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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노을

자녀교육

by 자한형 2023.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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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교육

아이를 키우다 보면 흔히 떠올리게 되는 화두이다. 자녀교육에 있어서 자율이냐 통제냐가 관건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자유방임이냐 통제에 의한 엄격함을 택할 것인가 자식을 교육시키다 보면 맞부딪치는 부분 중의 하나가 자율로 놔둘 것이냐 엄격한 통제와 프레스를 가할 것인가 하는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통상적으로는 대부분이 통제를 하여야 한다는 것에 큰 무게를 두고 의미가 부여되게 한다. 오로지 몽둥이가 약이고 조일수있을 때 확실히 조여야 공부도 확실하게 하고 원하는 방향대로의 지향이 이루어지고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다고 얘기한다. 예전에 지인의 자녀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착실하게 공부도 잘하고 모범적인 것으로 보여 세상의 견문도 넓히고 세상의 한 단면을 경험시킨다는 목적하에 미국으로 보내려고 했다. 고모가 있던 미국으로 고등학교이학년 여름방학에 떠나게 되었다. 얼마나 자유분방하고 다양화된 서구 문화에 내던져진 것인가. 엄격한 통제와 압박과 규율 속에서 자랐던 아이는 한 달간의 무방비상태의 자유분방함을 체험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거의 통제불능 사태가 빚어졌다. 부모가 제어할 수 없는 단계로까지 가버린 것이다. 결국 대입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하고 만것이다. 모든 것을 억압받고 하지 말라고 하던 것 투성이에서 무한한 자유를 맛보면서 천국이 따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놓인 것이다.

이에 반하는 친구의 이야기도 있다. 이웃동네에 살던 한 아이는 중 3때 쯤에 유럽을 보냈다. 서구문명의 찬란한 금자탑을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보고 와서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꼭 특목고를 가야겠다고 말이다. 죽으라고 열심히 공부해서 등수도 올리고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게 되자 결국은 특목고까지 입성하게 되었다고한다. 위의 두 가지 예에서 보여지듯이 외국문명을 접하고 왔는데 어떤 이는 그야말로 잘못된 방임으로 폐인이 될 만큼 완전히 삶의 지침을 잃어버리고 나머지는 제대로 된 체험으로 삶의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고 목표를 다진 성공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예화도 읽었다.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는 실크로드를 여행하다가 도적에게 잡혀 그들의 소굴로 끌려갔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소굴에는 세계의 명작이라 할 만한 것들을 모두 모아놓은 서고를 보고는 깜짝 놀라물어 보았다. 이런 명작을 보고서도 어떻게 나쁜 짓을 할 수 있냐고 그러자 도적은 나는 저 명작 속에서 나쁜 것만을 본다.라고 답했단다. 참 기가 막히고 말문이 닫힐 노릇이지 않은가. 이성계와 무학대사간의 대화에서도 이와 유사한 것을 느꼈던 적이 있다.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별 개념 없이 대사는 꼭 돼지 같이 보이요.그러자 무학대사는 제 눈에 임금님은 부처로 보이는데요하자. 이성계가 물었다.어째 그런 것이오.그러자 무학대사는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지요.했다고 한다. 사람이 가지는 시각차가 얼마나 큰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똑같이 외국을 다녀와도 외국문물을 접한 한 아이는 더욱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갖게 된 반면 또 한 아이는 잘못된 부분만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어긋남으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된 것이다. 자녀가 성장하고 어느 정도 머리가 굵어지고 자신이 판단할 수 있는 상태에 와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를 두고 부모가 이래라 저래라는 하기 힘든 건 사실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어긋나고 잘못된 길로 접어들고 엉뚱하게 생각하고 지향할 경우에는 분명하게 교정해주고 코치해주고 어떤 결과가 초래되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다.예전 희대의 살인마로 주목을 받았던 Y모군은 어린 시절 누군가가 자신에게 너도 할 수 있다.또는 너도 잘할 수 있다는 격려나 칭찬 한 마디만 받았더라면 이렇게 사회의 중죄인으로 잘못된 삶을 살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만큼 격려나 질책이나 칭찬뿐만 아니라 규율과 통제와 지도는 끊임없이 계속되어야할 필요는 분명 있을 것이다. 빗나가게 되고 잘못되게 되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자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키운 훈육의 잘못됨에 부모를 원망하고 탓하고 떠넘겨버리는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그러면 자녀를 혼자 스스로 노력하고 결정하고 진력하도록 다시말해 자율적으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고 모든 결정의 책임을 스스로 지도록 해야 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일까. 아니면 통제와 간섭에 의해 유도하고 권고해서 바람직한 방향을 찾아갈 수 있도록 꾸준히 조언해주고 이끌어주어야 할 것이냐가 문제로 제기된다.

