묏자리를 찾아
지난 연말에 어렵게 휴가를 내서 부모님의 묏자리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부동산 중개인을 대동하고 산속으로 올라갔다. 하필 그날은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속담대로 엄청 많은 차량과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아스팔트로 되어있는 이차로 도로의 한쪽 길이 주차장화 되어있었다. 군부대입구에서 양쪽편으로 줄잡아 200미터 가량은 되어보였다. 입구에 군부대가 있었고 부대를 가로질러서 올라가야 묏자리를 볼 수 있었다. 평상시의 한적한 때였다면 차로 금방 올라갈 수 있는 곳이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부대위병소에서 신분증을 제출하고 출입증을 교부받았다. 셋이서 걸어서 한참을 올라가니 부대 후문이 나왔다. 공사를 하고 있는 듯 했다. 민간업자들이 와서 막사의 마무리 정비를 하고 있었고 출입구 등은 포장공사 중이었다. 중개인이 부대에 다시 전화를 해서 후문을 열어달라고 독촉을 한후에야 겨우 후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전화를 한뒤 얼마 지나지 않아 관리병사가 막사에서 뛰어올라와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그가 내려올 때에도 전화를 주면 바로 열어주겠노라고 했다. 길은 후문이후부터는 시멘트로 된 도로였다. 산길이었기에 아스팔트로 포장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듯했다. 10여분을 올라가자 여기저기 좌우 곳곳에 묘들이 들어서 있었다.
일부는 동향이었고 또 어떤 자리는 남향으로 깨끗하게 정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매장묘 형태가 아닌 납골묘형식으로 된 곳도 있었고 묘지석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기도 하였다. 대리석으로 깨끗하게 조성되어져 있기도 하였다. 한쪽 귀퉁이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기도 하였다. 조성된 묏자리를 빙 둘러서 오동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표식으로 되어 있는 말뚝을 기점으로 해서 눈대중으로 어느 정도란 크기와 규모를 어림짐작으로 파악하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나무들로 우거져 있는 상태라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었다. 600평 정도였기에 상당한 규모였다. 군부대를 통과하지 않고 우회도로로 해서도 걸어올라 올수는 있다고 했다. 도로 아래쪽으로는 지대가 낮아 산소자리로는 부적당하였다. 중개업자는 산소자리를 쓸 때에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 마을사람들의 민원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땅주인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마을을 통과해서 묘를 쓰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는 것이다. 평소에 친분을 쌓아두었거나 연고가 없는 상태에서는 상여나 영구차가 함부로 마을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이 오늘날의 세태요 세상인심이라는 것이다. 한참 지형적으로 북쪽이어서 폭설이나 강추위가 걱정이 되기도 했으나 차량의 진입이 용이한 점과 민원의 소지가 발생될 여지가 없는 것이 장점으로 작용될 것 같았다. 군부대를 통과해야하는 번거로움과 규모가 너무 큰 것이 약점으로 여겨졌다. 산길을 내려와 차에 탑승했다. 중개인은 중개인대로 차를 가져온 상태라 따로따로 출발하게 되었다. 다음의 묏자리로 향했다. 그곳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곳이었고 관광자원의 보호차원에서 공장진입이 불허되는 지역이었던 것이 묏자리로서는 적격성을 갖추고 있었다. 다음의 묏자리는 큰길에서 산의 소방도로 같은 곳으로 10여분을 차로 올라갔다. 한쪽 공터 같은 곳에 차를 주차해두고 언덕배기를 올라가야 했다. 한쪽에는 고압전신주가 우뚝 솟아 있었다. 전체산으로 치자면 육내지 칠부능선에 해당된다는 설명이었다. 잡목들이 오육미터이상 자라 있는 상태여서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위쪽과 아래쪽에는 이미 산소가 자리를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소개자와 인척관계에 있는 지인의 땅이었기에 일반 부동산에서 소개하는 바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16년 전에 부친께서 사두었던 것인데 그 당시 값으로 평당 이십 여만원을 주었다는 것이었다. 나무들을 베어내고 작업을 한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묏자리로 여겨질 만 하였다. 풍수를 보는 지관도 다녀갔단다. 명당이라 할 만한 정도는 아니지만 사방이 탁 트인 상태여서 나쁘지는 않은 곳이라는 것이었다. 드문드문 묏자리를 해 놓은 곳을 사방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진입로 작업도 크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마음에 조금 걸리는 부분은 고압전신주 부분이었다. 망자에게 그것이 또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가 걱정이 되었다. 그곳에서 나오고 보니 들어가는 길은 나오는 길로 들어가면 편하게 진입할 수 있을 듯하였다.
