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원을 다녀오면서
엊그제 주말에 가족모임이 있어 전남 장성에 있는 민박집 소소원을 다녀왔다. 광주에서 10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곳으로 휴양(休養)을 위해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다. 토요일 오후 3시경에 각종 준비물을 잔뜩 싣고 출발했다. 따사로운 햇볕이 계절은 여름이 성큼 다가온 것처럼 무더운 날씨였다. 한껏 차속에서 에어컨을 켜고 드라이브를 하는 기분으로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하고 보니 한적한 시골마을에 한옥으로 되어 있는 펜션형 주택이었다. 각각의 방마다 별도의 주방시설이 갖추어진 방이 세 개가 있었다. 30여 평의 규모였다. 일행은 가져온 짐을 풀어놓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마을에는 드문드문 폐가도 눈에 띠었고 한옥도 간간이 보였다. 어려운 농촌의 현실을 적나라(赤裸裸)하게 보여주는 듯했다. 주변의 길가에는 찔레꽃도 보였다. 마을주변으로 같이 산책을 나갔던 동서에 의하면 노래가사에 찔레꽃이 붉게 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본래의 찔레꽃은 흰꽃만 있다는 것이다. 고구마 밭에는 스프링쿨러가 돌아가고 있었다. 사람의 인적(人跡)은 거의 없는 듯 여겨졌다. 곳곳에 피어있는 꽃이랑 농촌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두고 있기도 했다. 30여분의 산책이었는데도 땀이 날 정도가 되었다. 모임을 위해 가져온 음식을 차려놓고 간단히 요기를 했다. 술이 도착하지 않아 아쉬움이 남았다. 일행들이 다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였다. 모두들 좋아했다. 농촌의 싱그러움에 감탄을 쏟아냈다. 가족들이 타고 왔던 차에 모두 승차해서 저녁식사 장소로 갔다. 소소원의 주인장이 운영하는 자연밥상 식당이었다. 그곳까지 가는 길도 순탄하진 않았다. 지역축제인 홍길동 축제기간이라고 해서 곳곳에 차량진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겨우 도착해보니 홍길동 테마파크 바로 앞이었다. 자연밥상임에도 식당 형식은 뷔페식이었다. 음식을 남기면 천원의 벌금을 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어르신들은 좌정(坐定)해 있고 유사(有司) 등이 음식을 날랐다. 엄청 많은 음식들이었는데 모두들 허기(虛氣)가 졌었는지 남김없이 처치가 되었다. 음식은 산야초 장아찌, 산야초 나물, 제철야채, 김치, 볶음밥, 식빵, 떡, 과일 등 다양했다. 그곳을 나와서 다시 소소원으로 돌아왔다. 소소원 한옥 옆에는 황토방 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은 다른 손님들이 와 있었다. 축령산 자락이라고 했고 편백나무 숲이 유명하다고 했다. 가족모임은 거의 3개월 만에 모임을 하는 것이었다. 화제의 초점은 조카의 결혼이었다. 아직 정식으로 결혼식이 치러진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려 있는 듯했다. 일본 유학 중에 여자 친구를 사귀었는데 임신이 된 것이다. 11월경이 예정일이라고 했다. 아직 학업을 하고 있는 상황인데 이렇게 되고 보니 혼인신고만 하고 내년 정도에 결혼식을 올려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이메일로 여자 친구의 사진과 태아 사진이 같이 전송되어왔다. 가족 간의 의견이 분분했다. 열띤 공방전이 있었다. 이건 국제결혼인 셈인데 이게 바람직한 방향이고 결정인지 갑론을박(甲論乙駁)이 치열했다. 다음은 자전거여행이었다. 인천에서 상주까지의 300여 킬로미터를 처제네 두 가족이 자전거로 간다는 것이었다. 3박4일간의 일정이라고 했다. 4대강 투어를 하고 있는 것의 한 여정(旅程)중 하나라고 했다. 전 가족이 총출동을 하는 셈이었다. 맨 막내아이만 자전거에 싣고 달리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막판에는 문경세재까지 넘어야 하는 여정이라고 했다. 2개강의 투어는 이미 정복한 경험도 갖고 있었다. 문제는 둘째처제였다. 가장 체력이 약하고 힘겨워하는 듯했다. 집사람의 충고로는 한사람은 차로 행사의 지원을 하는 것이 필요한 것 아니냐고 했다. 하루에 타야할 거리가 거의 90킬로미터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오로지 자전거길을 달리기 때문에 어떻게 해볼 다른 방법이 없다고도 했다. 차량이 같이 보조를 맞추기도 어렵다고 했고 숙소도 거리에 맞춰져 정확한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닌 상황인 듯했다. 자전거도 새롭게 구입하고 만반의 준비를 다해 놓은 상황인 듯했다. 성공적인 완주를 기원하는 길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장인어른의 생신에 맞춰 축하인사를 하러온 지역 국회의원과 자치단체 장이 아침에 내방을 해서 선물을 선사하고 갔다는 얘기도 전했다. 생일 케이크와 참외 한 박스 그리고 수박 한통이었다고 한다. 지역에서 상당한 관록의 원로로서 존경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축하할 일이었다. 아이들의 통제는 둘째 조카가 맡아서 했다. 상점과 벌점을 나눠서 9명이나 되는 동생들을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소소원 마당 잔디밭에서 싸이의 강남스타일 음악에 맞춰 신나게 아이들이 말춤 경연대회가 즉석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재기발랄(才氣潑剌)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조카가 가져온 아이들에 대한 선물은 투명 고무공이었는데 튀기면 안에서 무늬가 춤을 추는 것처럼 흔들리는 것이었다. 하나씩 아이들에게 각자 나눠주었다. 착한 일에는 가점이 잘못되었을 때에는 감점이 주어졌다. 초등학생부터 중학생까지 골고루 분포해 있었다. 이제는 상당히 자신의 앞가림을 할 정도가 되어있었다. 기특한 일이었다. 바쁜 일이 있었던 셋째동서와 첫째처제가 도착하므로 성원(成員)이 되었다. 논의된 내용은 2015년 1월을 목표로 가족의 해외여행을 계획하는 것이었다. 매월 일정액을 모아서 전 가족이 해외여행을 한번 가보자는 것이었다. 중국이든 동남아든 그렇게 해서 역사적인 추억거리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미역국으로 생일상이 차려졌다. 총인원이 24명이었다. 아이 9명 어른 15명이었다. 넷이 빠진 셈이었다. 처형네의 아들 둘과 우리 집 아들 두 명이 빠졌다. 장인어른의 팔순행사가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다들 사회적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해 내고 있었고 한가락씩 하는 이들이었다. 막내처제가 박사학위를 받음으로써 네 번째 박사가 되었고 7월에는 교수시험에 도전할 계획이라고 했다. 외조를 하느라 동서의 노고가 컸으리라.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는 듯했다. 분란(紛亂)없이 화목하게 다들 잘 지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옥이네 육남매라는 카페도 운영되고 있었다. 처남네가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별 문제없이 잘 풀려 가리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다음 모임은 여름이나 가을 중에 한 번 더 치러질 것이었다. 육남매 가족모두 모두들 만사형통(萬事亨通)하고 승승장구하는 날들이 이어지길 기원해본다.
'심향을 향한 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숨겨진 사랑, 더 스토리 (0) | 2023.03.10 |
---|---|
순수의 시대 (0) | 2023.03.10 |
성채 (0) | 2023.03.10 |
삼고초려와 인재상 (2) | 2023.03.10 |
명치유신과 사카모도 료마 (1) | 2023.03.04 |