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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향을 향한 여정

보직 농기계팀

by 자한형 2023.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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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직 농기계팀원

 

 

내가 농기계팀으로 가게 된 것은 1995년이었다. 전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정된 것이었다. 유류쪽에 K모군이 있었다. 보직을 바꿔야 하는 필요가 발생함으로 인해 교체가 된 것이었다. 농기계쪽이 전체적으로 부서내에서도 상당히 홀대를 받고 있었던 터라 탐탁치가 않았다. 그런데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주무쪽이나 비료농약쪽에서만 승진이 이루어지니까 농기계담당 직원이 부장에게 강하게 항의를 했다. 그래서 주무서무담당이 승진을 못하고 농기계쪽 서무가 승진해 나가는 일이 있기도 했다. 아무튼 농기계 부문은 찬밥이었다. 한동안 팀의 이동으로 인해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농기계팀, 유류팀 등이 있었다. 사후봉사팀도 있었는데 농기계쪽으로 일원화가 되었다. 처음에 가서는 얼이 빠져 있다시피 했다. 전입 초창기에는 팀내에서 하도 말도 없이 묵묵히 앉아 있으니 과장이 상담을 하면서 뭔가 문제 있는 것 아닌가 하고 의아해 했었다. 정부지원 농기계라고 주된 것은 고참이 하고 그 외 일반 농기계와 농기계 기술교육 등을 담당하는 업무였다. 과장이 술을 못하는 형편이어서 회식 등도 자리는 하되 술은 기본적으로 건배정도만 하는 식이었다. 분위기가 전의 자재팀과는 너무도 달랐다. 오히려 예전사람들과 자주 어울리기도 했다. C모 팀원이 있었는데 같이 퇴근을 하면서 시청 앞으로 가서 생맥주를 한잔씩 하곤 했었다. 집이 강동구의 고덕동 부근이었는데 충청도 대천쪽 출신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죽이 맞아 어울려서 다니곤 했었다. 집은 신림동 빌라에서 소형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전체 120세대 쯤 되는 소규모 아파트 단지였다. 20평대의 규모였다. 차도 중고로 하나 구입을 했다. 프라이드 베타였다. 운전도 미숙하고 초보시절이었는데 겁도 없이 잘 타고 돌아다녔다. 큰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 했다. 8, 5살이었다. 공립 유치원이었던 어린이집을 다니다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한 것이다. 유치원을 졸업할 때 재롱잔치를 했다. 그것을 할 때 전체 진행을 위한 사회를 보았다. 집사람도 학교를 나가야 했기에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유치원에서 데려오고 데려다주고 하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었다. 한 아이는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한명은 학교에 데려다주는 식이었다. 아래층 집에서 비가 새는 바람에 일주일 정도의 공사기간이 있어 전 가족이 모텔생활을 일주일간 하기도 했다. 부장으로 오신 이는 지도사업 마인드를 가진 운동가적인 성격의 부장이었다. 교육원장도 역임했었고 원예특작부장을 하신 후에 오셨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우단장도 왔다. 부장은 부장을 마치고서는 지역본부장으로 영전해 가기도 했다. 그래서 안성쪽으로 농촌일손돕기지원을 부차원에서 나가기도 했다. K모팀원이 일손돕기후 점심때 도수높은 백포도주를 마시고 혼줄이 나기도 했었다. 그래서 결국 강남에서 상계동 집까지 집사람을 불러 데려다주기도 했다. 야심한 시각에 지리도 미숙한 강북을 다녀 오는 게 보통일은 아니었다. 농기계팀에서는 체육행사 등도 특별하게 마련했다. 술만 먹는 자리가 아니라 문화행사 수준으로 격상시켜서 하기도 했다. 영화를 보기도 했고 워크힐에 가서 세계적인 마술쇼 같은 것을 보면서 식사를 하기도 했다. 상당히 격조가 있는 행사였었던 듯했다. 3년을 통해서 농기계사업의 전반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5개정도의 업체가 주류를 형성했다. 대동공업, 국제, 동양, LG, 그리고 아시아정도였다. 4대 업체에 농기계서비스센터의 기술요원을 위탁해서 교육을 시켰다. 그리고 자동차정비도 필요한 부분이라고 해서 자동차정비에 관한 위탁교육도 실시했다. 한번은 용인에 있었던 동양물산에 농기계교육을 받으러 같던 교육생이 교육기간 도중에 숨지는 사고가 발생이 되었다. ㅇㅇ농협직원이었는데 지병이 있었는데도 교육을 입교한 것이었다. 