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둘레길
얼마 전 휴일 모임의 회합(會合)이 있었다. 최초 집결지는 쌍문역 3번 출구였다. 약속 시간에 맞춰 회원들이 삼삼오오(三三五五) 모여들었다. 어떤 이들은 동부인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딸을 데려 오기도 했다. 일단 버스정류소로 이동해서 버스를 타고 2차 집결지로 갔다. 정의공주(貞懿공주) 묘소가 있는 방학동이었다. 정의공주는 세종대왕의 따님이었다. 그 옆으로는 연산군의 묘(墓)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쪽에는 오랜 연륜이 느껴지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은행나무가 있었다. 거의 용문산 용문사의 은행나무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연륜이 풍기는 신령(神靈)스러움이 느껴질 만한 나무였다. 일행을 안내한 이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문화재 해설사였다. 연산군의 생애에 대한 부분과 그의 딸 그리고 그의 사위 등에 대한 얘기를 소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났을 때 연산군의 자손들은 다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단 출가한 딸 한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들이 여기 이렇게 잠들어 있었다. 조선 중기에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을 일으켰고 역대 왕 가운데 중 가장 파렴치했었던 왕으로 평가되는 이였다. 처음에는 영민(英敏)한 모습을 보였으나 나중에는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고 패륜(悖倫)과 과오로 점철된 생을 살았던 이였다. 그 가장 기본적인 원인으로 어떤 이는 어머니의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생모였었던 폐비(廢妃) 윤씨가 일찍 돌아가시게 되면서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연산군의 비극적인 시발(始發)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만큼 고귀하고 사람의 심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례이리라. 이곳의 묘지 단장도 2000년대 중반에야 겨우 이루어졌다는 것에서 연산군에 대한 홀대(忽待)를 새삼 느껴볼 수 있었다. 사진을 촬영하고 본격적인 북한산 둘레길의 순행에 나섰다. 일행은 20여명이었다. 연령대는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30대에서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였다. 가이드를 한 후배는 사전 답사를 하지 못해 아침 일찍 사전에 답사를 한 상황이었다. 회원 모두가 삼삼오오 가벼운 옷차림으로 휴일의 산책을 나온 것처럼 한가롭게 길을 걸었다. 온 산은 연초록빛으로 싱그럽기 그지없었다. 산행이라고 하기에는 그랬고 가볍게 산책을 하는 정도로 여겨졌다. 얼마만큼 걷고 나자 철제로 된 구조물 전망대가 있었다. 확 트인 전망이 눈부셨다. 기념촬영을 하고 하산을 했다. 둘레길의 내리막길은 더할 나위 없이 순조로웠다. 목적지는 북부 지방법원이었다. 도봉역 건너편에 위치해 있었다. 회원 중에 법원에 근무한 경험을 갖고 계신 분이 있어서 쉽게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고압적이고 권위적이라 여겨졌던 법원이 너무도 친숙하고 익숙하게 다가오게 꾸며져 있었다. 첫째는 담이나 벽이 없어진 것이었다. 누구나 친근하게 출입할 수 있도록 개방이 되어져 있었다. 그리고 원내에 곳곳에 예술작품이 배치되어져 있었다. 억대이상을 호가하는 유명작가의 걸작들이 전시되어 조각공원을 방불하게 했다. 석조의 조각품도 있었고 철로된 작품도 있었으며 외국작가의 작품도 있었다. 전직 판사로 법원에 재직 시에 이런 조각품의 설치를 직접 주관했었기에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여느 큐레이터에 버금갈 만큼 해박한 예술적 감각과 소양으로 상세하게 작품에 담겨진 뜻과 의미 그리고 작가들의 역량까지도 세부적으로 소개해주었다. 