살았었는데 13년째가 되던 해에 남편이 교육원으로 발령을 받아 내려가게 되는 바람에 또다시 두 번째로 주말부부가 되었다. 3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차를 사주었다. 기름값이 적게 나오는 경유차였다. 교육원에서 지냈었던 2년여 동안에 칠만 킬로미터를 뛰었다. 참으로 많은 시간을 길에서 보냈다. 그즈음에 토요 휴무제가 도입되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기에 그런대로 견딜만 했다. 그러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다시 23년 차에 또다시 교육원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세 번째로 주말부부가 되었다. 예전에 근무했던 곳이어서 별 어려움이 없을 듯했는데 생활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여전히 홀로 지내는 것과 단조로운 생활을 견뎌내는 것에 익숙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좋은 공기와 깨끗한 환경 속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는 부분에 부러움이 가득한 눈길로 눈치를 주기도 하지만 당사자로서는 곤욕스럽기 그지없다. 주말부부보다 더한 기러기 아빠들도 요즘에는 심심치 않게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경우가 흔해졌다. 사회 문제화 되기도 하고 심각한 상황으로 변모하는 경우도 왕왕 발생했다. 감사실 쪽으로 근무를 했던 한 선배의 경우에는 실질적으로는 주말부부였고 명목상은 아닌 경우라 할 만했다. 보따리를 싸서 나가면 일주일 후에 집에 들어오니 마나님이 그렇게 편안해 할 수 없다고했었다.그런데 퇴직을 하고 매일 얼굴을 맞대다 보니 오히려 불편해하고 바깥으로 좀 나가달라고 하소연을 한다고 한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관계가 부부관계가 아닌가 한다. 떨어져 있으면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면서도 막상 같이 있게 되면 그렇게 애틋해하지 않는 것이 보통

의 갑남을녀가 아니겠는가?

작년에는 가족 넷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았었다. 큰녀석은 군복무 중이었고 작은 녀석은 지방에 있는 대학기숙사에서 반년을 보내고 다시 한 번 더 수능을 한다고 해서 기숙학원에서 6개월을 지냈다. 그러다보니 가족 모두가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살게 되는 경우가 되었다. 어차피 얼마지나지 않아 그렇게 되겠지만 아직은 그래도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이 필요한 듯하다.

가족은 항상 같이 동고동락해야 하고 공동체로서의 삶을 영위하여야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길지도 않은 생을 아웅다웅하던 어떻든 한 지붕 아래 공동의 삶을 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아픔을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것에 생의 묘미가 있고 또다른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함께 살아가는 것에서 가족의 참사랑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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