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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노을

브라질에서 온 친구

by 자한형 2023.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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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에서 온 친구

중추절이 지나고 나서 브라질에서 살고 있던 친구와 몇몇 동창들이 서울시내 한 횟집에서 정겨운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페이스북을 통해 서로 연락이 닿았고 12명이나 모여 옛이야기를 나누며 한참을 떠들고 웃었다. 그 예전의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 듯했다. 술값을 갹출하자고 제안한 친구도 있었으나 대기업의 임원으로 있는 이가 냈다. 러브샷이 몇 순배 돌았고 소주 맥주의 폭탄주를 연신 제조하기에 바빴다. 게중에는 아직 담배를 피우는 이들이 있어 핀잔을 받기도 했다. 50대 중반에 이르러 이제는 어느 만큼 생활의 안정을 찾은 듯 보였고 사회적 기반을 닦아 놓은 상태여서 중년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구미로 평택으로 내려가야 할 친구도 있었지만 귀한 시간을 내서 참석을 해주었다. 국내 굴지의 언론사 편집부국장도 있었고 방송사 근무 직원도 있었고 대학교수도 서넛 있었다. 견실한 사업체를 운영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예약이 된 줄 알았는데 예약을 할까하고 글을 남겼는데 그것으로 예약이 되었던 줄 아는 소통의 엇박자가 있었다. 한쪽 귀퉁이의 탁자들이 놓인 곳에 앉아서 모임을 하다 보니 조금 어설프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오랜만의 해후여서 개의치 않는 듯 했다. 브라질에서 온 절친은 거의 3년만의 귀국이었다. 10여 년 전쯤에 브라질로 갔었는데 이제는 어엿한 한 사업체의 사장으로 변모되어 사장의 무게가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이 친구와는 고등학교와 대학을 같이 다녔다. 그리고 같은 서클에 가입을 했었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부터 의기투합해서 급속히 친해졌다. 상대출신이 5명 정도였는데 그 중에 한 명이었다. 매사에 활달했고 에너지

가 넘쳤다. 적극적이었으며 의욕이 충만했다. 삼남삼녀 중 장남이었고 누나가 셋 남동생이 둘이었다. 대청동에 집이 있었는데 산동네였다. 제대로 공부방이 없었는데 공부를 더욱 집중할 요량으로 이불을 가져와 학교에서 한동안 숙식을 하며 지내기도 했었다. 1년 선배와 돈독한 우의를 가지기도 했었고 많이 휩쓸려 다니기도 했다. 어머님께서 자갈치에서 횟집을 했다. 큰 누나도 횟집을 했다. 엄청나게 강한 생활력을 갖고 계셨다. 부모님이 연로하셨다.

녀석은 이학년이 되자 경제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이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를 하게 되었다. 경기도 파주쪽 부대에서 병영생활을 했다. 면회를 갔다 오기도 했다. 선배의 여동생이 한명 있었는데 나름대로 사겨볼려고 노력했으나 제대로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졸업 후에는 LG그룹에 취직을 했다. 처음에는 숙대입구에서 하숙을 하며 직장생활을 했다. 항상 진취적으로 업무에 임했고 활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비좁은 하숙집에서도 항상 조그만 TV를 틀어놓고 공부를 하곤 했었다. AFKN이었다. 영어 듣기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꿈을 갖고 있었고 야망을 품고 있었다. 결혼을 해서는 광명 하안동에서 지내기도 했다. 2000년도 쯤에 브라질 파견근무를 했다. 그러다 그것이 끝나자 독립해서 그곳에서 사업을 하게 되었다. 이역만리 머나먼 곳에서의 생활이었다. 아이는 늦었는데 딸아이를 보았다. 일 년에 한 번 정도씩 귀국을 하곤 했는데 요즘은 하도 바빠서 그것조차도 여의치 못한 모양이었다. 선배 한 분은 영국에 정착해 있는데 자주 연락을 하고 있고 사업상 조언도 많이 받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제품생산을 중국 쪽에서 위탁해서 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한 모양이었다.