얼마 전 뉴스에서 본 내용이다. 한 여학생이 모범적이고 성실하고 공부도 월등하게 잘했다고 했다. 부모의 뜻에 따라 고시를 꿈꾸도록 키워졌고 부모의 뜻에 따라 명문 법대에도 합격했다. 그런데 이 학생의 본래 하고자 했던 꿈은 음악이었다. 부모의 등살에 못이겨 자신의 꿈을 꼭꼭 숨겨둔 채 였다.어느 정도의 세월이 흐르고 꿈을 접은 자신에대한 마음의 정리도 되고 정상궤도에 진입했다고 인정되어 원룸을 얻어 독립을 시켜주었다. 그런데 얼마후 원룸을 방문한 부모는 깜짝 놀라게 되었다 .원룸이 여느 음악하는 공연장무대처럼 꾸며져 있다는 것이었다. 노발대발하는 부모의 질책을 들은 그녀는 그 다음날 자살을 선택하고 말았다. 참 안타까운 노릇이었고 불행한 사태가 아닐 수 없는일이었다. 부모의 권유대로 잘 따라 주었지만 겉으로 순응하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거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살아있는 동안 가슴에 품은 이룰 수 없는 한을 남긴 채 불귀의 객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세계적인 위상으로 떠오르는 인물들은 대개 혼자 힘으로 하루아침에 그런 영광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본인도 본인이지만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것과 피나는 노력, 그리고 부모의 헌신적인 지원 등이 혼연일체가 되어 완벽한 시너지 효과를 창출 했을 때 그 어느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자식이 원하는 바를 이해해주어야 하고 뒷바라지에 한 치의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자율적으로 알아서 하게 하되 잘못된 길로 가거나 엉뚱한 행태를 보일 때에는 분명한 메시지를 줘야하고 경고도 해야 할 것이다. 결론은 자율적으로 하게

지켜보되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 메스를 가하여야 한다.

세상이 워낙 험하고 다양한 상황이 연출되다보니까 신세대들의 자살유형도 별별 이유가 다 많았다. 기성세대가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억지스러운 이유도 있었다. 한 여성은 청운의 꿈을 품고 그야말로 불철주야 학업에 매진해서는 남들은 감히 생각도 못할 입법고시를 패스해서 사무관이 되었다. 그리고 국회로 발령을 받아 그곳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런 후 한달여가 지났다. 거의 허구 헌 날 반복되는 술자리에, 노래방에 믿기지 않을 만큼의 진절머리 나는 유흥문화에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라면 미래가 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실망한 나머지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고 만다. 자기집 아파트에서 아무 미련 없이 몸을 날렸던 것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갈등을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한 게 이런 씁쓸한 결말을 낳고 말았다. 우리가 관계 속에서 어울려 살아가면서 가져야할 삶에 대한 철학, 죽음에 대한 주관 등 제대로 인생을 이해하고 주체할 수 있는 준비가 미흡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보다 현실적이고 긍정적으로 세파를 헤쳐 나가고자 하는 힘을 이미 배웠더라면 훨씬 현명하게 잘 처신하며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누구나 자신의 자녀를 잘 키우고도 싶고 욕심도 내는 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품안에 자식이듯이 사춘기만 들면 아이들은 내 마음대로 잘 따라주진 않는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정형화된 틀을 갖고 기성세대를 견제하기 때문에 그들과 공통분모를 유추해내기는 결코 쉽지 않다. 자녀를 반듯하게 잘 키웠다는 의미도 인사성이 바르다든지 사회의 일인으로 멋진직장을 가졌다든지 또는 부모에게 효도를 잘 한다든지 하는 드러나는 사실 뿐으로 이 기준 또한 모호하다. 나도 자녀를 잘 키웠다는 소리를 들으면 무척이나 기분은 으쓱해지지만 결코 완벽하게 자신하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가 아무리 반듯하다고 여겨도 남들이 그저 그렇다고 하거나 아이들 스스로가 자기 비하를 하게 된다면 잘 키운 축에는 들기 힘든 것이다. 늘 어려운 과제였고 때때로 미봉책으로 하루하루 고비를 넘기며 예까지 왔다. 보편적인 원리로 정답에 가깝게 가려고 했지만 그 답조차 자녀와 소통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인 것이다. 자녀교육의 요체는 아마도 서로에 대한 신뢰감이 평소 어느 정도인가에 그 관건이 달려있다고 생각된다.

그저 여리게만 보이던 자식들이 어느 순간 내 눈높이를 잠식해 들어올 때면 내 무릎을 자연스레 낮추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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