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고희연에
얼마 전 토요일 아침에 집사람은 일 때문에 ○○시교육청으로 출근을 했다. 아들에게 아침을 챙겨먹이고는 대충 집안정리를 했다. 큰녀석이 4박 5일간의 휴가를 나온다고 해서 저녁 내내 청소를 하느라 고생을 한 덕에 그런대로 봐줄 만은 했다. 11시 30분에 온다던 동생이 11시 10분쯤에 왔다. 음료수를 한 잔 주고는 얘기를 나누었다. 11시에 교육청에서 출발한다던 집사람은 12시 10분경에야 도착했다.
준비해둔 짐을 차에 싣고는 바로 출발했다. 집을 나와서는 반포대교 쪽으로 해서 올림픽대로를 타고 중부고속도로로 향했다. 어제 밤늦도록 청소를 한 탓에 집사람은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대전쯤에서야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솔밭묵집으로 갔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손님들이 북적댔다. 묵밥 2인분, 두부김치, 보리밥 2인분을 시켜서 먹었다. 동치미는 예전의 맛은 아니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맛은 괜찮았다. 대전 통영간 고속도로
로 들어서서 단성IC에서 국도로 접어들었다.
30여 분을 달려 고향마을에 접어들었다. 컵이랑 은박지받침을 사려했는데 컵만 사들고 산길로 올라갔다. 가파른 길을 조금 올라가자 할아버지 묘소가 나왔다. 아직 겨울이 완전히 끝난 시기는 아니었기에 여기저기에 응달에는 잔설이 남아 있기도 했다. 새봄이 오기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으나 을씨년스러운 겨울의 스산함은 한기를 느끼게 해주었다. 산소 앞에 간단히 약식으로 제물을 차려놓고 성묘를 했다. 지난 여름에는 왔다가 그냥 발길을 돌렸던 기억이 그제서야 났다. 천천히 길을 내려왔다. 동생이 백모님의 묘소를 둘러보고 내려왔다. 백부묘소에서 성묘를 하고 할머니 묘소로 향했다. 5시를 지나고 있어서 서둘러야 했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넘어 조상의 묘소만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도 갑자기 어린 고라니 한마리가 나타났다. 그리고 할머니 묏자리 쪽으로 뛰어갔다.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상당히 어린 녀석이었는데 기특하게 묏자리만 안내하고 감쪽 같이 사라졌다. 먼저 동생과 집사람을 산소로 올려 보내고 차를 돌려왔다.길이 차가 한 대 겨우 빠져나갈만한 길이었고 비포장의 산길이어서 차량통행이 쉽지 않았다. 예전 언젠가는 차가 배수로에 빠져 레카차를 불러 겨우 빠져나간 뼈아픈 경험도 있었던 터라 미리 대비를 한 셈이었다. 길이 좋아진 탓인지 곳곳에 묏자리가 들어서 있었다. 기분 좋은 성묘가 되었고 상당히 좋은 길조로 받아들여졌다. 묵집에서 사온 동동주로 성묘를 했다.
고향 마을을 빠져 나오니 날이 어두컴컴해져 버렸다. 외가쪽을 가보려던 계획은 결국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읍내에서 현금을 찾아서는 시장통에서 돼지고기를 제법 샀다. 동생네, 부산집, 우리 것으로 삼등분했다. 군에 복무중인 큰 녀석이 오질 않았는지 특박이 연기됐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친구에게도 전화하고 연락을 기다렸으나 감감무소식이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해 하는 수 없이 부대에 전화를 하니 내부사정에 의해 특박이 일주일 연기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부산에 진입하는데 제법 막혔다. 동생을 덕천동에 내려다주고 부산집으로 향했다. 시간은 오후 8시30분이었다. 차를 주차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짐을 잔뜩 양쪽 손으로 들고 갔다. 부모님이 나와 있었다. 짐을 부려놓고 부랴부랴 감기몸살기가 있는 탓에 약국부터 찾았다. 약을 사가지고 왔다.
