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년 추석을 지내며
요즘 하도 신문지상이고 방송에서부터 요란하게 떠들어대던 터라 귀성도 걱정이고 귀경도 걱정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해외로 빠져나간 이가 많아졌다는 뉴스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하기도 했다. 아무튼 추석을 맞아 고향으로의 출발은 화요일 늦은 시각이었다. 집사람과 아들이 오후 8시발 버스를 탔다고 했다. 9시면 도착할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본격적인 출발은 9시 안성 공도에서 출발이 되었다. 10분전 쯤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터라 예년처럼 만나는데 애로를 겪지는 않았다. 미리 잠이라도 자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출발하고 나서 5분후에 고속도로에 올랐다. 하행선의 도로는 거의 주차장 수준이었고 버스전용차로도 속수무책이었다. 우리는 반대방향으로 해서 안성에서 평택 ㅡ 충주 간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초입부터 난항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하는 심정으로 기다렸으나 정체는 쉽게 해소되지 못했다. 20여분이 흐른 후 남안성 IC 부근을 지나자 조금 소통이 원활해졌다. 장시간의 여행이 될 것으로 예상했는지 아들은 영화를 다운로드하여 두었다고 했다. 고전영화로 대부였다. 집사람도 버스를 타기 전에 저녁식사를 한터라 만반의 준비는 되어있는 셈이었다. 20킬로미터를 조금 넘은 음성 대소까지는 40분정도가 소요되었다. 다음은 최근에 개통이 된 음성 ㅡ 충주 간 고속도로였다. 막힘없이 순조로운 차량의 흐름을 보여주었다. 금방 충주IC에 도착했다. 충주에서 김천까지의 코스가 난항이었다. 방송으로 예고되고 있는 교통정보는 쉽게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괴산도 막혔고 한참 정체구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120킬로미터의 거리였는데 극심한 정체현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간은 점차 자정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김천이 기로였다. 마산 쪽으로 가는 코스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대구 쪽으로 갈 것인가의 기로였다. 일단은 두 시간 이상의 운전으로 인한 피로를 풀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선산휴게소로 들어가 새롭게 출발할 준비를 해야 했다. 휴게소도 자정이 지났기에 편의점 외에는 영업을 하지 않고 있었다. 집사람이 먹을 캔커피를 자판기에서 뽑아왔다. 편의점에도 계산을 위해 길게 줄이 이어져 있었다. 휴게소에서 김천까지 짧은 거리였는데도 정체가 있었다. 겨우 새로 경부고속도로에 접어들자 차선이 늘어난 탓에 차량의 흐름은 순조로웠다. 출발한지 3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차량에 탑재된 내비게이션에서의 도착시간은 2시45분이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집사람과 아들은 수면에 빠져들었다. 부산 톨케이트에 통과하니 거의 두시를 넘기고 있었다. 꼬박 5시간을 운전한 것이었다. 평소의 시간대보다는 두 시간가량이 더 소요된 것이었다. 다음에는 꼭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집에 당도하니 새벽 2시 30분이었다. 다음날이 되었다. 가족들이 다 모였다. 오랜만에 만난 얼굴들이었다. 조카들은 시험공부 때문에 명절날에 겨우 얼굴을 비칠 것이라고 했다. 이야기꽃을 피웠다. 저녁에는 사촌들의 내방도 있었다. 술도 제법 마신 상태가 되었다. 명절날에는 큰댁에 가서 제사를 모셨다. 사촌형네는 고향에서 내려왔는데 일찍 나왔음에도 시간을 맞추지 못해 제사를 다 끝내고 나서야 당도하기도 했다. 한창 얘기 중에 벌초얘기가 나왔다. 다들 참가를 해 같이 하고 성묘도 해야 도리이건만 그것이 그렇게 실행이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한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참석이 안 되면 전화라도 해서 고생한 사람들의 위로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다들 묵묵부답이었고 유구무언이었다. 개인 사업을 하고 있는 오촌 동생은 차를 바꿨다. 벤츠를 타고 온 것이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혼다였는데 사업이 잘되는 모양이었다. 골프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스마트폰에 촬영된 스코어판에 나온 것을 보니 73타 수준이었다. 버디를 네 번이나 한 훌륭한 싱글 수준의 스코어였다. 엄청난 연습과 훈련의 결과였다. 하루에 300개씩을 연습장에서 치는 것을 거의 6개월간 했단다. 오전에 제사를 마치고 오후에는 곧바로 떠날 채비를 했다. 짐을 바리바리 싣고 다시 또 처가를 향해 길을 나섰다. 동서고가를 탔는데 입구부터 낙동대교까지 10여 킬로미터가 정체라고 안내되었다. 도리가 없었다. 차속에서 정체가 풀리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을 강구할 길이 없었다. 네비가 안내하는 시각은 도착 예정시간이 6시 50분이었고 정체가 지속되자 도착시간은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 출발시간부터 계산하면 거의 너댓 시간이 걸리는 셈이었다. 두어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절반도 못 간 신세가 되었다. 휴게소에 가서 주유를 하면서 볼일도 보았다. 워낙 사람들이 많아 휴게소는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제는 좀 쉬어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고 정체도 어느 정도 풀린 듯했다. 갑자기 몰려오는 수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결국 집사람과 운전을 교대했다. 처가에 도착하니 거의 저녁때가 되어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며 환담했다. 식사 후 처남네 가족들이 처가에 몰려가고 나니 집안이 조용해졌다. 아들은 사촌형과 얘기를 나눈다며 나갔다. 남은 것은 장인, 장모와 넷이었다. 팔순을 넘긴 고령의 나이였음에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신 것이 자식들로서 참으로 행운이었다. 비록 처남댁에서 나와 있지만 지척거리에 있고 처형네와 가까이 있어 적적하지 않게 지내고 계신 것도 큰 위안이 되었다. 얼마 후에는 처제내외가 와서 같이 시간을 나누었다. 다음날 일찍 출발할 요량이었기에 자정 무렵에 취침에 들어갔다. 집사람은 거의 새벽녘까지 담소를 한 것 같았다. 다음날이 되자 새벽같이 출발준비를 서둘렀다. 그래도 늦었다. 시간을 보니 7시를 넘기고 있었다. 정다웠던 사람들과의 작별을 하고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주를 지나고 천안 논산 간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아들과 집사람은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휴게소가 있는 정안부근에 정체가 된다는 안내를 보았다. 대전-당진간 고속도로가 연결된 당진으로 향하는 우회로를 택했다. 차량의 흐름은 원활했다. 서서울톨게이트를 통과하고 보니 10시도 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니 10시10분가량이었다. 평소 때보다 훨씬 빠르게 온 것이었다. 추석명절 대장정이 마무리된 느낌이었다.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한 해를 마무리하는 느낌이었다. 내년 설이 되면 또 이렇게 다녀와야 하리라. 내년 추석에는 둘째가 제대를 한 이후이니 네 식구가 모두 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해 주었다. 그렇게 보내고 났음에도 아직 이틀의 연휴가 더 남았다. 세상인심도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계사년 추석을 보내며 느끼는 감상은 남달랐다. 추석 민심의 동향은 그렇게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경제상황이 악화되어져 있다 보니 모두들 힘들어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다들 앞으로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과 희망을 안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듯했다. 경비만 엄청 소요된 것 같아 씁쓸함만이 남았다. 보다 알뜰하게 소비를 했어야 하는데 하는 일말의 후회도 남았다. 다음엔 나아지리라 다짐하며 이제 다시 새로운 기분과 각오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