천하의 명당자리를 찾아 주유하기도 했고 그것에 신명을 바치기도 했던 때에 비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질 만하다.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범접할 수 없는 부분들이었고 금기시되던 분야였으리라. 가난함과 천함의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해 양반가문의 명당무덤에 유골을 몰래 암매장하기도 했던 예도 흔히 있었다. 가장 유명한 얘기는 대원군과 얽혀있다. 안동김씨의 세도가 하늘을 찌르던 19세기 말엽 파락호로 지내던 대원군은 권력에의 복심을 채우기 위해 명당자리를 찾았다. 지관 정만인이라는 자가 찾아와 예산 덕산에 두 개의 명당자리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하나는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리는 자리고 또 하나는 2대에 걸쳐 군왕이 나는 자리라고 했다. 대원군은 군왕이 난다는 자리를 택했다. 대원군은 명당을 찾아준 정만인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했다. 대원군은 난그림을 그려주고 안동김씨의 환심을 산 다음 충청관찰사에게 대원군의 분묘이장에 협조하라는 편지를 받게 된다. 이로써 대원군은 본래 그 자리에 있던 절 가야사를 없애고 탑도 불태운 뒤 연천군에 있었던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7년 뒤에 둘째아들 명복이 태어나고 12년 후 명복은 조선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정만인은 대원위가 권좌에 있는 때에 찾아가 소원을 얘기한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인쇄할 수 있는 권한과 감독권을 달라고 한다. 그런 연후에 그는 팔만대장경을 몇 부 인쇄하고 해인이라는 도장을 갖고 줄행랑을 친다. 대원위는 그 후에도 정만인을 수소문해서 찾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해인은 풍운뇌정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 용왕이 다시 회수해 갔다는 후문이 돌기도 했다. 역술가가 대원위에게 “갑인년 전에 만인을 죽여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얘기를 했다고 했었다. 그것은 만 명이 아니라 정만인을 이른 것이었다는 야사가 전해지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묏자리를 두 군데 더 돌아보았다. 단독으로 결정할 부분도 아니고 가족들과의 협의와 상의를 거쳐야 할 것이고 더우기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의사일 듯하다. 낯선 땅에 안장되는 것에 대해 어떤 의향을 내비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부친의 경우에는 그래도 고향땅에 묻히시기를 희망하는 반면 모친의 경우에는 손사래를 칠만큼 엄두도 내지 못하게 했었다. 앞으로 그런대로 시간이 있는 만큼 좀 더 충분히 찾아보고 둘러보고 결정해야할 듯하다. 시대는 많이 달라졌고 사람들의 의식도 변화되었다. 유교적 분묘를 고집하는 것은 당사자들의 뜻이라 하더라도 후손들이 그렇게 가납하고 받아들여 주질 못하고 있다. 모든 경제권이 자식들에게 넘어가고 부양을 받는 입장에서 자식들에게 감나라 대추나라를 요구할만한 사정이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로 변해가고 있다. 매년 벌초며 성묘 등 관리를 계속하고 유지시켜나가는 것도 보통일은 아닐 것이다. 후손들이 많아 번갈아가며 충분히 관리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번거롭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제는 간명하고 깨끗하게 살다간 흔적만 남겨놓은 채 갈 수 있도록 변화되어가고 있다. 매년 올리는 제사마저도 간단하고 속전속결로 처결하고 있는 상황에 있다. 오랫동안 숙제로 남아있던 문제를 조금은 풀어내긴 했지만 완전한 해결까지는 여전히 요원해 보이긴 하다. 아무튼 여러 가지로 신경쓰이는 부분에 대해서 이리저리 모색한 것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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