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철보신의 범려
범려는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완지 사람으로 자는 소백이었다. 그는 정치가로서 살았고 농업인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마지막으로는 상인으로 거부가 되었던 인물이다. 월왕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왕조의부활이란 대업을 이룬다. 이렇게 된 후 그는 상장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범려는 “월왕 구천이 장경오훼(長頸烏喙 목이 길고, 입은 까마귀 주둥이인상)의 상이어서 어려움은 함께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 누릴 수 없다”고 친구였던 문종에 충고한다. 구천은 범려에게 전국토의 절반을 주겠다고 제의한다. 그럼에도 범려는 떠난다. 그러나 문종은 그의 조언을 듣지 않게 되고 결국은 토사구팽(兎死拘烹) 당하고 만다. 이 일화에서 너무나도 유명하게 회자(膾炙되는 말이 다음의 말이다. “새사냥이 끝나면 활이 필요없고,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게 된다. 적국이 있는 동안은 모신이 우대를 받으나 적국이 망하면 모반할까 염려하여 모신을 죽인다.”(蜚鳥盡良弓藏,狡兎死走拘烹敵國破謀臣亡(비조진양궁장,교토 사주구팽 적국파모신망)).
범려는 상장군의 높은 직위를 사양하고 월나라를 떠난 후에 이름을 치이자피라고 고치고 농업에 종사하게 된다. 얼마만큼 부를 축척하게 된 상황에서 본색을 알게 된 제나라 왕은 그에게 재상의 자리를 제안하게 되고 얼마간 재상을 한다. 그러자 범려는 다시 그많았던 재산을 모두 친지와 향당에게 물려주고 도나라로 떠난다. 도나라에 온 범려는 이름을 주공으로 바꾸고 상업에 종사해서 큰 부를 쌓게 된다. 그런 와중에 둘째아들이 초나라에서 시비가 붙어 사람을 살해하고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이때 범려가 한말이“천금을 가진 부잣집 아들은 저잣거리에서 죽지 않는다.”였다(천금지자불사어시(千金之子不死於市)) 그리고 또 남긴 말이 “고생을 하고 온갖 어려움을 겪어 본 사람은 돈을 중히 여겨 쓸줄을 모른다.”라고 했다. 아들 셋을 두었던 주공은 첫째아들에게 천금을 주어 초나라 현신(賢臣) 장생에게 보낸다. 그리고 신신당부를 한다. “결코 돈을 아깝다고 여기지 말고 기꺼이 다주고 동생을 구해오라”라고 했다. 첫째아들은 천금을 수레에 싣고 장생에게 가서 정중히 부탁을 했다. 그러자 장생은 초나라 임
금에게 아뢴다.“천기를 보니 나라에 재앙이 있을 듯하니 죄수들에게 사면령을 내려 은덕을 베푸는 것이 필요할 듯 합니다.”라고 진언을 한다. 그러자 왕은 사면령을 내리겠다고 한다.
그러자 이러한 소문이 시중에 퍼지게 된다. 사면령이 내려지면 범려의 둘째아들도 당연히 풀려 나올 것이라고 여긴 첫째 아들은 장생을 찾아가 천금의 재물을 돌려달라고 한다. 그러자 장생은 그것을 돌려주고 만다. 그리고 다시 입궐해서 임금에게 “도주공의 둘째아들이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혀 있는데 높은 관리가 도주공의 뇌물을 먹고 사면령을 내리게 했다는 소문이 돌아 민심이 흉흉하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임금은 도주공의 아들을 사형시키고 나머지 일반 죄수는 사면령을 내리라고 한다.
결국 둘째 아들은 주검이 된 채 돌아오게 된다. 도주공은 큰아들을 보낼 때 벌써 그렇게 주검이 되어서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보냈다고 한다. 본래는 셋째아들을 보낼려 했는데 여의칠 못했다. 첫째는 고생을 해서 돈의 소중함을 알았고 막내는 어느만큼 부유해진 상황에서 자라난 탓에 고생없이 돈을 펑펑쓸 수 있는 호기를 갖게 되었다.