얼마 전 부터는 딸아이를 미국 앤도버로 유학을 보내 공부를 시키고 있다고 했다. 명문 중의 명문기숙고등학교라고 한다.소위 1%만 다닌다고 했다. 방학 중에 실력향상을 위해 한국으로 나와 과외를 받고 가기도 했다고 했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 공부를 한 탓인지 언제 어디서나 열성적이고 파이팅이 넘치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동창회 일에도 무척이나 적극적이고 후원할 일이 있으면 솔선해서 보통 수준 보다는 더 많이 하는 상황이었다. 브라질에 집까지 사두었다고 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조직 내에서 최고 직급에로의 전진이 필요하고 정상의 자리에 섰을 때 삶의 보람과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둘째 누나가 울산에 살고 있기도 했는데 그전에 부산에 살 때 놀러가서 카레라이스를 맛있게 얻어먹기도 했던 추억도 되살아난다.

선영봉사 등은 둘째아들이 한다고 했다. 부친은 오래전에 별세하셨다. 모친은 막내아들과 같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은퇴를 할 때쯤이면 한국으로 와야 하지 않느냐고 했었는데 녀석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10억을 가져온다 해도 강남에 아파트 하나 얻을 수 있겠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담배를 곧잘 끊기도 했는데 또다시 피우고 있다고 했다. 10여년 이상을 외국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소식은 주로 메일로 주고받고 있는 상황이다.

얼마 전에는 여름방학에 딸이 서울에서 지내게 될 예정인데 그럴듯한 템플스테이를 할 만한 절을 소개해 달라는 의사를 전달해와 대충 자료를 챙겨서 보내주었다. 참으로 선견지명이 있는 멋진 생각이었다고 여겨진다. 친구의 골프 실력은 수준급이어서 사업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영국에 있는 선배와도 한 번씩 라운딩을 하는 모양이었다. 딸아이가 미국에 있어 경유지를 미국을 경유하는 것이 일상화되기 전에는 주로

유럽 쪽을 거쳐서 왔는데 그럴 경우에는 영국에 들러 한 번씩 교류를 가졌던 모양이었다.

브라질에서 나오면 호텔에서 보통 묵었다. 대구에서도 한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침대가 싱글이어서 방을 하나 더 얻어 자기도 했다. 딸도 무척이나 예쁘게 키운 듯 했다. 예전에 보았던 일본 소설 중에 불모지대라는 것이 있었다. 그 속의 내용 중에 일본 종합상사에서 일하는 젊은이의 포부와 야망 같은 것이 있었는데 요지가 그것이었다. 자신이 종합상사만으로서 국제수지를 향상시키는 첨병역할을 맡고있고 일본의 새로운 중흥을 위한 선봉에 서있다는 확신을 갖고 불출주야 상상의 이윤확보와 추구를 위해 매진한 것이다. 이런 열정과 땀방울이 전후의 일본을 일으킨 원동력이었다고 했다.

우리도 중동에서 독일에서 외화벌이를 했던 숱한 해외동포의 수고와 노력이 우리의 경제를 도약시키는 밑거름이 되지 않았는가. 우리 나라에서도 힘든 일일 텐데 외국에서 외국인으로서 성공의 역사를 쓴다는 것은 열배 스무 배 힘든 과정이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편집부국장인 친구의 아들은 내년쯤이면 브라질 일주를 한번 다녀올 계획을 갖고 있다고 했다. 사장을 하는 친구의 아들은 외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데 학기 중에 6개월을 브라질에서 보낸 모양이었다. 이제는 한 5년 정도만 더 하다가 귀국을 하겠다는 뜻을 비치기도 했다. 은퇴하면 브라질에 한 번 와보라고 했는데 가볼 수 있을지는 아직까지 의문이다. 모쪼록 큰대업을 이루고 성공의 날개를 활짝 펴길 멀리서나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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