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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향을 향한 여정

옹골찬 내자

by 자한형 2023.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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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골찬 내자 1-2

 

나의 내자는 1962115일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에서 유복한 가정의 15녀중 차녀로 태어났다. 한밤중에 태어난 호랑이 띠였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할머니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할머니 손을 잡고 OO초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합창단에 뽑혀 서울로 경연대회에 나가기도 하였다. 머리가 긴 생머리였는데 땋아주는 사람이 없어 결국은 선생님이 땋아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대학 부속여중학교에 진학을 하였다. 그녀가 중학교를 갈 때쯤 해서 무척이나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가니, 못가니 하는 상태가 되었고 방학시절에는 서울에 사는 부유한 친척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기도 했다. 야간중학을 가라는 권고도 받기도 하였지만 고집을 부려 정상적인 중학교를 다녔다. 학창시절인 중학 시절에는 효녀로 이름나 학교장이 주는 상을 받기도 했다. 여고는 OO여고를 다녔다. 부친께서는 야당국회의원 비서관을 지냈다. 사업을 했었고 잘 풀렸었는데 여러 가지 어려운 경제여건으로 사업이 잘못 되는 바람에 고난을 겪기도 하였다. 세상의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사리분별력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대학은 지방소재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활달하고 재기발랄한 성격 덕에 총대를 하기도 했다. 대학3학년 시절에는 친구들과 함께 언니의 주선으로 초군장교와 미팅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지금 나와의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되었다. 언니가 광주시내 중심가 충정로에서 조그마한 식당을 하고 있었는데 외출을 나온 초군장교가 식사를 하러 왔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에 여동생이 있으니 미팅을 한번 하자는 제의가 있었고 5명이 다음 주에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초군 장교와 대학 3년생들의 미팅이었다. 초군장교들과의 만남은 4주에 한정되어 있었다. 4개월간의 교육이었는데 외출은 4주 만 허용이 되었고 그다음에는 외박이 실시되었기 때문에 모두들 고향으로 가버리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미팅이 끝나고서 5명 모두에게 원고지 한 장 씩에 짤막한 편지를 보냈다. 그 중 두 사람에게서 답장이 왔다. 미팅을 한날은 1983813일이었다. 이웅평 북한군 소좌가 미그기를 끌고 와 귀순한 순간이었기 때문에 잊을 수 없었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3년이 지나고 제대할 때쯤이 되었다. 간간히 편지로 연락을 취했고 휴가 때 한 번씩 만나기도 하였다. 휴가 때 한번은 같이 광주에서 여수까지 가기도 했었는데 여비가 떨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측에서 수수방관해 아주 곤욕을 치르게 만들었던 적도 있었다. 가까스로 부산으로 가서 여비를 마련해서 급거 부대로 복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둘사이의 만남을 주선했던 언니의 종용이 줄기차게 이어졌다고 한다. 한때는 1여 년 동안 연락이 두절되는 경우도 있었다. 19866월경이었다. 제대한 이후 그녀에게 전화를 넣었는데 무척이나 반갑게 호응해 주었다. 엄청 쌀쌀맞게 대하던 여느 때와는 달랐다. 무척이나 기다렸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발령을 대기 중이던 백조시절이었고 이제는 결혼적령기로 때가 무르익은 상태가 되었다. 25세로 나이도 들만큼 들었고 튕기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도 알 나이가 되었다. 무척이나 냉정하고 이지적이었으며 범접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수없이 많이 쫓아다니던 남자들이 있었지만 제대로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질 않았다. 교사로서 발령도 나지 않은 상태에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고 답답한 정황이었는데 어떤 돌파구를 찾을 계기를 갖게 된 것이 아닌가 했다. 그녀는 3개월 후에 교사로서 발령을 받았다. 고흥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 OO중학교라는 곳이었다. 교사용관사가 있어서 그곳에서 생활하고 주말에는 집으로 가는 생활이었다. 단칸방에 부엌이 갖추어져 있어 생활하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다. 아내에 대한 프러포즈가 받아들여지고 어느 만큼의 공식적인 관계가 형성되었을 때 친구들이 하는 얘기가 있었다. ‘냉장고를 녹인 남자라는 별호를 지어 주었다. 얼마나 그녀가 냉철하고 얼음장 같았는지를 보여주는 일례라 할 만하다. 밑에 동생들도 작은 언니의 불호령이 떨어지면 만사가 순조롭게 해결될 정도였던 만큼 똑 부러졌고 당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던 중 새해가 되었고 2월말 경에는 부산과 광주의 중간지점이라 할 만한 남해에서 양가부모 친지간의 상견례(相見禮)가 있었다. 그리고 결혼날짜가 잡혔다. 4.19일로 정해졌고 부산에서 식을 올리기로 하였다. 4월 중순까지 나는 연수원에서 4주간의 신규직원 집합교육을 받았다. 결혼식은 조촐하게 치러졌지만 하객은 많았다. 남자나이 29세 여자 26세였다.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다. 일주일간의 여행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주말부부 상태로 들어갔다. 남자는 경남 충무에서 여자는 전남 고흥에서 생활하게 된 것이었다. 시가(媤家)는 부산이었고 친정은 전남 광주였다. 결혼한지 3개월여가 지나고 방학이 되었다. 