회원들은 돌아가며 작품을 감상하고 카메라로 촬영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실외의 작품 감상이 끝나자 우리는 안내직원의 지도를 받아 실내에 비치된 작품들에 대해서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받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법원의 공원화가 이루어진 곳이고 외국에서도 이런 법원을 벤쳐마킹하기 위해 많은 이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정말로 오랜만에 진귀한 경험을 해보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다음의 일정은 중식을 위해 식당으로 이동했다. 회원 한분 한분의 말씀과 건배 제의가 있었다. 첫번째 회원의 건배제의는 ‘고감사’였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본래 ‘고사리’라 해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해합니다. 라는 것이 본래의 건배사였다. 다음은 ‘신발끈’이 있었다. 신나게 발전하고 끈끈하게 맺어지자는 의미라고 했다. 다음은 ‘원더풀’이었다. 원하는 것보다 더 잘 풀리기를 바란다 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다. 비용의 계산은 전직 법원에 근무했던 선배가 하는 것으로 했다. 오랜만의 자리였기에 화기애애했고 풍성한 얘깃거리가 쉴 새 없이 회자(膾炙)되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음 만남을 기약하게 되었다. 요즘의 모임의 행태로써 썩 바람직한 듯 보였다. 아침에 모여 2시간가량 산책을 하고 점심식사 후 헤어지는 것이었다. 차를 끌고 번잡하게 가는 것도 아니고 편안하게 휴일을 보내는 모임이었다. 법원의 근무 마치신 분은 이제는 변호사로 개업해서 새롭게 제2의 생을 보내며 노후를 대비하고 있는 듯 여겨졌다. 아주 강직해 보였고 인품이 느껴지는 그런 모습이었다. 관행적인 전관예우 차원에서 상당한 우대가 있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드렸더니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해서 머쓱해졌다. 한 후배는 광주 오포에 사는데 직장은 행주산성 쪽에 있다고 했다. 한 시간 여를 출근하는데 소모하고 있다고 했다. 무릎관절에 무리가 가서 높은 산의 산행은 사실상 무리라고 했다. 파주에 한 산이 있는데 그곳은 야트막해서 산책에 아주 적격이라고 했다. 그런데 젊은 친구들은 너무 밋밋해서 재미가 없다고 손사래를 친다고 했다. 얼마 전 4년간 구미에 산적이 있었는데 주말부부를 해서 평소 평일에는 시간이 남아 헬스를 다니며 건강관리를 했다고 한다. 충분히 땀을 빼고 근력운동까지 할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는 회고를 늘어놓았다. 또 한 선배는 낙향을 준비하고 있었다. 3주 정도 고향에 내려가 옛집을 좀 수리하고 왔다고 했다. 환갑의 나이였다. 여러 가지로 손을 보고 비용도 꽤 든 것 같았는데 별로 표시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형수님이 낙향에 대해 동의를 했냐고 했더니 그렇게 되도록 설득 중이라고 했다. 언론사에서 근무를 하였던 분이었다. 농협교육원에서 귀농교육도 몇 년 전에 받았었는데 농사를 할 것 같지는 않았고 소일을 하며 글도 쓰고 책도 읽고 할 것으로 여겨졌다. 얼마 전에 아들 혼사를 치룬 상태였다. 대부분의 선배들은 일선에서 물러났거나 아니면 새롭게 생을 구가하고 있기도 했다. 기념사진 촬영을 하면서 미국 얘기를 했다. 우리는 그렇게 얘기한단다. ‘웃으세요 김치, 치즈라고 하세요’ 라고 하면서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미국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쪽은 아주 웃기는 몸동작을 한단다. 그러면 사람들이 웃는다고 한다. 우리처럼 웃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웃게 만든다는 얘기였다. 기라성(綺羅星)같은 원로들의 좋은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2개월마다 한 번씩 모임이 이어질 예정이었다. 오랜만에 휴일을 아주 뜻 깊고 유익하게 보낸 듯했다. 다음의 모임도 기대가 된다. 모든 회원들이 이번 북한산 둘레길 순행을 계기로 건강하고 승승장구(乘勝長驅)하며 운수대통(運數大通)하는 나날들이 이어지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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