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년 설을 보내며
햇살에 봄기운의 따사로움이 느껴지는 금요일 오후다. 자연의 순리는 언제나 변함없이 법칙대로 돌아가는 듯하다. 우수(雨水)를 얼마 남기고 있지 않다 보니 그렇게 혹독했던 추위도 한풀 꺾어진 듯하다. 얼마 전 우리 가족은 설을 보내러 민족 대이동의 한 명이 되어 고향을 갔다가 돌아왔다. 가족 전체가 가지 못하고 한 녀석은 엄동설한(嚴冬雪寒)에 군생활을 하느라 함께 하지 못했다. 내년까지도 가지 못할 것이다. 이제 일병이니 내후년은 되어야 동참이 가능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일찍 출발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여러 차례 통화를 했으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정시에 퇴근을 한 집사람 탓에 늦은 밤 시간이 되어서야 출발이 될 수 있었다. 일차적인 출발은 서울에서 안성까지였다. 집사람과 큰 아들이 7시40분발 안성행을 탔다. 안성공도에 도착한 시간은 8시 40분경이었다. 그리고 셋이 합류되어 출발한 시간은 8시 50분이었다. 다른 방법으로 다음날 새벽녘에 출발을 하는 것이 어떨까 했는데 그냥 가자는 의견이어서 곧바로 출발했다.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가야 할 듯하여 어떻게든 잠을 좀 자볼 요량으로 이불을 뒤집어썼지만 쉽사리 잠을 청하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하고 말았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미리 준비했던 김밥으로 간단히 요기했다. 일단 국도를 타고 안성 톨게이트 서울방향으로 진입해서 평택 음성 간 고속도로를 탔다. 초입부터 조짐이 요상했다. 하행선은 거의 주차장 수준이었다. 조금 전까지 하나도 막히지 않고 잘 왔었다는 말이 실감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남안성IC 쯤을 지나자 가는 길이 편해졌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30분 여분을 달려 충북 음성 대소 분기점에 도착해 보니 하행길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 시간반여를 달려 도착한 곳은 청원 분기점이었다. 막히지 않은 평소 때의 상황이었다면 30분이면 달려올 거리를 세 곱절이절이 걸린 셈이었다. 청원 ㅡ상주 간 고속도로는 순조로웠다. 속리산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여유를 가지고 다시 출발했다. 자정 무렵이라 두 사람은 잠을 청하고 있었다. 상주 낙동 분기점은 거북이걸음으로 운행이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김천에서 대구방향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마산 쪽으로 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그래도 대구 쪽이 나을 듯해서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새벽 한 시를 넘어서고 있었고 운전한 지도4시간을 지나고 있어 졸음이 몰려왔으나 피곤에 지쳐있는 집사람에게 운전대를 넘길 수도 없었다. 한창 몰려오는 졸음을 쫓으며 가까스로 운전을 해나갔다. 부산 ㅡ대구 간 민자 고속도로는 휑하니 비어있어 제 속력을 내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리하여 최종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하니 새벽 2시 30분이었다. 차를 주차해 두고 집에 들어가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11시경에 동생과 함께 남천동으로 갔다. 그리고 회를 떠 왔다.. 광어, 농어, 아나고, 낙지, 해삼, 멍게, 등이었다. 회에 곁들일 야채도 시장에서 사 왔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회에 약주를 한잔 하며 담소했다. 조카들은 중3인데 키가 168센티미터라고 했다. 무척이나 조숙한 편이었다. 부친은 자신의 묏자리를 한번 둘러봤으면 하는 눈치였으나 보름 뒤 모친생신 때에 시간을 내서 가보기로 했다. 오후에는 둘째 동생이 와서 저녁을 먹고 갔다. 저녁시간에는 이종사촌 형네 가족 등이 와서 한바탕 시끌벅적했다. 섣달 그믐날 밤이었다. 모친은 밥그릇을 여러 개 준비해 두고 그것에 소금을 담고 양초를 꼽았다. 부엌 싱크대위에 죽 정렬시켜 놓고 불을 밝혔다. 야심한 시각이었다. 식구들 한 사람씩 불러내놓고 당부를 했다.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며 7배를 하라고 했다. 밤새도록 촛불을 밝히는 의식이 진행되었다. 다음날 아침이 설날이었다. 모두들 설빔을 차려입고 부모님께 세배를 드렸다. 건강하고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이 쏟아졌다. 떡국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제사를 모시러 종갓집으로 갔다. 제사를 모시고 음복을 하고 아침으로 제삿밥을 먹었다. 오촌들과는 따로 이번부터 제사를 드리기로 했단다. 한결 편하게 제사를 지내게 된 셈이었다. 서로 간에 세배를 나눴고 덕담도 했다. 그리고 작은 집으로 가서 두 번째 제사를 모셨다. 예전에는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제사가 끝났는데 이제는 정오도 되기 전에 제사가 끝이 났다. 그리고 부모님 댁으로 귀가했다. 저녁때 한참 무리를 할 듯해서 미리 잠을 좀 보충해 두기로 하고 잠깐 누웠다. 오후쯤에 일어나니 여동생네 가족들이 와 있었다. 근황을 물어보고 얘기를 나누었다. 둘째 딸이 서울 H대학에 합격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이제는 한시름 덜게 생겼다고 격려해 주었다.. 모였던 식구들이 한 가족씩 떠나갔다. 마지막으로 채비를 해서 출발했다. 오후4시경이었다. 부모님의 정과 가족 친지들의 온정을 듬뿍 받고 호기롭게 출발을 했으나 도로사정은 엉망이었다. 고속도로 초입 출입 때부터 심각했다. 수정터널과 백양터널을 통과하고 나니 도로가 주차장 수준이었다. 청도 휴게소까지 가는데 2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한참 정체가 길어져 용변이 마려운 사람들이 휴게소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대구를 지나 중부내륙으로 가서 청원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속리산 휴게소에서 저녁을 먹었다. 밤 9시를 지나고 있었다. 출발한지 5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도로상황 안내판에서는 호의적인 상황을 내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으로 중부고속도로를 탔다. 두 시간여를 달려 집에 도착이 되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군에 있는 아들에게서 전화를 받아 무척이나 반가웠다. 형과도 제법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아주 빠듯한 일정에서의 귀성이었으나 그런대로 무난하게 명절을 보내고 온 것 같았다. 나중에 보도된 내용으로는 이제는 역귀성이 무척이나 많아졌다는 것과 귀성인파의 분산과 스마트폰 등의 이용으로 도로정체는 훨씬 심각성이 무뎌졌다고 했다. 한해를 새롭게 보낼 수 있는 활력을 얻고 온 듯했다. 경기가 좋지 않고 경제상황도 어렵지만 새롭게 출범하는 정부와 함께 우리의 저력을 보여주는 한 해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올해 계사년에 우리 국운이 욱일승천하는 한 해가 되었음 하고 소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