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어머니는 해방되시기 5년 전에 3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나셨다. 엄격하셨던 아버지 밑에 자라 조신하게 컸다. 9년 후에는 오빠의 큰 딸이 태어났다. 조카였지만 같이 자랐으니 키우다시피 해서 엄청 따랐다고 한다. 올케 되는 분은 갑을이란 곳에서 시집을 왔다. 그렇게 인연이 되려 한 것인지 모를 일이다. 위로는 언니가 둘, 오빠가 셋이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무척이나 엄하셨고 지엄하신 권위를 갖고 계셨다. 마을 자체는 담양 전씨의 집성촌이었다. 결혼을 하게 된 사정은 대략 이러했다. 오빠되신 외삼촌께서 처가에 상
을 당하는 일이 생겨 문상을 가시게 되셨다. 그리고는 백부님을 만나게 되셨고 결혼이 성사되었다. 부친은 20이었고 모친은 18세였다. 전통혼례방식이었고 외사촌 누님은 시집가는 고모를 따라간다고 울고불고 하셨다. 3일간은 신행을 친정에서 보내고 시가로 갔다. 갔을 때 식구는 대략 12명 정도였다고 한다.
2년 여가 지나고 남편은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훈련소 시절에 큰녀석이 태어났다. 고추보다 맵다는 시집살이를 했다. 오로지 홀로 자식을 키우며 어려움과 역경을 이겨 나가셨다. 얼마 후에는 장손이 태어났다. 금이야 옥이야 집안의 대를 이을 장손이었으니 그 귀함이 오죽했겠는가. 그에 비해 자기 자식은 그야말로 찬밥 신세였고 답답해 했다. 젖이 모자란 올케를 위해 장손에게도 젖을 물리기도 하셨다. 타고난 건강이 있으셨고 젊으셨던 탓에 그 모진 세월을 이겨내실 수 있으셨고 참아낼 수 있었다.
3년이 흐르자 남편이 제대했다. 만사를 제치고 분가를 종용했고 간단한 가재도구를 챙겨서 부산행을 감행하게 되었다. 군북이란 곳에서부터 부산까지 기차를 타셨는데 멀미를 심하게 하는 바람에 엄청 고생하셨다. 그리하여 대연동이란 곳에 단칸셋방을 얻으셨다. 다행히 먼저와 자리를 잡고 있었던 누님네들이 음으로 양으로 도움이 있었다. 그런 후에 얼마쯤 지나서는 딸애가 태어났다. 그런 와중에 그 단칸셋방에도 사돈네의 고학생 한 명이 같이 살았다. 고단한 삶의 한 전조를 보는 듯했다. 모친은 참으로 대단한 억척스러움이 있었고 자식에 대한 깊은 열정을 가졌다. 자신들의 못다 이룬 한을 자식들에게 불어넣었고 보상받고자 했다. 둘째 아들이 태어날 때쯤 해서는 집을 옮겨 이제는 그럴듯한 곳으로 갔다. 조그만 구멍가게를 꾸려나가시기도 했다. 막내아들을 낳으실 때쯤 해서는 아예 새롭게 지은 집에서 분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좁은 집에 9가구쯤이 옴짝달싹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지내는 시절이었다. 사글세를 떼어먹고 야반도주를 하는 이도 있었고 구구각색의 사연을 겪는 여러 분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같은 고향 사람들도 있었고 친척네도 있기도 했다. 이쪽으로 와서도 친척네의 공부하는 기숙 학생은 끊이지 않았고 직장을 다니던 외사촌형도 있었다. 자기 식구를 챙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그속에서 밥을 해 대고 도시락 싸고 살림살이를 꾸려가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10여 년을 그렇게 뒷바라지하시면서 군소리 한 번 없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시집살이하던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었다.
한 번은 명절이라 온 신구가 고향을 가는 길이었다.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큰 녀석이 냉큼 버스를 타버린 것이었다. 한참을 찾아다녔다. 그리고는 결국 버스종점 파출소에서 아이를 찾기도 했다. 남자애들 속에 자랐던 딸애는 정말 여러 가지로 속을 썩였다. 모친과는 오촌되시는 외삼촌이 계셨는데 이분은 이따금 대연동으로 놀러오곤 했다. 그러면 소찬이었지만 상을 차려내어 놓았고 술을 한 잔씩하고 가곤했다. 자식 넷을키우시면서 그런 속에서도 친척집 학생들을 돌봐주었다. 아침 새벽녘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이 끊이질 않았고 바쁘고 정신없는 생활을 했던 것 같다. 어떤 도움이나 가진 것도 없이 오로지 젊은 혈기 하나로 생존의 문제에 부닥쳤지만, 그 어떤 어려움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몇 년 전에는 모친에 대한 고희연을 하기도 했었다. 70여 성상을 오로지 지아비와 자식을 향한 희생과 봉사로 일관해 온 어머니에 대해서는 항상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빚을 진 느낌을 안고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