인사를 올리고 저녁을 먹고 하루 동안의 피로를 씻기위해 곧바로 잠에 곯아떨어졌다. 저녁은 신선한 회에 추어탕까지 맛있게 한 상 가득했지만 입맛이 없어 제대로 먹질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봉투준비를 했다. 35개를 준비했다. 고희연에 온 사람들에 대한 답례용이었다. 양주로 시바스 리갈을 가져가기로 했다. 신년용 수첩과 달력도 준비했다. 집에서 10시 30분경에 출발했다. 모친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으셨다. 가는 길에 고모님과 작은아들을 대연고개에서 태웠다. 자유시장 골목길을 돌아서 찾았다. 오전11시 10분경에 도착했다. 차를 주차하고 올라갔다. 32인석의 별도 연회장이 준비되어 있었다. 음식이
한창 뷔페식으로 준비 중이었다. 11시 30분경부터 식사가 된다고 했다. 정오인 12시쯤에 공식적인 기념행사의 의식이 치루어졌다. 케이크의 촛불이 점화되고 생일축하곡을 손자·손녀들이 불렀다. 집안 어르신의 건배제의가 있었고 축가로 외사촌 누님의 권주가를 들었다. 양주를 한 잔씩 돌렸다. 30여 명이 온 듯 했다. 가족 친지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주었던 것이다.
모친의 70 평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산간벽지 시골에서 3남 3녀중 막내로 태어나18세에 시집을 왔다. 남편도 없는 속에서 3년여의 고추보다 맵다던 시집살이를 견뎌냈다. 3년의 군생활을 무사히 마친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분가해 내려왔다. 3남 1녀의 자식을 키우며 갖은 고생을 다했고 8년 전쯤에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뇌졸중으로 인해 병마와 싸우기도 했다.
15년 남짓을 집안 식구 외의 객식구까지 챙겨주느라 갖가지 애환을 다 겪으셨다. 부모에게 지극정성의 효도를 다했고 시아주버니 등 시댁이고 친정이고 간에 우애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애를 쓰셨다. 말년에는 조금 편안한 생활을 보내시나 했는데 아버지의 사업이 폐업되는 바람에 가세도 기울어 더 큰 마음의 병을 얻으셨다. 환갑에는 그 연로하신 몸으로 설악산 대청봉을 종주하기도 했다. 강단이 있으셨고 추상 같은 위엄을 지니신 분이기도 했었다. 오로지 자식과 지아비를 위해 헌신하신 일생이었다. 자신의 한 몸을 희생해 자식과 지아비, 부모 형제를 위해 성심성의를 다한 일생이었으니 그 회한 또한 얼마나 깊으셨을까 싶었다. 나중에는 자리가 모자라 바깥으로 막내네 가족과 같이 나와서 먹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칠순잔치 고희연은 끝이 났다. 오후1시30분까지 연회장을 비워주어야 한다고 해서 나오고 말았다. 이종사촌네가 늦게 오는 바람에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했다.
연회장에서 작별을 하고 곧바로 서울로 향했다. 문현터널로 해서 남해안 고속도로로 올랐다. 얘기를 하다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톨게이트를 지나쳐서 지수에서 다시 돌아 나와 군북 IC로 들어갔다. 상점에서 컵이랑 소주를사들고는올라갔는데외할아버지의산소를찾을길이없었다. 도리없이외삼촌내외분에게만성묘를하고는인근에있던외숙모님댁에들러 인사를 드리고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셨다. 그리고 서울로 출발을 했다. 오후 4시 가량이었다. 중부고속도로로 올라와서 영동고속도로를 탔다. 북수원 IC에서 안양 방면으로 올라갔다. 동생을 의왕시에 내려주었다. 다시 산본으로 가서 외사촌 누님네 짐을 내려주고 집으로 귀가를 했다. 샤워를 하고 간단히 저녁을 차려먹었다. 그리고는 잠자리에 누웠다. 할머니 묏자리에서 본 고라니 한마리가 왠지 또렷하니 떠오르는 게 묘하다.
요즘은 모두들 장수하는 터라 회갑연은 생략하고 고희연으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몸이 부서질 만큼 정신없이 보낸 시간의 연속이었지만 기분은 날듯이 뿌듯한 이 쾌감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이려나. 만사형통의 징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피식 헛웃음이 절로 흘러 나왔다. 오랫동안 미루어왔던 숙제를 한 듯한 상쾌함과 통쾌함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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