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치유신과 사카모도 료마
오늘날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의 한사람으로 손꼽히는 위인(偉人)이 료마다. 33년을 살다간 시대의 선각자였고 근대화된 일본을 만드는데 최고의 일등공신으로 회자되는 인물이다. 얼마 전 방송에서 료마전이라는 대하드라마로 그의 일생이 방영된 적이 있었다. 50회 정도의 분량이었는데 대단히 인기리에 방영되었다. 1968년 명치유신(明治維新)이 일어나기 전까지 격동의 역사 속에서 한 획을 그었던 근대화의 초석을 다진 이였다. 200여년 지속되어온 막부정권의 종말을 고하게 했고 조슈와 사쓰마의 삿초동맹을 결성시켰고 신정부의 구상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갔던 이였다. 도사번의 하급무사로 태어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을 가졌고 일신을 오로지 일본국의 근대화를 위해 헌신한 이였다. 바다에 나타난 외국의 선진화된 흑선을 보고 그곳에 들어가 보고 싶어 했고 그런 배를 갖는 나라를 만들고자하는 원대한 꿈을 가졌었다. 그런 배를 타고 전 세계를 항해하고자 했고 전 지구를 돌아보고자 했었다. 해원대를 조직해서 오로지 해군이 앞으로 일본의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할 것을 자각한 이였다.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상당한 위험을 감수한 탈번을 감행하기도 했으며 변화의 시대에 일본이 나갈 길을 명료하게 제시한 선각자로의 역할을 충실히 했었다. 비록 자객의 손에 암살되기는 했지만 그의 뜻은 계속 이어졌고 계승발전 되었다. 그 자객은 막부의 주구노릇을 했던 신선조였을 것이라는 것이 통설인 듯하다. 그가 죽은 후 곧 명치유신이 이루어졌고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선정팔의라는 새로운 정부안도 어느 만큼은 수용이 되었던 듯하다.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대정봉환이 이후 보신전쟁으로 비화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기본 취지는 그대로 역사에 틀로 구현되었고 제대로 된 입헌군주국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서구제국에 의한 외세의 물밀듯한 침략 속에서도 자체적으로 국가를 만들고 조직과 헌정체계를 구축해 나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해군은 이때부터 부국강병의 기초를 닦게 되었다. 국가 방위의 기초로서 배를 만들고 이를 통해서 해군력을 증강시켜나가는 토대가 되었다. 자신이 속했던 도사의 번주를 통해서 막부의 실권자인 요시노부에게 건의를 하게해서 대정봉환을 이루게 만들기도 했다. 대정봉환이라는 것은 막부정권이 갖고 있었던 정치적 실권을 천황에게 다 밚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막부로서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고 정권자체를 내놓는 중대사였다. 자신과 뜻을 같이 했던 우국지사들이 수없이 죽어나가는 속에서도 굳건하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나갔던 지사였다. 격동의 세월 속에서 끊임없는 위험에 노출되는 와중에도 단계별로 자신의 구상을 체계적이고 단계적으로 이루어 갔던 선지자였다. 개방만이 살길이고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자각했었고 분명하고 확실한 대안을 제시했고 그것을 실천해 나갔던 것이 주효(奏效)했던 것이다. 그가 드라마 상으로 나왔을 때에는 그와 같은 동향의 상인이 나오기도 했다. 무역업을 통해 재산을 불려나갔고 오늘날 재벌로의 성장을 이룬 이의 내용도 같이 나와 대비를 하게 해 주었다. 그는 과거의 료마와의 인연 내용 등을 기자에게 술회하는 형식으로 내용을 전개시켜나가고 있었다. 그는 료라는 여인과의 혼인관계도 있었으나 후손은 보지 못했다. 세 살 위의 누나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고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다. 오로지 구국의 일념으로 대의를 위해 혼신의 투혼을 불살랐던 부분에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그는 1835년에 태어나 1967년에 서거할 때까지 33년을 산 것이었다. 27세부터 33세까지 불과 5년여가 그의 전성기였지만 그 짧은 동안에 주요한 업적을 다 이루어낸 것이다. 그 때 당시 막부에 속했고 암울한 현실을 만든 장본인이라고 여겨 막부군에 속해있던 해군장군 가쓰 가이슈를 암살 하러 갔다가 그의 포부와 야망에 대한 얘기를 듣고 감화를 받아 제자로 입문하기도 한다. 그는 해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던 이였다. 탈번한 낭인으로서의 불안한 지위 속에서도 불굴의 투혼을 발휘해서 협상하고 조정하는 역량을 발휘하기도 하고 해원대를 조직해서 일본해군의 초석을 놓기도 했다. 통상의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무심할 정도였던 듯하다. 그에 대한 글이나 드라마 등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왜 우리에게는 이런 인물이 없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던 이도 아니었는데 엄청난 일들을 성취시켰고 역사의 소용돌이를 변모시키는 그런 부분들을 이뤄냈다는 자체에서 참으로 남다름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젊고 낮은 계층에서의 설득과 협상이 성취되고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부분에서 위대한 부분이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만약 우리나라에 태어났다고 가정한다면 그런 역사적인 대전환을 이룰 수 있는 사건의 성취가 가능할 수 있을까 하고 반문한다면 부정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여겨진다. 어떻게 향반 정도의 낮은 직급의 관리가 세상을 변혁시키는 일을 성사시킬 수 있었겠는가를 자문하면 절로 답이 나오지 않을까. 김옥균이라든가 기타 개화파들이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고 그렇게 노력했건만 제대로 된 일을 이뤄놓은 것은 겨우 갑신정변이라는 것이었고 3일천하에 불과할 정도였으니 안타까움이 인다. 동학이라는 부분이 제대로의 사회변혁을 이루어 냈다면 달라졌을 수도 모르지만 사회개혁의 프로그램으로서는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사회전체가 그런 일이 가능하게 하는 분위기로 형성되어져 갔던 부분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그렇게 되도록 이끌고 성취시킨 부분에 그의 업적이 위대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로부터 36년간이 일본을 세계의 변방국가에서 일등국가로 성장 발전시켜가는 시기였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평인 듯하다. 이로 인해 1905년 세계를 좌지우지하던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해서 승리하는 동인을 만들어 내기도 했던 것이다. 세계의 변화에 적극 대응하고자 했고 유학을 통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벌써 러시아에 유학한 군인도 있었고 미국에 유학한 해군 장교도 있었다. 미스전쟁의 참관을 하기도 했고 폐색작전을 관전하기도 했고 그것이 여순의 폐색작전에 원용되기도 했다. 또한 장교는 프랑스에 유학해서 기병을 세계적인 기병으로 그 작전능력을 끌어올려 러시아의 코자크 기병을 무너뜨리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었고 그것은 언덕위의 구름이라는 작품에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변병의 조그만 나라에서 뒤쳐져 있었던 문명국이 세계를 주름잡는 국가로 우뚝 설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것에서 료마의 위대성이 빛나는 것이리라. 료마는 근대일본의 초석을 놓는 일에 자신을 헌신했던 이로 역사에 길이 빛날 업적을 이루었다. 한알의 밀알로 명치유신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과 기초를 닦았던 이로서 부족함이 없었던 선지자로 자리매김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