신혼생활이 충무에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주말부부가 제대로 동거생활을 할 수 있는 기간이 여름과 겨울의 1개월 정도의 방학기간 뿐이었다. 같이 생활한지 1주일여가 지나고서는 갑자기 잠적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자기의 몸 상태가 좋질 않았다고 해서 아무런 연락이나 흔적도 없이 친정인 광주로 가버린 것이었다. 약을 지어먹고는 가료(加療)를 하기위해 떠난 것이었다. 참으로 당황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우여곡절 속에서도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 결혼한지 1년이 지난 88년이 되었다. 6월경이었는데 내가 서울로 발령이 났다. 아내가 첫째를 임신하게 되어 몸이 무거워진 상황이었다. 718일에 첫아이로 아들을 낳았다. 밤늦은 시간에 진통이 와서 같이 지냈던 선생님이 급하게 고흥의 조그마한 병원으로 이송해서 조치를 취해 주었다. 몸조리는 처남댁이 될 사람이 해주었다. 3일이 지난 연후에 내가 나타났고 간호를 해주었다. 아이는 일주일 후 부산으로가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나는 승진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는 핑계로 서울에서 잘 내려오지도 않았다. 아이는 시가인 부산에 아내는 고흥에 남편은 서울에서의 생활이 이어졌다. 남편이 한 번씩 고흥행을 하기도 했는데 8시간이상이 걸렸다. 토요일 오후 두 시경 출발을 하면 밤11시경에야 고흥의 관사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정오쯤에 짧은 만남의 아쉬움을 남긴 채 다음의 해후(邂逅)를 기약하며 아쉬움을 남긴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서울로 출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밤8시경에야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참으로 그당시에는 곤혹스러운 일이었고 희망을 꿈꾸기에는 너무나 막막한 현실 속에서의 팍팍한 삶이었다. 그런 암울함 속에서도 젊음을 무기로 하루하루 희망을 갖고 열심히 살고자 노력하며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 나는 처음에는 모 여대 입구에서 하숙을 하였는데 조금 적응이 된 이후에는 미혼인 친구와 대림동 단칸방에서 자취생활을 하였다. 89년도에는 내가 승진시험 준비관계로 인해 왕래가 뜸해졌다. 아내는 90년이 되자 서울로 전근발령이 나게 되었다. 결혼한 지 3년이 되었고 아내의 교사 근무는 햇수로 36개월이 지났다. 결혼한 지도 3년이 지나 있었지만 주말 부부로 이어진 생활이라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의 막바지 상황이었고 그 고생스러움을 감내하는 것에 인내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던 때였다. 과연 이런 상태에서의 생활의 유지가 얼마만큼 계속될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다행스럽게도 아내가 서울로 발령이 난 것이었다. 서울 중심부의 J여중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기이하고 어이없게도 야간반을 맡게 되었다. 공립 여중학교였는데 야간반이 편성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저녁6시에 출근해서 10시까지 근무하는 올빼미 같은 생활을 해야 하는 기묘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큰 녀석도 부산 시가(媤家)에서 데리고 왔다. 집은 용산구청 뒤편에 방 두 칸짜리에 전세를 얻었다. 맞벌이부부로 아이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하는 가운데 우여곡절이 많았다. 낮 시간에는 아이를 돌볼 수 있었지만 집사람이 출근하는 저녁에는 어린이집에 맡기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사무실 회식자리에 꼬맹이를 데리고 가기도 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3월에는 나의 승진시험이 있었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게 단박에 그 어려운 시험에 합격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3개월 후 발령을 받았다. 발령은 제주도 남제주군지부로 났다. 참으로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얼마만큼 새롭게 신접살림을 차린 상황이 되었는데 3개월 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자마자 또다시 별리(別離)의 운명이 연출하게 된 것이다. 발령받은 상황에서 일주일 동안을 기구한 운명의 장난 앞에 밤이면 밤마다 울음 울었다. 내가 직접 인사부서를 찾아가 발령 취소를 청원하기도 했지만 한번 벌어진 일이라 달리 소용이 없었다. 아무튼 주어진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참으로 암울하게 느껴졌고 앞이 캄캄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서귀포에 단칸방을 얻어 자취를 하며 생활을 해야 했다. 2달이 지난 후에 방학이 되었다. 아이는 부산시댁에 맡겨두고 아내가 홀로 제주도로 내려왔다. 한 달여를 지내는 동안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고 결론은 육아휴직으로 났다. 그래서 9월부터는 3년간의 휴직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대충 기존 업무의 정리를 하고 제주도 서귀포로 내려온 것이 10월쯤이었다. 그로부터 익년 3월까지 6개월까지가 세 식구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가족 같은 분위기로 삶을 꾸려간 시간이었다. 매주 제주 유명 관광지 곳곳을 돌아다녔고 안온하고 꿀같이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해 3월이 되자 아내는 두 번째 임신 9개월이 되어서는 다시 둘째 녀석의 출산과 산후조리를 위하여 처가집으로 가버렸다. 제주생활 6개월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제주도에는 입춘을 전후한 15일 전후의 신구간이라는 기간에만 이사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이삿짐을 쌓아두어야 했다. 포장을 해서는 보낼 준비를 해놓은 상황에서 2 개월여 동안 홀로 생활을 하였다. 일 년 남짓 있는 동안에 이삿짐을 세 번 싸는 희안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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