부장과 함께 가서 조문()을 하기도 했다. 부장을 모시고 농기계 위탁교육장을 찾았다. 부장의 특강은 상당히 명강이었다. 교육원장을 했었기에 강의 등에는 탁월한 역량을 갖고 있었다. 운동가적인 기질과 성향이 있었기에 사업적이고 이익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별로 관여가 없으셨지만 지도지원 등에 있어서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농기계 박람회와 관련된 것이 있었다. 농림부쪽에서 협조문서가 와서 그것을 시행하려고 하니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결국은 시행이 보류되었다. 한 직원이 통계쪽의 집합교육을 가려고 했었던 부분으로 인해 불협화음이 생기기도 했었다. 굳이 경제사업부 직원이 그런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 논리였고 주장이었다. 결국 교육은 갔으나 눈총은 남았다. 독실한 크리스천이기도 했다. 강철 같은 체력을 갖고 있었다. 부장과 자재부 직원, 그리고 나 셋이 함께 북한산을 등반한 일이 있었는데 뒤쫓아가느라 무척이나 고생한 기억이 새삼스러웠다. 한사람은 산악회 총무였고 또 한사람은 토요일마다 산행을 북한산으로 하는 이였다. 부장은 아침마다 북한산을 오르락내리락 하신 분이었다. 그 속에 끼였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상상이 되는 부분이었다. 명절에는 부장댁에 세배를 드리러 가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주기도 했다. 3년 후에 과장은 승진해 나가고 J과장이 후임으로 왔다. 96년도에는 경제사업관련 T/F팀이 꾸려졌다. 3개월 동안 운영이 되었다. 경제기획실 주관으로 각 부서별로 한명씩을 차출해서 장기 경제사업 비전과 방향 등에 대한 것을 전략적으로 모색하는 것이었다. 을지로 쪽에 있었던 중부 공판장쪽에 캠프를 차려놓고 밤늦도록 아이디어를 짜냈다. 조사부쪽에서도 오고 각 부서에 한명씩이 모여 토론하여 회의를 하면서 전략을 도출해 내었다. 김팀장이 주관을 하고 각 부서별로 모인 이들이 세부적인 부분을 맡았다. 경제사업 전방향이라 해서 책자가 한권 만들어졌다. 이제 이들이 각부서의 중추()적인 부분을 맡은 이로 성장 발전해 있는 형세가 되었다. 두 번의 파견 근무 경험이 있었는데 그 첫 번째가 96년이었고 두 번째는 199911월이었다. 200071일로 농협, 인삼협 축협의 중앙회 통합이 예정되어있었다. 양재동에 통합준비위가 구성되어 있었다.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3개월 정도 근무를 하는데 선임 승진대상자 세 명이 부부장에게 불려갔다. 통합반에 자원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승진과 맞물려 있는 시기였다. 결국 하는 수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내가 차출이 되어갔다. 그리고 승진에 분루()를 삼켜야 했다. 그렇게 통합반에 차출된 인원 중에 유일하게 승진이 안 된 사람이 되었고 90년 승진자 중에 남아있는 이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는데 그 속에 내가 속해 있었다. 그것이 어떻게 작용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 때 당시의 심정으로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원래 있던 팀으로 복귀를 한다고 하니 농기계팀에서는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예전 근무지였던 팀으로 복귀를 하게 되었다.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한번은 농기계과의 비용이 엄청나게 문제가 되어져 있었다. 과도하게 부채가 많은 상황이었는데 몇 개월 동안 그것을 갚아나가느라 고생을 한 것도 있었다. 95년에서 3년간의 농기계 팀원으로서의 보직은 적성에 맞는 부분도 있었고 그렇지 않는 부분도 있었으나 교육을 해본 것은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되었다. 부서내에서 피해의식도 강했던 부분에서의 근무를 통해서 핍박받는 자 또는 홀대 받는 자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던 부분도 큰 성과였다. 항상 양지에서만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 직장생활일 것이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것처럼 그렇게 전화위복()의 기회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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