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인의 표상 윤 선생을 흠모하며
어느 날 윤 선생 내외가 교육원을 방문하였다.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윤 선생은 어느 때보다도 활달해 보였고 의기양양해 보였다. 차를 한잔 마시며 얘기를 나누었다. 이제는 팔순인 연세도 있으니 어떻게 한번 회고록을 써 보는 것을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지 않으냐는 권유에 펄쩍 뛰었다. 자신이 그렇게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니고 만인의 표상이 될 만하지도 않다고 막무가내였다. 20년 전에도 출판업을 하는 한 친구로부터도 그렇게 자서전을 써야하지 않느냐는 권고를 받은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일개 보통 사람이 뭘 한 게 있다고 자서전이고 회고록을 남기느냐고 손사래를 쳤다. 오늘은 약속하신 대로 휘호를 하나 써서 왔다. 제자(題字)는 상선약수(上善若水)였다. 물은 언제나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만물을 포용(包容)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직접 휘호(徽號)를 가져왔는데 사진 촬영을 해야 하는 데 사진기가 없었다. 여러 가지로 고민하다 결국 아이디어를 낸 것이 휴대용전화기의 카메라기능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휘호를 서로 한 손씩 부여잡고 정겨운 모습으로 한 컷의 사진을 촬영하였다. 촬영은 사모님이 해주었다.
선생과의 인연은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새롭게 부임해온 원장이 취임식을 앞두고 급히 인사를 갔다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11시쯤으로 예정되었는데 제대로 시간을 충분히 맞출 수 있을 것으로 작정하고 갔는데 가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10여 분이 늦어졌다. 상당히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인사를 드리고 사진을 찍고 반지를 맞추고 하다 보니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농업인의 집이라고 해서 어떤 시골의 농가를 상상하고 갔는데 아니었다. 드넓은 아파트였고 거실 가득히 난이 지천으로 널려있는 듯했다. 참으로 풍족하고 여유로운 농업인도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윤 선생은 일흔에 가까운 연배였다. 일선 농업 현장에서는 물러나 있었지만 여러 방면으로 자문도 해 주고 ‘새농민회’의 회원들의 경조사도 챙기는 등 바쁘게 생활하고 있었다. 처음 놀랐던 부분은 이런 것이었다. 경기도 새농민회 회장으로 있었던 J모 회장님댁을 인사차 방문하는 자리였다. 자신보다 먼저 원로로 윤 선생을 찾아가야 한다고 충언을 해주시는 것이다. 경기도 회장님도 대단하다고 여겼는데 더 선배가 있다고 하니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윤 선생은 60년대 초 모든 사람이 도시로 몰려들고 농촌을 떠나갈 때 그 어려운 농촌으로 귀농한 제1호였다. 손꼽힌 대학을 졸업한 이가 혈혈단신 농업과 농촌을 위해 헌신한 삶을 살았다. 37년간을 농업에 종사하며 농업으로 성공하는 길을 보여 주신 농업인의 표상 그 자체였다. 미국으로의 유학길도 마다하고 사상이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를 받고 정신병자로도 오인되며 농촌을 고집했던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윤 선생의 지극 정성은 모든 이에게 감동을 주고 농업인으로 선구자가 될 만큼 우뚝 선 것이다. 초창기에는 어려움도 많았다. 처음에는 경종법으로 포도농사도 지었고 양돈도 했었으나 본격적인 농업은 낙농업이었다. 젖소가 몸부림쳐서 남의 무밭을 다 뭉개버리고 휘젓고 다니고 하는 통에 그 ant값을 다 물어주러 다니기도 했다. 참으로 험난한 각고의 세월을 겪고 난 후에도 어떤 유혹이 다가와도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외길 인생으로 농업인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성천 류달영 선생과도 돈독한 유대를 갖고 있었다. 선생이 회장으로 있는 회의 이사진으로 참여하기도 했었다. 자신의 죽음 이후에 대해서도 장기기증까지 다 해놓은 상태라고 하니 참으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라 할 만하다. 1977년도 새농민상을, 1981년에는 5.16 민족상을, 1999년에는 일가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었다. 자녀로는 아들 둘을 두었고 손자도 여럿 두어 다복한 가정을 이뤄 행복한 노후를 보내며 아직도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얼마 전에 만난 자리에서 일화를 하나 털어놓았다. 자신이 안양 교도소에 강의하러 나갔을 때라고 한다. 월 1회씩 나갔는데 그것도 오래 하다 보니 이젠 죄수들의 눈빛을 보면 다 느낄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 한 죄수는 자신과 눈빛을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단다. 그렇게 피하다 어느 순간에 보면 눈빛을 마주치게 된다는 것이다. 한참 강의를 진행하다 보면 그의 눈빛이 살기를 띄던 눈빛에서 차츰 부드러워지고 안정화되는 것을 느낄 때면 강의를 온 보람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또 한 번은 어느 지인에게 휘호를 하나 써 주었다. 그것은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는 글이었다. 그 글을 자신의 집무실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고서는 두고두고 음미하고 마음속에 새기며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퇴직 후에는 그 액자를 집으로 가져와 거실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고 간직한다는 얘기를 전해주기도 했다. 항상 겸손하고 덕을 지닌 모습으로 우리 농촌과 농업, 그리고 농협의 장래를 위해 애쓰고 충고해주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 반성하게 된다. 과연 누가 그렇게 열정과 애정을 가지고 평생을 헌신할 수 있을까 반문하며 나 자신에게도 담금질하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건강하고 평안한 삶을 오래도록 누리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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