범려는 명철보신(明哲保身)의 화신이었다. 이치에 밝고 잘 살려 몸을 온전하게 보전한다는 의미의 명철보신이다. 또한 만(滿)이면 손(損)을 초래하고 항룡은 회한이있다는 역(周易)의 원리를 터득함이었다.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의미다. 하늘에 오른 용을 항룡이라한다. 구만리 장천의 하늘에 오른 용도 영원히 하늘에 살 수는 없다. 하늘은 절정이요, 꼭짓점이고 끝이다. 더 이상 높이 올라갈 곳은 없다. 숨 쉬고 살려면 땅으로 다시 내려와야 한다. 그러므로 항룡은 후회나 회한을 갖기 마련이다. 이를 항룡유회라 한다. 사람이 지위가 높아졌을 때 스스로 경계하고 겸손하게 처신해서 후회할 일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기에서 사마천이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이로 범려는 손색이 없을 듯하다. 치욕적인 궁형을 당하면서까지 사마천이 그려내고자 했던 춘추전국시대 역사 속에서의 최고의 인물로 그리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범려는 사랑했던 여자 서시를 부차에게 바친다. 자신의 연모(戀慕)의 정을 떨쳐버리고 대의를 위해 매진(邁進)한다. 구천에게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각고를 겪게 하고 뼈를 깎는 절치부심(切齒腐心) 속에 복수의 칼을 갈게 만들었던 것이다.
범려의 경쟁자로 부각되는 인물은 오자서이다. 그는 일모도원(日暮途遠)으로 묘사된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즉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초나라에서 아버지와 형을 비운에 잃게 되고 그 복수를 다짐하게 된다. 그는 오왕 합려를 보좌해서 손무와 함께 부국강병을 꾀한다. 그런 연후에 초나라를 토벌하게 되고 원수를 갚게 된다. 오자서는 죽어있는 초왕의 시체를 꺼내 주검에 채찍질을 가한다. 이를 굴묘편시(掘墓鞭屍)라 한다. 합려가 죽고 부차가 왕위에 오르자, 오자서는 궁지에 몰리게 된다. 월왕구천과 범려 등을 죽일 것을 권고하지만 부차는 이를 듣지 않는다. 백비라는 간신의 모함에 의해 결국 오자서는 죽게 된다. 오자서는 죽으면서 내 눈알을 꺼내서 동문위에 올려놓으라고 했다. 구천과 범려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모습을 똑똑히 보게 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참으로 복수의 전형다운 유언이었다. 초나라에서 아버지와 형을 잃고 도망을 다니던 때 하루를 고민하며 복수의 칼을 갈았는데 얼마나 고민을
했으면 하루 밤사이에 검은 머리가 백발로 화했다고 한다. 사마천은 오자서편을 쓰면서자신의 비원을 같이 담았던 것이 아닐까라고 할만큼 그 복수심에 공감을 느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오자서는 월나라가 뱃속의 치료하기 어려운 질병과 같은 것이라서 바로 멸망시키지 않으면 후환이 있게 된다고 했다.
이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 심복지환(心腹之患)이다. 현대를 살아 가면서 명철보신의 화신인 범려의 삶과 처신 그리고 그 지혜가 한층 새롭게 되새겨진다. 중국의 소설가 김용은 범려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다고 하고 범려를 쫓아서 그가 말년을 보낸 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범려에 관한 일화는 수없이 많지만 대표적인 것 하나 들어보고자 한다. 월왕 구천이 부차의 신하가 되어 그의 밑에 있을 때의 일이다. 부차는 몸이 아파 제대로 운신도 못하고 있는 상태였었다. 범려는 구천에게 진언을 한다. “부차의 변을 가져오라 해서 그것을 맛보시고 변상태로 보아 대왕께서는 조만간에 바로 쾌차할 것이라고 얘기를 하십시오. 그러면 부차가 왕을 신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구천은 범려의 말대로 했다. 한나라의 제왕으로서 치욕적이고 굴욕적인 일을 대의를 위해 거리낌 없이 해낸 것이다. 진언을 한 범려도 그리고 그것을 실행한 구천도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부차는 월왕 구천에게 패배하여 죽어가면서 오자서의 고언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자결했다고 전해진다. 험난했던 춘추전국시대의 옛 이야기 속에서 슬기롭게 세상을 산 범려를 통해서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울 수 있고 세상살이의 묘법(妙法)을 터득해 볼 수 있다. 결코 주어진 현실에서 안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모든 전심전력(全心全力)을 다하여 이루고자 하는 바를 성취시켰다. 그런 후에는 그 어떤 복락(福樂)도 함께하지 않고 물러난다. 때를 아는 것이고 본분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 연후에 또 다시 농업으로 큰성공을 이룬 후에는 모든 것을 희사(喜捨)하고 빈몸으로 다시 또 출발한다. 이번에는 상업으로 큰 부를 이룬다. 농업에서 큰 부를 이루었을 때 고명(高名)이 불행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이름이 높아지면 불행해진다는 의미이리라.
세상만사(世上萬事)가 만(滿)이면 손(損)을 초래하고 항룡유회라 했다. 가득차면 손실을 보게 되고 하늘로 올라간 용에게는 내려올 일과 후회만 남는다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경구요, 본받아야 할 점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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